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권하에서든 정권 초기에는 이른바 ‘실세’들이 반짝 빛을 발했었다. 전두환 정권시절에는 허화평ㆍ허삼수ㆍ허문도 등 ‘쓰리 허’가 있었고, 노태우 시절에는 박철언이 그러했다. 김영삼 시절에는 전병민이 그런 편에 속했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재사(才士)형’이었다는 점이었고, 또다른 공통점은 그들의 시대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왜?
노태우 정부시절 공보처장관을 지냈던 최창윤씨가 손광식 본지고문을 비롯해 모언론사 주필, 국장 등 언론사 중진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같은 궁금증의 일단을 밝혀주는 증언을 했다. 통치권자의 절대권위에 해가 되는 과도한 권력행사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는 해석이다. 편집자.
전통(전두환 대통령)은 두 허, 허화평, 허삼수에 정치적인 비중을 크게 두지는 않았어. 청와대의 ‘수문장’ 정도였어. 그래서 의도적으로 “허대령, 허대령”하고 지칭하곤 했지.
예편으로 준장이 되어도 마찬가지야. 그래 옆에서 있던 사람이 “준장입니다”하고 리마인드를 시키면 “그게 제대로 된 별이야. 다 시절과 상황이 맞아 들어가 별 하나 붙인 것이지” 하곤 했어.
***"그게 제대로 된 별이야, 다 시절이 맞아들어가 별 하나 붙인 거지."**
물론 두 사람이 12.12 사태때 ‘개국공신’ 역할을 해서 기본적으로는 애정을 바탕에 깔고 있었던 건 사실이야. 그래도 전통은 경력ㆍ경륜(자신은 예외로 치고)을 중요시해서 두 사람을 권력의 분배나 요직에 앉히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 언젠가 허화평을 국세청 차장으로, 허삼수를 대구 시장으로 발령내려고 했다가 유보한 적이 있어.
한번은 이학봉이가 두 허에게 밀려서 수석 자리를 내놓고 경기도 지사로 나가게 돼 있었어. 이학봉이는 즉각 전통과 독대를 했고 ‘없었던 일’로 하기로 결정이 바뀐 일도 있어. 뭐 이런 것들로 힘의 균형을 권력자가 이끌기도 하겠지만, 그의 주변에서는 실질 파워를 가늠하곤 하지.
언젠가 두 허는 육ㆍ해ㆍ공군을 통합사령부로 한데 묶는 안을 추진했는데 당시 국방부장관 주영복이가 청와대로 들어와서 “그건 대통령의 군 통수권을 약화시키고 힘의 분산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하자, 즉각 허화평에게 전화를 걸어 고압적으로 힐책을 했지.
허화평은 전화를 받자마자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각하, 그게 아닙니다”하고 큰 소리로 변명을 하더군.
이른바 ‘이ㆍ장사건’(이철희ㆍ장영자 사건)때 두 허는 전통의 처삼촌 이규광씨를 “감옥에 넣어야 한다”는 강경론을 폈는데, 이게 전통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어.
이규광이가 대세에 밀려 감옥에 들어 간 다음 감옥으로 면회를 온 친척들에게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고 소동을 피웠지. 이 소리를 전해들은 전통은 두 허가 사태를 그렇게 몰고 갔다고 보고 내심 괘씸하게 생각했어.
***김재익 수석을 몰아치다가 거꾸로 밀려난 두 허씨**
이런 감정이 분출된 것이 금융실명제 때야. 실명제는 김재익 경제수석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통이 강력하게 추진을 했지. 두 허는 반대의 입장이었고. 그러니 자연 김재익과 허는 충돌을 할 수 밖에. 화가 난 허화평이는 김재익을 맞대 놓고 “이 새끼”하는 식으로 모욕적인 언사를 썼어.
그러자 김은 사표를 내고 병원에 입원을 해 버렸어. 병문안 겸 전통이 사람을 김이 입원한 병원으로 보냈더니 별 병도 아니고 두 사람의 갈등 때문이란 걸 알았지. 전통은 이젠 칼을 빼 두 ‘읍참마속’하기로 결심을 한 거야.
두 허는 바깥세상에서는 ‘실세’로 통해 재계에도 꽤 영향력을 행사했고 부총리, 장, 차관들도 그 밑에서 눈치를 볼 정도였지. 그러나 실제로 권력 내부에 그런 위치에 서 있었던 것은 아니야. 다만 전통의 권력 장악과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터라 힘이 있을 것이라 생각할 법 했던 것이지.
