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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와 유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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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윤치호와 유길준

박노자ㆍ허동현의 서신 논쟁-'우리안 100년 우리밖 100년' <2>

***지나친 친미는 좌절만 가져다 줄 뿐 - 희대의 영어천재 윤치호의 교훈**

허동현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보내주신 서한에서 언급하신 대로, 한국인에게 미국이란 나라는 대단히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허동현 교수님의 지적대로, 경제성장의 밑바탕이 된 자본과 기술을 제공한 나라이면서, 이를 근거로 한국인들의 자체 발전 능력을 늘 폄하(貶下)하는 나라가 아닙니까?

"미국"이 아직까지 한국에서 "세계의 중심"이자 "근대의 상징"으로 통하는 사실은, 온 나라를 휩쓸고 있는 "영어 배우기 열풍"에서도 알 수 있을 듯합니다. 아니, 아이의 건강에 해가 될 수도 있는 위험한 혀 수술까지 해가면서 "영어 배우기에 적합한 인간"을 만들려고 하다니요. 물론 한 인간의 "몸값"(깊이 생각해보면 섬뜩한 말이지만, 한국에서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이라 그대로 사용합니다)이 그 영어 발음의 확실성으로 평가되는 사회에서, 그렇게까지 하는 부모들의 마음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닙니다. 백 보 양보해서 수술을 하면 영어 발음이 개선된다고 칩시다. 영어 발음이 미국인을 능가할 만큼 "본토적"이 된다면 한국에서의 입신양명에는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발음이 완벽하다고 해서 과연 그 아이가 미국 사회에서도 "우리"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1백20년 전 본격적으로 영어를 배운 최초의 조선인, 윤치호(尹致昊: 1865~1945)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사진 1> 에모리 대학 유학시의 윤치호, 1891년(27세)에서 1893년(29세) 사이 <1(윤치호).jpg>
좌옹 윤치호 문화사업회

<사진 2> 초대 주한 미국공사, 루시어스 푸트(Lucius H. Foot)<2(푸트).jpg) 좌옹 윤치호 문화사업회

1883년 1월~4월간에 일본의 요코하마에 있는 네덜란드 영사관의 서기관 레온 폴데르씨에게 영어를 배운 뒤에, 4개월 동안 얻은 영어 실력으로 1883년 5월부터 서울에서 주한 미국 공사 푸트(Foote)의 통역으로 발탁된 10대 후반의 윤치호. "내이티브 스피커"도 아닌 네덜란드 사람에게 몇개월 동안 영어를 학습한 뒤, 임금 앞에서 중차대한 국사(國事)의 통역을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해낸 그는, 분명 천재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미 1883~1884년에 그가 작성한 영문 문서를 보면 요즘 웬만한 대학생의 영어 작문보다 훨씬 고급으로  보입니다. 그가 영문으로 번역한, 조선의 최초의 도미(渡美)사절로 1883년에 미국에 건너간 민영익(閔泳翊,1860~1914)의 신임장을 보면,"비준"(批准:ratification)처럼 그 당시에 조선어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근대적 한자어의 영문 번역어까지 다 보입니다.웬만한 조선 선비 같았으면,한자로 써도정확하게 무슨 소리인지 모를 그 단어들의 정확한 의미를,윤치호가 이미 영어로 파악했다는 말씀이지요.그것도 사전이란 전무한 상황에서 말씀입니다!

