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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스'와 '도너츠'의 차이

박노자ㆍ허동현의 서신 논쟁-'우리안 100년 우리밖 100년' <3>

***일본을 통해 유럽을 받아들인 조선의 한계와 혼란/허동현**

안녕하세요, 박노자 선생님

혹시 한국에 두 종류의 '도넛(doughnut)'이 있다는 걸 아십니까? 도나스와 도너츠가 바로 그것인데, 콜라와 잘 어울리는 미국식 원조 도너츠를 일본인들이 자기 입맛에 맞게 바꾼 것이 일본식 도나스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찹쌀 도나스와 꽈배기 같은 서양에 없는 일본식 도나스를 먹고 자란 386세대가 "민권" 회복을 외친 세대라면, 미국식 도너츠를 먹고 큰 요즘 대학생들은 "인권" 신장을 도모하는 세대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일본인들은 "모찌"를 "찹쌀 도나스"로, 서구 근대의 중심가치인 "인권"은 "민권"으로 둔갑시켰습니다. 도나스와 도너츠가 차이가 나듯 민권과 인권도 그 함의(含意)가 매우 다르더군요. 거울에 비친 모습은 본래 형상과는 다른 법. 서구 근대 식품이나 사조는 일본의 전통과 만나면서 형식과 내용 면에서 변형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일본인들이 사회ㆍ문화적 배경을 달리하는 서구의 지적 산물들을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일본이 자랑하는 최고의 지성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1862년 영국에 들른 그는 그때 이미 난학자(蘭學者, 네덜란드를 통해 받아들인 서구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서구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은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구 근대의 산물인 민주주의의 기본 제도들은, 이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던 그에게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답답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더군요.

"정치상의 선거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선거법이란 것이 어떤 법률이고, 의회라는 것은 어떠한 관청이냐고 질문하면, 저쪽 사람은 웃기만 한다. 무엇을 묻는지 잘 알고 있다는 태도이다. …또한 보수당과 자유당이라는 당파 같은 것이 있어 서로 지지 않고 밀리지 않으려고 맹렬하게 싸운다고 한다. …태평무사한 천하에서 정치적인 다툼을 하다니.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저 사람과 이 사람이 적이라면서도 함께 식사도 하고 술도 마신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福翁自傳』)."

<사진 1> 분출하는 자유의 물결, 1880년대 일본에서는 정부의 권력 독점에 반발하여 자유와 평등의 신사상을 설파하는 자유민권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자유'라고 쓴 깃발(세로 2.2m, 가로 2.9m)은 1890년 제1회 일본 총선거 때 사용됐다. <1(자유).jpg> 중앙일보 사진

그러니 일본말로 중역(重譯)된 개념을 빌려 서구 근대를 이해했던 우리 선조들은 더한 혼돈을 겪을 수밖에 없었지요. 1881년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소위 신사유람단)의 조사(朝士)로 일본을 둘러본 민종묵(閔種默, 1835~1916)은 자유민권운동을 보고 "한 변사가 소리쳐 말하길 '나라의 대세는 인민에게 달려 있다' 하니 이는 자유권을 일컫는 것이다"라는 목격담을 남겼습니다(『문견사건초(聞見事件草)』). 허나 그 역시 '자유권'이 국가와 법을 초월하는 자연법적 권리라고 주장하는 일본 재야인사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한 것 같더군요. 사실 오늘날까지도 '자유권'문제는 국가와 법을 초월하는 자연법적 권리로 보는 입장과 근대국가 성립과 더불어 국민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헌법에 의해 보장된 실정법적인 권리로 보는 입장이 대립하면서 논란을 빚고 있는 문제이지요.

