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와 제2공화국, 선거혁명, 그리고 노무현정부/허동현**
안녕하세요, 박노자 선생님
"변화는 변방에서"라는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 시대입니다. 그리스 도시국가 중에 세계제국을 건설한 것은 아테나나 스파르타 사람들에게 야만인 취급을 당하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었고, 한 세기 전 동북아에서 서구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여 근대국가로 거듭 난 것도 중국인과 한국인들이 "섬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일본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례는 우리 역사 속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고구려ㆍ백제ㆍ신라 중 삼국을 통일한 최후의 "승자"는 변방 취급받던 신라였고, 한 세기전 기독교와 신학문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천대받던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이었지요.
안정된 사회에서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주변인들이 힘을 갖기란 불가능하지요. "아비를 '아비'라 못 하옵고 형을 '형'이라 못 하오니,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변방과 중심의 중간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반쪽 양반 홍길동. 호부호형(呼父呼兄)조차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한을 품고 가출한 그는 기문둔갑(奇門遁甲)의 도술을 익혀 조선 팔도를 휘젓지만 결국 양반들의 세상을 뒤집지 못하고 율도국이란 상상 속의 이상사회로 떠나버리고 맙니다.
사진 <1(군국기무처).jpg> 고종의 초상을 그려 정삼품에 오른 구한말의 대표적 화가 조석진(趙錫晉, 1853~1920)이 그린 갑오경장 당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 회의 모습. 군국기무처는 당시 '국내 대소사무를 전결'하던 기구로 의원수는 총재 1인을 포함해 21명이었다.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기존의 권위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는 변혁기는, 주변인(marginal intelligentsia)들이 꿈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 갑오경장(甲午更張, 1894~1895), 4.19혁명(1960), 5.16 군사쿠데타(1961), 그리고 2002년의 "선거혁명"은 변방에 머물던 주변인들이 중심으로 진입한 역사적 사건들이지요.
33세의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을 필두로 29세의 홍영식(洪英植, 1855~1884 ), 25세의 서광범(徐光範, 1859~ ?), 23세의 박영효(朴泳孝, 1861~1939), 20세의 서재필(徐載弼, 1866~1951) 등은 약관(弱冠)의 나이에 갑신정변을 일으켜 비록 "삼일천하"이긴 했지만 권력을 잡았습니다. 갑오경장을 주도한 이들 역시 예전에는 권력의 핵심에 진입할 수 없었던 서자―김가진(金嘉鎭, 1846~1922)ㆍ안경수(安駉壽, 1856~1900)ㆍ윤웅렬(尹雄烈, 1840~1911), 중인―정병하(鄭秉夏, 1849~1896)ㆍ고영희(高永喜, 1849~ ? ), 함경도와 평안도 출신―김학우(金鶴羽, 1862~1894)ㆍ장박(張博, 1849~ ? ), 그리고 기독교 신자―서재필(徐載弼, 1866~1951)ㆍ윤치호(尹致昊, 1865~1945)―들이었습니다.
사진 <2(4.19).bmp> 4.19혁명 당시 통일을 염원하는 학생들의 구호 :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서 판문점으로!'@프레시안
4.19혁명에 힘입어 정권을 잡은 민주당 신파는 평안도 출신 기독교인들과 흥사단 계열의 인사, 그리고 1952년 부산정치파동 이후 이승만과 결별한 관료나 법관 출신인사들로, 전라도 지역 지주출신의 정치인들이 대다수인 구파에 비해 10여년 연하의 비주류 신진 소장세력들이었습니다. 5.16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 역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주류사회에 편입될 수 없는 농민의 아들들이었으며, 20~30대가 주도한 "선거혁명" 덕에 요즘 "신주류"로 떠오른 운동권 인사들도 한때 "사형"을 언도받을 만큼 핍박받은 바 있었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시대적으로 불가피한 개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일본과 야합한 갑신정변ㆍ갑오경장 추진세력들과, 집권욕에 사로잡혀 헌정질서를 무너뜨린 5.16 군사쿠테타 주도세력은 여러 모로 비슷한 점이 많더군요.