<사진 3> 1883년 보빙사절(報聘使節)로 미국에 파견된 전권대신 민영익·부대신 홍영식에 대한 신임장 전문과
번역문이 전재된 신문<3(신임장).jpg> 국사편찬위원회

<사진 4> 민영익<4(민영익).jpg> 국사편찬위원회

***24세부터 영어일기 - "내 생각을 표현할 어휘가 한국어에는 아직 부족하다"**

그러나 그의 천재성이 십분 발휘된 것은 1888년 11월 4일부터 시작된 도미 유학 때입니다. 그는 미국에 온 지 겨우 1년이 된 1889년 12월 7일부터 거의 완벽한 영어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영어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는,"내 생각을 표현할 만한 어휘가 한국어에서 아직도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썼는데,모국어에서 없었던 근대 문명적 단어를 외국어로 익혔던 그의 어학 능력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됩니다.그가 죽을 때까지 빠짐없이 썼던 영문 일기는 현재 한국 근대사의 귀중한 근본 자료로 꼽히지요. 믿기지 않는 이야기지만, 윤치호의 일기에 쓰여진 일부 고급 영어 어휘는, 현재의 웬만한 미국 지식인도 쉽게 이해하지 못할 만큼 수준이 높습니다.

예컨대,그가 미국에서 만난 한 일본 계통의 의사에 대해서 "dissimulation을 '지혜'로 잘못 알고 있다"(『윤치호일기』,1890년 2월 27일)라는 평을 하는데,"dissimulation"이라는 말이 본인의 나쁜 점을 숨기는 위선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미국인들이 과연 많은가요? 변변한 영한사전도 없이 난삽한 인문서적을 탐독하여 "dissimulation"과 같은 라틴 계통의 고급 어휘를 습득한 윤치호의 실력과 투혼이 실로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역시 고급 한자어의 사용에 익숙한 사대부 출신이라는 점도 이와 같은 고급 어휘의 기적적인 습득을 가능케 한 것이 아니었는가요? 그것보다도 한국의 신(新) 문명에의 접근의 차원에서 더 재미있는 것은, 그의 독서 범위가 얼마나 넓었는가 라는 겁니다.

<사진 5> 윤치호 영문 일기<5(윤치호 일기).jpg> 국사편찬위원회

미국 유학 시기의 윤치호의 일기에서 약 40종의 원서 서명이 보이는데, 그들 중에서는 이미 중국이나 일본의 지식인들이 주목했던 명저도, 아직 극동 문화권에서 알려져 있지 못한 저서도 다 포함돼 있습니다. 예컨대, 그가 탐독했던 매콜리 (Th.B.Macaulay: 1800~1859)의 『영국사』 (5권, 1849-61년간 출간)는 이미 일본 지식인들에게 서구에 대한 중요한 지식 공급의 원천이 됐습니다. 마찬가지로, 그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때 고종의 특사 민영환 (閔泳煥: 1861~1905)의 통역으로 러시아로 갔을 때 상트 페테르부르그에서 즐겨 읽었던 톨스토이 (1828~1910)의 『전쟁과 평화』는 이미 1886년에 일본어로 번역, 출간됐습니다. 그러나 그가 미국에서 애독했던 비처 스토우 (Harriet Beecher Stowe, 1811~1896) 여사의 흑인 노예의 비참한 상황에 대한 고발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1852년 출간) 같으면, 아직은 중국이나 일본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작품이었습니다. 일본 같은 경우에는, 그 소설이 1896년 - 즉, 윤치호가 미국 유학을 마친 다음 -이 돼야 『국민신문』에서 번역, 연재됐습니다.

<사진 6> 桂庭 閔泳煥(1861∼1905)<6(민영환).jpg> 국사편찬위원회

이 모든 사서(史書)나 문학 작품들에 대해서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당대 조선의 대부분의 식자에 비해서는 물론, 웬만한 중국이나 일본의 개화 지식인에 비해서도 윤치호는 분명히 한발쯤이나 앞서가고 있었던 신세계의 개척자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과의 대화의 장인 일기마저도 영어로 쓸 만큼, 미국을 완전하게 내면화하여 진짜 미국인이 되려고 노력했던 희대의 천재 윤치호는, 과연 미국의 상류 사회에서 "우리의 구성원"으로 대접받았을까요?

