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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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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태규 명리학 <32>

중국, 어디까지 뻗어갈 것인가?

하늘로 승천하는 한 마리 붉은 용, 이 말은 비약적인 발전을 보이고 있는 중국 경제에 대한 찬사다. 오늘은 이처럼 눈부신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중국의 앞날에 대해 음양 오행을 써서(用) 알아보기로 한다.

중국의 도약은 모든 도약하는 경제가 그렇듯이 내부 문제점 또한 만만하지 않다. 특히 재정 투입에 의한 발전이라는 문제, 금융의 부실, 농촌경제의 침체가 커다란 문제가 되고 있다. 반면 강력한 중앙의 지도력과 정책적 탄력성, 잘 살아보고자 하는 중국 사람들의 열망이 있어 낙관적인 면도 많다. 그럼 중국은 앞으로 언제까지 뻗어 가는 것일까? 또 경제 발전에 따른 문제는 무엇인가도 함께 조망해 보기로 하자.

미래를 알려면 언제나 과거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기에 역사를 모르는 자는 가을 풀벌레가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일본이 전 세계를 사들일 것 같던 때가 불과 십 수년 전이고, 불황 없는 경제라고 호들갑을 떨던 미국의 신경제 현상도 이제는 종말을 고하고 그 대가를 치르느라 저 난리다. 그래서 역사를 살펴야 한다.

아편전쟁을 신호탄으로 유럽 열강들에게 무참하게 유린당했던 중국 대륙에 통일된 새로운 힘이 들어선 것이 바로 오늘날의 중국 사회주의정권이다. 정식 명칭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 10월 1일에 탄생했다. 음양 오행으로 따져보면 기축년 갑술월 갑자일의 일이다. 두 개의 갑목(甲木)기운이 기토(己土)의 땅인 중국에 들어섰으니 정당한 권위가 들어선 것이다. 가끔 다큐 프로에서 모택동 주석이 천안문 위에 서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장면을 보곤 하는데, 그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가 정말 인상적이다.

그에 앞서 1948년 11월, 무자(戊子)년 계해(癸亥)월에, 역사 고도인 소주에서 국민당 군대가 결정적인 패배를 당함으로써 무력화되었고 장개석 역시 이로 인해 다음해 1월 잠시나마 총통직을 내놓아야 했다. 이는 무토가 자수를 누르는 해, 계해월이니 월의 천간지지가 모두 물이다. 즉 물의 세력인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장개석 군대가 최선을 다했지만 천운은 중국 공산당에게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무자년은 전란의 해였고, 이로서 모택동이 영도하는 중국 공산 정권의 성립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모택동은 중국을 통치한 지 거의 30년이 지난 1976년 9월에 사망했고, 그 해 봄에는 주은래를 추모하는 민중의 대대적인 시위가 있었는데 바로 제1차 천안문 사건이고, 나중에 중국은 그 혁명성을 평가하여 4.5운동이라 칭하고 있다.

그 이후 중국은 잠시 권력을 잡은 4인방이 쿠데타로 숙청당하고 실질적인 권력은 중공 정권 탄생후 30년이 지난 1979 기미(己未)년에 가서 등소평에게 넘어갔으니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중국 정권의 탄생이다. 이 해는 묘하게도 1919년 중국의 5.4 운동이 있었던 해로부터 60년, 한 갑자가 지난 해이고 중국 공산당 정권이 탄생한 해로부터 30년이 지난 시점이다.

동시에 이 해는 포스트 마오(毛) 시대의 출발점이며, 무치(武治)에서 문치(文治)로 나아가는 원년이며, 개혁ㆍ개방도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60년 한 순환주기의 절반 지점에서 발생하는 충운(衝運)으로서 질적인 변화를 나타낸다.

1919년 5.4 운동의 60년전인 1859년에는 태평천국이라는 민중 봉기가 실패하면서 중국 근대화의 출발점인 양무운동이 시작된 해였다. 이처럼 역사는 1859 양무운동-1919 5.4 운동-1979 개혁ㆍ개방이 되니 모두 기미(己未)년이고 60년을 주기로 커다란 변화를 나타낸다.