위로부터의 근대국가 수립과 외자도입을 통한 경제개발을 중심으로 하는 이들의 국가발전 전략은, 비민주적 특징을 갖는 일본형 국민국가를 발전모델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양반 혹은 군부와 재벌 같은 집권세력들의 이익만을 지키려 했다는 점에서, 시공을 뛰어넘어 공통의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 과정과 절차가 옳지 않아도 결과만 좋으면 되는 것일까요? 이들은 신출귀몰한 홍길동도 이루지 못한 꿈을 현실에서 이뤄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성취가 외세(갑신정변과 갑오경장)와 총칼(갑신정변ㆍ갑오경장과 5.16)에 의한 것이라면 동기가 아무리 좋았다 해도 면죄부를 줄 수는 없을 겁니다.
이번 "선거혁명"은 그 주도세력이 20~30대였다는 점에서는 갑신정변과 유사하고, 청나라와 미국 같은 외세와 동등한 관계 수립을 지향했다는 점에서는 갑신정변ㆍ갑오경장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기성 질서에 대한 "개혁"을 외친다는 점에서는 갑신정변, 갑오경장, 5.16 군사쿠데타와 유사합니다. 그러나 변혁을 위한 수단이 총칼이 아닌 투표라는 평화적 방법이라는 점에서, 또 "촛불시위"가 상징하듯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자존을 꿈꾼다는 점에서, 이들과 크게 다릅니다.
사진 <2(촛불시위).jpg> 세종로를 가득 메운 촛불시위대(2002년 12월 10일) @광화문 리포터
거시적으로 볼 때, 인권이 사상된 산업화(부국강병) 위주의 근대화 프로젝트를 추진한 5.16 군사쿠데타의 연원을 갑신정변과 갑오경장에서 찾을 수 있다면,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 발전"을 내건 김대중정권과 노무현정권은 제2공화국 장면정권의 연장선상에 위치한다고 여겨집니다. 사실 이번 "선거혁명"은 "이 땅에서 최초로 성공한 시민 민주혁명"이자,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주체적으로 극복해 자주적 통일을 모색한 통일운동의 시발점이던 4.19혁명과 매우 유사합니다. 또한 10~20대 학생들이 주도한 4.19혁명에 힘입어 세워진 제2공화국 장면 정권과 20~30대 시민들이 이끈 2002년의 "선거혁명"의 결과 집권한 노무현 정권의 역사적 성격도 매우 비슷하다고 봅니다.
사진 <3(4.19).jpg> 4.19혁명 당시 태극기를 들고 경무대로 향하는 시위대 @운석 장면 연구회
왜냐하면 두 정권을 일구어 낸 사람들이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구현을 열망하는 청년세력이라는 점, 집권을 지원해준 지지세력들이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닌 정치ㆍ사회ㆍ경제구조의 근본적 개혁을 요구한다는 점, 정책의 기본방향이 정치ㆍ사회ㆍ경제 제 부분의 민주화와 대외적인 자주를 도모한다는 점, 정권을 담당했던 민주당 신파와 운동권 출신 인사들은 그 신분적 주변성이 비슷하다는 점, 그리고 이들은 당초 미국이 원하던 카운터파트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 유사성을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래의 통념과 달리 1957년 이후 미국이 생각한 이승만 이후 집권자는 부통령 장면(張勉, 1899~1966)이 아니라 자유당 온건파를 대변하는 이기붕(李起鵬, 1896~1960)과 민주당 구파 조병옥(趙炳玉, 1894~1960)의 연합이었다는 것이 최근 미국측 기밀문서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또한 장면정부가 추진한 "10만 감군"과 남북화해 정책 등은 한반도를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 한 미국의 세계전략이나 입맛에 맞지 않았습니다.