당시 민종묵과 동행했던 엄세영(嚴世永, 1831~1899)도 일본의 서구화된 사법제도에 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중재ㆍ예심ㆍ공판 등의 제도를 두어 관이 아주 작은 일을 저울질하고 세밀하게 파헤치니 자연 고법(古法)과 부합한다. 징역이라 일컫는 것은 한(漢)의 성조(城朝)나 당(唐)의 적수(謫戍: 죄인을 변방에 수자리 살러보내는 제도)와 같은 것이며, 그 속원(贖圓: 보석)이라 하는 것은 우(虞)의 속금(贖金: 죄를 면하고자 바치는 돈)이나 주(周)의 벌환(罰鍰: 일정액의 돈을 내어 죄를 면하게 하는 제도)의 제도에 해당한다. 사구(司寇: 형벌과 경찰을 맡아보던 고대 중국의 관직)의 사악한 행위를 방지하는 제도를 본뜬 것이 경찰(警察)ㆍ순사(巡査) 의 제도이고, 국인(國人)들이 죄를 준다는 "국인여죄(國人與罪)"의 뜻을 취한 것이 대언ㆍ방청의 제도이다. 무릇 민인(民人)의 건강과 위생을 지킴에 그 극단을 다하지 않음이 없다. 소위 법이란 것은 형명(刑名)ㆍ법술(法術)의 유(流)가 아니라 바로 치국(治國)의 계약(契約)이기 때문이다(『일본문견사건초(日本聞見事件草)』)."

사람이 사물을 보는 인식의 폭과 깊이는 그가 받은 교육의 내용과 그가 견문한 바 세상의 크기에 비례하는 법. 엄세영도 예외는 아니었겠지요.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지식을 바탕으로 서구화된 일본의 사법제도를 이해했습니다. 과연 그는 "예심ㆍ공판ㆍ징역ㆍ경찰ㆍ대언인[변호사]" 등 일본이 받아드린 서구적 사법제도가 "법은 곧 형(刑)"이라는 동양의 형벌중심의 형명지학(刑名之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른 법체계인 서구 법사상에 기초한 것이라는 것을 얼마나 알 수 있었을까요.

일본인들은 한자를 도구로 서구 문물을 번역해 들이고 언문일치 문체를 개발해냄으로써 일본식 근대를 만들어 내었지요. 근대 국민국가 건설 과정에서 말과 글이 일치하는 구어체 문장을 만들어 내는 것이 국민통합의 기본 전제였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균일하고 균질한 생각을 공유하는 "국민"을 만들어 내는 것이야말로 근대국가 건설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이었고 그 관건은 언문일치의 문체를 만들어 내는 데 달려 있었습니다.


<사진 2>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 1839∼1931)의 미구회람실기(米歐回覽實記) <2(미구회람실기).jpg> 프레시안 사진


언문일치에 성공한 일본은 서구로부터 읽어들인 지식을 전체 국민들과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예컨대 1871년 11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1년 10개월 동안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독일ㆍ러시아 등 구미제국을 둘러 본 이와쿠라(岩倉)사절단이 거둔 성과는 사절단을 동행했던 역사가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 1839~1931)에 의해 5권의 『미구회람실기(米歐回覽實記)』(1876)에 고스란히 담겨 전 국민이 공유할 수 있는 지식과 정보가 되었습니다. 구메는 이 책에 "이 사절이 거둔 모든 성과를 국민의 일반적 이익과 개발을 위해 편집ㆍ간행"한다고 썼듯이, 이와쿠라사절단원들은 천황이 아니라 바로 국민을 대표한다고 생각했으며, 이 같은 사고를 실천에 옮겨 자신들이 경험한 바를 국민들과 함께 나누었던 것입니다.

<사진 3> 조사시찰단의 일본시찰 보고서 <3(시찰보고서).jpg> 프레시안 사진

이처럼 일본의 사절단은 자신들의 경험을 활자화하여 국민들과 공유하는 데 힘을 썼지만, 우리의 사절단들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예컨대 조사시찰단원들은 1881년초 4개월에 걸쳐 일본이 서구 근대를 본떠 정치ㆍ경제ㆍ군사ㆍ산업ㆍ사회ㆍ문화ㆍ교육 부문에서 이룩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총 80여 책의 보고서에 응집시켰습니다. 그러나 비단으로 장정된 이 보고서들은 국왕이나 일부 위정자들이 정책을 결정할 때 참고자료로 이용되는 정도였기 때문에 이들이 거둔 성과가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진 4> 국한문 혼용체 문장을 구사한 유길준의 「세계대세론」(1883)<4(세게대세론).jpg> 유길준전집편찬위원회 사진

