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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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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39>

음양 오행으로 본 삼국지-조조 편

삼국지의 흐름을 음양 오행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는 시간이 나면 늘 역사 연표와 역사책들을 펼쳐놓고 동서고금의 세월 속을 뒤지며 돌아다니는데 오늘은 그중 여러분들이 가장 즐겨하는 삼국지가 주제로 뽑혔다. 앞으로 세 번에 나누어 쓰고자 한다. 기대하셔도 좋다.

전자공학에 역공학(reverse engineering)이라는 분야가 있다. 다른 회사나 나라에서 신제품을 개발하여 상품화하면, 얼른 몇 개 사다가 뜯어보고 조립해보고 하면서 그 제품의 신기술을 역으로 알아낸 다음 그것을 기반으로 대항 상품을 만드는 기술을 역공학이라 한다. 필자가 시간이 나면 역사 속으로 들어가 알아보고 다니는 작업도 사실 이와 동일하다.

가령, 미국의 역사 연표를 들고서 어떤 해, 몇 월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나열해놓고 하나의 가정을 세우고, 그 가정에 입각해서 다시 살펴봐서 맞으면 미국이 음양 오행으로 무엇에 해당된다는 것을 알아낸다. 그리고서는 그것에 기반해서 앞으로 미국에서 일어날 일들을 예측하게 되는데 그러다가 약간 이상하면 다시 전제가 틀렸는지 아니면 다른 요인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작업을 반복하게 된다.

필자가 미국을 여러 번에 걸쳐 癸水의 나라라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런 작업의 성과다. 이런 예측은 때로 대단히 흥미로운 결과를 가져다주곤 하는데, 오래 전부터 필자는 아르헨티나가 병자(丙子)라고 추정해왔다. 그래서 속으로 올해가 임오년이니 천간 지지가 모두 충이라 큰 난리가 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르헨티나는 요즘 금융 위기로 죽을 지경이다. 각설하고, 필자가 삼국지의 시대를 연구하는 방식도 이와 같은 방식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서론이 좀 길었다.

먼저 조조에 관한 얘기부터 한다. 조조는 기원후 155년, 乙未년에 지금의 안휘성에서 태어났다. 진수의 삼국지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머리가 총명하고 임기응변하는 지모가 있었다고 한다.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하니 조조의 사주를 역구성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특히 그가 나중에 늘 두통으로 고생한 사실은 거의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결국 그가 사망한 원인도 소설 삼국지처럼 관우의 목을 보고서 놀라 죽은 것이 아니라 간기능 악화 내지는 뇌종양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기타 이런 저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조조는 태어난 날의 음양 오행(일간)이 신금(辛金)인 것으로 추정된다. 일간이 신금이고 태어난 해가 을미년이니 재벌 내지는 군벌 사주라 할 수 있다. 그럼 조조의 연표를 따라가 보자.

조조가 최초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기원후 184년 甲子년에 일어난 황건적의 난리 때였다. 앞으로 두고 보면 알겠지만, 조조는 신금이라 庚辛金이 들어오는 해에 새롭게 일을 시작하고, 壬癸의 물이 들어오는 해에 발전하며, 甲과 乙의 목이 들어오는 해는 재운(財運)이라 재미를 보고, 丙丁 火가 들어오는 해에 명예를 얻거나 때로는 위기에 처하며, 戊나 己, 특히 戊土가 들어오는 해에 죽을 쑤게 된다. 특히 을의 해에는 대득을 거두는데 이는 조조에게 있어 횡재수를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갑자년은 조조가 수확을 거두는 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조조에게 찾아온 최초의 위기는 187년 정묘년에 동탁이 조조를 효기교위(중갑 기병대 연대장쯤으로 보면 된다)에 임명했을 때였다. 동탁과 붙어보았자 장차 재미가 없으리라는 것을 내다본 조조는 이름을 바꾸고 숨었는데 이 어간에 조조는 여러 차례 목숨의 위기를 넘긴다.

그런 조조가 고향에서 최초로 자신의 일가 친속들의 재산을 펀딩하여 사병(私兵)을 거느리게 된 것이 189년 己巳년 겨울의 일이었다. 여러 군벌들이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컨소시엄을 구성한다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난세에 벤처기업을 차린 셈이다. 그리고 본격적인 기업 활동은 물론 다음 해 庚午년 1월부터였다.