40여년전에 이미 시도되었던 다원화된 시민사회의 정착과 대외적 자주의 꿈은 내부적으로는 보수ㆍ반동세력인 군부의 5.16군사쿠데타와 민주당 구파의 야합에 의해, 대외적으로는 한국의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의 쿠데타세력에 대한 지지로 인해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종래 알려진 바와 달리, 장면은 5.16 쿠데타를 맞아 수녀원에 숨어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미국 측과 연락을 취하면서 쿠데타 진압을 요청했지만, 미국은 정당한 민간정부를 버리고 군부를 지지했던 것이지요. 결국 제2공화국의 붕괴와 함께 민주와 통일을 지향한 4.19혁명은 정치ㆍ사회구조의 변혁을 이루는 데는 실패한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사진 <4(5.16).jpg> 5.16군사쿠테타 당일 아침의 박정희 소장 일행(박 소장을 중심으로 좌측이 이락선 소령, 박종규 소령, 그리고 우측 끝이 차지철 대위) @프레시안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바가 오랜 권위주의 정부의 통치의 유산을 탈피해 다원적 시민 사회, 민간 자율의 경제구조, 화해와 관용의 정신을 통한 국민 통합에 있다면, 장면과 제2공화국은 정신사적 차원에서 이러한 제도와 가치들을 한국사상 최초로 실천하려했던 정치가이자 정권으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에 입각한 다원화된 시민사회의 구현을 다시 한 번 시도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제2공화국의 치세는 우리의 앞길을 이끌어주는 이정표이자 좌표로서 기능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특히 4.19혁명 이후 방종에 가까운 시민들의 자유 구가가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 상황 속에서도 물리적인 힘에 의한 질서유지보다 시민들에게 자율적 각성의 시간을 주려고 했다던 장면의 회고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연일 계속되는 데모로 인해 사회가 혼란에 빠졌지만, 민주당이 집권한 후 집권전의 공약을 위배할 수가 없었다. 내각책임제를 실시하면서 국민의 자유를 박탈하고 독재적인 수법으로 정권을 유지한다면, 이는 국민을 배신하는 것밖에 다른 변명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혼란기라 해서 국민을 배신할 수 없었다. 정권을 잡은 우리로서 무슨 핑계로든지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총검에 의한 외형적 질서'보다도 '자유 바탕 위의 질서'가 진정한 민주적 질서라고 믿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자유당 정권 하에 억눌렸던 국민들이 자유가 허락된 이때에 쌓이고 쌓였던 울분을 한 번은 마음껏 발산시키고 나서야 가라앉을 것은 어찌할 수 없는 뻔한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은인 자중한 것이다. '국민이 열망하던 자유를 한 번 주어보자'는 것이 민주당 정부의 이념이었다. 갈수록 혼란을 더해 가는 사회상황 속에서 우리는 철권으로 억압하는 대신 시간으로 다스리고자 했다. …귀와 입으로 배운 자유를 몸으로 배우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론과 학설로 배운 자유는 혼란을 일으키지만 경험으로 체득한 자유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단단한 초석이 되는 것이다. 자유가 베푼 혼란과 부작용에 스스로 혐오를 느낄 때 진실한 자유를 얻는 것이다(『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9, 76~77쪽)."
***"신주류"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력이 스스로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며, 20~30대의 꿈을 이루어줄 대표에 불과하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이러한 시민의 자각에 기반한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의 구현이라는 장면의 정치사상은 한국의 민주주의 발달과정에서 좌표로 기능한 등대였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가 남긴 "우리의 성의는 미처 결실을 보기 전에 끝내 무참히 짓밟혔다. 민주주의는 한 사람의 총리나 각료들의 헌신적인 노력만으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뼈에 새겼다. 아무래도 전국민이 합심해서 이끌어야 하는 하나의 수레와 같은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협력할 때 수레바퀴는 잘 구른다" 라는 경구는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발전에 아직도 유효한 처방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진 <5(장면).jpg> 자신을 저격한 저격범을 면회하는 장면(張勉, 1899~1966). @운석 장면 연구회
중심의 교체 그 자체가 개혁이고 발전이 될 수 없음은, 이른바 "개혁"이 과거의 탄압과 차별에 대한 한풀이 수단으로 악용된 우리 역사의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주도세력의 수(갑신정변 1백여 명, 갑오경장 1천여 명, 5.16 군사쿠데타 3천6백명, "선거혁명" 전체 유권자 3,499만여 명의 48.9%에 해당하는 1천2백1만4천2백77명)가 상징하듯, "신주류"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력이 스스로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며, 20~30대의 꿈을 이루어줄 대표에 불과하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과도 대화와 타협으로 생각의 차이를 줄이며 더불어 살아가는 새로운 관용(寬容, tolerance)의 전통을 세울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겠지요.