***"미국에서 천부인권을 누리려면 일단 백인으로 태어나야"**

그의 일기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황인종을 멸시하는 백인 불량배들에게 가끔 얻어맞기도 하고,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로 호텔 투숙을 거절당해 정거장에서 밤을 지샜는가 하면, 세례 교인이었던 그와 가장 가까워야 할 미국 선교사에게마저 늘 은근히 - 그리고 가끔은 매우 노골적으로 - "왕따"당하는 처지였습니다. 그의 『일기』에 기록된 가장 대표적인 선교사들의 인종주의적 모욕의 몇 케이스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에게 짐을 미리 배에다가 실으라고 강력하게 권고했던 휴제스(Hughes) 부인(한 선교사의 부인 - 인용자의 주)이 끝내 내가 너무 지나치게 강요를 해서 대단히 미안한데, 우리 선교사 같으면 당신네들을 보통 작은 아이로 보는 습관이 있지 않습니까. 그 습관이 나에게도 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강요를 합니다. 당신이 우리네 선교사들을 아시잖아요? 라고 이야기했다. 이 말이 내 마음을 질러버렸다. 그녀는, 우리 원주민들이 우리 일을 스스로 처리 못할 만큼 다 우둔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우리 원주민들을 그렇게 보는 그들이, 민감한 일본인들의 분노를 그토록 많이 유발하는 것이 과연 놀라운 일이 아니다. (…) 내가 선교사의 조수가 되고 싶지 않은 많은 이유 중의 하나는, 너무 많은 영적인 보스 밑에 있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휴제스 부인에 대해서 하등의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 그녀는 충실하면서 선심이 많은 선교사인데, 이처럼 우리 원주민들을 무시하는 것이, 인종주의적인 오만과 편견이 강한 미국의 출신이기 때문이다." (1897년 4월 23일)

"오늘 아침에 레르(Loehr) 목사가 중국 학생 신도들에게 교회에서 예수가 악마를 이겨서 천당을 쟁취하셨듯이 일본이 중국을 이겨 대만을 얻었다고 설교했다. (…) 중국인들에게 설교하는 자리에서 더 어리석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선교사들이 원주민들이 왜 예수에게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지 않느냐고 불평한다. 그러나 선교사 자신들이 그들의 주택의 접견실에서 원주민들을 절대 대접하지 않는 (오만한 태도)를 버리지 않으면 원주민들도 마음을 열 리가 없다." (1897년 6월 31일)

"1899년에 언더우드(Underwood)박사와 그 부인이 (내가 지방관으로 있었던) 원산으로 잠깐 들렸다. 내 사랑하는 아내가 그 부인을 방문했다. 그러나, 그들이 1주일 후에 원산을 떠날 때 우리 집을 지나가면서도 우리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들끼리 예의를 정확하게 지키는 데다 우리에게도 자신들에게 예의 지키기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그들이기에, 그러한 행실은 도저히 납득이 안 간다. 우리에게 인류 평등의 원칙이 명백하게 적혀 있는 성경을 가르치면서, 이처럼 그 원칙을 자신들이 위반하는 것이다 (…) 그들의 오만한 태도 때문에 나는 손해를 보면서도 그들과 되도록이면 사교하지 않으려고 한다." (1903년 1월 15일)

<사진 7> 언더우드(Rev. H. G. Underwood,1859~1916) 목사<7(언더우드).jpg> 프레시안

결국에는, 자기 일 처리도 못하는 작은 아이, 원주민, 예의를 지키지 않아도 될 만한 사람의 대접을 늘 받아 온 윤치호는, 인종주의야말로 미국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이 소위 자유의 땅에서 천부 인권을 누리려면 일단 먼저 백인으로 태어나야 한다"(『윤치호일기』1890년 2월 14일)는 말은,그가 미국에 대해서 일찍부터 내린 일종의 결론이었습니다. 백인 인종주의에 상처받아 만신창이가 되었을 그의 마음 상태를 생각해보면, "황인종의 맹주", "백인 침략과의 투쟁의 총사령부"임을 자칭했던 일제의 간사한 계략에 넘어가 친일로 돌아선 그의 행동을, 용서할 순 없어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지 않을까요?