조조는 재벌 집안의 후손으로 동탁 토벌군의 맹주가 된 원소와의 안면을 이용하여 분무장군이라는 감투를 얻어 썼다. 이 때 조조의 나이 35세가 되는 해였다. 경오년의 경금은 신금과 친구지간이므로, 이 해 조조는 일종의 동업에 나선 셈이다. 그러나 그 해 2월 기묘월에 기토가 들어오니 조조의 용신인 水氣를 막아서 전투는 패배로 돌아가고 간신히 목숨만 부지할 수 있었다. 최초의 비지네스가 실패로 돌아간 셈이었다.

하지만 3월 경진월, 친구들의 도움을 얻는 달이라 하후돈, 진온 등의 친구들이 병력 4천여명을 꾸어주게 되니 간신히 파산을 면한다. 그러나 그 후 지지부진하던 사업은 192년, 壬申년에 가서 조조로서는 행운의 기운인 壬水가 들어오는 해, 다시 겨울 동짓달 임자월에 가서 일약 대박을 터뜨리게 된다.

황건적 30만명이 조조의 휘하로 귀순해 들어오고 그 식솔까지 합하면 무려 일백만이라는 사람들이 조조의 수중에 들어왔던 것이다. 조조는 드디어 일약 청년 재벌로서 입지를 다지게 된 것이다. 조조는 이 병사들을 재편성하여 정예병을 만드니 이를 청주병(靑州兵)이라 했다. 청색은 물색이 아니라 녹색인데 녹색은 목기를 뜻하고 목은 조조에게 재물이 되는 것이다. 일약 잘 나가는 시절의 코스닥에 상장한 셈이었다.

이 청주병은 나중에도 조조의 핵심 군사력으로서 나중에 중원과 멀리는 형주를 침공할 때 용맹을 떨친 철갑 기병의 전신이 된다. 유비가 백성과 함께 가네 마네 하면서 어영부영하다가 박살난 것도 바로 이 철갑기병대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그 기병대장이 바로 용맹무쌍한 허저였다.

조조는 이 해를 기점으로 중원의 강자들을 차례로 병탄하고 M&A 하는 데 성공한다. 194년부터 195년, 갑술, 을해년에 연달아 유비와 여포를 격파하더니 마침내 196년 丙子년 戊戌월에 가서는 재관이 모두 들어오니 황제를 옹립하고 대장군 직을 받고 무평후로 봉해지면서 귀족의 타이틀마저 얻으니 명실공히 명예와 벼슬, 재력이 절정에 달하게 된다.

甲子년에 황건적 토벌로 약간의 명성을 얻은 그가 庚午년에 기병하면서 계기를 맞더니, 경오와 충이 되는 丙子년에 이르러 공업(功業)을 한 번 크게 이룬 셈이다. 이로서 조조의 출세 작전 1단계가 완료되었다. 12년 한 순환주기가 끝난 것이다.

한번 크게 공업을 이룬 조조의 그 이후 행보는 순탄하지 않았지만, 시련을 뚫고 전진해간다. 특히 198년 戊寅년에는 무토가 들어오니 조조의 운세에 파란이 많았고 간신히 목숨을 건지는 위기를 넘기기도 하며, 심한 두통으로 고생하기도 한다. 무토가 조조의 용신인 임수를 극해서 상황이 어렵고 두통이 심했던 것도 수생목의 상생 작용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도 조조는 정벌을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200년 庚辰년에 가서는 드디어 중원의 패권을 놓고 원소와 자웅을 결해야 하는 절대 고비에 이르게 된다. 수대를 이어오면서 기반을 굳힌 원소의 수십만 군세에 비해 조조는 겨우 수만의 군대로 맞서야 했다. 막강 재벌과 신흥 재벌의 한판 싸움이 바로 관도의 싸움이었다.

관도란 원래 고유 지명이 아니고 정부의 물자 수송을 위해 설치한 공설 나루터라는 뜻인데, 당연히 물살이 가장 약하므로 군사를 이동시키기가 쉬운 곳이다. 그래서 이곳이 전장이 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조조가 결국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인심을 얻었다는 점이다. 庚辰년이라 사람들과의 왕래와 정분이 두터운 해였고 뱃심도 두둑한 한 해였다. 지난 두 해 동안의 힘든 싸움에서 조조는 교만함을 버리고 인심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체득했던 것이다.

조조가 관우에게 극진히 한 것도 그렇고, 막료들이 여차하면 원소가 추진하는 거대 신당 프로젝트에 동참하겠다고 비밀리에 충성 맹세를 한 결정적인 증거물도 나중에 웃으면서 불태워 버린 것, 모두 조조가 인심을 얻어야 한다는 지혜를 체득했기 때문이다. 경진의 경금이 신금과는 친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국 조조는 이 전쟁에서 신고 끝에 그나마 운이 들어오는 겨울에 간신히 승리할 수 있었고, 중원의 대세는 조조 쪽으로 넘어갔다.