이 시찰단을 따라 일본을 유학했던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이 언문일치의 문체 개발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깨달은 선각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1883년 「세계대세론」이란 논설에서 국한문혼용을 처음으로 시도해 그가 유학을 통해 얻은 지적 성과를 국민과 공유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이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해 저술한 『서유견문』(1895)의 발간으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1천부를 찍은 이 책은 다음해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며 유길준이 역적으로 몰려 망명객이 되어 버렸기에 금서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기에 이 책은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일본인들의 지견(知見) 향상에 공헌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西洋事情)』(1866)과 달리 역사적으로 거의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서유견문』과 순 한글판 『독립신문』이 말해주듯, 우리의 선각자들도 언문일치의 문체 개발에 나섰지만 자신의 눈으로 서구 근대를 읽어들이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즉 "상상의 공동체"로서 민족을 단위로 한 근대 국민국가 만들기에 가장 최우선 과제인 언문일치의 문체 개발에 뒤쳐진 것, 그리고 서구의 새로운 개념을 자기화 하지 못한 것이 근대 국민의 창출을 불가능하게 만든 주된 요인 중에 하나인 것이지요. 당시 이들 매체를 통해 전파된 국민(國民), 국회(國會), 육법(六法), 정당(政黨), 시간(時間), 공간(空間), 철도(鐵道), 증권(證券), 법률(法律), 경제(經濟), 은행(銀行), 병원(病院), 과학(科學), 표상(表象), 분석(分析), 자본(資本), 사회주의(社會主義), 민주주의(民主主義), 희극(喜劇), 비극(悲劇), 주관(主觀), 객관(客觀) 등 무수한 어휘들이 일본에서 새로 번역ㆍ조어된 한자어라는 사실이 이를 웅변해주지요.

일본학계의 "천황" 소리를 들은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2~1996)의 말처럼, 일본이 군국주의의 길을 걷게 된 이유 하나는, 개개인의 개별적(individual) 권리인 인권을 집합 개념화하여 민권(people's right)으로 잘못 번역한 데 있지요. 사실 지금은 "freedom and people's rights movement"로 번역어가 정착된 자유민권운동(自由民權運動)의 성전(聖典) 역할을 한 Herbert Spencer의 Social Statics(1851)도 서명을 『社會靜學』이 아닌 『社會平權論』으로 오역한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에피소드가 재미있습니다.

<사진 5> 민권을 설파하는 연사와 이를 감시하는 경찰의 눈초리가 이채롭다. <5(민권).jpg> 프레시안 사진

그러나 이런 오역의 실수가 일본인에게만 머물렀을까요. 조사시찰단의 사례에 잘 나타나듯이, 근대 서구에서 이입된 개념들--일본에서 조어된 번역된 한자어들--을 처음으로 접한 유길준 등 한국인들은 이를 이해함에 있어 문자의 이면에서 생기는 개념의 차이를 극복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최초의 일본과 미국 유학생 유길준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가 서구 근대의 지적 성과를 충분히 소화ㆍ이해하기에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그는 서구 근대의 지적 성과를 이해함에 있어 대체로 일본 지식인들에 의해 "번역된 근대(translated modernity)"를 통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따라서 그는 동시대의 일본 지식인들이 겪은 지적 혼돈보다 더한 서구와 일본의 상호작용에 의해 일본적으로 변형된 "삼중 번역된 근대(triple-translated modernity)"의 미로를 헤맬 수밖에 없었겠지요. 서구 근대의 자유주의와 공리주의 같은 요소와 함께 일본의 국권주의적 요소, 그리고 조선의 전통적인 유교적 윤리체계가 뒤섞여 있는 그의 주저 『서유견문』은 그가 얼마나 큰 지적 혼돈을 겪었는지 잘 말해 줍니다.

그러면 유길준의 시대로부터 한 세기 이상이 지난 오늘날 우리들이 처한 상황은 좀 나아졌을까요? 우리 정치인들은 아직도 "민권 수호"를 외치고 있고, 우리도 여전히 일본산 신조어 --민주화(民主化), 반체제(反體制), 일조권(日照權), 혐연권(嫌煙權), 난개발(亂開發), 풍속산업(風俗産業) 등--에 의거해 새로운 사회ㆍ문화 현상들을 설명하고 있지 않나요. 일본을 통해 세상을 본다는 점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오십보 백보인 셈이지요.

