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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다시 보기 - 근대화 10년 늦춘 ‘실패한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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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다시 보기 - 근대화 10년 늦춘 ‘실패한 혁명’

박노자ㆍ허동현의 서신 논쟁-'우리안 100년 우리밖 100년' <6>

***폭력과 살육을 서슴지 않은 근대화 지상주의자들 / 박노자**

허동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요즘 1884년의 갑신정변을 긍정 일변도로 보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문명 개화"를 전적으로 긍정하는 근대화주의적 입장에서 보더라도 "청년 정치가"들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서 국내 개화 세력들이 엄청난 타격을 입어 갑오경장―즉, 1894년―까지 개혁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양반 출신으로서 최초로 개신교에 입교한 동경 외국어 학교의 한국어 교사이자 『마가복음』의 언문 번역자 이수정(李樹廷, ?~1886)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어학 천재 윤치호가 "반역자의 잔당"으로 지목돼 1885년에 외국으로 떠났고, 당대 최고의 국제법 전문가 유길준이 1892년이 돼야 연금(軟禁)이 풀렸고, 정변의 주역인 김옥균, 박영효 등도 근대화를 위해서 일하지 못하게 됐지만, 조선에 몇 없었던 이수정, 윤치호, 유길준과 같은 "외국통"들의 활동이 차단되거나 제한된 것이 큰 손실이었다는 것입니다.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정변이 일본군에 기댄 것도 흠이지만 정변의 주체들 중에서 상당수가 나중에 일본의 조선 통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는 사실도 정변의 "민족적 명분"을 파괴합니다.

<1(개화파).jpg> 1885년초 일본 망명 시절의 갑신정변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朴泳孝, 1861~1939), 서광범(徐光範, 1859~ ? ), 서재필(徐載弼, 1864~1951), 김옥균(金玉均, 1851~1894) @국사편찬위원회

1883-1884년간에 일본의 도야마(戶山)육군 학교에서 공부한 뒤에 갑신정변의 행동대로 활동하여 민씨파 대신들의 피를 직접 흘린 정란교(鄭蘭敎, 1864-1943)나 이규완(李圭完, 1862-1946), 신응희(申應熙, 1859-1928) 등의 박영효 계통의 인물들이 도(道) 장관(현 도지사), 중추원 참의와 같은, 식민지 시기의 조선인으로서 얻을 수 있었던 최고의 벼슬자리를 두루 역임했다는 사실은,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것입니다.

처음에 일본을 "근대화의 선배이자 모델"로 생각했다가 나중에 점차 "아시아의 맹주?"나 "조선 근대화의 후견인"으로 인식하게 된 그들을 두고, "소신 친일파"라는 용어를 쓰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비록 한국에서 아직까지 별 인기 없는 관점이지만―인간주의적인 입장에서 보더라도 정변 주모자들에 의한 민가(民家) 방화와 청ㆍ일 양국 군대의 충돌로 무고한 백성 약 100여명을 희생시킨 그 사건을 "잔혹 행위"로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 손에 민씨파 대신들의 피를 직접 묻힌 서재필(1864-1951)과 같은 행동대원들이 나중에 평생 자신들의 "혁명 참여"를 자랑할 뿐 자기 손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에 대한 애도와 참회의 뜻을 한 번도 피력한 적이 없는 것은, 그 근대화 지상주의자들이 사람의 목숨을 얼마나 가볍게 여겼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2(서재필).jpg> 만년의 서재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 역사학에서 최근까지만 해도 주로 민권의 주창자, 한국 민주주의의 비조로만 알려져 있는 서재필의 차후 태도에 대해서 조금 더 부연해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나중에 미국에서 한 영자 한인 교포 신문에서 갑신정변에 대해서 회고록을 쓸 때,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과 자신 공범들의 행각을 묘사했습니다.