이처럼 1979년에 출발한 중국의 개혁ㆍ개방 정책은 그로부터 10년후에 가서 커다란 내부 모순에 부딪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제2의 천안문 사건이다. 정치적 자유는 경제적인 하부 토대를 필요로 하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천안문 민중 시위와 탱크 진압 사건은 바로 기사(己巳)년 기사(己巳)월의 사건이다. 당시의 권력자 등소평은 아직 정치적 자유화를 시기상조로 판단하였던 것이지만, 중국은 기(己)라는 글자에 가서 커다란 소용돌이를 맞이하면서 중국인들의 내적 에너지가 분출되곤 한다.

이런 중국이 내부 갈등을 어느 정도 수습하고 본격적인 경제발전에 매진하게 되는 것은 1992년 등소평의 남순강화가 계기가 된다. 모택동 주석 사망후 대략 15년이 경과된 시점으로서 중국 개방 정책의 골간이 사회주의식 시장경제라는 말로써 정리되었다. 공산당 정권의 유지와 개방형 경제 발전간의 갈등을 절충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는 1979년에 시작되어 2009년까지 이어지는 30년 사이클의 절반 지점에 해당된다.

그러다가 1995, 을해년에 을목이 중국의 본질인 기토를 누르는 해에 중국 경제는 시장경제 이후 처음으로 자본주의적 불황을 맞이했지만, 그 이후 1997년, 등소평은 떠났으나 홍콩이라는 보약을 먹으면서 일약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아시아 각국이 금융위기로 풍지박산 났던 1998년 무인년에 들어서자 중국 경제는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가운데 도약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는 우리가 과거 1986년 단군 이래 호황이라던 3저 경기와 유사한 것으로서 그 절정의 시기는 2000년 경진년 부터 올해 임오년까지이다. 이 흐름에서 중국은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지만, 일단 내년 중반에 가서 성장세는 마무리 될 것이다.

이처럼 중국 경제 발전 사이클은 우리에 비해 15년 후행하고 있다. 우리가 1964년 경제 5개년 개발계획을 시작한 시점과 1979년 개방 정책과의 차이다. 따라서 중국의 2003년 계미년은 우리의 1989년에 해당되며 그 이후 우리가 1992년까지 조정기에 들어갔던 것처럼 중국 역시 2007년까지 과잉투자로 인한 조정양상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약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어 중국공산당 정권이 시작된 1949년으로부터 60년이 지난 2009, 기축(己丑)년까지 이어질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2008년 중국 베이징 올림픽은 중국 경제의 현대화를 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되겠지만, 한편으론 하나의 시대가 마무리되고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는 매듭이 될 것이다. 따라서 2008 올림픽은 중국 정권 성립 이래 한 갑자 60년 순환을 마무리하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1860년대부터 시작된 치욕의 세월도 이로써 끝날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 변화가 너무도 뻔하지만 또한 문제이기도 하다. 바로 중국 공산당 지배 체제의 해체가 시작될 것인데 이 일이 사실 큰 일이다. 경제적 풍요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자유를 수반하기 마련이다. 박정희의 개발독재가 스스로를 '물' 이라고 하면서 민권 이양의 시대 정신을 표명했던 노태우 정권의 과도기를 거쳐 김영삼 정권의 문민정부로 변화했듯이 중국 역시 그런 과정을 밟지 않을 수 없겠지만, 좀 다른 점이 있다. 나라의 크기가 우리보다 월등하기 때문에 이 같은 양적 차이는 중국의 민주화 과정이 우리보다 훨씬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그 과정은 또 다시 30년의 사이클을 밟아야 할지도 모르며, 그 과정에서 상당한 내부 갈등과 혼란을 불러 올 수도 있다. 말이야 쉽게 중국 공산당의 해체라고 했지만, 어디 그 과정이 부드럽게 이어질 것 같지 않다. 가령 올림픽 개최 이후 개방화가 급진전되면서, 내부의 민주화 요구가 드세질 경우 중국 정권은 긴장을 조성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힘에 의한 대만과의 통일이 가장 좋은 명분이 될 것이다. 중국 당국은 홍콩 반환이 있었던 1997년부터 10년 이내에 대만 통일을 완수하겠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으니 더더욱 그렇다.

