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신군부의 12.12 쿠데타로 분위기가 삼엄하던 지난 80년 3월의 일이다.
당시 한국 재계를 양분하고 있던 삼성그룹과 현대그룹 사이에 언론을 매개로 한 일대 전쟁이 불붙었다.
싸움의 발단은 삼성그룹 계열사인 중앙일보가 현대건설의 부실 공사를 문제삼자, 이에 발끈한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각 신문사에 이병철 삼성회장과 홍진기 중앙일보회장의 과거 비리를 폭로하는 광고를 실으려 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싸움은 삼성은 중앙일보, 현대는 동아일보 등 각자 연을 맺고 있던 언론매체들을 매개로 한 폭로비방전의 양상을 띠고 전개됐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 이유에 불과했을뿐, 싸움의 실제 동기는 신군부와 삼성그룹간 유착으로 현대그룹이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정회장의 위기감에 따른 것이었다. 이처럼 초반에는 삼성이 유리했으나 83년 정회장이 서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하면서 현대에게 유리한 쪽으로 국면이 바뀌었다.
손광식 본지고문은 당시 두 고래의 싸움 과정을 취재하며 양쪽 관계자들로부터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내막을 들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83년에는 정주영 회장의 초청을 받아 울산 현대조선 영빈관에서 이병철 회장과 정회장간에 얽힌 애증의 관계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이 녹취록은 한국 재벌사의 알려지지 않은 이면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인 동시에, 당시 재벌의 영향력아래서 자유롭지 못했던 언론의 위상도 함께 읽을 수 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편집자
***이야기 하나: 현대측 증언**
신군부 등장 이후 맞붙은 삼성과 현대의 쟁투에는 정주영 회장의 잠재의식도 작용된 듯 보인다. 그는 신군부가 모시는 신현확총리와 이병철회장이 밀착되어 과도기 또는 ‘새시대’의 재벌판도에 어떤 역학관계로 작용되고 자신과 현대는 소외당할지도 모른다는 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매스컴을 통한 대대적 광고로 대 삼성 공격명령을 내렸어.
“이병철은 한비밀수 사건의 장본인이며 홍진기(중앙일보 회장)는 자유당 부정선거 원흉이다” 하는 5단 통광고를 만들어 각 신문사로 뛰었어. 동아일보와 매일경제신문 광고국으로 뛰었는데 동아에는 접수가 되지 않고 마침 매일쪽에는 접수 여직원이 있어 접수가 되었다. 그러나 20분도 안되어 첩보가 삼성쪽으로 들어갔지. 삼성은 총력전으로 나서 광고를 막았어.
그러나 양측의 폭로 고발 기사전쟁이 격화되어 서울시에 나가있던 검열단은 시국 기사보다는 이 기사에 신경들을 썼어. 결구 경방의 원로 김용완회장이 주선을 해서 양측의 화해협상이 이루어졌어. <장원>에서 양측이 만났는데 현대에서는 정회장과 이명박 사장이, 삼성쪽에서는 홍진기 회장이 참석했고 이병철 회장은 참석 안했어. 당시 이회장은 일본 동경에 있었어. 회담은 극히 감정적 기류였어.
정회장: 부실공사라는 게 조인트 하나 빠져도 금이 가고 그러는 건데, 뭐가 부실공사인지 한 번 따져보자.
홍회장: 지금 그런 걸 따지자고 할 때인가.
이명박: 놔두시오. 정회장이 하고 싶은 말 충분히 하도록 해야 할 것 아닌가.
정회장: 막 말로 30만원 뇌물 주다가 걸렸다는 게 그렇게 대서특필로 계속되어야 할 사건인가. 그렇다면 사형까지 받은 홍회장 얘기 꺼내도 괜찮다는 논리 아닌가.
홍회장: 그게 지금 기사가 된다면 기사로 쓰도록 해 보라.
정회장: 기사가 된다는 게 아니라 그걸 광고로 천하에 알린다는 거다.
이렇게 치고받다가 이명박이 타협을 유도, 결국 현대-삼성전은 끝이 났다.
( 현대쪽 모부장의 증언. 1980년 3월)
***이야기 둘: 삼성측 증언
일본 동경에서 "한국 신문에 야단(현대와 삼성의 공방전) 났다"고 보고했더니 이회장은 “난 신문 안본다” 하더니 “그래 삼성 두드려서 어떻게 하자는 긴고”하면서 눈 하나 깜짝 안하더라.
이번 싸움에 현대는 30억원을 ‘기금’으로 쌓아 놓고 작전을 폈다는 얘긴데 모 신문 사장에게 1, 2억원이 전달됐다는 설까지 있다
이병철회장은 현대쪽에서 ‘화해 협상’이 들어오자 “만나자면 만나제. 어떻든 내가 나이도 한 살 더 먹고 다 내 책임이다. 모든 재계인사 다 모인 자리에서 만나자 해도 만나겠다”고 했다.
이회장은 돼지축사 오염 사건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용인 관리한 놈 정부가 안잡아 넣으면 내라도 잡아넣을 기다. 5억원이나 들여서 공해처분 시설 안해 놓았나. 내도 현지에 가서 확인했다만서도 저수지가 큰 거 하나 작은 거 하나 2개다. 돼지똥은 큰 데로 뽑아 가지고 물에 뜨는 돈분은 거둬 내서 비료로 쓰고 오줌은 증발시키면 되는 긴데 그걸 작은 데로 흘리다가 문제가 된 것 아닌가.”
