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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후'를 제대로 대비하려면ㆍㆍㆍ

박노자ㆍ허동현의 서신 논쟁-'우리안 100년 우리밖 100년' <1>

1백년전의 한반도와 오늘의 한반도를 비교하면서 한민족의 나아갈 길을 모색해 보는 두 지식인의 지상 논쟁을 오늘부터 주 1회 연재한다. 진보적 입장을 대변하는 박노자 교수는 러시아 출신 한국인으로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건강한 보수를 자처하는 허동현 교수는 경희대 사학과 교수로 있다.

이 논쟁 시리즈는 지난 1월초부터 중앙일보에 게재되고 있는 두 분의 원고(각 10매)를 보다 긴 글(각 25매)로 확대ㆍ보완한 것이다. 편집자


허동현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개화기 풍경에 대한 연재를 시작하면서, 그 시절이 지금의 우리에게 왜 중요한지 다시 한번 자문하게 됩니다.

<사진 1>

사실 저는 "왜 1백년 전 잡지나 신문을 지금에 와서 보고 이야기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때의 신문이나 잡지를 펼쳐보면 한 세기 이전이 아닌 '지금 여기'의 문제들에 대해 읽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역사는 물론 그대로 반복되지 않습니다만, 새로운 차원에서 전개해 나갈 때 이 전의 발전의 패턴들이 구조적으로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1백년 전에, 약해져 가면서 남아프리카 등지에서 제국주의적 약탈 전쟁을 일으키는 영국을 중심으로 했던 그 당시의 세계 체제 속에서, 농경 사회에서 공업 사회로 가고 있었던 우리 나라가 세계 체제에의 자주적 편입의 시도를 했지만, 결국 실패해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 패권 국가 영국의 주니어 파트너이었던 일본에 먹히고 말았습니다.

<사진 2>

지금 같으면, 약해져 가면서 지구 곳곳에서 약탈적 전쟁을 일으키는 나라는 다름이 아닌 세계 패권 국가 미국입니다. 미국 중심의 세계적 공업 사회에서 이미 중진의 위치에 오른 우리 나라는, 이제는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는, 1백년 전의 극동에서의 중국의 헤게모니가 약해져 갔듯이 지금 약해지는 미국 헤게모니라는 새 상황에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이미 1백년 전에 기존의 패권 국가(중국)와 신흥 세력 (일본)의 각축장이 돼본 국토가 다시 한번 기존의 패권 세력(미국)과 신흥 도전자(중국)의 싸움터가 되지 않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의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100년 전에 중국 패권의 이후의 신세계에 제대로 준비 못해 실패한 경험을 거울 삼아 미리부터 미국 패권 이후의 세계에 대응하는 방식을 준비해야 할 셈입니다.

두 번째 과제는, 1백년 전의 농업 사회처럼 점차 종말을 향해서 달려가는 물량 중심의 공업 경제에서 미래형 지식 중심의 경제로의 이행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1백년 전에 우리가 일본에 쌀과 콩을 대량으로 수출했듯이 지금 전세계에 반도체와 자동차 등의 공업 제품을 수출하지만, 미래의 경제는 부가가치는 훨씬 더 높은 지식, 문화 상품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셈입니다. 1백년 전에 공장을 세우는 것이 급선무이었듯이, 지금은 외국 학생이 몰려 올 만한 대학교를 만들고 세계인들이 다 즐길 수 있는 영화나 음악 등을 창작하는 것이 급한 일이 아닙니까? 공업 이후, 미국 이후를 준비해야 하는 우리는, 1백년 전의 선조 못지 않게 기로에 서 있습니다. 그러고 흥미롭게도 선조들이 고민했던 바로 그 문제들에 대해서 새삼스레 고민하게 됩니다.

예컨대 여러 개화기 인물 중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1859~1925)의 글을 봅시다. 1907년 백암 선생이 당시 진보적인 언론으로 취급받던 평안도의 잡지 '서우(西友)'(1906년 12월 창간, 1908년 1월 폐간)에 한국이 앓고 있는 여러 병(病)에 관한 글을 기고하셨습니다. 그분이 가장 큰 병으로 지목하신 건 다름 아닌 벼슬 청탁의 만연, 즉 공적(公的) 통치체제가 공평하게 업적 위주로 운영되지 못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사진 3>

백암 선생뿐이었습니까? 위정척사 운동의 거두 최익현(崔益鉉.1833~1906)과 동도서기론적 개혁 유림이었던 이기(李沂.1848~1909)는, 이념적 입장은 근본적으로 달랐지만 "세도가들이 환로(宦路)를 독점하는 이상 나라가 잘 되지 못할 것이다"라는 점에서는 의견일치를 보았습니다.

