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켈이 독일의 목표로 꼽은 '사회적 정의'
독일에서 방송이나 토론회 등에 나온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 가운데 하나가 바로 'Soziale Gerechtigkeit(사회적 정의)'란 단어이다. 이 말은 상황에 따라 "사회적 공평성, 사회적 공정성, 사회적 정당성" 등으로 옮기는 것도 가능한데, 이 글에서는 '사회정의(社會正義)'란 말로 통일해서 쓰도록 하겠다.
이 '사회정의'의 문제는 지식인이나 정치인들의 일상적 친목 모임부터 연방 하원의 공식적인 논의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경제·정치적 논의들에서 최우선시되는 중요한 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다루는 것이 어려운 까닭은 무엇보다도 이 사회정의를 규정하는 구속력 있는 개념이 없다는 점이다. 또 다른 어려움은 이것이 객관적으로 보기 어려운, 항상 주관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어떤 사회적 사건이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들은 매번 무엇이, 그리고 어떻게 또는 어떤 방식으로 대처하고 해결하는 것이 사회정의에 적합한가를 놓고 다툰다. 예를 들어, 지난해 18대 총선에서 사민당(SPD)은 자신의 공약들이 좀 더 사회정의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이것을 끊임없이 내세웠었다. 같은 해 12월, 대연정을 통해 3번째 연방 총리가 된 메르켈은 자신의 정책 구상을 밝히는 첫 연방 하원의 연설에서 '우리의 목표는 유럽의 안정과 성장, 그리고 사회정의'라고 역시 이 점을 강조하였다. 독일인들이 이렇게 민감하게 따지고 드는 '사회정의'란 도대체 무엇일까?
▲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난해 9월 22일 치러진 총선에서 승리한 후 자축하고 있다. ⓒAP=연합 |
독일어 단어 'Gerechtigkeit'는 영어의 'justice'와 비슷한 말로, 그 형용사 형태는 'gerecht'인데, 이는 "공정한, 공평한, 정의의, 정당한, 적합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형용사는 원래 'recht'에서 온 말인데, recht는 "틀림없는, 정확한(richtig); 정당한, 정의에 맞는, 도리에 맞는, 공정한, 공평한(gerecht); 적당한, 적절한(passend); 당연한; 형편이 좋은, 바람직스러운(gelegen); 진정한, 진실의, 실제의(wahr, wirklich)" 등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영어의 'right'와 유사한 말이다.
이처럼 Gerechtigkeit의 뜻을 어원까지 들어가며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이 단어를 단순하게 '정의(正義)'로 옮겼지만, 사실은 훨씬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즉, 이 단어를 우리말로 단순하게 정의로 번역함으로써 정당성, 공정성, 공평함 등의 의미가 사라져버리는 것을 막아보고자 함이다. 이 말이 비록 한 단어이지만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서 각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쓰일 수도 있다는 점을 미리 강조해 두고자 한다.
평등과 불평등에 대해 반드시 사회적으로 합의해야
이와 유사한 개념은 이미 아리스토델레스부터 찾아볼 수 있었고,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많은 부분이 발전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 '사회정의'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세기 중반 '사회적 문제(Soziale Fragen)'와 연관 속에서였다. 이후 1960년대 후반부터 산업사회의 사회문제들이 본격화되면서 이 용어는 새로이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사회정의'라는 개념은 "어떤 사회에서 권리나 가능성, 그리고 자원들의 상대적 분배가 공정하다 또는 공평하다고 할 수 있는 사회적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결과적으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적 상태'의 기준이나 내용이 정확하게 무엇이냐를 둘러싸고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많고, 또 다양한 측면들이 존재한다.
이 개념은 또한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측정과 묘사가 가능하다. 반면에 사회정의는 그 측정이 쉽지 않기 때문에 묘사하기도 어렵다. 이는 오히려 어떤 사안에 대한 평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평가의 문제'란 '어떠한 결정이 사회정의에 부합한다, 또는 부합하지 않는다'라고 논의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어떤 사실에 대해 사회적으로 정의롭다고 생각하거나 약간의 불평등을 받아들일 만하다고 여길 때, 이런 것들은 반드시 정치적으로 타협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각 사안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항상 다르기 마련이고, 또 사회가 완전한 것은 아니어서 온전히 정의로운 사회는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한 사회가 "더 정의로운 사회를 지향하느냐?" 또는 반대로 "덜 정의로운 사회로 가느냐?"의 차이가 존재할 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바로 이러한 방향을 결정하는 데에는 정치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사회정의에 대한 질문은 결국 '평등의 문제'에 대한 것으로 귀결된다. 예를 들어 "시민들이 어떻게 똑같아야 하는가, 서로 다른 것을 어떻게 허용할 것인가, 이와 더불어 하나의 사회질서를 정의로운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와 같은 질문들을 던질 수 있다. 이것들은 사회정의가 반드시 모든 것의 평등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는 말이 아니라, 역으로 사회계약적 불평등을 일부 수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부지런하고 많이 일하는 사람이 게으르고 태만한 사람보다 많이 버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남녀가 똑같은 직업에서 서로 다른 급여를 받을 경우 보통 공평하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결과적으로 사회정의는 사회적 평등과 깊은 관련이 있다. "기회 또는 결과와 관련하여 어느 지점에 상대적인 평등이 존재해야만 하는가?"하는 질문에 대해 논쟁이 벌어지고는 한다. 예를 들어 "누구나 자신의 성공 또는 실패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는가? 복지, 사회안전망, 의료보험, 문화적 참여 등에서 결과적으로 모두 동등한 지분을 갖도록 국가가 배려해야만 하는가? 모두 같은 시간에 출발해야만 하는가, 또 모두 동시에 도착해야만 하는가?" 등의 문제들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서로 논의를 통해 합의하여 결정할 일이지, 사전에 어떤 정답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사회정의에 대해 모든 이가 동의하는 단일한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각의 개인들이 옳다고 믿거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합쳐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사회정의'라는 것은 결국 "사회 구성원들의 서로 다른 의견들을 종합하여 도출해 낸 '사회적 합의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대통령이 한 달에 얼마를 받는 것이 적당하냐는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국민이 납득하는 정도의 액수가 적절할 것이다.
어떤 사회에서 '사회정의가 없다 또는 부족하다'는 말은, 사회 구성원들 간에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사회정의가 거의 실종된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다. 이는 우리 사회가 크게 두 진영으로 갈라져 극단적 대립의 상태에 있으며, 사회정의에 대한 합의도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로 상대 진영을 타도의 대상으로 보고 있으며, 그에 따라 사회적 갈등이 극심한 편이다.
최근 밀양의 송전탑 건설, 철도공사의 민영화 문제 등이 그 구체적 사례들이다. 그것들은 옳고 그름이나 맞고 틀림의 문제라기보다는 서로 생각이 다른 사회 구성원들 간 합의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들도 결국은 우리를 위해 하는 일인데, 우리들 가운데 일부 또는 다수가 그것에 대해 극렬하게 반대를 한다면 논의와 조정, 대화와 설득을 통해서 뭔가 합의점을 찾아야지 무작정 힘으로만 몰아붙일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 국가보안법의 경우, 그 폐지 여부를 놓고 격렬하게 대립하자 결국 그 폐지를 유보하였는데, 이처럼 사회적 갈등이 심한 문제에 대한 판단이나 결정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회적 대립이 계속해서 더 심화한다면, 그것은 언젠가 폭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심각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갈등을 해소할 기제(제도적 장치)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를 위한 첫걸음으로 다음 편에서는 '사회적 합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해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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