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출시된 지엠대우 마티즈는 경차 돌풍을 일으키며 200만 대를 판매해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2009년부터는 쉐보레 스파크라는 이름을 달고 판매돼 4년 만에 100만 대를 돌파했습니다. 지난해 국내에서만 6만969대를 팔아 판매 순위 6위를 차지할 정도로 국내에서도 여전히 인기가 높습니다.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위기 때문에 사상 최악의 상황에 빠진 지엠을 구한 차가 스파크입니다. 지엠은 스파크를 전략 경차로 생산했고, 전 세계 150여 개국에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스파크는 우즈베키스탄과 인도 지엠 공장에 반제품(CKD) 상태로 수출돼 현지에서 조립하지만, 반제품을 포함해 전량 한국지엠 창원공장에서 만들어집니다.
지난 4년 동안 창원공장에서 완성차로 만들어 직접 수출한 규모는 68만7755대, 반제품 상태로 수출된 규모는 32만6175대였습니다. 한국지엠 세르지오 호샤 사장은 "스파크 100만대 판매 돌파는 GM 글로벌 경차 개발·생산본부로서 한국지엠의 위상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성과"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지엠 스파크 100만대 기록
마티즈에서 스파크까지 300만 대의 자동차를 만든 한국지엠 창원공장에는 2700명의 생산직 노동자가 일하고 있는데 정규직이 1700명, 비정규직 사내하청 노동자가 1000명입니다. 비정규직 비율이 무려 37%에 달합니다.
지난해 2월 28일 대법원은 한국지엠(옛 지엠대우) 창원공장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불법파견이라고 판결했습니다. 2010년 7월 22일 현대자동차에 대해 불법파견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에 이어 나온 의미 있는 판결이었습니다.
2005년 노동부는 당시 지엠대우 창원공장의 조립, 차체, 도장, 자재 보급, 반제품(KD)에서 일하는 6개 하청업체 소속 843명의 사내하청 노동자에 대해 합법도급이 아니라 불법파견이라고 판정했습니다.
이어 검찰은 "제조업 직접생산 공정업무인 차체 조립 등 자동차 생산 업무에 종사하도록 함으로써 위법한 근로자 파견의 역무를 제공받았다"며 근로자파견법 위반 혐의로 닉 라일리 전 사장에게 벌금 700만 원을 구형했고, 대법원에서 이를 최종 확인한 판결이었습니다.
대법원은 "근로자들의 업무 내용이나 범위, 노무제공 방식 등을 종합해 볼 때 이 사건 근로관계의 실질은 도급이 아닌 근로자 파견이어서 유죄가 인정된다는 판결"이라며 "이번 판결이 불법적으로 이뤄지는 근로자 파견 관계로부터 해당 근로자들을 보호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습니다.
대법원에서 불법파견이라고 판결받은 창원공장
대법원 판결 이후 법원이 발표한 것처럼 "불법적으로 이뤄지는 근로자 파견 관계로부터 해당 근로자들을 보호하는 데 기여"했을까요? 불법파견으로 인정받은 843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정규직으로 전환되었을까요?
지난 12월 17일 고용노동부는 창원공장과 사내하청업체 8곳을 조사한 결과 불법파견에 대한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한 한국지엠 창원공장에 대해 불법파견 혐의가 없다고 발표했습니다.
창원지청은 △파견 사업주에 대한 실체 판단 △사용 사업주 지휘명령 △협력업체 직원 채용과 해고 결정권 △소요자금 지급조달 책임과 권한 등을 두고 불법파견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고, 사내하청 노동자 100여 명의 설문조사에서도 불법파견이 적발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고용노동부 창원지청은 "최근 특별 점검에 나선 현장은 지난 2005년 당시와 비교해 많이 개선됐다"며 "혼재작업의 경우 원청업체와 협력업체가 완전히 분리된 것을 확인했다"고 했습니다.
정부는 불법파견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하기는커녕 불법파견에 면죄부를 주었고, 대법원 판결은 농락당했으며 판결문은 휴짓조각이 되었습니다. 불법파견을 인정받은 843명의 노동자 중에서 단 한 명도 정규직이 되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노동부도, 검찰도 인정했고, 대법원까지 확인한 불법파견이 어떻게 합법도급으로 둔갑했을까요? 이런 신통방통한 요술방망이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요?
