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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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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40>

음양 오행으로 본 삼국지-유비ㆍ제갈량 편

유비는 기원후 161년 辛丑년생이다. 유비의 인생 역정을 찬찬히 살펴보니, 유비가 불이었다는 것은 분명한데, 다만 丙火냐 丁火냐를 판단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사마천의 사기와 진수의 삼국지, 심지어는 세설신어까지 무려 한나절을 꼬박 뒤진 결과 유비가 丙火였음을 말해주는 단서가 16개, 정화였음을 말해주는 단서가 14개였다. 그래서 일단 유비를 丙火로 추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癸水였음이 분명했다.

유비에게는 그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었던 것 같다. 조조처럼 카리스마나 전광석화와 같은 기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손권처럼 형을 잘 두는 바람에 출세한 것도 아닌데, 그에게는 뭔가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유비와 그 부하들의 관계는 일반적인 군신 관계를 넘어서는 끈끈한 의리나 애정 같은 것이 있다. 일단 유비와 연을 맺은 사람들은 온갖 고난을 함께 할지언정 유비를 떠나는 법이 없었다. 이는 아마도 유비의 타고난 성격에 어린 시절 일찍 부친을 여의면서 형성된 삶의 지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유비는 분명 뛰어난 전략가도 전술가도 아니었다. 그는 50이 가까운 나이에도- 그 당시에 50이 가깝다는 것은 다 살았다는 얘기나 진배없는데- 변변한 기반 하나 없이 형주의 유표에게 의탁하고 있을 정도로 무능해 보이기도 하지만, 반면 그 많은 영웅호걸들이 차례로 퇴장해 갔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마침내 3강 안에 들었으니 실로 대단하다 아니 할 수 없다.

글을 읽다 보면 알게 되겠지만 유비는 木運에 도움을 얻고 火運에 세력이 커지며 土運에 용맹을 떨치고, 金運에 힘들어지고 水運에 아주 어렵다. 이는 유비의 타고난 運氣가 다소 약한 편에 속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를 명리학적 용어로 신약(身弱)이라 한다. 몸이 약하다는 뜻이 아니니 오해하시지 말기 바란다. 신약형의 사주는 일간이 불인 유비로서는 金運과 水運에 어려워진다. 동시에 이런 타입의 사주는 어진 면을 특징으로 한다.

유비는 15세되던 乙卯년, 乙木이 丙火를 생하는 해라 공부운이 들어오니 친척의 도움으로 노식을 찾아가 공부한 것이 훗날 입신의 발판이 되었다. 여기서 그는 많은 귀족 자제들과 연을 맺을 수 있었고 특히 공손찬과 연결될 수 있었다. 그러다가 황건의 난이 났을 때, 작은 공을 세워 벼슬길로 나섰지만, 매번 중도에 그만 두는 불운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러다가 191년 辛未년에 공손찬의 추천으로 평원국-나라가 아니라 작은 지방 자치 단체로 이해하면 된다-의 재상이라는 미미한 자리에 앉았지만, 그런 유비에게 제법 행운이 찾아든 것은 194년, 甲戌년의 일이었다.

처음에 서주의 군벌 도겸이 조조의 위협을 느끼자 백성들로부터 신망이 높은 유비를 막료로 불러 예주 자사의 타이틀을 주고, 나중에 자신의 병세가 악화되자 미축의 조언으로 그해 겨울, 즉 갑술년 병자월에 유비는 서주를 인계받게 된다. 갑목이 병화를 생하는 달에 복이 굴러 들어온 것이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다음해 195년 乙亥년에 유비는 조조에게 쫓겨온 여포의 귀순을 받아들인 것이 불씨가 되어 결국은 여포에게 안방을 내주는 비참한 처지로 전락한다. 이런 점을 보면 유비가 어질기는 하나 분명 전략가의 자질에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유비의 무서운 인내를 볼 수 있다. 유비는 끓는 속을 꾹 누르고 잠시 참으면서 조조에게 다리를 놓아 O.K 사인을 받은 뒤, 조조에게 귀순하는 변신을 보여준다. 웬만한 사람이었다면 이쯤에서 목숨을 재촉했을 터인데, 유비는 위기를 기막히게 넘긴 것이다. 이후 조조는 유비를 좌장군으로 삼고 다시 예주목의 타이틀을 준다.

조조는 다가올 원소와의 한판 승부를 위해 남쪽의 걱정거리를 유비를 통해 막아보고자 한 것이다. 조조는 辛金이고 유비는 丙火라 合이 되는 사이여서, 두 사람간에는 상당한 끌림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합은 남녀간에 들 경우 그것을 궁합이라 할 정도로 서로간에 강한 이끌림이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유비는 어느새 조조를 배신하고 원소와 내통하니, 199년 己卯년에 가서 핑계를 대고 하비로 내뺀 다음, 병세를 수만으로 키우고 조조와 대적하다가, 결국 庚辰년에 가서 조조에게 기습공격을 당하고 원소에게 귀부한다.