"[우정국의 개국 축하연 때] 민가 방화의 현장에 민영익이 나타나자마자, …우리 도야마 출신의 학생들이 당장 그를 칼로 찔러 그 귀 하나를 잘라버렸다. 그 동시에 또 다른 장교를 죽여버렸다. 그 후에는 장안에서 온갖 헛소문이 다 퍼져 궁정 내에서의 왕족을 포함한 모든 주민들이 다 큰 경계심을 갖게 됐다. …우리 도야마 출신의 학생들은 구식 조선 군대에 비해서 훨씬 더 잘 무장ㆍ훈련돼 있었다. 우리는 부패한 완고당을 국가의 배신자이자 우리 개인적인 적으로 간주하여 그들과 싸우려는 사기로 불타고 있었다. 무기가 모자라고 숫적으로 많지 않았지만 관련 없는 사람들을 못들어오게 하고 계동궁을 잘 지켰다. (The New Korea, August 18, 1938; Philip Jaisohn, My Days in Korea, 연세대학교출판부, 1999, pp. 16-21).

<3(이동인).jpg> 개화승 이동인 @한국사진100년사

***무고한 백성과 온건개화파들이 반드시 죽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서재필은, 이 회고록에서 미국을 빛의 나라로 생각하고 점차적인 부국강병 식의 개혁을 주장했던 정치인이자 화가―그리고 개화승 이동인과 기독교인 이수정의 후견인―인 민영익을 배신자로 매도하여 그 암살 미수를 합리화하면서도, 자신이 맡았던 끔찍한 노릇에 대해서 언급을 피하고 있습니다. 그와 다른 도야마 출신의 생도들이, 단순히 경우궁이나 계동궁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들어와 임금을 알현하려는 민씨 파 대신들을 직접 죽이기도 했습니다. 김옥균의 『갑신일록』의 말에 의하면,

"이조연(李祖淵: 민씨파의 주요 대신 중의 한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 부르짖기를 '내가 주상께 입대(入對)하고자 하니, 나를 문안으로 들여보내 주시오'한다. 서재필이 칼로 앞을 가로막으면서 꾸짖기를 '내가 전문(殿門) 호위의 명을 받았으니 명이 없으면 들어가게 할 수 없오'하였다. 또 장사들이 모두 분연히 일어날 형세를 보였음으로 한규직(韓圭稷: 민씨파의 또 다른 대신)과 이조연은 어찌 할 수 없이 경우궁 후문…을 나갔다. 문 밖에서 황용택(黃龍澤), 윤경순(尹景純), 이규완, 고영석(高永錫) 등이 그들을 죽였다. …서재필군을 시켜 장사들로 하여금 환관 유재현(柳在賢)을 정전(正殿) 위에 묶어 오게 하여 그의 죄목을 낱낱이 드러내고 뭇 칼날이 번뜩이는 가운데에서 곧 그를 육살을 했다. 그제서야 환관과 궁녀들이 다들 실색하고 숨을 죽였다."

일본과 중국을 드나들었던 노련한 외교관 이조연은, 과연 정말 꼭 죽어야 할 배신자이었을까요? 환관 유재현의 죽을 죄는 과연 무엇이었는가요? 유재현의 최후에 대해서는,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중관(中官) 유재현이 어선(御膳, 수라상)을 바치자 김옥균은 그 수라상을 차면서, '이때가 어느 때인데 수라상으로 한가하게 지낼 수 있느냐?'라고 하자 유재현은 그들을 크게 꾸짖어, '너희들은 모두 교목귀경(喬木貴卿, 몇 대에 걸쳐서 벼슬을 해온 세도가 가문)으로서 무엇이 부족하여 이렇게 천고에도 없는 역적질을 하느냐?'라고 하므로 김옥균은 칼을 빼어 그를 내려치자 그는 뜨락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를 본 고종은 벌벌 떨었다(제1권 上)."

