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서울시 일부 수도 검침원들은 주말과 휴일 근로수당, 연장 근로수당 등을 일절 받지 못했다며, 1억 원에 가까운 체불 임금 진정서를 제출한 바 있다. 이때에도 노동자들은 "위탁 업체는 형식적인 사용자일 뿐, 검침원들에게 실제 근무 지시를 한 곳은 서울시"라는 판단에 따라, 박원순 서울 시장을 상대로 진정서를 냈다. (☞ 관련 기사 보기 : [단독] 서울시 수도검침원, 임금 체불에 금품 상납까지?)
현재 서울 지역 상수도 계량기는 약 187만 3000개 소다. 서울시는 이 계량기에 대한 점검과 교체 업무, 관련 민원 처리, 수도 요금 고지서 송달 업무 등을 매 2년마다 시의회 동의를 거쳐 민간에 위탁한다. 시의회 동의안을 보면 서울시는 "공무원이 수행하는 것보다 민간 위탁이 인건비를 대폭 절감"할 수 있다며 민간 위탁 추진 필요성을 설명했다. 이에 따라 8개 수도사업소와 위탁 계약을 맺은 업체에 속한 수도 검침원은 330명, 교체원은 67명이다.
▲ 서울시 북부수도사업소에서 일하는 계량기 교체원이 10일 동파된 계량기를 떼어내고 새 계량기를 설치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하얀) |
서울시, PDA로 '직접' 업무 지시하고 검침원 해고 권한도 가져
우선 330명 검침원의 사정부터 보자. 검침원들은 누구나 서울시가 지급한 PDA로 업무를 본다. 각 수도사업소가 검침원의 PDA로 '7일(토) 장충동 2가 208-1 검침'과 같이 작업을 지시하면, 검침원들은 작업을 마친 후 PDA에 계량기 검침 결과를 입력해 원청이 관리하는 요금관리시스템으로 전송한다. 근무 지시를 하는 곳도, 결과를 보고받는 곳도 모두 위탁 업체가 아니라 서울시인 것이다.
이러한 업무 형태는 애초에 서울시가 위탁 업체를 선정키 위해 입찰자들에게 내건 '용역계약특수조건', '과업 지시서', '상·하수도 검침 관련 용역 적격심사 세부기준' 등의 문서에 이미 명시된 바다. 해당 문서들을 종합하면, 검침원들의 근무 시간과 장소·복장·인력 등을 결정하는 곳은 각 수도사업소 또는 서울시 상수도관리본부이며, 이들에 대한 평가·징계·해고 권한까지 원청이 가지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위탁 업체들은 서울시 요구에 따라 검침원의 근무 시간을 수도 사업소장과 '사전' 협의해 운영한다. 위탁 업체들은 용역 착수 10일 전까지 인력 배치 계획서와 종사원 교육 계획서, 징계 규정 등을 상수도관리본부나 사업소로 제출해야 한다. 또한 위탁 업체 검침원들은 관할 수도 사업소장이 지정하는 장소에서 근무해야 하며, 상수도사업본부에서 제시한 디자인과 색상을 따른 제복과 명찰을 패용해야 한다.
이는 지난해 '위장 도급' 의혹이 제기된 삼성전자서비스와 매우 유사한 근로 형태다. 이곳 하청 노동자들 역시, 휴대폰에 설치된 업무 프로그램을 통해 원청으로부터 직접 업무 지시를 받으며 원청인 삼성 로고가 박힌 유니폼을 입고 있다.
수도사업소는 공무원 5명과 하청 관리자 2명으로 구성된 평가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으며, 이 위원회가 일 년에 1~2회 검침원들의 업무 수행 능력을 100점 만점으로 평가해 부적격자를 골라낸다. 수도사업소는 이 부적격자와 잦은 민원을 야기하는 검침원들에 대해 위탁 업체에 징계 및 해고를 요구할 수 있으며, 이때 업체는 10일 이내에 이 요구에 응하고 결과를 통보해야 한다. 원하청이 도급 계약상 갑-을 관계란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노동자들에 대한 전적인 징계 해고 권한을 원청이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서울시 수도사업소 공무원이 계량기 교체 업무 '직접' 지시
교체원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진 않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은 PDA가 아닌 수도사업소 소속 공무원의 구두 업무 지시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수도사업소 공무원도 인정하는 바다. 지난 10일 <프레시안>이 만난 북부 수도사업소 김 모 팀장은 "서울시로 접수된 계량기 동파 민원 리스트를 출력해 여기(위탁 업체 노동자 사무실)로 '바로바로' 직원들이 '수시로' 가지고 내려와 신속히 민원을 처리한다"며 "다른 수도사업소도 같은 방식으로 운영된다"고 말했다.