또한 그들과 달리 유교 자체를 폐기 처분하려고 했던 기독교도 윤치호(尹致昊.1865~1945)도, 관계(官界)가 특정 가문과 특정인들의 전유물이 된 이상 어떤 개혁도 주효하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즉 다양한 이념이 각축을 벌이던 개화기에 이념적 공통점이 없었던 인물들의 대다수가 공적(公的) 영역의 확립을 조선사회가 해결해야 할 급선무로 본 겁니다.

그것이 과연 그 당시에 조선만의 문제이었습니까? 구한말의 개혁가들에게 가장 존경을 받았던 외국 논객인 청나라 사람 양계초 (梁啓超: 1873-1929)도, 공덕(公德)이 확립돼 있지 못해 사덕(私德)으로 돌아갔던 당대의 중국 사회를 개탄했습니다. 1900년대의 개화 학교의 한문 교과서이었던 양계초의 명저 <신민설> (新民說: 1902년 출판)에서 제5절은 바로 공덕을 논하는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유교의 윤리가 일체 사회 관계를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신, 친구 등의 사적인 관계로 압축시켰던 겁니다. 물론 임금과 부모의 은혜를 알고 윗사람에 대해서 보은지심을 갖고 아랫사람을 자비스럽게 봐주는 인의염치의 인간이 한 사인 (私人)으로서 훌륭한 인간이겠지만, 그가 국가와 국민을 모르고 오로지 임금 섬기는 줄만 알고 지인을 챙겨줄 줄만 안다는 것은 양계초 논리의 중심이었습니다. 사적 관계 중심의 전통 농경 사회의 윤리가 보편적인 국가 차원의 법치 논리로 바뀌지 않는 한, 서구의 물질 문화의 수입이 재앙만 낳을 것이라고 양계초가 내다봤습니다. 물질적으로 부강해졌음에도 사적인 관계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르는 사람에게 야수처럼 대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양계초의 유교 비판이 100% 타당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중국이나 한국의 실학 전통 같으면 임금이 아닌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봤으며, 황종희 (黃宗羲: 1610-1695)와 같은 유교의 선각들이 이미 법치 사상을 개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양계초가 생각했던 유교의 대체물이 바로 국가를 부모보다 더 은혜로운 존재로 보는 극단적인 국가주의이었는데, 그것이 100년 전의 한국 지성인에게 대단한 공감을 얻었지만 국가주의의 폐단을 이미 두루 다 경험해본 우리들이 이와 같은 논리를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정할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전근대적 극동 사회에서 공적인 영역을 사적인 인륜 관계의 하위 가치이자 연장으로 봤기 때문에, 자기 사람 챙겨주기 정도는 만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진 4>

그러기에 같은 유교적 맥락에서 제기되는 인재 등용론이 부단히 거론됐음에도 실천으로 잘 옮겨지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상업사회로 전환됐음에도, 양계초나 박은식, 이기, 윤치호 등의 개화기의 개척자들이 개탄했던 관계 위주주의 - 즉, 진정한 공적 영역의 미발달 -가 계속 문제로 남아 있다는 겁니다. 물론 온나라를 실질적으로 독재자와 그 집단의 소유로 만들어버린 퇴행적인 군부 독재가 한국에서 공업 사회로의 이행을 주관했다는 비극적인 역사야말로 이와 같은 현상의 주된 이유일 겁니다. 어쨌든, 관계주의가 요즘처럼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한다면 지식 위주의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인연을 통해서 시원치 않은 교수들을 뽑아 놓은 대학에 우수한 외국 학생들이 과연 몰려오겠습니까? 대출을 받는 데에 있어서 은행 지점장과의 개인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아이디어 사업들이 발전되기가 쉽겠습니까? 공무원 사회의 승진 청탁의 폐풍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있다면 "1백년 전 약채(藥債:약값)라 부르던 것을 지금은 '떡값'이라 부르는 것"이 유일한 차이점이라는 웃지 못할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습니까.