한 세기 전 우리 눈으로 서구 근대 읽어들이기에 실패한 역사를 되새겨 보면서, 한자교육을 게을리 한 결과 한 세기 전 조상들이 쌓아놓은 정신적 보고에 쉽게 다가갈 수 없게 되었다는 점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날마다 쏟아져 들어오는 새로운 개념과 현상들을 우리 언어로 표현하는 데 소홀한 결과 이제는 우리들끼리도 최신정보와 지식을 교류하려면 영어단어를 빌릴 수밖에 없게 된 것은 아닐까요? 한자교육 폐지와 "영어 배우기 열풍" 그리고 일본산 신조어의 남용과 오늘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정체성 균열 사이에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경쟁'을 멀리했던 조선이 '경쟁'에 광분하는 한국으로 변한 이유는?/박노자**

허동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일본식 번역어가 각 분야 전문용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현실, 다시 말해 일본화된 서구적 근대가 현대 우리말을 통해서 우리를 어떻게 포획ㆍ지배하는지 저도 자주 생각합니다. 예컨대 `경쟁`이나 `경쟁력`과 같은 `competition``competitiveness`의 일본식 역어(譯語) 말입니다.

조선시대 언어에서는 `다툴 경(競)`자도, `다툴 쟁(爭)`자도 별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공자의 말대로 "군자는 다투는 일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다들 수긍하는 진리였고 `경분(競奔)`, 즉 서로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앞다투어 경쟁하는 행위는 소인배의 특징으로 인식돼 있었습니다. 물론 실제로 관료 생활에서 경쟁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군자다운 행동 양식으로 볼 수 없었던 것도 조선시대이었습니다.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나 허균(許筠: 1569-1618), 이익(李瀷: 1681-1763),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등의 뛰어난 선비들이 거의 다들 은사(隱士) - 즉, 세속적인 경쟁을 초월한 은둔 생활자 -의 전기를 쓴 적이 있다는 것은, 그들이 당파 다툼이 꼭 동반하는 벼슬길을 얼마나 덧없는 걸로 여겼는지 잘 보여줍니다. 그들이 생각했던 은사의 이미지를, 이익의 「동방일사전(東方一士傳)」의 다음과 같은 말이 잘 잘 느끼게 합니다. "원래 선비가 천하에서 살고 있을 때 불우한 시기를 만나면 인간과 세속을 피하게 돼 있다. 날짐승, 들짐승과 한 무리가 돼 자연에 몰입하여 이름마저 잃으면 무슨 한계가 있겠는가?"

<사진 6> 서구의 사회진화론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한 유길준의 미발표 논설 '경쟁론'(1883년·'유길준 전서' 5권에 수록). 유길준은 쇄국으로 인한 경쟁의 부재에서 조선왕조의 쇠퇴 원인을 찾았다. <6(경쟁론).jpg> 유길준전집편찬위원회 사진

유배지인 쓰시마라는 외진 섬에서 나카지마(中島)라는, 우연히 만난 일본인 통역에게 정이 통해 온 세계가 이익을 다투는 곳에 대장부 마음을 가진 자 몇 사람이나 되는가? 같은 한시 한 수를 건네준 위정척사의 거두 최익현 (崔益鉉: 1833-1906)도, 몸이 풍운의 시대에 늘 휘말려 살았지만 마음으로는 그 이상을 그대로 간직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다툴 경(競)`자를 천시했던 나라를, `국가 경쟁력`이나 `나의 경쟁력`, 그리고 `나의 몸값`을 가장 많이 거론하는 나라로 만들었을까요. 서구식 약육강식의 논리인 진화론을 수용해 `한 나라가 경쟁에서 뒤지면 망국멸종을 당한다`는 제국주의 시대의 살벌한 진리를 설교했던 메이지 시대의 일본 저서와 그 저서를 대략 따랐던 중국의 유명 논객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의 책들이 구한말 지식인의 신(新)문명에 대한 길잡이가 된 것이 중요한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량치차오는, 국가에도 개인에게도 필수적인 발전, 진보의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국가간의 폭력적인 경쟁을 공례(公例), 즉 자연의 도리라고 불렀습니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전쟁과 경쟁이 없으면 근대적인 국민도 근대적인 국가도 그리고 근대적인 애국심도 성립되지 못한다는 것은 1900년대의 량치차오의 지론이었습니다. 그 생각을 일반 조선인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준 이가 박은식이었습니다.

<사진 7>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 <10(양개초).jpg> 프레시안 사진

예컨대, 잡지 <서우> (西友)의 제2호 (1907년 1월)에서 박은식이 번역한 량치차오의 애국론이 실렸는데, 그 장문의 글에서 량치차오가 중국인의 근대적 애국심의 부족이 바로 국가적 경쟁의 역사가 너무 짧은 탓이라고 주장합니다.

