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 전 조선은 시대정신에 뒤떨어졌다. 오히려 그 반대로 갔다. 백성을 중심으로 사회를 혁파하자는 운동에 지도세력은 외세와 손을 잡고 철퇴를 가했다. 지도층 일부가 시도한 정치개혁은 외세와 수구파의 역풍에 실패로 끝났다. 서양과 동양 사이의 세력 전이(轉移), 중국과 일본 사이의 세력 전이(轉移) 한 가운데에서 조선은 중심을 잃고 이 외세, 저 외세와 손을 잡기에 급급했다. 그 결과 조선은 근대국가 수립에 실패하고 주권을 잃었다.
60년 전 갑오년인 1954년, 당시 한반도는 3년 전쟁을 겪고 한반도 분단체제 공고화를 시작했다. 한미일 삼각동맹을 축으로 하는 해양동맹과 북·중·러를 축으로 하는 대륙동맹 사이에, 이삼성의 표현대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 대분단은 120년 전 실패한 근대국가 수립의 과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한반도와 중국은 분단되었고, 일본은 '기지국가'화 되었기 때문이다.
21세기 첫 갑오년, 동아시아는 또 다른 국제정세의 격랑을 경험하고 있다. 120년 묵은 과제와 60년 묵은 과제가 복합적으로 결합하며 갈등의 폭발이냐, 해소냐의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이 격랑 속에서 한국은 삼각파도 앞에 서 있다.
첫 번째 파도는 미·중 경쟁의 파도다. 지난 120년간 서서히 힘을 회복한 중국은 온전한 주권행사를 주장하며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를 흔드는 실력행사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난 60여 년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에서 패권을 행사해 온 미국은 '재균형'으로 이에 대응하고 있다.
두 번째 파도는 중·일 경쟁의 파도다. 중국과 일본 사이의 세력전이에 대응해서 일본은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를 지키는 미국의 첨병 역할을 자초하고 나섰다. 미·일 동맹을 절대시하며 미국으로부터는 집단자위권 지지를 얻어내고 '보통국가'의 길을 성큼 가고 있다. 중국은 센카쿠/댜오위다오(尖角列島, 중국명釣魚島)를 포함하는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한 것에서 드러나듯이 일본에 대한 압박을 늘리고 있다.
세 번째 파도는 북한이 일으키고 있다. 2013년 봄에 보여준 것과 같이 핵무기보유국가를 자처하며 한반도분단과 동아시아 분단에 강하게 도전하고 있다. 2013년을 거치며 김정은 체제를 공고화한 데 이어, 경제력뿐만 아니라 군사력에도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2014년 신년사에서는 "이제 이 땅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나면 그것은 엄청난 핵 재난을 가져오게 될 것이며 미국도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며 이전에는 없던 강력한 경고를 추가했다.
갑오년 격랑은 두 가지 방법 중 한 가지로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동아시아 삼국은 근대적 주권국가의 완성으로 현재의 격랑을 돌파하려 할 수 있다. 중국은 통일 중국을 완성하여 자신이 주장하는 영토와 영해에서 주권을 행사하는 것이며, 일본은 군사력을 보유하고 분쟁을 전쟁으로 해결할 수도 있는 '보통국가'를 완성하는 길이다. 중국과 일본 사이의 충돌가능성이 현저히 높아지고, 남북도 군사경쟁을 격화시킬 것이다. 한반도는 통일국가로 주권을 행사하기가 더 어려워지고, 설사 통일이 되더라도 중·일 갈등과 미·중 경쟁 사이에서 활로를 찾기가 난감한 조건에 놓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동아시아는 더욱 심한 격랑에 시달릴 것이다.
반대로 동아시아 삼국은 통합적 탈현대국가로 현재의 격랑을 돌파할 수도 있다. 다원적 다인종적 원칙 아래 '하나의 중국' 및 '연합방 코리아'를 구성하는 것이다. 또, 근대적 웨스트팔리아 주권행사를 초국가적 틀 안에서 스스로 제한하여, 일본의 '평화국가'를 지키고 중국과 코리아가 이를 본받는 것이다. 동아시아 지역안보협력기구를 구성하여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갈등적 요소를 해소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미·중 신형대국관계가 평화로운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모든 변화를 추동하는 힘은 한반도에서 나올 수밖에 없고, 따라서 코리아는 동아시아의 핵심국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21세기 첫 갑오년, 국제정세가 복잡할수록 멀리 보자. 그리고 한 걸음씩 착실하게 내딛자. 가야할 방향은 오히려 더 뚜렷해지고 있지 않은가. 가장 중요한 첫걸음은 아무래도 남북관계이다. 남과 북이 호흡을 맞춰 손을 잡아야 이 격랑을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신년사에서 북이 그 단초를 마련해줬다.
2013년 신년사는 "남조선의 반통일세력은 동족대결정책"을 버려야 한다고 대결적인 모습을 보였다면, 2014년 신년사는 구체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과제를 제시했다. 남북 간의 '대결해소'나 그 보다도 하위인 '관계개선' 조차 목표로 상정하지 않고 '관계개선을 위한 분위기 조성'을 제시했다. "북남사이의 관계개선을 위한 분위기를 마련하여야" 한다며, 구체적으로 "백해무익한 비방중상을 끝낼 때가 되었"으며 "민족을 중시하고 통일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든 과거를 불문하고 함께 나아갈 것"이라며 유화적인 손을 내밀었다. 한반도신뢰프로세스에 대한 화답인 듯 싶기도 하다.
2014년, 상호비방 중단하고 신뢰의 단초를 마련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21세기 첫 갑오년, 신뢰를 만들기 위해 구체적 조치를 선제적으로 취하자. 동아시아 격랑을 헤쳐나갈 힘은 그 첫걸음에서 나올 수밖에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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