▲ 운전석 모듈. ⓒ박점규 |
대법원 판결 농락한 정부
이 공장의 사내하청 노동자인 김희근 씨(33)는 2008년 2월부터 6년 동안 스파크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는 운전석 모듈에 에어컨 컨트롤러를 부착합니다. 그와 동료들 12명이 작은 컨베이어벨트에 따라 들어오는 운전석 모듈에 계기판, 에어컨, 오디오 등을 차례로 조립합니다.
조립된 모듈은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바로 옆에 있는 정규직 노동자에게 전달됩니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차체와 도장 공정을 거쳐 큰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들어오는 본체에 하청 노동자들이 조립한 운전석 모듈을 조립합니다.
문짝을 조립하는 과정도 똑같습니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작은 컨베이어벨트에서 문짝에 들어가는 전선, 유리, 사이드미러, 손잡이, 전원컨트롤러 등을 조립해 문짝을 완성합니다. 이 문짝은 바로 옆에 있는 정규직 노동자에게 전달되고, 정규직 노동자는 스파크에 조립합니다.
2008년 이전까지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뒤섞여 문짝을 조립하고, 운전석에 있는 자동차 부품들을 조립하던 방식에서 비정규직만 바로 옆으로 떼어내 업무를 분리한 것입니다. 조립부에서 모듈을 조립해 공급하는 일을 비롯해 자재 보급, 서열 보급, 간단한 부품 조립 업무를 정규직과 분리해 비정규직만 모아놓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화재 진압에서 주요 업무인 불을 끄고 인명을 구하는 일은 정규직 소방관이 하고, 소방차를 운전하거나 화재 현장 진입을 위해 문을 부수거나 소화기를 전달해주는 일은 비정규직 소방관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강도를 잡는데 주요 업무인 강도를 잡아서 수갑을 채우고 조사하는 일은 정규직 경찰이 하고, 신고를 받거나 강도를 경찰서까지 후송하는 일은 주요 업무가 아니니까 비정규직 경찰이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화재 진압은 정규직 소방관, 소방차 운전은 비정규 소방관이 한다면?
신고를 받고 출동해 화재를 진압하고 인명을 구한 후 돌아와 장비를 정비하는 일련의 노동을 구분할 수 없듯이 차체에서부터 시작해 도장과 조립 공장을 거쳐 자동차 한 대가 완성되는 일에 참여하는 노동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컨베이어벨트라는 자동흐름방식의 자동차 생산 조립공정에서는 어느 한 부분을 떼어내어 도급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당연하고, 대법원 판결의 취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희근 씨와 동료들 12명이 운전석 모듈을 만들지 않는다면 단 한 대의 스파크도 생산될 수가 없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사내하청업체 사장들을 '바지사장'이라고 부릅니다. 대부분 전직 한국지엠 관리자들인 '바지사장'들은 원청의 지시 없이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희근 씨가 속한 '종합개발'이라는 사내하청업체 사장이 돈을 많이 벌겠다며 스파크는 하루 650대가 생산되는데 운전석 모듈을 1500개를 만들 수 없고, 다른 기업들처럼 회사 창립 기념일이라고 하루 휴무를 할 수도 없습니다.
하청업체는 사업주로서의 독립성과 독자성이 취약하고 한국지엠의 노무 대행기관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하청업체는 위장도급 회사이고, 원청이 하청노동자를 사용하는 시점부터 근로계약을 맺은 '묵시적 근로계약 관계'입니다.
하청업체는 독자성이 없는 노무 대행기관
그러나 2010년과 2013년 대법원은 현대차와 한국지엠(옛 지엠대우)의 사내하청에 대해 독립성이 있다며 묵시적 근로계약관계를 인정하지 않았고, 원청회사의 지휘명령만을 인정해 파견관계에 있다고 판결했습니다.
사용자들은 원청회사가 직접 지휘명령을 하지 않고 하청업체 '바지사장'을 통해서 지휘명령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 입증하면 불법파견을 피해갈 수 있게 됐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섞여 있는 공정을 분리하고, 원청의 지시가 담긴 문서를 하청업체 사장의 이름으로 바꾸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 운전석 모듈. ⓒ박점규 |
법원에서 위장도급을 인정하지 않고, 불법파견만 인정한 '반쪽짜리' 판결문이 불법을 은폐하고 방조하는 면허증이 되고 만 것입니다. '묵시적 근로계약관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 불법파견 판정은 843명 중 일부 발탁채용을 제외하고 근로자파견법에 의해서는 단 한 명도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못하는 비극의 씨앗이 된 셈입니다.
