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꽤 순종적인 삶을 살아왔다. 인권운동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삐딱선을 탄 것이라고 할까. 체제를 맹신하진 않았지만 딱히 불신하지도 않았다. 순응하는 삶은 안정감을 준다. 가끔 어느 정도의 보상을 주기도 한다. 울타리 안에 갇혀져 일생을 살아온 사람에겐 그 울타리 안이 인생의 전부이기도 하다.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집회에 나온 50대 아저씨의 "난 어려서부터 반공교육을 받아왔고 이것밖에 모르는데…." 라는 말은 우리네 인생을 씁쓸하게 만든다.(2004 김경만 감독의 <학습된 두려움과 과대망상>에서)
나와 당신을 가두어 버리는 울타리 중에는 '법'이 있다. 이 법이라는 것이 참 웃기다. 사실 법은 사람과 사람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만든 필요악이다. 법이 최소한으로 존재하는 세상을 원한다는 법학자들이 가끔 위선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법은 사람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러한 법이 사람이 아닌 통치를 위한, 기득권을 보전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린 지 너무 오래다. 아니 법은 애초부터 그러한 목적으로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법이 사람 위에 있다. 그리고 그 위에 돈과 권력이 있겠지. 법이라는 것은 참 신기해서 제정된 순간부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 법의 정당성과 필요성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게 만든다. 울타리가 생긴 순간부터는 그 울타리를 넘었느냐 넘지 않았느냐만 중요해진다. 우리는 우리를 향해 그러한 울타리가 엄청나게 쏟아져 울타리 밖 초원이 보이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다.
점점 견고해지는 울타리- 저작권
▲ '소리바다2' 설치 화면. |
그들의 다운로드에 '불법'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그들의 공유의 근원지인 소리바다를 공격했다. (소리바다는 한때 가입자만 200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들은 소리바다를 통한 공유와 자신들의 이득간의 균형을 잡아 오히려 자신들에게 유리한 기회를 잡을 수도 있었다. 새로운 유통방법을 개발할 기회가 그들에겐 있었다.
그러나 욕심에 눈이 멀어 엉뚱하게 다운로더들에게 화풀이하고 애꿎은 기술과 법망의 허술함을 탓을 하느라 시간 낭비한 그들은 기회를 놓쳤고 결국 거대 통신사들이 음원시장의 우위를 차지했다. (이들 거대 통신사들로 이루어진 음원대리중계업체가 음원수입의 상당 부분을 챙긴다.) 하지만 이들이 한 삽질의 놀라운 성과가 있었는데 공유라는 것에 불법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린 것이다. '저작권 침해'는 찜찜하다는 인식을 널리 퍼뜨리는데 성공했다.
현 저작권법에 의하면 영리목적이 아닌 한 개인이 영화나, 음악 등 다운로드 받는 등 사적이용을 위한 복제는 합법이다.(저작권법 제 30조) 하지만 법원은 업로드 되어 있는 파일이 저작권 침해한 파일인 경우에는 다운로더가 이를 미필적으로 알고 있었다면 그 복제는 적법하지 않다고 판결하여 30조를 제한적으로 해석하고 있다.(서울중앙지법 2008.8.5 자 2008카합968 결정 저작권침해금지등가처분) 이런 법률의 해석을 정부는 저작권법상 명문화하고 나아가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공유를 제한하고 축소시킨다. 저작권법은 끊임없이 저작권자의 배타적 권리를 강화하고 자유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발달해오고 있다.
공유라는 것은 한 사회의 문화를 이루는 근간이다. 한 창작물을 공유하고 복제하는 것, 그 것을 통해 제2의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 문화를 풍부하게 하고 한 층 더 깊어지게 하는 것이지 도둑질이 아니다. 이것은 문화향유권과 연결이 된다. 문화향유권은 단순히 만들어진 창작물을 보고 즐기고 누릴 것 뿐만 아니라 그 창작물을 씹고 뜯고 변형할, 나아가 창조할 적극적인 권리까지 포함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저작물의 보호 기간은 50년이다. (미국의 70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꽁꽁 싸맨 그들의 저작물이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향유될 수 있을 때는 언제일까. 문화의 주인은 기업이 아니라 바로 우리이다.