나아가 총칼이 아닌 인터넷을 무기로 "선거혁명"을 주도한 20~30대들의 성취 이면에는, 남북분단의 비극과 군사독재의 질곡 아래서 묵묵히 제 몫을 다한 50~60대 국민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봄이 다가오는 수원의 연구실에서
***준엘리트의 주류 진출, 철저한 인권존중ㆍ평등사상 수반돼야/박노자**
허동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변방'과 '중심'의 시각에서 개화기를 비롯한 한국 역사 전반을 조감해보는 것이 대단히 유의미한 접근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구한말의 '문명 개화'가 여러 차원에서의 '주류 교체'를 의미했다고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지리적으로 여태까지 무시해왔던 평안도와 함경도의 출신들이 오래간만에 기를 펼 수 있게 됐고, 연령의 차원에서 20대 후반의 신채호(申采浩, 1880~1936) 같은 이들이 1900년대의 여론을 주도하는 명(名)논객이 됐고, 종교적으로 불교 신앙이 깊었던 개화의 제1세대(김옥균, 서광범, 유대치 등)와 기독교로 개종한 제2세대(윤치호, 서재필, 이상재 등)가 기존의 유교 중심의 판도를 획기적으로 바꾸고 말았습니다. 거기에다가―물론 일부에 국한된 현상이긴 하지만―"상한(常漢: 평민)"에서 임금의 최측근으로 벼락 출세한 이용익(李容翊, 1854~1907)과 같은 극적인 신분 이동의 경우를 합해보면, 그야말로 다차원적인 '주류 교체' 현상이라고 말할 만합니다. 사실, 우리가 통상 '사대부 명망가' 내지 '양반 지주' 출신으로 알고 있는 그 당시의 주역들 중의 상당 부분은, 알고 보면 진정한 의미의 '지배 엘리트'와 약간 사이가 멀었던 층에 속했습니다.
사진 <6(신채호).jpg>신채호(申采浩, 1880~1936) @프레시안
예컨대,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의 경우에는, 조선 초ㆍ중기의 명문 가문인 기계(杞溪) 유씨 집안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정의 환경이 별로 넉넉지 않은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안이 당대 세도가이었던 안동 김씨, 풍양 조씨에 크게 밀려 할아버지는 고을원, 아버지는 참봉(參奉: 종9품) 등의 외직, 말직밖에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출세는, 가정적인 배경에 힘을 입은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실력을 일찍 알아준 노론의 거두 박규수 (朴珪壽, 1807~1876)와의 만남, 그리고 열려 있는 사고로 초기 개화파로부터 인정을 받은 일부터 시작됐습니다. 가정적 환경이 그리 넉넉지 않음에도 "재주 있는 사람"으로 평판을 받아 출세의 가도를 달리는 것은 양반 출신의 개화파들의 특징이었던 것 같습니다. 유길준이야 그나마 서울의 북촌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어윤중(魚允中, 1848~1898) 같은 경우에는 아예 충북 보은의 가난한 시골 양반의 자제이었습니다. 사회의 생산 기반과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본격적으로 바뀌는 격변기마다 이와 같은 '변방인의 대(大)진출'이 보이는 것이 바로 역사의 법칙이겠지요?
사진 <7(어윤중).jpg> 어윤중(魚允中, 1848~1898) @프레시안
그러나, '변방인'이라는 명칭이 그 당시에 중앙 무대로 진출한 신진들의 성격을 과연 정확하게 가리키는 것인가요? 예컨대, 개신 유림의 가장 유명한 이데올로그 박은식은 차별을 받았던 황해도의 출신인데다 조선 왕조 내내 뚜렷하게 벼슬을 한 경력이 없는 향반(鄕班)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자랑스러운 족보도, 벼슬도, 과거 급제의 기록도 없는 시골 서당의 훈장 집에서 태어난 박은식이, 조선시대 양반 엘리트의 기준으로 봐서는 분명히 변방인이었음에 틀림없지요. 그러나 여유 있는 시골 부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한문을 완벽하게 익혀서 나중에 스승 박문일(朴文一)이라는 위정척사파의 유명한 멤버를 통해서 집권 민씨 족벌과 줄을 댈 수 있었던 그가, 구한말의 평민의 입장에서는 당대 사회의 "대인(大人)", 한 명의 지배자로밖에 안 보였을 것입니다. 학술적인 용어를 쓰자면, 그나 그와 가까웠던 대다수의 개신 유림들이 집권 엘리트를 밀어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해보려는 준(準)엘리트(subelite)이었던 셈이었습니다. 엘리트이었기에 신(新)서적을 읽어 새로운 패러다임을 익힐 수 있었고, 집권 집단의 정식 멤버가 될 수 없었기에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거한 사회의 대대적인 "구조 재조정"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허동현 교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그들이 추구하는 사회의 재편이 나름대로의 긍정적인 의미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라면 문제는, 기존 엘리트보다도 선민 의식과 자기 확립에의 욕망이 유독 강한 그들이 진정한 의미의 '변방인', 즉 이 사회의 서민과 약자들 위에서 군림하면서 그들의 이해 관계를 거의 고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컨대 박은식 같으면 실학자로부터 내려온 투철한 애민(愛民)사상을 갖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는 "윗분"으로서 "아랫사람"을 어루만지는 방식이었지 자신을 "민"의 한 구성원으로 보는 것이 절대로 아니지 않았습니까? 그가 설파한 "교육입국(敎育立國)"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국가의 부강을 위한 "국가 사상(즉, 국가주의)"과 기술 지식의 보급이 위주로 돼 있는 것입니다.