"중국이 자고(自古)로 통일된 나라로서 수천년 동안 홀러서기를 계속 해왔으며 자국(自國)을 천하(天下)라고 부르고 국가라고 부르지 않았으니 [근대적 의미의] 국가가 일찍 없어던 셈이었다. 국가가 없었으니 어찌 국가를 사랑하겠는가? 서로 평등한 몇 개의 국가가 있어야 자국에 대한 사랑이 일어난다 (…). 외국 모욕을 물리치는 [역사]가 있어야 애국심이 생기는데, 그러한 역사가 없다면 형제간의 사랑이라 해도 역시 망각하게 된다. 남의 집안을 대해봐야 내 집을 사랑하게 되고 (…) 남의 국가를 대해봐야 우리 국가를 사랑하게 된다. 유럽 국가들이 고대 희랍 시기부터 (…) 서로 경쟁하면서 생존을 구했으니 애국적인 성격이 생긴다. (…) (현대 한국어로 간추려 번역했음 - 인용자의 주)."

애국심 -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피지배자들의 지배 집단에 대한 충성과 복종 -이 국민 생존의 필수 조건으로 인식되고, 경쟁이 애국심의 어머니로 간주된 셈입니다. 물론 근대 국가의 세계에서 국가 간의 경쟁도 자국에 대한 충의(忠義)도 불가피한 요소지만, 량치차오가 애국심의 모범으로 흠모하고 베끼고 싶었던 메이지 일본에서 우파적인 애국심과 국가 정신이 결국 대륙 침략의 정신적인 뒷받침이 됐다는 것이 우리에게 나름대로의 교훈을 주지 않습니까?

외침과의 영웅적인 싸움 등의 남과의 경쟁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찬 우리 역사 교과서를 합리화할 때, 우리가 늘 한국이 약소국인 만큼 대외 경쟁 의식의 함양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아주 비슷한 방식으로 교과서를 만들었던 메이지 초기의 일본 지식인들도 일본을 유럽 열강의 희생자, 세계의 약소국으로 인식했던 겁니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걸고 1870년대에 한반도 침략 (강화 조약 강요 등)을 시작한 그들의 선례를 보면, 방어적 민족주의와 공격적 민족주의 사이의 경계를 얼마나 쉽게 넘을 수 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사진 7>『서우』<7(서우).jpg> 프레시안 사진

요즈음 일제 유산의 청산을 외치는 사람들이 많은데, 경쟁을 최고의 덕목으로 보는 의식이야말로 메이지 시대 문명 개화 패러다임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끔찍한 유산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그 유산을 본격적으로 청산하려면, 일단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해주는 복지 국가의 기본틀이 잡혀야 되지 않을까요.

일본을 거쳐 중역(重譯)된 신문명 어휘의 상당 부분이 그 원의(原義)가 변질돼 일본적 전체주의의 색깔을 띠게 됐다는 허동현 교수님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러한 단어 중에서 지금까지도 우리의 의식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말은 바로 `국민(國民)`입니다. `nation` `national`을 한자어로 옮긴 메이지 초기의 단어인 `국민`의 문자 그대로 의미는 `나라의 백성`, 즉 `나라가 다스리는 백성`인데, 이와 같은 함의를 역어로서의 `국민`이 계속 지녀온 셈입니다.

<사진 8> 「국민교육헌장」<8(국민교육헌장).jpg> 프레시안 사진

패망 이전까지의 일제에서도, 최근까지의 남한에서도 `국민`이 형식적으로 일체의 국적 소유자를 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국가, 엘리트의 동원, 계몽의 대상인 피치자(被治者)라는 뉘앙스를 강력하게 풍겼습니다. `국민교육헌장`은 모든 피치자에게 하달(下達)되는 `계몽 국가의 진리`였으며, `국민의례`는 지고지선(至高至善)한 국가의 가치들에 대한 복종을 나타냈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우리는 권리와 자율을 강조하는 서구의 `시민`의 상(像)이 아닌, 병역과 납세, 그리고 각급의 학교를 통한 이념 주입의 대상임이 주요 특징이었던 메이지 시대의 `국민`의 상을 그대로 닮아버린 셈이었습니다.