<4(민태호).jpg> 민태호(閔台鎬, 1834~1884). 민영익의 아버지, 갑신정변 때 김옥균 등의 개화당 인사에 의하여 척살당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매천의 텍스트를 그대로 믿는다면, 유재현의 유일한 죄목은 폭력적 정변을 반대하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매천의 같은 책에서는, 그 당시의 서재필의 생생한 모습도 보입니다:

"서재필이 생도들과 함께 칼을 휘두르며 조영하(趙寧夏)와 민태호(閔台鎬)를 차례로 죽였다. 그들의 몸은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다. 고종은 이 광경을 바라보며 눈물만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조영하는 칼에 맞았으나 죽지 않고 오히려 고함을 치며, '조선의 법에 누가 문신(文臣)은 칼을 차지 못하도록 하였느냐? 내 수중에 칼을 들어 너희들을 만 갈래로 쳐서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다'라고 하였다.

어떻습니까? 정파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조선인―그리고 같은 임금을 섬겼던 동료 신하―의 몸을 토막낸 민주주의자 서재필은, 이를 회고록에서 의식적으로 빠뜨린 셈입니다. 자신의 행각이 재미 한인들에게 살육이자 그야말로 배신으로 보일 것을 눈치챘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번이라도 자신과 공범들이 저질렀던 그 끔찍한 살육에 대해서 참회한 적이 있었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끝까지 자신의 행각을 혁명이라고 높여 불렀지요.

***갑신정변 주역들과 박정희ㆍ김일성의 유사점**

허동현 교수님, 바로 그것이야말로 한국근현대사의 최대의 비극이 아닌가 싶습니다. 근대화를 위해서 살육을 마구 범하는 자들이 참회하기는커녕 자랑을 늘어놓는 것이 한국의 근현대사입니다. 갑오 개혁의 관계자들이 과연 바로 그때 일본군이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하면서 수십 만의 한국 농민들을 상륙하고 있다는 사실을 과연 몰랐을까요? 잘 알면서 그 군사적 업적을 치하했던 것이지요. 박정희와 그 정권의 관계자들이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몰랐을까요? 알면서도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서 젊은이들의 피를 미국에 팔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지요.

최근에 <매일경제신문>이 대미 관계의 호전을 위해서 이라크 침략을 도우러 한국 군대의 전투요원을 파병하자고 제안한 것을 보면, 피지배층 젊은이의 피를 그냥 단순한 근대화ㆍ경제성장의 윤활유로만 아는 사고 방식이 그대로 건재하는 듯합니다. 물론 어디를 가나 소위 근대의 전제 조건은 온갖 주변 분자(근대화에 저항하는 구체제의 충성 분자, 저항하는 농민과 노동자, 식민지 원주민 등)의 해골 행진입니다만, 한국의 근대화가 압축된 만큼 살육도 처참해졌고, 그 살육을 당연시하는 근대 지상주의적 사고방식도 굳어졌습니다.

<5(베트남).jpg> 1965년 10월 부산항을 통해 베트남으로 떠나는 맹호부대@프레시안

현재 남한 같으면, 갑신정변의 긍정적인 의미를 찾아보려는 연구자라 해도 분명히 그 "한계성"에 대한 단서들을 많이 달 것입니다. 그러나 박정희 시대의 관(官)학자들이―갑신정변을 "조선 민족의 개조 사업"의 시초로 봤던 일제 시대의 이광수 류의 "문화 민족주의자"를 따르듯이―갑신정변을 대단히 높게 평가했습니다. 가령 박정희에게 "국방 사관(史觀)"위주의 국사를 강의했던 이선근(李瑄根, 1905-1983)은 김옥균을 "우리 나라 근대화 운동의 용감한 선구자"로 이해하고 갑신정변의 실패를 바로 "우리 나라 자주적인 근대화의 실패"로 보고 있었습니다.