그래 밑에서 “어느 은행장 안 되겠더라” 하면 “그럼, 짤라야지” 했고, 누가 “이런 사람 괜찮다”고 하고 좋게 말하면 당장 “은행장으로 쓰자. 인적 사항 올려라” 하고 군인 기질의 열정을 강하게 표출했어.
나중에 두 허가 쫓겨날 때 아무런 징후나 낌새가 없었어. 하루 아침에 비서실 문이 활짝 열리고 두 허는 물론, 여비서들까지 밖으로 내 몰렸어.
당시 사회에서는 ‘외채망국론과 공직자 사치생활’이 문제화되던 때인데 공직자 가정에서 외제품을 쓰다가 버린 것이라든가 외제 화장품을 국산제품 통에 넣어 쓰고 있다는 것이 언론에 의해 고발되었어.
두 허가 가택조사를 받은 것도 이 때였어. 경찰서장인지, 세무서장인지가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양주병이 나왔지. 허씨들은 “그래, 대한민국에 양주 한두 병 집에 놓아두지 않는 놈 있냐” 하고 호통을 쳤지. 이게 다 정치적으로 전통이 시킨 일이라는 걸 모르는 허씨들은 워낙 단순했던 군인들이라 그런 차원으로 심각하게 보지는 못했던 거라. 두 사람은 결국 해외로 나가게 되었지.
***"이게 누구 자리야? 의자 빼"**
그러나 신세를 졌던 재계 사람들이 미국 현지에서 얼마씩 ‘금융지원’을 해서 생활에 불편은 없었어. 본인들도 언젠가는 전통이 다시 부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고 항간에는 “무슨무슨 자리로 롤 백 한다”는 소문이 떠돌아 아직 힘이 있는 것으로 전파되곤 했어. 그래서 대궐 밖으로 밀려났지만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불우한 생활’이란 추측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어.
역시 권력자는 ‘힘의 절대성’을 좋아해. 주영복의 경우는 광주청문회 때 증언대에서 어영부영 했지만 이걸 꿰뚫어 본 것 같아. 전통이 그래도 자기시절에 지방자치제 입문이라도 해 놓았다는 업적을 의식하고 일부 지자체에 대한 실험적 자치단안을 내렸어. 주영복은 이것조차도 반대했지. “통치권위에 도전적 요소가 될 수도 있고 국민의 긴장감도 이완된다”는 이유를 들어 전통에게 반대의사를 표시했어. 비록 전통의 결정을 반대하는 것이지만 최고 권력자로서는 ‘싫지 않은 생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대목이야.
전통이 권력의 권위를 지키려는 권위의식은 대단한 바가 있었다고 해. 한번은 청와대에서 회의가 있을 예정이어서 회의 테이블에 자리 지정을 담당자들이 하게 되었어.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참석하는 회의라 그렇지 않아도 후계구도도 있고 해서 전통과 나란히 의자를 배치했지. 그랬더니 회의장을 둘러보던 전통이 “이게 누구 자리냐"하고 물었어. “노대표 자리입니다”하니까 “의자 빼!” 하고 일갈하는 게 아니겠어.
***당돌했던 박철언도 끝내는 밀려났다**
노통이 취임하자마자 청와대 회의에서 원탁형 배치를 지시한 것과 이 사건이 연관성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더군. 전통은 박통의 측근에서 권력의 카리스마를 고대로 배웠다면, 노통은 그걸 전통을 통해 ‘반면교사’로 물려받은 것이라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애.
노통이 박철언이를 청와대 밖으로 내보낸 건 ‘엘리트 관료나 파워의 중심에서 자란 것만 가지고 정치적 힘이 크게, 그리고 길게 될 수는 없다’고 판단해서 나온 거야. 물론 그 배경에는 ‘포스트노’에 대한 정권 시나리오가 깔려 있었지.
우선 이 사람을 첫 대면하면 몹시 당돌하다는 인상을 받아.
나하고 사적으로 만났을 때 자기의 역할은 “노통의 파워를 다지고 남북정치에 이니셔티브를 잡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더군. 대중적인 정치기반을 다지기 위해 의회쪽으로 나왔지만, 본인은 일단 공간적으로 청와대와 멀어지니까 이에 대한 반동에서 남북비밀접촉설까지 빚어낼 정도로 탐욕적으로 일을 벌였던 게 아니었나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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