▲ 서울시 중부수도사업소 검침원들이 사용하는 PDA와 명찰. 명찰에는 위탁 업체가 아닌 '중부수도사업소' 가 적혀 있다. ⓒ프레시안(최하얀) |
위장 도급의 정황들은 검침원들과 마찬가지로 계약 관련 서류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서울시 '수도계량기 교체공사 계약 특수조건'과 '시방서'를 종합하면, 위탁 업체는 교체원들의 인사 자료를 작성해 1부를 서울시에 제출한다.
만약 발주기관(서울시)이 업무 수행에 적정하지 않다고 판단한 교체원을 위탁 업체에 교체 요구하면, 업체는 이 교체원을 '즉시' 교체해야 한다. 아울러 교체원들은 서울시가 주관하는 월 1회 이상의 교육을 받고 상수도사업본부 주관 교육이나 회의 등에도 참석해야 한다.
교체원은 또한 사회 취약계층 시민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에는 그 내용을 기재하여 발주기관에 보고해야 하며, 서울시 지정 근무복 착용 및 명찰 패용 등도 의무 사항으로 계약 관련 서류들에 명시돼 있다.
이와 함께 "작업 완료 후 보온재 등은 교체 전의 원상태로 유지하고 물기를 닦은 후 주변을 깨끗이 정리한다"와 같은 현장 작업 수칙 또한 계약 관련 서류에 열거돼 있고, 교체원들은 매일 감독원(원청 직원)이 지급하는 서식에 맞추어 교체 작업과 결과 보고를 각 수도 사업소에 제출해야 한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류하경 변호사는 "누구보다 법을 준수해야 하는 국가기관이 가장 악의적인 간접 고용 형태인 위장 도급으로 공무원이 해야 할 일을 하청 노동자에게 내맡겨 놓고 있었다"며 "법적으론 물론 이는 도덕적으로도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류 변 호사는 "간접 고용 문제 해결을 강조해 온 박원순 서울시장인 만큼, 수도 검침원과 계량기 교체원 근로 실태와 위장 도급 문제를 지금이라도 해결하길 바란다"고 촉구했다.
한편, 이러한 지적에 대해 서울시 관계자는 "위장 도급 여부에 대해 검토 단계에 있다"며 "현재로선 할 말이 없다"고 밝혔다. 서울시 상수도관리본부 관계자는 "8개 수도사업소가 체결하는 수도 검침 및 교체 용역 계약을 설계한 곳은 본부"라고 밝힌 후, 이 외 문제들에 대해서는 "담당자가 자리를 비웠으니 잠시 후 답하겠다"고 10일 말한 후 현재까지 연락이 없었다.
위장 도급·불법 파견이란? 근래 많은 일터에서 사업주들이 인건비 절감과 사용자 책임 회피를 위해 중간 업체를 통해 노동자들을 간접 고용(용역, 하청, 위탁, 파견, 아웃소싱 등)하고 있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간접 고용 중에서도 '위장 도급'과 '불법 파견' 형태의 간접 고용은 특히 그 문제가 심각하다. 민법상 도급(어떤 일의 완성을 맡기고 그 대가로 보수(도급비)를 지급하는 약정)을 넘어서는 원청의 하청 노동자들에 대한 지시·감독·인사 권한 행사는 필연적으로 고용 불안과 근로 조건 저하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 심지어 중간 도급 업체는 '유령 회사'와도 같이 사업주로서의 실체가 없는 경우도 있다. 앞서 현대자동차, 이마트, 삼성전자서비스 등이 '위장 도급' 또는 '불법 파견 '논란에 휩싸였으며, 이 중 이마트는 고용노동부의 불법 파견 적발 이후 간접 고용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했다. 간접 고용 사업장이 고용노동부나 법원으로부터 위장 도급 또는 불법 파견 판정을 받으면, 해당 사업주에게는 하청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해야 할 의무가 생긴다. 또 각종 형사 처벌과 과태료를 물을 수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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