사실 현재에도 일부의 보수적인 원로 사학자, 사회학자들은 철저하게 비(非)민주적인 일본적 근대화 모델에 압도를 당했던 갑신정변 주역들을 "한국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창시자"로 그대로 여기고 있습니다. 박정희의 정치적 라이벌 김일성의 역사를 보는 눈이 박정희와 다른 부분도 많았지만, 갑신정변의 평가에 있어서는 흥미롭게도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즉, 북한에서도 김옥균과 그 측근들을 "진보적이며 애국적인 반(反)봉건 인물"로 인식하고 그 정변의 시도를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높여 부릅니다. 정치적으로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던 남북의 두 독재자는, 갑신정변을 왜 비슷한 방식으로 이해했을까요?

제 생각 같으면, 박정희와 김일성의 김옥균관(觀)의 흡사함이 남의 군부 독재와 북의 "유일 사상 체제"의 어떠한 구조적인 상통함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물론 표피적인 이념 등이 많이 달랐지만 국가 주도하에 대중을 동원하여 부국강병형(型) 근대 공업 국가를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단기간내에 건설해보겠다는 근본적인 발상이 하나이었던 셈이었습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의 모형대로 국가의 무소불위의 힘에 의한 "근대성 쟁취"를 꿈꾸었던 두 독재자가, 한국사상 최초로 부국강병 프로젝트를 체계적으로 구성한 김옥균과 박영효 등을 "선각자"로 인식한 것이 과연 자연스립지 않습니까? 반대파의 무자비한 숙청을 계획했던 갑신정변 주역들의 잔혹성이, 피를 물처럼 흘렸던 두 독재자들에게 오히려 크게 어필했을 겁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요즘 남한에서 갑신정변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는 사실이, 우리가 이미 독재 시대의 근대지상주의적 사관을 크게 벗어났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이미 캄캄해진 오슬로에서 박노자 드림

***"그들의 폭력성이 서구이 그것보다 더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 허동현**

반갑습니다. 박노자 선생님

"개미와 베짱이." 여름 내내 노래만 부르며 지낸 베짱이와 열심히 일한 개미의 겨울나기를 통해 "개미처럼 살라"는 교훈을 주었던 이솝의 우화는 이제 그 생명을 다하였습니다. 한여름의 무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래를 연습한 덕에 인기가수가 된 베짱이의 성공담을 전하는 새로운 버전의 이야기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가슴에 더 와 닿기 때문이겠지요.

우화의 주인공들을 평가하는 척도가 바뀌듯,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도 시대에 따라 호오(好惡)가 교차하고 긍부(肯否)가 갈렸습니다. 역사는 항상 새롭게 쓰여진다고 했던가요. 변화하는 현재에 맞춰 과거를 재해석하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일 터. 우리가 서 있는 곳과 지향하는 바에 따라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는 것이겠지요.

<6(김옥균).jpg> 1882년 수신사 박영효와 함께 일본에 갔을 때 나가사키(長崎) 우에노(上野)사진관에서 촬영한 사진 @도쿄 한국연구원

항상 같은 평가가 내려졌을 것 같은 북한학계의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도 늘 변해 왔으니 말입니다. "주체사상"이 나오기 전에 조선 력사 편찬위원회가 펴낸 ꡔ조선민족해방투쟁사ꡕ(1949)는 "외국자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몇몇 귀족계급 가운데 몇 사람의 선진분자가 근대적인 주권확립을 기도하여 실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부정적으로 평하였습니다.

그러나 1955년 12월 김일성이 주체적 조선역사의 연구를 진행할 것을 지시한 이후에는 "조선 최초의 부르주아 개혁운동"(리나영, 『조선민족해방투쟁사』, 1958;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김옥균』, 1964)으로 평가가 갑자기 바뀌더니, 1970년대 들어 주체사관이 확립되면서 "부르주아 혁명"(허종호 등, 『조선에서의 부르주아혁명운동』, 1970)으로 평가 절상되었다가, 1980년대 중반이후 다시 "첫 부르주아 개혁운동"(리종현, 『근대조선력사』, 1984; 최운규, 『조선 근대 및 현대 조선경제사』, 1986)으로 평가 수위가 낮추어졌습니다. 이러한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의 변천 뒤에는 그 당시 북한사회의 현재가 반영된 것이겠지요.