불법파견 노동자를 보호해야 할 정부는 아예 사용자들이 범죄를 은폐할 시간을 넉넉하게 벌어주었습니다. 2010년 12월 23일 창원지방법원에서 불법파견 판결이 났지만 3년 동안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2013년 2월 23일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고도 10개월 동안 시간을 벌어주다가 12월이 되어서야 형식적인 근로감독을 하고 합법도급이라며 면죄부를 주었습니다.
금속노조 경남지부는 노동부의 무혐의 발표에 대해 "대법원 판결 이후 열 달이나 지나 특별근로감독을 하는 바람에 불법파견 증거가 모두 지워졌다"며 "정규직과 섞여 일하던 하청업체 직원들을 한쪽으로 몰아 일하게 한 것밖에 없다"고 반발했습니다.
2005년 노동부 판정으로 보면 불법을 세탁할 시간을 10년이나 준 셈이고, 2010년 법원 판결 이후에도 만 3년 동안 불법을 방치한 것입니다.
반쪽짜리 대법원 판결문이 비극의 씨앗
한국지엠 창원공장에는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800여 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으며, 2차 하청까지 포함하면 1000명에 이릅니다. 김희근 씨를 포함해 1차 하청업체 중에서 500여 명이 단기계약직 노동자입니다.
하청업체와 1개월, 3개월, 6개월 단위로 계약을 맺고 계약을 갱신하면서 5~6년씩 일하고 있습니다. 퇴직금을 주지 않기 위해 1년이 되기 전에 잠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일하기도 하고, 다른 업체로 보내 일하기도 합니다. 4년 만에 100만 대 생산을 달성한 스파크가 편의점 아르바이트처럼 초단기 계약직 노동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2008년부터 창원공장에서 일해 온 김희근 씨는 2010년 8월부터 종합개발이라는 하청업체와 초단기 계약을 맺으며 3년 동안 일해 왔습니다. 회사는 퇴직금 등을 주지 않기 위해 중간에 일주일씩 집에 갔다 오게 했습니다.
2013년 8월 회사는 희근 씨에게 1개월짜리 초단기계약에 서명하라고 했고, 이를 거부하자 해고했습니다. 이에 대해 경남지방노동위원회는 1월 6일 심문회의를 열어 "총 근로기간이 2년을 넘겼기 때문에 중간에 공백이 있다 하더라도 기간의 정함이 없는 노동자로 봐야 한다"며 부당해고를 인정했습니다.
한국지엠은 현대자동차와 함께 대법원까지 불법파견을 이긴 사업장이지만 비정규직 조합원은 11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현대차에서는 1600명이 현대차의 정규직 소송을 하고 있지만 한국지엠 창원공장은 다섯 명만 소송을 냈습니다.
김희근 씨는 2005년 파업 패배의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있고, 정규직 노조가 움직여야 하는데 소수의 정규직 활동가들을 빼면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에 비정규직이 나서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3개월 단위의 초단기계약으로 인해 고용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소송은 멀고 주먹은 가깝기 때문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지엠은 비정규직을 한곳에 몰아넣어 불법파견 판결을 피해가고 초단기 계약직 노동자를 사용해 비정규직 노조 활동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현대자동차도 한국지엠을 따라 신규채용을 통한 공정재배치와 촉탁직 사용을 통해 불법파견을 피해가려고 있습니다.
2014년은 노동부가 현대자동차를 비롯해 주요 자동차 공장의 사내하청 노동자가 불법파견이라고 판정한 지 10년이 되는 해입니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불법파견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싸운 지 10년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불법을 바로잡기는커녕 불법파견을 묵인, 은폐, 조장하고 있는 정부와 위장도급을 인정하지 않은 법원의 반쪽짜리 판결문 때문에 사내하청 노동자의 정규직화 꿈은 점점 아득해지고 있습니다.
멀리 있는 반쪽짜리 법원이 아니라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스스로 뭉쳐 싸우는 길밖에 없습니다. 2014년, 100만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대표해 싸우고 있는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관심과 응원이 집중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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