재미있게도, 구한말에 한반도 주민들에게 "국가에 대한 의무를 우선시하는 국민이 되자"고 외쳤던 사람들 중에서는, 다들 알아볼 만한 독립운동가들도 꽤 많았습니다. 박은식(朴殷植, 1859~1925)과 같은 경우에는 잡지 `서우(西友)`의 한 논설에서 `국민`을 `필부(匹夫)`라고 하면서, 필부임에도 국가적 의무를 담당하고 국가를 위해 일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규정한 바 있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과거의 논객들 중에서도 이미 무조건 강요하는 국민 의무의 사상에 반기를 들어 합리적인 개인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이지만 - 중국 유학을 마친 뒤에 고향 동래에서 좌파적 색깔이 강한 민족 계몽 운동에 종사했던 유필균(尹弼均)이라는 무명의 논객이 『개벽』지 제11호 (1921년 5월)에 사회 규범에 대한 의무 관념의 모순이라는 도전적인 글을 기고했습니다. 그는 자유로운 개성의 권리를 다음과 같이 옹호했습니다.

<사진 9>『개벽』, 천도교단에서 발행한 국한문 혼용체의 잡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자유와 독립의 신사상을 전파하는 데 공헌했다. <9(개벽).jpg> 프레시안 사진

"긍종(肯從)할 수 없는 규범을 가져다가 긍정을 강요하는 거기에서 우리는 큰 고통을 느끼며 불평(不平)을 일으킨다. 이에 대하여 '개인은 사회의 규범에 긍종할 의무가 있다'고 한다. (…) 개성을 무시하고 무조건 긍종을 요구하는 것이 용우(庸愚 - 용렬하고 어리석음)에 심한 바라 하겠도다. (…) 개인의 의사는 마치 흐르는 물같고 규범은 시간의 의미로 고정체가 아닌가? (…) 의무를 빙거(憑據 - 빙자)하여 개인 긍종을 요구함은 마침 개성을 소멸시키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나의 원치 않는 바를 즉 나의 부인하는 바를 부득이(不得己)라하여 맹종하는 것같이 모순함이 없으며 모순으로 오는 고민같이 고통의 심함이 없다. 설사 그 조건 없는 긍종의 요구가 일시간 성공한다 할지라도 그는 언제든지 개인의 양지(良知)가 눈을 뜰 때는 새삼스럽게 대변동이 일어날 극히 불안전한 것이다. (…) 개인을 위한 사회, 또는 사회를 위한 사회가 되었으면 되었지 사회를 위한 개인이란 말은 천에 만에 부당한 소리다."

살벌한 일제 시대에도 이처럼 사회의 일률적인 맹종의 요구에 반기를 들어 개인의 신성한 권리를 외친 이들이 있었습니다. 몰개성하며 천편일률적인 국민이 아닌 각자가 서로 다른 개인을 위한 사회의 건설을 뜻했던 선각들이 계셨으니 개인의 양심대로 행동하는 권리를 위한 오늘날의 우리 투쟁도 지는 싸움으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역사를 아는 힘이란 바로 그것이 아닌가요?

유필균과 같은 예외도 있었지만, 민족의 독립을 지향했던 구한말, 일제 초기의 사회운동가라 해도 일본 메이지 시대의 상식대로 `국민의 권리`로서 `국가를 위해 복무할 권리`를 가장 우선시한 셈입니다. 정치적으로 독립을 지향했다 해도, 신문명을 메이지 일본이 중역하면서 변질시킨 서구의 기본틀 안에서 이해한 것이야말로 한국의 애국적 계몽운동의 비극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들이 일제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했지만 `경쟁`과 `국민`이라는 일본화된 서구 개념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인 듯합니다. 그 비극의 진실을 이해하여 적어도 상황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남과 치열한 경쟁을 하지 않으면서 살 권리, 개성의 다양성을 존중받을 권리를 보장해주면 좋지 않겠습니까? 역사를 공부하는 데에 의미가 있다면 과거 속의 이와 같은 교훈들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그 의미 아닙니까?

<더 읽어 볼 만한 논저>

송 민. 「국어에 대한 일본어의 간섭」. 『국어생활』14(1988).
이연숙. 「근대일본과 언어정책」. 『일본학보』22(1989).
마루야마 마사오ㆍ가토 슈이치 저, 임성모 역. 『번역과 일본의 근대』(이산,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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