남한학계도 박정희와 그 뒤를 이은 신군부 독재정권 하에서는 "근대화운동의 선구"(보수학자) 또는 "부르주아 개혁운동 내지 혁명"(민중사가)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사회의 민주화가 진전된 1990년대 이후 근대국가 만들기에 공헌했다는 동기론에 근거한 종래의 호평에 대해 신랄한 비판들이 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비판들은 갑신정변의 폭력적 방법의 부당함이나 이후 역사전개에 끼친 악영향, 즉 근대 국민국가 만들기에 실패하게 한 과오를 지적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갑신정변과 그 주도세력을 비판적으로 파악한다고 해서 우리 학계가 "우리도 자생적 근대를 수립할 수 있었다"는 종래의 화두를 버린 것은 아니지만, 박노자 교수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독재 시대의 근대 지상주의적 사관"을 벗어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저 역시 갑신정변을 일으킨 죄로 역사의 법정에 선 피고인들에게 준엄한 심판을 논고(論告)하는 검사이고 싶지만, 오늘만큼은 이들을 대변하는 변호사를 자임할까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보인 외세 의존적 개혁의 몰주체성과 인권 의식의 결핍은, 19세기 이래 우리 나라의 거의 모든 집권정부가 태생적으로 갖고 있던 공통의 약점이라는 점에서, 우리 모두가 나누어 져야 할 공동의 멍에라고 보는 까닭입니다.

***'과실치사'인가 '무죄'인가**

"과실치사"와 "무죄". "그[김옥균]는 현대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고 조선을 힘있는 근대적 국가로 만들려고 절실히 바랐다. …그리하여 그는 자연 일본을 모델로 취하려고 백방으로 분주하였던 것이다. 늘 우리에게 말하기를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는 우리 나라를 불란서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서재필, 「회고갑신정변」, 민태원, 『갑신정변과 김옥균』, 1947)."