사진 <8(박은식).jpg>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1859~1925)ⓒ프레시안
예컨대, 그가 제시하는 행동 강령격이었던 "우리 나라를 누가 구제할 수 있는가? 우리 인민을 누가 살릴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실업학가다(孰能求吾國者며 孰能活吾衆者오 實業學家가 是로다, 『서북학회월보』제1권 제7호, 1908년12월)"라는 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교육의 목적과 이상을 설파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가없는 큰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는데, 바람과 물결이 갈수록 심해져 가고 있다. 뭍이 보이지 않는다.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우리를 살려다오, 우리를 살려다오!'라고 외치는데, 짙은 안개 속에 빠지고 날아가는 모래에 가려져 시력이 더욱더 약해지기에 앞으로의 길은 분명하지 못하다. 허공을 향하여 '우리를 인도해다오, 우리를 인도해다오' 라고 외치는 것은 인지상정인데, 우리 나라의 목하 사정은 바로 '살려달라! 인도해달라!'라고 간절히 부를 만한 것이다. 어디를 향해서 [도움을] 물색할 것인가? 필히 학문 세계를 향해서다. 학문 세계를 말하자면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살리는 가장 긴요한 요소가 되는 것은 바로 실업(實業) 교육이다. 대저 나라의 승패는 빈부 강약에 있는 것인데 나라나 사람들이 무엇을 갖고 부강해지는가? … 그것이 실업 교육의 발달의 여부에 달려 있다.
지금 세계의 가장 부강한 나라는 바로 영국인데, 원래 영국은 유럽의 소국이었다. 영국은 …최근 수십년 동안 수 만리에 걸친 식민지를 개척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다른 나라보다 실업의 이권(利權)이 먼저 비상히 발달됐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무위(武威)를 떨친 피터(Peter)1세 대제도, 궁궁의 안락과 제왕의 존위를 생각하지 않고 조선소에서 기술자로 일한 이유는, …제조 공업이 부국강병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만약 독일은 크루쁘(Krupp, 克魯朴)의 대포를 …만들지 못했다면 비스마크(Bismark)의 정략과 몰트케(Moltke)의 군략으로는 프랑스를 이기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 나라를 구할 사람은 실업 교육가이니 사회의 자본가와 유지들이 자본을 모아 여러 가지 사업을 발달시키는 데에도 힘을 써여 되지만, 청년을 외국에 파견하여 실업 학문을 많이 체득하여 국가의 부강과 민생의 쾌활도 함께 도모해야 한다(현대 한국어로 번역하였음, - 인용자)."
마치 크나큰 바다에서 짙은 안개 속에서 앞길을 가리지 못해 노도 속에서 점차 물에 빠져가는 배처럼 망해 가는 나라에서 구국의 방안으로서의 기술 교육의 진흥을 재촉하는 박은식의 애타는 애국심을 분명히 존경할 만합니다. 그러나 그의 궁극적인 이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생존 경쟁"에서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것을 그 때 "자연의 법칙"으로 생각했던 그는, 한국도 "많은 식민지를 개척한" 영국이나 "프랑스를 이긴" 독일 못지 않은 하나의 열강으로 되기를 기원했습니다. 크루쁘의 대포처럼 위대한 무기를 만들고 비스마크나 몰트케 장군, 피터 대제와 같은 무자비하면서도 비전이 있는 "철권의 리더"의 지도하에서 세계에서 "무위를 떨치기를" 기원했던 셈이지요.
