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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은 달빛보다 밝다**
별빛을 모으면 보름달 빛보다 밝다. 지난 7월 24일, 음력으로 유월 보름날 밤, 필자는 몽골 초원에 누워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은하수가 금방이라도 폭포수처럼 쏟아질 듯한 별의 바다에서 몇 해 전 푸젠(福建)에서 만난 한 앳된 사내의 기억이 떠올랐다. 20대 초반의 새파란 나이에 벌써 자신의 업체를 몇 개나 거느리고 있었던 그가 자랑처럼 말했다.
"여기에는 해도 달도 없어요. 별들만 가득하지요. 하지만 별들이 발산하는 빛은 보름달보다 찬란하지요."
정말 그렇다. 그곳 푸젠은 소형기업의 천국이다. 작은 별처럼 무수한 소형업체가 발하는 경제력의 빛은 한 개의 보름달 같은 대기업보다 강하다. 이렇다 할 대형 국유기업은 하나도 없다. 종업원수 20명도 안 되는 소규모 사영업체가 경제총량의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푸젠의 경제는 비할 바 없는 활력에 넘치고 있다.
푸젠 성의 약칭은 민(閩)이다. 민은 옛날 푸젠에 살았던 미개 민족의 이름이다. 푸젠 토박이의 얼굴 골상과 베이징 토박이의 그것은 한국 사람의 얼굴 골상이 일본 사람과 다른 것보다 훨씬 더 차이가 크다. 동북아 사람보다는 동남아 사람과 많이 닮은 푸젠 사람을 11억 한족 주류 민족으로 분류해놓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초기 최고지도자들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을 소수민족이라고 잘게 나누어 놓으면 훗날 일어날지도 모를 민족분리운동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해버린 것은 아닐까? 무서운 심모원려다.
바다를 면한 중국의 성 가운데서 푸젠은 산악지역이 제일 많은 성이기도 하다. 전체 면적의 90퍼센트가 산으로 이루어졌다. 중국의 우롱차(烏龍茶)의 90퍼센트 이상이 푸젠의 산에서 난다. 푸젠은 민둥(閩東) 민시(閩西) 민난(閩南) 민베이(閩北) 4개 지역으로 나뉜다. 푸젠 북동쪽의 민둥 사람은 무사안일을, 서쪽 내륙의 민시지방 사람은 조상숭배를, 북쪽의 민베이 사람은 안빈낙도를 삶의 종지로 삼는 반면 남동해안의 민난 사람은 진취적이고 개방적이다.
민난 사람은 농사에는 젬병이지만 장사에는 고수다. 북동쪽 바닷가 민둥 사람도 배를 타기는 하지만 고기잡이 배인 데 반하여 민난 사람은 배를 타도 상선을 탄다. 푸젠상인이라면 곧 민난상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푸젠의 성도 푸저우(福州)는 민베이 지역에 위치한다. 시내 인구는 겨우 100만 정도로 최소한 500만 정도가 되어야지 대도시로 치는 중국에서 푸저우는 중소도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푸저우가 푸젠의 베이징이라면 샤먼(厦門)은 푸젠의 상하이다. 민난 지역에 위치한 샤먼이 1980년에 경제특구가 된 이후 푸젠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2001년 현재 1인당 GDP가 상하이보다 높은 샤먼은 97년 4월부터 타이완의 가오슝(高雄)과 해운직항로가 개설되어 운항되고 있다. 97년부터 매년 9월 8일 샤먼경제특구에서는 '중국투자무역상담회'(CFIIT)를 개최하고 있다. 베이징 주재 각국 대사관, 특히 대사관 관계자들과 서구와 한일 기업인들을 초빙하는 한편 푸젠 성장이 이들 기업 대표들 초청 만찬을 개최하는 등 투자유치 다변화에 노력하고 있다. 역시 민난 지역의 취안저우(泉州)는 푸젠 제3의 도시로 원나라 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세계 최대를 다투던 항구로서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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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다 쓰는 물건인고?**
취안저우의 부속 도시의 하나인 진장(晉江)은 중국 신발제조업의 수도 '화도'(靴都)로 통한다. 진장 최초의 신발공장은 린투치우(林土秋)라는 농민이 설립한 것이다. 린투치우는 원래 학교 문턱도 가보지 못한 무지렁이 농민이었다. 1970년대 말, 어느 날 화교인 그의 누나가 해외에서 돌아와 집 마당에 다 빨래를 널었다. 그런데 빨랫줄에 걸린 물건 하나가 너무나 신기해 그의 시선은 빨랫줄과 엉켜버렸다.
'저건 뭘까? 마치 소 눈가리개 같기도 하고, 누님은 참 이상하지, 소 눈가리개로 뭘 하려고 그러지?.' 가만히 손으로 눌러보니 폭신폭신 감촉이 기가 막혔다. 뭘까?