서재필이 회고하는 김옥균의 소망이었습니다. 임오군란 이후 거세어진 중국의 간섭은 바로 주권국가의 자주권 침해라고 생각한 급진개화파는 한시바삐 근대국가를 수립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때마침 청불전쟁이 일어나 조선에 주둔해 있던 중국군 1천5백명이 월남으로 급파되기에 이르자, 김옥균 등은 중국 군사력의 약화를 틈타 명실상부한 독립국가를 이루려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조선에 남아 있는 1천5백명의 중국군을 자력으로 내몰 수 없었던 김옥균 등은 먼저 미국의 도움을 청했지만, 조선에 대해 불간섭 내지 중립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던 미국은 이를 거절했지요. 이때 이들 앞에 나타난 사람이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1841-1917)였습니다. 그에게는 이 전쟁을 기회로 최대한 자국 세력을 확대하라는 본국 정부의 훈령이 내려져 있었고, 외세를 물리치기 위해 또 하나의 외세가 필요했던 김옥균 등은 일본의 힘을 빌려 거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을 등에 업고 중국을 몰아내려고 한 김옥균 등과 이들을 지원함으로써 일본의 조선 침략을 확대하려 한 다케조에 공사의 동상이몽은 원세개의 무력 앞에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7(갑신일록).jpg> 『갑신일록(甲申日錄)』, 김옥균이 일본망명 후 갑신정변의 전말을 기록해놓았다.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또 하나의 외세를 빌려 외세를 몰아낸다는 김옥균 등의 전략은 자기모순적일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성공할 확률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런 방식의 거사가 오히려 조선의 근대화를 지연시키는 결과를 자초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은 비단 오늘의 우리만이 아니었지요. 당시 양식 있는 사람들은 정변의 실패를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김옥균 등과 같은 꿈을 꾸었던 윤치호와 윤웅렬 부자조차 갑신정변이 실패할 것을 예측하였습니다. 윤치호의 『일기』를 보면, 윤웅렬이 급진 개화파의 정변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예측한 대목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가친은 고우(古愚, 김옥균의 호) 등 여러 사람의 일이 반드시 실패할 몇 가지를 미리 헤아리셨다. 임금을 위협한 것은 순(順)한 것이 아니고 역(逆)한 것이니 실패하는 첫째 이유이다. 외세를 믿고 의지하였으니 반드시 오래가지 못할 것이 실패하는 둘째 이유이다. 인심이 불복하여 변이 안으로부터 일어날 것이니 실패할 셋째 이유이다. 청군이 곁에 앉아 있는데 처음에는 비록 연유를 알지 못하여 가만히 있으나 한번 그 근본 연유를 알게 되면 반드시 군대를 몰아 들어갈 것이다. 적은 수로 큰 수를 대적할 수 없는 것이니 사소한 일본군이 어찌 많은 청병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실패할 넷째 이유이다. 설사 김옥균과 박영효 등이 능히 순조롭게 그 뜻을 이룬다 하더라도 이미 여러 민씨와 임금께서 친애하는 신하들을 죽였으니 이는 왕과 왕비의 의향에 위배된 것이다. 임금과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서 능히 그 자리와 세력을 지킬 수 있겠는가. 이것이 실패할 다섯째 이유이다. 여섯째, 만약 김옥균과 박영효 등의 무리가 많아서 조정을 채울 수 있다면 혹시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 하겠다. 그러나 두서너 사람이 위로는 임금의 사랑을 잃고 아래로 민심을 잃고 있으며 곁에는 청국인이 있고 안으로 임금과 부모의 미움을 받고 밖으로 당붕(黨朋)의 도움이 없으니 능히 그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짐을 바랄 수 있겠는가. 일이 반드시 실패할 터인데 도리어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어리석고 한스럽다."

결국 윤웅렬의 예언대로 갑신정변은 중국 군대의 무력 개입으로 '삼일천하(三日天下)'로 끝나고 맙니다. 그리고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조선에는 김옥균 등이 뜻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조선의 근대 국민국가 수립 가능성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던 것입니다. 윤치호는 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날 일기에서 그 무모함을 다시 한 번 통탄하였습니다.

"아아. 김옥균 무리의 경망스러운 행동은 위로 나라 일을 실패하게 하고 아래로 민심을 흔들리게 했으며, 공적으로는 개화 등의 일을 완전히 탕패(蕩敗)시켰고, 사적으로는 자기네들의 가족을 몽땅 망하게 만들었다. 한 번 생각을 잘못해 모든 일이 실패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고 얼마나 도리에 어긋나는 짓이냐!"

<8(고종).jpg> 조선 제26대 왕 고종(재위 1864~1907).@국사편찬위원회

이 무모한 정변으로 근대화에 대한 고종의 의욕이 좌절되어 버렸는가 하면, 갓 싹을 틔우기 시작했던 개화사상은 백성들로부터 불신을 받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내정간섭을 막고 조선을 완전한 자주독립 국가로 만들고자 했던 계획과 전혀 다르게 중국의 지배를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던 것입니다.

갑신정변을 계기로 중국은 조선에서 중국을 반대하는 일체의 움직임을 근절시키기 위해 조선의 근대화 노력을 철저하게 차단했습니다. 특히 중국은 1885년 11월 원세개를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로 임명해 조선의 내ㆍ외정치를 감시했습니다. 원세개는 조선 국왕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리면서 철저한 우민화 정책과 개화파 탄압정책을 실시하여 조선을 실질적으로 중국의 보호국으로 만들어 나갔던 것입니다.