필자는 2010 경인년부터 전 세계의 정치 경제가 길고 긴 침체 조정기로 들어갈 것으로 보고 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기로 한다. 그리고 경인(庚寅)의 해란 그 뜻을 알아보면 경금이 인목을 심하게 누른다는 뜻이며, 6.25 전쟁도 이 해에 발발했었다. 중국 당국은 대만을 무력 통일하려는 기도를 보일 수도 있을 것이고, 미국 역시 저번에도 이야기했지만 금의 기운이 들어오는 해는 좋은 일이 없을 뿐더러 걸핏하면 전쟁을 하게 된다.

대만을 둘러싸고 서태평양에서의 긴장과 대치가 가장 높아질 수 있는 시기에 해당되는 것이다. 미국이라는, 이미 중천을 넘기고 서서히 기울고 있는 제국의 자부심과 내부 갈등을 대만 통일이라는 명분으로 모면하려는 중국 사이의 갈등은 필연적인 충돌 코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2010년과 2011년에 가서 최고 위험 수위에 달할 것이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북한 지배 체제가 이를 기회로 살려보려는 유혹을 받게 되는 일이다. 미국의 힘이 대만 해협으로 집중하는 사이에 이대로 가면 결국 흡수합병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있는 북한 내부의 강경파가 득세하거나 또는 쿠데타 발생, 그로 인한 남북한간의 긴장 고조라는 시나리오가 예상된다. 북한으로 하여금 그같은 유혹을 자제시키는 원동력은 중국과 러시아의 견제인데, 만일 중국이 미국과 대치 국면으로 들어간다면 어떻게 되는가?

이에 경제 침체에 고전하던 미국이 러시아를 나토에 가입시킨 후 중국을 배후에서 포위하는 구도로 나간다면 또 어떻게 되는 것인가? 버블 이후 재기의 모멘텀을 찾지 못하는 일본 역시 그 사이에 분명 재무장으로 들어갈 명분을 얻을 것이며, 그리하여 서태평양에서 미국과 일본, 중국, 러시아, 남북한이 모두 대치 구도로 들어가는 이 시나리오는 물론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는 있지만 필자로서는 너무도 섬뜩해서 등골이 오싹하곤 한다.

그래서 필자는 툭하면 중국의 인권 문제를 가지고 중국을 자극하는 미국을 볼 때마다 걱정이 앞서곤 한다. 아무튼 중국내 정치적 자유에 대한 문제는 대만 해협 문제, 그리고 남북한 문제, 일본의 재무장 등으로 이어지는 일파만파의 시발점이 될 수 있기에 보통 일이 아니다.

결국 중국의 문제는 중화경제권이 커지고 우리가 중국 경제에 발목을 잡히느냐 하는 것보다, 그에 따른 정치적 갈등이 가져올 파장이 더 우려되는 것이다. 반대로 중국의 경제 발전이 부드럽게 정치적 자유화로 이어진다면 중국이라는 땅은 우리가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디딤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웃이 잘 되면 인근은 언제나 혜택을 보기 마련이다.

물론 필자는 우리의 국운이 상승하고 있기에 어떤 시련이 닥쳐도 굴하지 않고 뻗어갈 것임을 확신하고 있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통일 문제 역시 독일처럼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인한 행운보다는, 중국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통일의 해법은 더욱 복잡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햇볕 정책이야 우리로서는 마다할 수 없는 노선이지만, 국방력의 지속적인 강화와 이해를 달리하는 인근 국가들과의 균형잡힌 선린우호 방안 역시 장기적이고도 치밀한 안목과 전략 속에서 유연성을 가지고 대처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2024년 이전에- 아마도 2019 기해년이라 여겨지는데- 반드시 남북한이 하나로 합쳐질 것이라는 것도 동시에 말해두고자 한다. 그리고 2010년부터 중국 문제는 우리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있어 커다란 위험과 기회를 동시에 제공하는 양날의 칼이 될 것이기에 정말 잘 대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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