이 과정에서 포로가 된 관우는 조조가 융숭한 대접을 해 주자, 관도의 싸움에서 안량을 베어버리는 공으로 보답하고 원소에게 피신해 있는 유비를 찾아간다. 이 대목은 조조가 인재를 아낄 줄 아는 영웅이라는 사실, 그리고 부귀보다 의리를 중히 여기는 호걸로서의 관우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런 재미 때문에 삼국지연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잘 팔리고 있다.

戊寅, 己卯의 해란 결국 戊土와 己土가 유비에게는 발전을 의미하긴 하나, 지지의 寅木과 卯木에게 극을 받고 있어 유비는 일이 잘 될 듯 하다가 안되는 운세였다.

유비는 원소로부터 다시 병력을 약간이나마 지원 받았지만, 원소의 용렬함을 실망하게 된다. 이에 핑계를 대어 빠져나와 辛巳년에 가서 유표에게 신세를 의탁한다. 이 무렵 유비는 부평초 신세였지만, 결국 운기가 약한 유비에게 남방은 불의 방향으로서 기연을 얻는 단초가 되었다.

형주 북방 신야성에서 집 지키는 번견 노릇을 하던 유비에게 새로운 계기가 찾아온 것은 206년 丙戌년의 일이었다. 불의 해라, 이 해 유비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게 되고 그중 사마휘와 서서는 유비에게 용과 봉을 얻으라는 언질을 준다.

급기야 207년 丁亥년에 가서는 고기가 물을 만나듯 삼국지 최고의 캐릭터인 제갈량과 조우하게 된다. 그럼, 이쯤에서 제갈량의 사주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제갈량의 행적을 살피면 그가 癸水였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제갈량이 참모, 유비가 주군이지만 사실 음양 오행으로 보면 제갈량이 유비의 정신적 주인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유비는 제갈량을 삼고초려로 모셔오고 이후에도 제갈량의 말을 잘 듣게 된다. 유비와 제갈량의 만남을 융중대(隆中對)라 하는데 융중은 제갈량이 은거하던 지명이다. 지금 현 시점에도 풍운의 기회를 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정객, 상객들이 융중 땅을 찾아 나서고 있을까!

그후 戊子년에 이르러 유비는 처음에 조조의 철갑 기병에게 혼줄이 났지만, 마침내 제갈량의 외교에 힘입어 손권과의 전략적 제휴를 달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조의 거칠 것 없는 세력 확장에 일침을 가하게 되니 이른바 적벽 대전이다. 이후 유비는 형주땅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실속이라는 실속은 다 차린다.

걸핏하면 사업계획서 수정하랴, 재작성하랴 정신없던 유비가 드디어 든든한 근거지를 하나 마련한 것이었다. 이처럼 무자, 기축의 토운은 유비로서는 발전의 해가 되었다.

조조가 재물 방향인 동쪽에서 청주병을 얻어 군세를 키웠지만, 불에 속하는 유비는 다소 운기가 약한 관계로 남쪽에서 형주병을 얻어 드디어 신흥 재벌로 부상하게 된다. 형주병은 유비가 서촉으로 들어갈 때 반을 데리고 갔으며 나머지는 관우가 형주에서 관리했다. 후에 위와 오의 공동작전에 말려 관우가 죽을 때 대부분 상실하게 되니 그 이후 유비는 전력상의 손실을 만회할 수 없었고 제갈량 역시 이 문제로 두고두고 부심한다.

아무튼 유비는 그러다가 211년 辛卯년, 신금이 서쪽을 뜻하니 서방에서 대망의 기회를 잡게 된다. 제갈량이 말한 대로 서촉은 유일하게 남은 땅인데 서촉의 유장이 어서 오라고 길을 열어준 것이었다. 얼씨구 좋다 하고 군대를 몰고 서촉으로 들어간 유비는 기회를 엿보다가 계기를 잡았지만 역시 金運은 유비에게 그리 좋은 운이 아니었다. 고전을 거듭하다가 214년 갑오년, 나무 기운이 들어오는 해에 제갈량의 원병이 도착하자 비로소 성도를 탈취할 수 있었다.

유비는 그 후, 어진 정치로 촉의 민심을 어루만지다가 행운의 해인 218년 戊戌년에 가서 조조와 한중 땅을 놓고 혈전을 벌이게 되며 이듬해 己亥년에 조조의 군대를 대파하고 한중을 차지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 해 겨울 관우가 형주를 잃고 사망하는 불운을 맞이한다.

바로 이 시점, 유비가 한중을 얻고 관우가 번성을 공략하던 그 때가 유비로서는 절정이었다. 정해년, 제갈량을 만나서부터 다시 12년의 한 순환주기가 마무리되는 시점이었다.