그가 꿈꾸었던 "부강하고 병력이 강한" 나라에서 재능 있는 청년들을 외국에 유학 보내는 "자본가와 유지"들이 위에서 군림할 것은 그로서 당연한 발상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비스마크의 독일처럼 "강력한 나라"를 만들려면 당연히 그 당시의 독일 못지 않게 각급 학교와 징병제 군대를 통해서 군사 훈련도 일체 국민에게 실시해야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박은식은 "문약지폐(文弱之弊)는 필상기국(必喪其國,『서우』제10호, 1907년9월)"이라는 그의 유명한 글에서 "남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다들 꼭 군사 교육을 어릴 때부터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한 마디로 한국의 보수 사학자들이 극구 칭찬하는 박은식의 "교육구국"은,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군국 독일이나 일본과 유사한 자본주의적 부국강병의 프로젝트이었을 뿐입니다.
***지금 중앙 무대에 진출한 80년대 재야 진보 운동가들에게 - 제발, 엘리트주의적 폐습에 물들지 않기를…**
물론 한 나라가, 인간적인 얼굴이라고 있을 수 없는 근대적 자본주의의 야수적인 세계 사회에서 살아 남으려면 이와 같은 부국강병 프로젝트가 불가피하게 필요하다는 것도 어찌 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다만, 1900년대의 소위 "계몽 운동"이 현실주의적, 자본주의적 근대화 이상의 어떤 목표를 가졌다는 오해를 벗어나야 합니다. "계몽" 운동가들은 불평등하고 야만적인 "힘의 세계"를 현실로 인정하고 그 세계에서 "먹히는 자"가 아닌, "먹는 자"가 될 만한 "힘센 나라"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수많은 "계몽" 운동가들이 일제의 강점(1910) 이후에 일제의 지배를 또 하나의 현실로 인정하고 "백인종"을 이길 만한 "일본의 지도하의 힘센 황인종"을 위한다 하면서 일제와 협력했던 하나의 배경은, 그들의 원래부터의 현실주의적, 자본주의적 지향입니다.
사진 <9(백범일지).jpg>독립운동가 김구(金九, 1876~1949)가 상하이와 충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직을 지내면서 항일운동의 최전선에서 방어할 각오로 유서를 대신하여 기록한 친필자서전. @한국역사정보시스템
물론 그들의 "교육구국"은, 실무적인, 군사적인 교육을 백성들이 자율적으로 받을 것이라는 발상도 전혀 아니었습니다. 행정 권력을 통해서라도 그 교육의 "은혜"를 베풀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박은식이 회장직을 맡았던 서북학회(1908년1월~1910년9월)의 회원 전봉훈(全鳳薰)이 황해도 배천(白川)군의 군수라는 자신의 직함을 이용하여 군내에 설립할 14개의 "개화학교"의 경비 부담을 아예 자의적으로 호당 3두~1석 정도의 신설세(稅)로 군민들에게 전가시킨 이야기가 잘 알려져 있습니다(『서북학회월보』 제18호). 참, 전봉훈의 "교육열"을 찬양하는 이야기를, 『백범일지』(도진순 주해, 돌베개 1997, 205쪽)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미천한 출신이라 해도 일단 출세한 자들은 기존의 엘리트와 "아랫것들"에 대한 행동의 패턴이 다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악질적인 탐관오리로 1888년의 영흥(永興)민란을 촉발시킨 이용익의 행적을 보면 출세한 천민이 얼마나 옛날의 동류들에게 가혹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1960~80년대의 집권 군부의 우두머리들도 대개 빈농 출신이었다는 사실도 연상됩니다.
사진 <10(이용익).jpg>이용익(李容翊, 1854~1907)@프레시안
준엘리트의 진출이 물론 진일보의 의미를 담고 있지만, 그들이 철저한 인권 존중, 평등 사상을 확고히 가지지 않는 한 사회 약자들의 신세가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금 중앙 무대에 진출하고 있는 1980년대의 재야 진보 운동가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사항입니다. 제발, 엘리트주의적 폐습에 물들지 않기를…
날씨가 흐린 오슬로에서 박노자 드림
추천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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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형. 「대한제국기 계몽주의계열 지식층의 '삼국제휴론'-인종적 제휴론을 중심으로-」.『한국근현대사연구』13, 2000.
―――. 「장지연의 변법론과 그 변화」. 『한국사연구』10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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