물론 일제 말기에 조선인 젊은이들에게 일본군 지원을 강요하는 등의 그의 친(親)파쇼적인 행위에 대해서 역사는 엄격한 언도를 내려야 하겠지요. 그러나, 그를 소신 친일파로 만든 여러 요인 중의 하나는, 보편적인 종교적 담론의 담지자임을 자임하면서도 실제로 극악무도한 인종주의적 차별을 일삼는 미국인들의 이율배반적인 행실이 있었음을 아울러 기억해야 되지 않습니까?

100년 전 미국인이 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다 결국 비참하게 무너진 한 조선 천재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미국에서 배울 것과 취할 것이 있지만, 미국이 우리의 "자상한 어버이"가 되리라는 순진한 상상, 미국이 약자를 동등하게 대해주리라는 근거 없는 기대는 버리는 것이 낫다는 것 아닐까요?  

용미(用美)는 가능하고 바람직하지만,지나친 친미(親美)가 좌절만 가져다 줄 확률이 많지 않습니까?

안녕히 계십시오

박노자 드림  


***미국을 배웠으되 주체성을 잃지 않은 유길준**

안녕하세요. 박노자선생님

혹시 어렸을 적에 "요괴인간"이라는 만화영화를 보신 적이 있나요. 60년대말 이 만화영화는 얼마 전 어린이들의 동심을 사로잡은 "포켓몬스터"에 필적할 인기를 누렸지요. 주인공인 뱀ㆍ베라ㆍ베로는 손가락이 셋 밖에 없는 흉측한 겉모습과는 달리 악에 맞서 선을 행하며 인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지만, 늘 인간에게 배신당하였습니다. "나도 인간이 되고 싶다"고 외치던 이 요괴인간들의 내면 세계가, 혓바닥 절제수술과 미국 원정출산을 감행해 계층 상승을 꿈꾸는 부류들과 놀랄 만큼 닮았다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요?


<사진 8> 또는 8(요괴인간).jpg를 넣어 주세요!! 프레시안

어쩌면 이 만화는 서구인에게 "문명인"으로 대접받기를 갈망하였지만, 냉정하게 "왕따"당하고 만 일본인들의 심리 상태를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인들은 서구인들이 조롱한 남녀 혼욕을 금지하고 전통적으로 금기시하든 육식을 장려하는 등 서구인의 도덕과 문화에 동화되고 싶어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왜소한 일본인을 훌륭한 외모와 지성을 겸비한 서구인과 혼혈하여 개량하자고까지 하였지요.


<사진 9>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 <9(후쿠자와).jpg> 프레시안


"탈아입구(脫亞入歐)." 일본을 대표하는 지성,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조차 아시아의 나쁜 친구들과 인연을 끊고 좋은 친구인 유럽과 하나가 되자고 소리 높여 외쳤지요. "오늘을 도모하는 데 있어서 우리나라는 이웃나라의 개명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일으킬 여유가 없다. 오히려 그 대오에서 벗어나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같이하여, 저 중국ㆍ조선과 접촉하는 방법도 이웃나라이기 때문에 특별히 봐줄 것이 아니라 바로 서양인이 이들과 접촉하는 방식에 따라 처리할 것이다. 악우(惡友)와 친하게 되면 악명을 면하기 어렵다. 우리는 진심으로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를 사절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이지요.