인연들을 무조건 일차적으로 챙겨주어야 한다는 우리의 통념이 보다 공익 위주의 방향으로 교정되지 않는한 우리의 발목이 그대로 묶여져 있을 겁니다. 공적 영역의 확립이야말로 시민사회의 기초인데, 1백년 전에 비해 시민사회가 훨씬 성숙해진 오늘날에도 그 기초작업은 아직 미완의 상태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개화기 인물들이 사회에 당부했던 말씀들이 지금도 유효한 셈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국내 문제도 그렇지만 국제 문제에 있어서도 당시의 모색과 자각들이 지금의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를 주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유길준(兪吉濬.1856~1914)은 1880년대 초부터 인접 강국들의 각축장이 돼 가는 한반도를 '중립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형태는 그때와 많이 다르지만 지금 동아시아에서 형성되고 있는 긴장감은 1백년 전에 비해 결코 덜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국력과 야심이 점점 커져 가는 신흥 도전자 중국에 대해 기존의 패권 국가인 미국이 은근히 '포위 전략'을 쓰는 듯하기도 하고, 잘못하다가는 한반도가 중ㆍ미 갈등의 무대가 될 소지도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과연 미국의 군사 기지들이 중국과 인접한 중앙아시아 국가 - 즉, 우즈베키스탄이나, 키르기즈스탄 등지 -에서 들어선 것이 우연의 일치만으로 볼 수 있습니까?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이야 아프간의 탈레반을 궤멸하기 위해서 중앙아시아에서의 기지들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인데, 탈레반 대신에 친미 괴뢰 정부가 아프간의 수도에 입성한 지 이미 1년 이상 돼도 중앙아시아에서의 미군 기지들이 철수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미국이 이라크 침략을 준비하고 있지만 만약 그 침략이 성공돼 이라크를 재식민화하거나 공고한 친미 정권 체제를 만든다면, 중국이 의존하는 중동 석유 공급의 열쇠를 바로 미국이 쥐게 됩니다. 유럽의 분석가 이야기로는, 미국의 이라크 침략의 수많은 동기 중의 하나는 바로 이와 같은 중국 길들이기랍니다. 북한의 핵 개발을 자극하게 하는 최근 미국의 북한 따돌리기 정책도 결과적으로 중국의 동맹국 북한을 고립화시킴으로써 중국의 영향력 증가를 견제하는 포석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금의 한.미 안보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정말 한국의 국익에 부합할까요? 만약 미국 극우들이 정말 한반도를 포함한 극동의 전역에서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 있다면 남한에서의 3만7천 미군의 주둔이 남한을 주요 전장으로 만드는 데에 틀림 없습니다. 그것이 과연 우리가 좌시할 수 있는 사항입니까?

<사진 5>

유길준 시절과 다른 점은, 그 때 잠재적 전쟁 도발자는 기존의 패권 국가인 중국이 아닌, 신흥 세력 일본이나 러시아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를 우려했던 유길준이, 한반도를 중립화시켜 주변의 여러 열강의 이권을 보장하면서 그들의 노골적인 무력 충돌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그는 중국과의 전통적 조공 관계를 지속하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되 한반도에서의 중국군 주둔을 반대했습니다. 여러 열강의 이해가 겹치는 한반도에서 한 열강의 군 주둔이 다른 열강들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유길준 시절과 달리, 지금 신흥 세력(중국)이 아닌 기존의 패권 세력(미국)이 극동에서의 전쟁 도발자로 나설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유길준의 시절과 같은 점은, 잠재적 갈등의 한 당사자가 한반도에서 군을 주둔시키는 것이 한반도의 안정을 위협하고 차후 한반도를 전장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혹 한반도의 '중립화'와 외국군의 주둔 불가론을 주장했던 1백년 전의 제안을 다시 한번 긍정적으로 검토해볼 여지는 없을까요?

한 마디로 구한말 국내외 상황과 그때 지성인들의 생각이 꼭 지금의 우리에게 무언가 시사해 주고 조언해 주는 것 같기만 합니다. 역사를 논하면서, 우리는 그 동시에 오늘의 문제들도 하나 하나씩 풀어나가는 셈이 됩니다.


반갑습니다. 박노자 선생님.

선생님 말씀대로 한 세기 전 신문과 잡지, 위인들의 저작을 뒤적이다 보면, 제 자신도 "그 때 거기"와 "지금 여기"의 상황이 1백여 년이라는 시차를 느끼지 못할 만큼 유사하다는 데 동감합니다. 그리고 저 또한 선조의 "선견지명"이 한국사회 내부의 고질적 병폐나 국제정세의 변동이 초래할지도 모를 재앙에서 우리를 구할 수 있는 한 세기를 넘기고도 유효기간이 남은 특효약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 6>