이 해 조조는 정말 영웅본색이었다. 독자분들도 자기와 같은 오행이 들어오는 해에는 모두 그런 영웅 본 때깔로 변한다. 확인해 보시라. 아무튼 조조는 202년 壬午년, 즉 丙子와 충이 되는 해에 원소가 사망하자 북방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는데 사실 이 6년간이 조조가 가장 고생한 기간이었다. 원소의 잔당을 정리한 다음 207년 丁亥년에는 정화가 들어와 관록이 빛을 발했다. 그간의 막료들에게 상을 내리고 나서 이윽고 조조는 남으로 눈빛을 빛내게 된다.

그런 조조가 허저의 철갑기병을 앞세워 형주를 파죽의 세로 병탄하고 내려가 적벽에서 유비와 손권의 연합 세력과 대치했다가 그 해 겨울 80만 대군을 잃어버리니 이 해가 바로 戊子년이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조조는 무토가 들어오는 해에 죽을 쑨다. 더더욱 적벽은 붉은 벽, 즉 불을 의미하므로 조조에게는 불길한 지명이었다.

그러나 조조의 운세는 다하지 않았고, 북방에 터를 공고히 하면서 서서히 삼국정립의 형세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는 조조가 황제를 등에 업고 신흥 재벌의 위용을 자랑했던 丙子년으로부터 12년이 지나 다시 한 순환주기가 끝나는 시점이었고 조조의 출세 2기에 해당된다.

그후 조조는 庚寅년에 경금이 들어오니 영웅의 멋을 내느라 동작대를 지어 위세를 천하에 과시하기도 하지만 庚金이 寅木을 눌러 서서히 조조의 지병인 두통 증세가 심해져 간다. 213년 癸巳년에는 위공에 오르고 구석을 받더니 甲午년에는 황후를 죽이고 사실상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다가 횡재수가 있는 乙未년에는 한중을 점령하는데 이 시점이 조조의 운세가 이제 다하는 시점이다.

다음해 손권을 공격했지만 별 재미 못 보더니, 급기야 戊戌년, 천간지지 모두 토운이 들어오는 해에 조조는 유비에게 한중에서 대패하고 그 땅을 빼앗기고 만다. 鷄肋의 고사는 이 시점에서 나온 것이다. 두통이 극심해진 조조는 병세를 돌렸고, 그 해부터 아프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庚子년 정월에 경금이 조조의 머리를 쳐서 일생을 마쳤다.

조조의 일생을 정리해보면 결국 12년씩 3단계로 나뉜다.

1단계는 甲子년, 황건적의 난에서 명성을 얻고, 庚午년에 거병하여 신흥 재벌로 등장하기까지.

2단계는 丙子년에 황제를 등에 업고 세력을 얻은 후, 관도의 싸움에서 이기고 壬午년, 원소 사망으로 기업을 굳히고 적벽에서 대치하기 전까지.

3단계는 戊子년, 적벽에서 패배한 후 삼국이 정립되고, 甲午년 사실상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후, 무술년에 한중에서 유비에게 패하고 庚子년 정월에 지병 악화로 사망할 때까지.

이렇게 보면 조조의 일생은 12년씩 36년간의 비지네스 일생이고, 그중 언제나 子와 午의 충운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조의 일생이 불과 물의 투쟁이었고 남쪽에서 생긴 일이 언제나 변화를 주니, 결국 이는 손권과 유비의 남쪽 세력을 누를 수 없었다는 얘기도 된다.

조조는 신금으로서 을미생이고, 행운의 길신이 물인 것이 분명하고 나무가 있으니 문학성이 뛰어난 사주이기도 하다. 그런 그의 재주는 아들에게로 이어져 그 아들이 ‘칠보의 시’를 짓게 만든 유전적 요인이었다. 그러나 조조는 냉철해서 그런 문학가적 아들보다는 관리에 능한 아들 조비를 후계로 삼았으니 이 또한 조조의 기업가적 혜안을 엿보게 한다.

이처럼 역사 자료를 놓고 유명한 인물의 행적을 살피면 그 사람의 사주를 역으로 구성해낼 수 있으며, 나라의 일을 놓고 연구하면 그 나라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데, 이는 마치 죽은 자의 유골에서 DNA 증식을 통해 그 사람의 정보를 알아내는 방법과도 같은 것이다. 필자가 음양 오행에 깊이 빠져든 것도 바로 이 같은 작업을 너무 즐기는 탓인지도 모른다.

다음 번에는 유비와 제갈량, 손권의 이야기로 이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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