<사진 10> 윤웅렬ㆍ윤치호 부자. 1882년 무렵 일본에서 찍은 사진 별기군 책임자였던 윤웅렬은 임오군란으로 일본에 망명해 유학중이던 아들과 함께 했다. <10(윤치호 부자).jpg> 좌옹 윤치호 문화사업회

***윤치호 "인종편견과 차별이 극심한 미국, 지독한 냄새가 나는 중국, 그리고 악마 같은 정부가 있는 조선이 아니라, 동양의 낙원이자 세계의 정원인 축복 받은 일본에서 살고 싶다"**

변화란 문화의 중심보다도 변방에서 일어나기 쉬운 법. 동양 문화의 변방이었던 일본이 서구 따라하기에 먼저 나설 수 있었듯이, 윤치호도 비슷한 처지였습니다. 부친이 서자였던 윤치호는 토인비의 표현을 빌자면 밀려드는 변화의 물결에 맞설 수 있는 주변인(marginal intelligentsia)이자 "창조적 소수자(creative minority)"였습니다.

때문에 그는 성리학을 버리고 영어를 배우고 "영혼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기독교를 받아들여 미국인 빰치는 영어 구사력과 어떤 미국 신사에 못지 않은 식견과 신앙을 갖출 수 있었지요. 하지만 피부 빛과 겉모습까지 바꿀 수는 없듯이, 그가 동등하게 대우받기를 갈망한 미국사회에 주류로 편입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과 같은 "요괴인간"들이 모여 사는 일본을 낙원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터이지요.

1893년 11월초 일기에 보이는 "인종편견과 차별이 극심한 미국, 지독한 냄새가 나는 중국, 그리고 악마 같은 정부가 있는 조선이 아니라, 동양의 낙원이자 세계의 정원인 축복 받은 일본에서 살고 싶다"는 그의 독백은, 정체성을 상실한 한 인간의 정신적 방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분별한 "영어 배우기 열풍"이 결국은 윤치호처럼 한국과 미국 어느 사회에도 속하지 못할 불우한 인간들을 양산할 뿐이라는 선생님의 지적은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설득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담지 않을 수는 없듯이, 세계 공용어 영어를 무작정 외면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영어를 배우긴 하되 영어를 통해 '고급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거라 믿는 "요괴인간 증후군"에 걸리지 않을 방법은 없을까요?

<사진 11> 1884년 경, 하버드(Harvard) 대학 진학을 위해 대학입학예비고등학교(prep school)인 담마학교(Governor Dummer Academy)에 다니던 시절의 유길준 <11(유길준).jpg> 유길준전서편찬위원회

저는 최초의 미국 유학생 유길준(兪吉濬, 1856~1914)에게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는 윤치호와 함께 1881년 조선 최초의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돼 일본 게이오 대학에 유학한 인물이자 노론 명문가 출신으로 넉넉히 급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관직에 오르는 지름길이라 할 수 있는 과거를 포기한 이른바 '선각자'였습니다. 그가 1877년에 지운 과거제도의 해악을 비판하는 「과문폐론(科文弊論)」을 보시지요.

"격물진성(格物盡性)의 학문이라고 하지만, 도대체 격물한 바와 진성한 바가 어떤 것이란 말인가. 본래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도에 몽매하니 그 용(用)이 사람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그 의식을 풍부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으로 어찌 국가의 부강을 성취하고 인민의 안태(安泰)를 이룩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과문이란 것은 도를 해치는 함정이자 인재를 해치는 그물이며, 국가를 병들게 하는 근본이자 인민들을 학대하는 기구(機具)이니, 과문이 존재하면 백해(百害)가 있을 뿐이며 없더라도 하나도 손해가 없는 것이다. 위로는 조정의 백관에서부터 밑으로는 민간의 글방 서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과문으로 부몰(浮沒)하니, 필경 취생몽사(醉生夢死)하다가 끝내 각성하여 깨닫지 못할 것이다."


<사진 12> 1883년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報聘使) 일행<12(보빙사).jpg> 유길준전서편찬위원회
앞줄 : 로웰(P. Lowell)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오례당
뒷줄 : 현흥택 일본인 통역 유길준 최경석 고영철 변수

1883년 봄 1년 반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유길준은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주사로 임명되어 『한성순보(漢城旬報)』라는 근대 신문 창간에 기여하던 중 같은 해 가을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報聘使)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의 수행원으로 미국에 건너 가 최초의 미국유학생이 되었습니다. 허나 그의 유학생활은 1884년 12월 4일 발발한 갑신정변으로 인해 오래가지 못하였으며, 결국 그는 1885년 9월 약 2년간의 유학생활을 끝내고 귀국 길에 오르고 말았지요.