지금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국제정세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높은 파고가 휘몰아치던 1백여 년 전의 상황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 아니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약육강식의 세계사가 우리 눈앞에 다시 한 번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한 세기 전 그들과 냉전 붕괴 이후 오늘의 우리가 처한 상황은 매우 흡사한 것 같군요. 그 때 그들이 근대의 길목에서 한국이 나아갈 방향을 놓고 부심(腐心)했듯이, 오늘의 우리도 전환기의 혼돈 속에서 미래를 모색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1884년부터 1905년까지 22년간 이 땅에서 격동의 시간을 보낸 미국공사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은 일본이 서구 근대의 성과를 배우고 익혀 일취월장할 때 어찌하여 당신들은 잠만 자고 있었냐고 힐문(詰問)하였습니다. "불쌍한 조선사람들이여! 그대들은 너무도 오랫동안 무사 안일의 세월을 보냈다. 아마도 조선의 땅이 남의 나라에 의해 망한 것이 아니라 지진과 화산에 의해 폐허가 되었더라면 조선은 벌써 곤한 잠 속에서 깨어났을지도 모른다"라고요.

물론 1백여 년 전 우리 선조가 수수방관하면서 세월을 보내지도 않았거니와 자주적 근대국가를 수립할 능력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컨대 1881년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소위 紳士遊覽團)으로 일본의 발전상을 보고 돌아 온 어윤중(魚允中, 1848~1896)의 포부를 들어봅시다. 일본 시찰 중 떠오른 개혁의 구상들을 적어 놓은 『수문록(隨聞錄)』에서 그 편린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진 7>

"일본인은 일의 이익과 손해를 따지지 않고 단연히 감행함으로 잃는 바가 있더라도 국가의 체제를 세울 수 있었으니 우리도 본받아야 한다." "사람들의 진취성을 북돋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과거제도가 폐지되어야 하는데, 과거를 혁파하면 공명진취를 도모하는 무리들이 모두 앞다투어 외국에 나가 재주와 기예를 습득하여 돌아올 것이다." "영국ㆍ프랑스ㆍ독일ㆍ러시아 이외에 벨기에와 스위스 같은 나라들로부터도 그들의 뛰어난 점을 받아들여 힘을 다해 미리 주도하게 준비하여 부강을 이루어나가야 한다."

그러나 1백여 년 전 우리는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전에 희생양이 되어 근대 국민국가와 시민사회를 수립하지 못했으며, 일제 패망 이후에도 미ㆍ소 양 강대국의 냉전논리에 의해 분단국가로 전락하고만 참담한 실패의 역사를 맛보았습니다. 모든 실패에는 원인이 있게 마련이며, 그 책임은 일차적으로 당사자에게 있는 것이지요. 거짓의 역사를 쓰는 나라는 망국의 길을 자초하는 것이나 진배없듯이, 한 세기 전 우리의 참담한 실패에서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저 역시 한 세기 전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실패의 원인을 우리 내부에서 찾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개화기 공적 영역의 문제에 대해서는, 당시 한국의 현실을 목도한 외국인들조차 한 목소리로 지적한 바 있습니다. 1894년부터 네 차례나 한국을 샅샅이 둘러본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ː1832~1904)여사는 그 체험기인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1897)의 이곳 저곳에서 어디에서도 사회 정의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통박하였습니다.

하지만 비숍 여사는 한국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한국인들은 대단히 명민하고 똑똑한 민족이다. (…) 근사한 기후, 풍부하지만 혹독하지는 않은 강우량, 기름진 농토, 내란과 도적질이 일어나기 힘든 훌륭한 교육, 한국인은 길이 행복하고 번영할 민족임에 틀림이 없다"고 말이지요. 이처럼 애정 어린 눈으로 한국의 미래를 밝게 내다본 비숍 여사는 한국인들이 "정직한 정부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면 천천히 진정한 의미의 '시민'으로 거듭 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정직한 정부와 적절한 제도만 갖추어진다면 한국인들이 숨은 잠재력을 발현할 것이라고 예견한 비숍 여사의 혜안은 다시금 재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 8>

