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기자, 월요일에 여성 활동가들만 모여서 KBS 수신료 반대 기습 기자회견 할 거야. 다른 사람들한텐 말하지 말고 몰래 와줘. 미리 알려지면 KBS에서 쫓아낼 테니까."
이것이 지난 16일 오전 11시 20분, 한국방송공사(KBS) 시청자광장에서 '기습 기자회견'이 열린 내막이다. (☞ 관련기사 보기 : "KBS, 수신료 인상 항의 기자회견 '과잉 진압' 논란")
그렇다. 월요일 기습 기자회견은 언론단체 활동가들이 철저히 기획한 사건이었다. KBS가 수신료 인상 반대 여론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떠보려는 명백한 '도발'이었다. 기습 기자회견 장소를 굳이 본관 '시청자광장'으로 정한 것도 전략이었다. 언론단체 활동가도 시청자이니, 시청자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하면 적어도 무자비하게 쫓아내진 않으리라는 잔꾀를 부린 것이다.
기자도 별일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KBS 수신료 인상에 대한 비판 여론이 많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따라서 언론단체의 기자회견은 대수로운 일도 아니다. 더군다나 참가자들은 모두 여성 활동가들뿐이다. 큰 충돌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 짐작했다. '사진'이 필요한 일이 없겠거니 싶어 사진 기자 선배에게 따로 연락도 하지 않았다.
오판이었다.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광장에 선 지 5분도 안 돼 KBS 사내 '진압조'가 출동했다. 참가자들은 "회견문을 읽고 조용히 끝내겠다"고 했다. 그러나 회견문 두 문단을 채 읽기도 전에 청원경찰들은 회견문을 압수하고, 참가자들의 팔을 잡아챘다. 끌어내는 손길엔 주저함이 없었다. 악악대는 비명과 함께 "여기는 모두에게 개방된 곳 아니냐"는 목소리가 시청자광장에 울렸다. 준비해 간 노트북보다는 녹음기, 카메라가 필요한 현장이었다.
사건의 현장을 담는 사진 기자들도 막았다. 기자들은 "언론사에서 어떻게 취재 방해가 일어날 수 있느냐. 다 보도할 것"이라고 반발했다. 기자들의 경고에도 진압은 얼마간 계속됐다. 작정하고 건 도발을 KBS는 오히려 '보란 듯이' 받아쳤다.
뒤늦게 보고를 받고 내려온 KBS 홍보실 부장을 만났다. 18년 간 기자 생활을 했다는 홍보실 부장은 "취재를 방해한 점에 대해선 기자분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회견 참가자들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그는 "기자회견을 하려면 미리 공문을 보내고, 지정된 장소에서 해야 했으며, 시청자광장은 그런 단체 사람들이 기자회견을 할 장소가 아니"라고 말했다. "기자도 언론단체 활동가들도 결국 시청자인데, 시청자가 시청자의 광장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게 왜 안 되느냐"고 물었다. 곧 답변이 돌아왔다. 그가 말한 '시청자광장'이라는 장소의 성격이란 이러했다. 'KBS 방송을 홍보하고, 그와 관련된 목적으로 방문한 시청자와 국민을 위해 마련한 공간.'
의문이 들었다. 시청자광장이 왜 자사 홍보 공간이 되어야 하는 건가. 단순 홍보 목적이라면 '시청자광장'이 아닌 'KBS 홍보 광장'으로 이름을 바꿔야 하는 것 아닌가. KBS를 비판하는 시청자는 시청자가 아닐까. 나를 따르지 않으면 적으로 치부하는 '배제의 논리'가 '국민의 방송' KBS의 사고의 밑바탕에 깔렸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 서울 여의도 KBS 사옥 모습. ⓒ프레시안 |
"반대 여론에 눈과 귀 닫은 방송이 국민의 방송?"
이러한 배제의 논리는 불공정 보도로 이어진다. 최근 KBS의 수신료 인상 관련 보도는 가히 불공정 보도의 모범(?) 사례로 기록될 만하다. KBS 수신료 인상안 관련 기자회견이 열린 지난 11일, 종합편성방송 JTBC와 KBS의 뉴스 앵커 멘트를 그대로 가져왔다.
"월 2500원인 수신료를 4000원으로 올리겠다는 KBS 수신료 인상안. 곧바로 야당과 시민단체의 반발이 나왔습니다. 민주당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들은 성명서를 내고 '공영방송 지배구조의 개선 없이 수신료를 인상하는 건 국민의 저항과 분노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언론 관련 단체들도 반발했습니다." (12월 11일 자 JTBC <뉴스9>)
"어제 KBS 이사회가 이 수신료를 현실화 방안을 통과시켰는데요. 길환영 KBS 사장은 오늘 기자회견을 갖고 수신료 현실화가 왜 필요한지 설명하고 국민 여러분의 이해와 지지를 부탁했습니다." (12월 11일 자 KBS <뉴스9>)
앵커멘트뿐 아니라 보도 내용에서도 KBS는 수신료 인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완전히 제거했다. 대신 수신료 인상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내용만 실어 보냈다. '보도 공정성' 원칙은 온데간데없이 오직 '자사 홍보'만이 남았다. 언론사가 아니라 한낱 이익단체에 불과하다는 악평이 뒤따른 건 당연했다.
그럼에도 KBS는 당당했다. 11일 기자회견에서 KBS 길환영 사장은 자사 뉴스에 대해 "소수 측 이사들이 주장하는 보도 공정성과 제작 자율성을 담보하기 위한 장치는 이미 만들어져 제대로 시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보도 공정성이 이미 확립됐단 얘기다. "보도가 왜 이렇게 망가졌느냐"는 비난 여론에 "우린 잘하고 있는데 너희는 왜 이러니"라며 맞받아치는 모양새다. '종박(從朴) 방송' 비판을 듣는 판국에 공정성이 지켜지고 있다니, 그 생각의 근거가 궁금할 따름이다.
사실 여론을 주의 깊게 본다면, 수신료 반대 주장을 하는 이들이 수신료 인상 그 자체에 반대하는 건 아님을 알 수 있다. KBS 경영난에 대해선 어느 정도 수긍을 하는 분위기다. 다만 지금보다 나을 거라는 '믿음의 근거'를 대라는 것뿐이다. 이런 여론을 무시한 채 돈만 더 내라며 '대국민 호소'를 하는 것은 시청자들과 국민을 기만하는 일이다.
거창한 포부는 필요 없다. 지금까지 공정 방송에 소홀했음을 인정하고, 무너진 보도 공정성을 다시 세우겠단 의지라도 밝혀야 한다. KBS가 '국민의 방송'이 아닌, '국민의 (혈세를 축내고, 국민을 기만하는) 방송'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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