미국유학 시절 그도 영어를 배우고 기독교를 깊이 연구했지만, 윤치호와 달리 전통적 가치관을 폐기하지 않았지요. 그도 양반관료의 횡포로 일반 국민들이 공평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폐단이 있음을 예리하게 비판했지만, 조국이 적절한 개혁만 단행한다면 백인종들의 문명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낙관적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국민 교육의 중요성을 토로하는 국왕 고종에게 바친 상소문 「언사소(言事疏)」(1883)의 한 대목이 심금을 울리네요.

"교육의 도(道)가 융성해지지 않으면 인민들의 지식이 넓어질 수 없고, 그렇게 되면 그 나라는 반드시 빈약하게 될 터이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대체로 지식과 기력 양자는 교육에 달려 있으며, 교육의 길은 국가의 시책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사진 13> 『서유견문(西遊見聞)』(東京: 交詢社, 1895) <13(서유견문).jpg> 유길준전서편찬위원회 사진.

갑신정변으로 인해 귀국한 유길준은 위안스카이의 박해를 피해 우포대장 한규설(韓圭卨)의 집에 유폐되었으며, 여기서 그의 대표작 『서유견문』을 1887~1889년간 집필ㆍ탈고하였다.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윤치호와는 달리 그는 서구에 대해 극단적 패배의식이나 열등감을 갖지 않았습니다. 또한 자신의 내면에 침잠해버린 윤치호와 달리 그는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쳐 자신의 식견을 동포들과 공유하는 데 힘썼습니다. 그의 대표적 저서 『서유견문(西遊見聞)』(1895)을 쓰게 된 배경에 대한 술회를 보시지요.

"이 책은 제가 긴 연금(軟禁) 생활기간에 집필한 것으로서 1894년 일본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바깥세상에 대한 견식을 넓히기 위해 이 책을 무료로 배포하였습니다."(1897년 6월 7일자 미국인 모스에게 보낸 영문서한)

<사진 14> 청국의 주차관(resident)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 프레시안

박선생님이 지적한 바와 같이, 윤치호는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미국 유학을 떠나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내면으로 침잠해버렸습니다. 그는 미국인도 잘 모르는 단어까지 알 정도인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수많은 원서를 섭렵해 신지식을 얻은 천재지만, 그가 얻은 어떠한 성취도 국민들과 함께 나누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유길준은 1885년 고국에 돌아와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의 박해를 무릅쓰고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등 자신의 영어 실력과 국제법 지식을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나아가 그는 자신이 일본과 미국 유학을 통해 얻은 지식을 동포들의 안목을 넓히는데 쓰일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세계대세론」(1883)ㆍ「경쟁론」(1883)ㆍ「세제의」(1891)ㆍ「지제의」(1891)와 같은 논설과 『노동야학독본』(1908)과『대한문전(大韓文典)』(1909)을 비롯한 수많은 저서들은 자신이 이룩한 바를 국민과 함께 나누려 한 그의 삶의 소산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랬기에 조국의 미래를 낙관하며 한 걸음씩 천천히 점진적인 개혁을 모색하는 중용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고, 국권 상실 후에도 일제에 굴종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었다고 봅니다. 정체성을 잃지 않는 그의 서구문화 수용 태도와 점진적으로 목표에 다가간 삶의 방식은 오늘의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사진 15> 『대한문전(大韓文典)』(1909)<15(대한문전).jpg> 유길준전서편찬위원회
<사진 16> 『노동야학독본』(1908) <16(노동야학독본).jpg> 유길준전서편찬위원회


개화기에 우리가 순진하다 싶을 정도로 "호의적" 미국관을 갖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요. 『독립신문』(1897년 10월 16일자)에 실린 미국 소개 기사를 보시지요.