한 세기 전 우리 선조들이 목말라했던 사회 전반의 투명성 확보가 아직도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긴 하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이라 일컬을 만큼 발전한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카터 에커트(Carter Eckert)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와 같은 몇몇 외국학자들은 한국의 성공을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미국의 원조 덕분에 이룬 종속적 발전이라고 깎아 내리기도 합니다. 즉 한국의 산업화는 식민지 시대 일본에 의해 이루어진 산업화의 물적ㆍ인적 토대를 바탕으로 해방 후 미국 시민들의 세금으로 조성된 거대한 원조에 의해 종속적으로 이루어진 예기치 못한 성공이라는 것이 그 핵심이지요. 저는 한국의 근ㆍ현대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각이 수정주의, 세계체제론,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목적론적 구조주의 이론에 주박(呪縛)된 편향된 시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인들이 "바쁘다 바빠"와 "빨리 빨리"를 외치며 이루려 한 것이 비단 물질적 풍요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즘 더욱 활발해진 시민운동을 볼 때, 한국인들은 물질적인 면뿐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압축 성장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간 국가와 민족이라는 큰 가치에 눌려 있던 작은 가치--개인이 누려야만 할 양심의 자유와 인권 같은--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생각을 달리하는 계층과 집단들이 서로를 관용하는 다원화된 사회가 곧 실현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인터넷을 통한 '선거혁명'이 가능해질 만큼 산업화와 정보화에 앞선 우리이지만, 전세계 마지막 분단국가라는 이념적 장벽과 이에 대한 역사적 기억을 달리하는 세대간 장벽에 대한 대응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요즘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는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를 보면, 저 또한 1백년 전의 악몽이 재현되어 한반도가 미국과 중국 두 나라의 세력 각축장이 될 수 있으며, 그 최선의 해결책이 중립화일 수 있다는 선생님의 지적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유길준이 "우리나라가 의뢰하여 나라를 보전하는 것은 중국이 돌보아주는 데 달려 있다"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진짜 속내가 자국의 군사력에 의해 유지되는 중립이 아니라 중국에 기댄 중립이었다는 사실과 이 글이 쓰여지자마자 서재에 사장되어버렸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의 속내를 한 번 들여다볼까요.

"우리 나라는 통상을 시작한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우(無憂)하다 할 수 없으며, 또한 무난(無亂)하다고도 할 수 없다. 오직 중립 한 가지만이 진실로 우리 나라를 지키는 방책이지만 이를 우리가 먼저 제창할 수 없으니, 중국이 이를 맡아서 처리해 주도록 청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만일 중국이 혹 일을 핑계삼아 즉시 들어주지 않으면, 오늘 청하고 내일 또 청해서, 중국이 조약의 주창자가 되어 영국ㆍ프랑스ㆍ일본ㆍ러시아 등 아시아 지역과 관계가 있는 여러 나라들이 회동(會同)하는 자리에 우리 나라가 참여하여 공동으로 그 조약문을 작성하도록 요청해야 한다. (…) 중국은 군대를 쓰지 않고도 동쪽에 대한 우려를 영원히 끊을 수 있고, 우리 나라는 믿음직한 장성(長城)을 얻은 것과 같아 앉아서 만세(萬世)의 이득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 모든 방략은 중국에 달려 있을 뿐이고 우리나라가 친신(親信)할 바도 중국만한 나라가 없으니, 우리 정부가 간절하게 청하기를 바랄 뿐이다."

<사진 9>

이처럼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던 유길준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중국이라는 외세를 무시할 수 없었듯이, 오늘의 한국인들이 스스로 이룩한 물질적 성공의 이면에 버티고 있는 미국이라는 존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때문에 1백년 전과 마찬가지로 '힘이 곧 정의'인 국제정치질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모색하는 과정에서 돌다리도 두들겨보는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역사에서 교훈을 찾지 못하는 국가나 민족은 도태되기 마련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망각할 때 우리는 또 다른 참담한 실패를 반복할 수도 있으니 말이지요. 이 같은 실패의 역사에서 하나의 교훈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역사의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겠지요.

한 세기 전 실패의 역사의 책임이 당시의 지배계급이었던 왕실과 양반계급에게 있다면, 시민사회를 운위하는 지금 역사의 시간을 지체시킴으로써 또다시 1백년 전의 실패를 반복한다면 이는 시민임을 자각하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 할 수 있겠지요.

다시 한 세기가 흐른 뒤 우리 후손들이 지금의 우리를 시대적 요청에 잘 부응해 나간 자랑스런 선조로 기억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우리는 주어진 역사의 시간에 충실하고 시대적 과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고밀도의 삶을 살아야 하겠지요. 저는 우리에게 부여된 소명을 다할 때 다시는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의 시간을 허송했다는 비판을 듣지 않을 것이고, 한 세기 전의 참담한 실패를 반복하는 어리석음도 범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저는 박노자 선생님과 함께 한 세기 전 우리의 실패의 역사 속에서 미래를 위한 교훈을 찾아 이삭줍는 마음으로 한국 근ㆍ현대사의 여러 문제들을 때론 같은 시각에서 때론 서로 다른 잣대로, 마치 옷감을 짜듯 베틀의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 보려 합니다.

머리를 맞대고 역사 속 교훈 찾기에 나선 선생님과 저의 작업이, 우리에게 닥친 현안이 재앙이 되지 않도록 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만 줄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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