시골 깡촌에서 반평생을 땅만 파던 그가 알리가 있겠는가. 아내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물건이었다. 그러나 누나에게 직접 물어보기가 왠지 민망했던 그는 아내에게 그 물건의 정체를 대신 물어봐달라고 부탁했다. 그것은 지금이야 누구나 다 아는 여성의 브래지어다.
린투치우는 그것의 용도를 알고 나니 매우 자극적인 느낌을 받았다. 홀연 그의 머리에는 요상한 아이디어가 하나가 퍼뜩 떠올랐다. 그는 누님에게 그걸 선물로 달라고 졸랐다. 만져볼수록 연식 정구공처럼 탄성이 넘치고 보드랍기 그지없었다. '이 속에 무엇이 들어있지?' 궁금해 하며 속을 뜯어본 그는 두 조각 스펀지가 들어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문방구로 달려가 탁구 라켓을 10개 샀다. 그리고 탁구 라켓에 부착된 스펀지를 뜯어내 그것으로 브래지어를 10개 만들었다. 그는 그 수제품 브래지어를 가까운 의류상점에 팔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후 자신도 손님으로 가장하여 얼마나 팔리는가 하고 가보았더니 30분도 채 안되어 다 팔렸다.
상점 주인은 당장 린투치우에게 브래지어 2000개를 더 주문했다. 이제는 탁구 라켓을 사서는 안 된다. 어디서 스펀지를 구하지, 그는 약국에서 그 비슷한 것을 본 기억이 있어 근처 약국으로 달려갔다. 약국 주인은 스펀지만 전문으로 제조하는 공장을 그에게 소개해주었다. 린투치우는 브래지어와 생리대 등 여성용품을 전문으로 하는 제조회사를 차렸다. 그는 또 거기서 벌어들인 돈 20만 위안으로 마침내 신발공장을 세웠다. 한마디로 그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상품경제의 혈맥인 시장을 정확하게 짚어냈던 것이다.
지금 신발의 수도 진장은 산싱(三興) 안타(安踏)를 비롯해 제화업체 수만 약 2,000개 가까이 있다. 연간 3억 켤레를 생산하고 그 중 40퍼센트를 해외로 수출하고 있다. 중국 신발제조의 수도에서 세계 신발제조의 수도를 목표로 매진하고 있는 진장의 첫걸음은 빨랫줄에 널린 브래지어 한 개와 거기에서 돈줄을 잡은 한 촌사람의 천부적인 상품경제 마인드에서 내디딘 것이다.
***화교 중 최다수는 민난 사람**
약관의 남이 장군은 이시애 난을 평정한 후 백두산에다 평정비를 세우고 비문에 새기기를,
남아 스물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男兒二十未平國
뒷날 그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後世唯稱大丈夫
라는 시를 남겼다. 후에 이 비문은 '이마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너무 잘 나간다'고 생각해 질시에 차 잠 못 이루던 간신배에 의해 '나라를 얻지 못하면(未得國)'으로 변조되었다. 결국 젊고 푸르던 남이의 목은 서른도 못 되어 '추악한 음해'에 잘리고 말았다.
중국 민난 지방에는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말이 있다.
"나이 스물에 사장이 되지 못하면 사나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민난지방은 20대 전후의 청소년 사장들 천국이다. 남이 장군 나이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대여섯 개 업체의 사장이 되었다는 소식은 이미 뉴스거리가 아니다. 겁을 상실한 어떤 '무서운 아이'는 두 자리 수에서 세 자리 수의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민난상인들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악착같이 덤비는 것을 즐긴다. 민난상인은 수중에 10만 위안이 있으면 은행에서 다시 10만 위안을 더 빌려 투자하려고 한다. 다른 지역 중국 상인들처럼 쩨쩨하게 은행에 5만 위안을 저축하고 5만 위안을 투자하지는 않는다.
마오쩌둥은 북벌전쟁 시에 이런 말을 했다.
"광둥 사람은 혁명을 하고, 푸젠 사람은 돈을 내고, 후난 사람은 군인이 되고, 저장 사람은 관리가 된다."
푸젠 사람이 돈을 댄다는 것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푸젠 사람은 돈이 있고, 둘째는 돈을 대는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국가에 보답한다는 뜻이다.
타이완이 중소기업과 가족기업 형태가 발달한 원인도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타이완 사람 대부분은 명말청초에 섬으로 건너간 민난 사람들의 후예들이다. 세계 5천6백만 화교들 가운데 민난 출신이 2천여 만 명이다. 광둥 출신의 화교수와 비슷하게 많다. 특히 필리핀 화교 가운데 90퍼센트가,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의 8백만명이 민난의 후예들이다. 그래서인지 샤먼에는 필리핀 총영사관이 주재하고 있다.