"이 나라에서는 의리로 주장을 삼고 정치상과 권리상에 모든 일들을 천리와 인정에 합당하게 만든 풍속과 사업이 많은 고로 천복을 받아 지금 이 나라가 부하기로 세계에 제일이요, 화평한 복을 누리기로 세계에 제일이라."

미국을 공평하고 예의를 숭상하며 영토욕이 없는 정의의 나라로 보는 시각이 팽배했었지요.

***유길준 "미국은 우리의 위급함을 구해주는 우방으로 믿을 바 못 된다"**

그러나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자 지미(知美)파 인사인 유길준은 미국은 통상 상대에 불과할 뿐이며, "위급함을 구해주는 우방으로 믿을 바 못 된다"고 일갈함으로써, "약자를 돕는 정의의 나라"라는 미국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피상적 인식에 경종을 울린 바 있습니다. 그가 1885년에 저술한 「중립론(中立論)」을 보시지요.

"혹자는 말하기를 '미국은 우라나라와 우의가 두터우니 의지하여 도움을 받을 만하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미국은 멀리 대양(大洋) 건너편에 있으며 우리나라와 별로 깊은 관계가 없다. 더구나 미국이 먼로 독트린(蔓老約, the Monroe Doctrine)을 선포한 후에는 유럽이나 아시아의 일에 간섭할 수 없게 되어 있어 설사 우리나라가 위급해지더라도 그들이 말로는 도움을 줄 수 있을지언정 군대를 동원해서 구원해 줄 수 없다. 옛 말에 천 마디의 한 발의 탄환만 못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미국은 우리의 통상의 상대로서 친할 뿐이며, 우리의 위급함을 구해주는 우방으로 믿을 바 못 된다."

그의 이러한 대미 인식 및 접근 태도는 미국에 대한 극단적 평가가 교차하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고 봅니다.

해방 이후에도 미국은 한국의 든든한 후원자였지만, 기실은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려 한 것이 미국의 본심이었겠지요. 그러나 해방 후 한미관계를 살펴 볼 때, 두 나라 관계가 미국 측의 일방적인 전략적ㆍ경제적 이해타산에만 휘둘린 것으로 인식하는 것도 비주체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6.25전쟁 이후 한국은 미국이라는 중심부 자본주의 국가에 군사ㆍ정치ㆍ경제적으로 종속된 "식민지"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하면 우리는 해방 후 팩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를 구가하는 미국과의 긴밀한 유대를 쌓고 이를 이용하여 역사상 최초로 "서구중심 세계질서" 속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선생님의 지적처럼 이제 우리는 미국에 대한 종래의 고정된 이미지를 버리고, 보다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미국을 인식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앞서 "후원자와 수혜자" 혹은 "침략자와 피침략자"의 관계로 보는 극단적 입장, 즉 한미관계가 미국의 일방적인 이익만을 위해 전개된 것이라는 시각에서 탈피하는 것도 득중(得中)의 길이 아닐까 합니다.

<더 읽을 만한 책>

유영익, 「서유견문론」『한국사시민강좌』7(일조각, 1990)
유영익. 「'서유견문'과 유길준의 보수적 점진개혁론」. 『한국근현대사론』(일조각, 1992).
유영렬,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한길사, 1985)
김상태, 「일제하 윤치호의 내면세계 연구」『역사학보』165(역사학회, 2000)
김상태 편역,『윤치호일기: 1916-1943』(역사비평사, 2001).
유동준, 『유길준전』(일조각, 1987)
허동현 역. 「유길준논소선」(일조각, 1987)
Koen De Ceuster, From Modernization Collaboration, the Dilemma of Korean Cultural Nationalism: the Case of Yun Ch'i-ho(1865-1945), Leuven University 박사학위논문(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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