과실치사인가 무죄인가. 교통사고를 당해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살려야 한다는 좋은 마음에 들쳐업고 병원으로 뛰어갔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꼭 필요한 응급조치가 늦어져 환자가 죽게 되었다면, 그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초등학생이 아닌 대학원생이 그런 실수를 범했다면, 그는 무죄를 주장할 수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김옥균 등은 당시 우리 나라에서 가장 개명한 사람들이었기에 과실치사죄를 면할 길이 없겠지요. 동기가 아무리 좋아도 잘못된 수단과 방법까지 정당화할 수는 없는 법. 허나 이들이 뒷날 일제에 협력했다 해서 이들을 고의로 환자를 죽게 한 파렴치범―"소신 친일파"―으로 보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고 봅니다. 결국 부역자가 되긴 했지만 애초에는 애국적 동기로 나선 것도 사실이니 말이지요.

<9(박영효).gif> 갑신정변의 또 다른 주역 박영효@프레시안

***'정당방위'인가 '과잉방위'인가**

"근래 제2당(민비와 보수당)은 왕비의 보호로 크게 권력을 얻게 되자, 우리들에게 어떤 죄명을 씌워 유형에 처하려는 악질적인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우리들은 죽음은 처음부터 각오한 바이나 그들의 손에 처형당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우리도 이에 대처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박영효가 말하는 거사이유이지요.

"우리들은 지난 수년 동안 평화적인 수단으로 모든 노력을 하였지만 여태까지 이에 대해 아무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오늘날 죽음의 경지에까지 처하게 되었다.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우리가 먼저 일어나 그들을 막아내는 대책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될 형편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들의 결심은 이미 한 길밖에 없다."

김옥균도 일본공사관원에게 자신들의 거사가 보수파의 제거 움직임에 맞선 정당방위라고 주장하였지요. 그러나 보수세력에게 숙청된다 해도 최악의 경우 정약용이나 윤선도처럼 풍광이 수려한 강진이나 보길도로 귀양가는 정도였을 그들이, 칼을 빼들고 정적을 살해하는 야만적 방법을 택한 것은 정당방위로 보기에는 정도를 넘어선 과잉방위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사실 민씨 척족세력들도 동도서기(東道西器)에 입각한 개혁에는 동의하고 있었던 만큼, 매우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대화와 타협으로 상대를 설득할 여지도 분명 있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죄는 단지 실패한 것뿐이라고 항변할지도 모릅니다. 메이지유신과 5.16군사쿠데타처럼 성공했다면 자신들은 "건국의 원로"나 "산업화의 기수"로 추앙되었을 것이라고 말이지요. 어차피 인간의 얼굴을 한 근대가 현실세계에 존재한 바 없었고, 근대란 본래 피비린내 나는 살벌한 것이지 않느냐고 말이지요.

<10(학살).jpg> 1940년 중국에서 자행된 일본군의 학살. 아이들도 무차별 학살하였다. @사진으로 보는 일본현대사

저도 박교수님처럼 갑신정변 주도세력과 남북한의 군사독재 세력에 일맥상통하는 "살육"의 근대화에 분개하며, 반대합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본래 근대란 "살육"과 "주변분자들의 해골"위에 세워진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한국의 근대가 범한 살육이 서구나 일본의 근대보다 참혹했다고 보지 않으며, 자신들의 범죄행위에 대해 참회하지 않는 몰염치가 한국의 살육자들에게만 보이는 특수 현상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1ㆍ2차 대전기간 서구제국들이 전장에서 자행한, 미군과 러시아군이 베트남과 아프가니스탄, 체첸에서 범한, 그리고 일본이 동아시아에서의 저지른 살육에 비해 한국에서 벌어진 그것이 더 참혹하다고 말할 수 있나요. 일본과 미국과 러시아의 살육자들이 그들의 범죄에 대해 참회한 적이 있던가요. 더구나 한국의 살육자들은 사실 범죄를 주도한 정범(正犯)이라기 보다 종범(從犯)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습니까? 저는 그들이 범한 살육이 동족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으며, 그 배후에 외세가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 한국 근ㆍ현대사의 비극과 특수성을 상징하는 것 같아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11(광주).jpg>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희생된 광주시민의 유해가 안치된 관@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연합통신 노동조합