타이완 해협 건너편 타이완 국민의 90퍼센트 이상은 민난 지역에서 명말청초에 건너간 사람들의 후예다. 타이완의 현재 총통 천수이벤(陳水扁)과 전 총통 리덩훼이(李登輝)의 원적지도 민난이다. 타이완 거주 2천만 명을 합친다면 대륙 밖에 살고 있는 중국인 중 민난 사람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한다. 또한 동남아에서 활약하는 세계적 거상들은 모두 민난 출신이다. 그들 민난 화교들이 이웃한 광둥 출신 화교들과 가장 다른 점은, 자녀교육이 엄격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특히 자녀를 현지인이나 백인과 피와 살을 섞게끔 절대로 가만 놔두지 않는다.
***대포로써 적의 돈을 벌다**
푸젠의 동쪽바다 건너편은 타이완이다. 냉전시대 타이완 해협은 한반도의 DMZ처럼 동족 대립과 상쟁의 해협이었다. 푸젠은 '타이완 해방'을 위한 대륙의 최전방 기지였다. 약 30여 년간 간헐적인 포격전이 계속되었던 타이완 해협은 개혁개방 이후 상쟁에서 상생으로 대전환을 이루기 시작했다. 평화와 발전이라는 세계적 조류가 그 '바다의 DMZ'에 밀어닥쳤다. 타이완 해협은 비행기로 25분이면 날아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다. 그러나 지리적 거리는 지척이었으나 심리적 거리는 천만리 머나먼 길이었다.
함께 피를 나눈 동족끼리 그렇게까지 싸울 필요가 없었는데, 서로 떼돈을 벌 수 있는 장사파트너였구나. 대체관계가 아니라 보완관계였구나 라는 사실에 눈을 떴던 것이다. 80년대 말 국민 1인당소득 6천 달러를 돌파한 타이완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 가운데 하나로 불렸다. '섬나라 민난', 즉 타이완의 외화보유고가 일본과 1, 2위를 다툴 만큼 불어나는 동안 '대륙의 민난' 푸젠은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80년대 초 잠에서 깨기만 하고 이불속에서 게으름을 부리던 푸젠이 실제로 침상에서 일어난 시기는 90년대 초였다. 좀더 정확히 베이징 시의 1인자며 당 중앙 정치국원인 자칭린(賈慶林)이 푸젠성 성장을 맡고서부터였다. 그는 당시로선 매우 대담한 두 마디 구호를 외쳤다.
"민(閩), 문(門) 사이에 있는 벌레 충(虫)을 용(龍)으로 변화시키자."
"소룡 타이완을 추월하여 대룡 푸젠을 건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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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은 푸젠의 농수산물과 공업원료를 원했고 푸젠은 타이완의 전자제품과 통신기자재와 자동차 부속품이 필요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시각으로 본 푸젠은 이미 타이완을 무력으로 침략하기 위한 군사기지가 아니었다. 타이완을 겨냥하였던 샤먼 해안의 수십 문의 장거리 대포들은 대륙으로 관광 나온 타이완 사람이 반드시 둘러보는 명소가 되었다. 대포로 (적지 주민들의) 돈을 벌고 있으니... 참 기가 막힌다.
푸젠은 타이완의 접경지대였다는 탓으로 중화학공업의 기초는 취약했지만 무역업과 유통업의 기반은 중국의 어떤 연해지방의 성에 비해도 손색이 없었다. 경공업과 부동산을 위주로 한 타이완의 투자가 밀물처럼 이루어지기 시작하자 경제개발에 추진력을 더했다. 1990년대 중반에 벌써 푸젠, 특히 민난 지역은 소비생활의 타이완화가 광범위하게 진행되어 주민들의 생활수준이 타이완과 비교해 별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민난 지역이 주도하는 푸젠의 경제발전은 최근 10년간 GDP 성장률이 연평균 13.7퍼센트에 달하는 쾌속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중국의 27개 성과 자치구 중 최고 속도의 경제성장률이다. 그러나 푸젠에 진출한 타이완 기업들의 투자는 노동집약적 경공업 또는 부동산, 위락시설 개발에 집중되는 폐단이 있었다. 최근 푸젠 정부는 미국과 유럽, 한국과 일본의 기업 들의 투자유치에도 노력하고 있다.
한국이 푸젠에 투자한다면 고려해야 할 장단점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장점은 타이완과 홍콩을 비롯해 해외와의 해상운송과 통신망이 편리하다는 점과 상하이와 광둥과 인접해 있어 투자비용은 상대적으로 낮은 점이다. 단점으로는 타이완 기업이 투자를 선점하고 있고, 아직 우리와의 해운 및 항공운송망 직항로가 개설되어 있지 않은 점이다. 그러나 이런 단점이 오히려 처녀지라는 희소성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한국 기업이 푸젠에 진출하면 중국 당국으로부터의 각별한 관심과 지원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샤먼경제특구의 중국 관리들은 이렇게 기염을 토하고 있다.
"민난 지방만을 도려내놓고 타이완과 비교한다면 이미 타이완을 추월했다. 이제 민난의 풍요를 푸젠 전역으로, 나아가 전 중국으로 확산시키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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