새로운 대안은 없는 것일까
사실 비영리 사적 복제가 정확히 얼마나 저작권자의 경제적 이익을 침해하는지는 경제적으로 추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침해당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없던 이익을 확장해나갔다고 보는 것이 맞다. 기술이 발달·보편화되기 이전에, 1990년대만 하더라도 좋아하는 가수의 신곡이 라디오에 나오면 테이프로 녹음해 반복해서 듣기도 했다. 괜찮은 방송을 비디오로 녹화하여 소장하기도 한다. 이는 불법이 아니었다. 헌책방에서 책을 사는 것이 저작권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듯이 이미 공표된 저작물의 2차적 이동을 철저하게 봉쇄하는 것은 지나치다.
저작권법 존재의 의의는 저작권자의 이익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당한 권리와 저작물의 공정한 이용을 도모함으로써 문화 및 관련 산업의 향상 발전에 있다(저작권법 1조). 문화의 발전을 위해서는 문화에 대한 보편적 접근 또한 보장해 주어야 한다. 문화의 향유와 발전을 위해 정부는 저작권자의 배타적 이익을 강화하는데만 앞장설 것이 아니라 공공이익의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정부는 구체적인 의무도 갖고 있다. 독립영화에 대한 지원을 삭감하고 심사과정 또한 제 입맛에 맞는 작품을 찾는데 골몰하는 정부를 보면 국가의 문화 발전과 다양성을 위해서 해야 하는 의무를 역시나, 또 잊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불법' 다운로드는 안 됩니다." 하고 그들이 선전할 때 그들은 흔히 대중 스타를 앞세운다. 그런데 '불법' 다운로드가 '근절'된다고 해서 내가 좋아하는 스타가 못 받던 수익을 더 받는 것은 아니다. 그 스타가 출연한 영화의 제작에 참여한 스텝들의 불안정한 노동환경이 개선되는 것도 아닌 것 같다.(한국의 영화 스텝들은 최저임금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는다고 한다.) 어렸을 적,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1만5000원 짜리 앨범을 한 장을 사면 그 가수에게 몇 십 원의 수익이 돌아간다는 것을 알았을 때 받은 충격을 기억한다. 한 달 용돈 꼬박 모아 산 앨범. 내 용돈은 누구 배를 채워준 것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본질적인 문제는 잠재적 소비자가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균등한 수익분배구조에 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 책임을 다시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저작권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하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창작자의 정당한 권리를 보장해주고 적절한 경제적 보상을 하는 것. 지금의 틀 안에 갇힐 것 아니라, 기존의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저작권법 체계를 벗어난 새로운 대안을 함께 생각해야할 때이다.
해적당, 울타리 없는 바다에서
지난달 18일 스웨덴 해적당 아멜리안 안데르스도테르 유럽의회 의원이 방한했다. 인터넷을 통해 불법으로 다운로드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해적'이라고 한다. 해적당은 인터넷 불법 다운로드 행위를 옹호한다. 인터넷 정보의 자유로운 공유, 저작권법 및 특허권의 철폐와 혁신을 주장한다. 해적당은 저작권의 효력을 창작물 공표 이후 5년으로 줄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아멜리아는 이날 기자간담회와 이어진 토론회에서 "우리는 인터넷에서 자료를 자유롭게 올리고 내려 받는 건 상식이며,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어야한다" 라고 했다. 또한 "지식인층이나 다국적 기업에서 정보를 독점하려 인간의 사회 활동을 촉진하고 도움 되는 정보접근을 막거나 저작권 이름으로 감추려는 것은 이기적인 생각"이라는 고 말했다.
너무나 당연한 듯 말하는 그녀의 말에 적지 않은 사람이 당황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보의 '소유'와 '집중', 그를 지켜주는 저작권이라는 울타리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이 견고해져만 가는 저작권체계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 질문은 더 넓고 깊어져야 한다. 이제는 우리의 삶과 떼어 내려 해도 뗄 낼 수 없는 인터넷 시대에 정보에 대한 접근과 그 이용은 권력이 된지 오래다. 무늬만 정보민주화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정한 정보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 글은 "나와 당신을 가두어버리는 울타리"라는 제목으로 주간인권신문 <인권오름>에도 실렸습니다. <인권오름>기사들은 정보공유라이선스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정보공유라이선스에 대해 알려면, http://www.freeuse.or.kr 을 찾아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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