인간의 얼굴을 한 근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가슴과 머리 속에 들어 있는 화두(話頭)입니다. "타자와 더불어 살기"와 "근대 만들기"는 혹 무엇이든 뚫을 수 있다는 창과 어떤 창도 막을 수 있다는 방패의 관계처럼 함께 이룰 수 없는 목표는 아닐는지요.

봄이 다가오는 연구실 창문 밖을 바라보며...

허동현 드림

***추천도서**

1. 이광린. 『개화당연구』. 일조각, 1973.
2. 북한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편, 『김옥균』. 사회과학원출판사, 1964.
3. 최영호. 「갑신정변론」. 『한국사시민강좌』7. 일조각, 1990.
4. 신용하. 『초기 개화사상과 갑신정변 연구』. 지식산업사, 2000.
5. 한국근현대사연구회. 『한국근대 개화사상과 갑신정변 연구』. 신서원, 1998.
6. 주진오. 「해제: 북한에서의 '갑신정변' 연구의 성과와 문제점」. 『김옥균』. 역사비평사, 1990.
7. 하원호. 「부르주아민족운도의 발생․발전」. 『북한의 한국사 인식』Ⅱ. 한길사, 1990.
8. Lew, Young Ick. "Dynamics of the Korean Enlightenment Movement, 1879~1889 : A Survey with Emphasis on the Korean Leaders." 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編. 『淸季自强運動硏討會論文集』上. 臺北 : 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1987.
9. Lew, Young Ick. 'Late Nineteenth-Century Korean Reformers' Receptivity to Protestantism: The Cases of Six Leaders of the 1880s and 1890s Reform Movements.' "Ashia munhwa" 4 (1988).
10. Jaisohn, Philip, M.D. "My Days in Korea and Other Essays." Seoul: Yonsei University Press, 1999.
11. Nahm, Andrew C. 'Kim Ok-kyun and the Reform Movement.' "Korea Journal"24:12(December 1984).
12. Cook, Harold F. 'Kim Ok-Kyun's Second Visit to Japan.' "Journal of Social Sciences and Humanities"30(June 1969).
13. Cook, Harold F. 'Kim Ok-Kyun's Early Career.' "Journal of Social Sciences and Humanities"35(December 1971).
14. Hong, Soon C. 'The Kapsin Coup and Foote: The Role of an American Diplomat.'"Koreana Quarterly"15:3-4 (Fall-Winter 1973).
15. Hwang, In K. "The Korean Reform Movement of the 1880s: A Study of Transition in Intra-Asian Relations." Cambridge, MA: Schenkman Publishing Company, 1978.
16. Liem, Channing. "Philip Jaisohn: The First Korean-American: A Forgotten Hero."Seoul: Philip Jaisohn Memorial Foundation, 1984; Elkins Park, PA: The Philip Jaisohn Memorial Foundation, Inc., 1984.
17. Nahm, Andrew C. 'Kim Ok-kyun and the Reform Movement.' "Korea Journal"24:12 (December 1984).
18. Shin, Yong-ha. 'The Coup d'Etat of 1884 and the Pukch'ong Army of the Progressive Party.'"Korea Journal"33:2(Summer 1993).
19. Yang, Yong-ik. 'Dynamics of the Korean Enlightenment Movement, 1879-1889: A Survey with Emphasis on the Roles of the Korean Leaders.' "In Ch'onggye Paek Kang undong yont'ohoe nonmunjip"sang. Kyongbuk: Chungang yonguwon kundaesa yonguso,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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