그 이후 유비는 황제의 위에 올랐지만, 망조가 들었는지 막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략적 동맹 관계였던 東吳를 정벌하고자 나선 것이 辛丑년이었다. 이처럼 역시 금운은 유비에게 좋은 해가 아니다. 동오로서는 서쪽에서 위기가 발생한 해였지만, 다음 해 壬寅년 물의 운이 들어오니 유비에게는 殺運이고 동오로서는 귀인을 만나는 해라 육손이라는 청년이 병권을 잡고 유비를 대파하기에 이른다.

유비는 이에 백제성에 칩거하고 병을 얻어 다음 해 癸卯년 丁巳월 계사일에 세상을 떠나니 한 영웅의 일대기였다.

유비의 일생을 단락지어보면 194년 乙亥년부터 두각을 나타내고, 간난신고를 거치면서 백성의 인심은 얻었으나 결국 별무소득. 충운이 들어오는 辛巳년에 형주의 유표에게 의탁한 것이 행운의 단초가 된다. 마침내 형주 사람들의 인심을 얻으면서 급기야는 신사와 충인 207년 丁亥년에 가서 융중 땅에 길게 엎드려있던 젊은 용을 얻으니 12년 한 순환 주기로서 유비의 입신 1단계였다.

207년 丁亥년, 제갈량이라는 용의 머리에 올라탄 유비는 일약 조화를 부리면서, 형주를 차지하고, 6년 뒤 癸巳년에는 유장과 서촉을 놓고 힘든 싸움을 벌이다가, 겨우 갑오년에 서촉을 차지한다. 그런 유비는 219년 己亥에 가서 급기야 한중 땅마저 차지하니 유비의 운세는 이 때가 절정이었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또한 12년으로서 유비의 입신 2단계이며, 유비의 운은 사실상 여기서 끝난다.

그 뒤 유비가 221년 신축년 계사월 병오일에 황제의 위에 오른 것은 유비 인생에 있어 후식 내지는 입가심에 불과한 사건이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제갈량의 이야기로 이어가자. 앞서 일간이 癸水라고 말한 제갈량은 181년 辛酉생이다. 이는 그가 대단히 비상한 아이디어와 방략을 지닌 인물임을 말해준다. 공명은 207년 丁亥년에 유비를 만난 후 유비에게 천하계(天下計)를 전하고, 이어서 동오의 손권을 설득하는 데 대공을 세운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열화당에서 나온 중국예술사 회화편(김기주 역)을 보면 그가 그림에 능했다는 이야기가 진수의 삼국지와 선화화보, 화양국지 등에 전하고 있다고 한다. 그림에 능했다는 사실은 그가 계수였음을 더욱 확인해주고 있다.

제갈량의 개인적 이야기는 유비나 조조에 비해 그다지 자세하지는 않다. 사실상 그의 일생은 유비와 조우하면서부터 역사의 공식 무대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유비가 살아있을 때 그는 참모로서, 눈에 띄는 행동을 많이 보여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나무가 들어오는 해에는 언제나 크게 움직였다.

유비가 서촉에서 고전을 거듭하자 214 년 甲午에 장비와 조운을 대동하고 서촉으로 들어가 유장의 항복을 이끌어내었고, 유비 사후 남쪽의 맹획이 반란을 일으키자 225년 乙巳에 맹획을 평정한다. 이른바 7종7금의 전설이다. 그리고 227년 丁未의 해, 불이 들어오는 해에 군대를 한중으로 전진 배치하고 저 유명한 출사표를 쓴다.

그러나 다음 해 戊申의 해가 되니 제갈량에게는 힘겨운 토운이었고, 다시 여름, 火土가 강한 계절에 마속의 선봉군이 장합에게 일패도지하자 눈물을 머금고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그 해 12월 甲子월에 다시 군대를 끌고 진창(陳倉)을 포위공격했으나 상대의 철저한 수비로 결국 철군하게 된다.

다시 제갈량은 231년 辛亥의 해에 기산으로 군사를 진출시켰으나 군량 부족으로 회군중인 6월 乙未월에 추격해오는 장합을 전사시키고 기세를 올렸다. 그 후 233년 癸丑에 가서 군대를 조련하고 양곡을 목우와 유마라는 산악용 수레를 통해 사곡 입구에 집결시켰다.

많은 준비를 한 이번 전역은 그러나 제갈량의 마지막 기도가 되었다. 다음 해 234년, 甲寅년 제갈량은 군대를 위수의 남안인 오장원에서 사마의와 대치중 그 해 8월 壬申월에 53세를 일기로 병사한다. 촉군이 질서정연하게 철군한 후, 진지 배치를 돌아본 사마의는 ‘과연 천하의 기재로다!’라고 찬탄했다고 한다.

대체적으로 목운이 오는 해에 그의 운세는 좋은 편인데, 왜 갑인년에 사망했을까 궁금하신 분도 계실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밝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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