모두 뭘 어떨게 해야 하는 건지 몰라서 결국 사건 만들고 삼성 욕먹게 한다는 이야기였다.
수원 전자공장에 불이 났을 때다. 사장이 불려갔다.
이회장: 자, 어떻게 할긴고?
사장: 방화벽을 쌓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이회장: 불 난 다음에 방화벽 쌓아 뭐하노. 돈 어떻게 융통하고 보험 어떻게 챙길 것인가 그걸 생각해야지.
(그리고는 80억원의 자금을 확보해 냈다. 그런 다음 화재 취약지구 일일이 돌면서 점검했다)
이회장: 보험 들어야 하지만 그게 최상 아니데이. 보험회사라카는 것은 손해 안 볼라고 하는 기라. 그러니 정신들 독똑히 차리거레이. 내가 회사할 때는 방화벽 없어도 불 한 번 안났다. 나더러 가만히 있으라카더니 잘만 터지는 구나. 이젠 나도 내가 하고 싶은 걸 할기다.
(같은 시기 삼성쪽 모부장의 증언)
***이야기 셋: 정주영 회장의 이병철 회장 회고**
난 젊었을 땐 예쁜 여자가 좋더라. 이젠 나이가 드니까 멋있는 얘기하는 여자가 좋아. 모윤숙이는 <제1공화국>(TV연속극)에서 너무 예쁘게 나와. 이쁘지는 않지. 멋있는 이야기는 잘하는 여자야.
이병철 영감 요새 많이 달라진 것 같아. 그전에 전경련 기금 출연할 땐 돈 3억원 안 내놓아서 김용완 회장에게 “이회장이 돈 안 내는데 가부간 결정해서 통고해 주면 좋겠다, 그 분이 돈 안 내서 전경련 회관 못 짓는 건 아니지만...”하고 얘기했더니 김용완회장이 이회장보고 “당신 돈 안내도 전경련 회관 세울 수 있다고 정아무개가 말합디다”하고 반농담조로 말했어요.
그러자 이병철회장은 “회사 안에서 그 돈 내서 뭘하느냐 해서 결정 못하고 있는 것 뿐인데...” 하면서 섭섭해 했어요. 그래 가지구 우리 두 사람 사이가 서먹서먹해진 거예요. 그래서 김용완회장이 자리를 마련해 신라호텔에서 이회장을 만났어요.
이회장은 내가 쓴 <신문과 나>를 보았는지 “신문 비판하는 사람 큰일 난다”고 해. 그러더니 이번에는 김용완 회장 보고 “인촌은 친일 하지 않았느냐”구 해 김회장은 얼굴이 벌개지면서 “무슨 소리요?”하는 거지. 그랬더니 이회장은 “우리 취재하는 애들(동경특파원 등)이 정보를 입수해 증거물을 카피해 가지고 있어요”하고 말하는 거야. 김용완씨는 인촌(김성수씨)이라면 오늘의 자기를 만들어 준 사람이자 처남 매부간이라 속으로 꽤 불쾌했을 거라.
이회장은 얼른 화제를 바꾸더니 자기는 정치를 하려고 마음먹고 신문을 만들었다는 얘기를 하더니 민관식이가 까불길래 신문(중앙일보), 방송(동양방송)으로 쳐 국회에 못나가게 했다고 하는 거야.
요즘 전경련이 외채 얘기하니까 신문에도 사설이 나오고 해. 그러니까 청와대 쪽에서 누가 이걸 사주했느냐고 야단이지만 올해 (83년) 어떻게 해서든지 국제수지 균형 만들어야 내년 이후 잘 넘어갈 터인데..... 외환은행이 홍콩시장에서 5억달러 빌리는 데 애를 먹은 건 그것뿐 아니라 수출입은행 어음발행등 70억달러 외화도입과 연관지어 채권자들이 전체를 스크린 하느라고 그렇게 늦어진 거야. 하지만 우리 현대는 수형(어음) 한 장 끊으면 외자 빌릴 수가 있어. 그만큼 현대는 믿는다 이거지.
민간주도 이후 경제는 잘 돌아가는 것 같은데 민간주도 제일 안된 곳이 상공부야. 한국중공업도 민간에게 맡겼으면 저 꼴 안났을 거야. 그건 뻔한 이치야. 국영기업에서 누가 수십억달러짜리 수주를 해 오겠어. 국제정보를 아는가, 사람을 아는가. 정부가 중화학에 개입한 건 잘못 중 아주 잘못이에요. 하겠다는 놈은 내 버려둬야 합니다. 하겠다는 놈 막는다고 안 되는 거 아니지. 할 놈은 하고야 마는 거야.
은행민영화 해도 은행장은 역시 금융계에서 나와야 해. 우리 주주들은 아마 몇 년은 참아줄 걸. 그렇지만 대형화 증자를 해서 외국이 알아주는 민간은행이 되어야 해. 지금은 외환은행 정도나 알아줄까. 우리 은행들 밖에서 잘들 몰라. 외국은행 지점 하나가 우리 은행 본점보다 이익 많이 내는 것 이것 주목해야 합니다. 걔들은 담보 안봐요. 사람을 봅니다. 미국 은행에서 중역들이 나보고 점심,저녁 사라 해서 밥 사면 현대 잘된다고 칭찬하지. 그러면서 이것저것 물어봐. 왜 그런 줄 알아요. 투자한 기업이 망하는가 아닌가 항시 타진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 은행이 돈 떼일 리가 없지.
(83년 4월13일 울산의 현대조선 영빈관에서 정주영 회장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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