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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희망 버스, 불우 이웃이나 도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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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희망 버스, 불우 이웃이나 도우라고?"

[기자의 눈] 밀양 주민에게 희망 버스가 천군만마인 이유

30일 밀양 희망 버스 동승을 앞두고 걱정이 태산이었다. 희망 버스에 탑승해본 경험이 없어서 더 그랬다.

희망 버스를 둘러싼 논란이야, 현장에서 두 눈으로 확인하고 본대로 쓰면 그만이었다. 정작 아리송한 것은 따로 있었다. 직장인에게 삶의 희망이나 다름없는 귀한 주말에, 참가자들은 왜 희망 버스에 탑승한 걸까? 외지에서 온,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방문이 그토록 힘이 된다는 이유가 뭘까? 이번 희망 버스 동승은 이 밑도 끝도 없이 일차원적인 궁금증을 없애기 위한 여정이기도 했다.

희망 버스 참가자, 어쩌면 별종?

밀양 희망 버스는 30일 오전 서울 대한문 앞에서 출발했다. 언론은 희망 버스 참가자들을 쓸 때 주로 단체 위주로 서술한다. 일부 기사만 보면, 큰 뜻을 도모하기 위해 단체 차원에서 의무적으로 참가한 별종들만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실제로 보니, 그저 '가봐야 하지 않나' 싶어서 지인과 나들이 가듯 참가한 사람이 많았다. 본인이 사는 곳과 멀고 먼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에 부채 의식과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이 별종이라면 별종이겠다. 이 험하고 바쁜 세상에서 말이다.

희망 버스 첫 경험자답게, 혼자 뒤처질까 봐 초조한 얼굴로 헤매다가 이보아 밀양 희망 버스 기획단 대변인과 같은 버스에 타게 됐다. 그는 밀양으로 향하는 내내 기자들의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끔 제3자 입장에서 듣기에도 짜증 나는 통화 소리가 들려왔다.

기자들은 주로 '어떤 단체에서 왔는지'를 세세하게 확인하려 했고 이 대변인은 왜 취재의 초점이 단체에 맞춰지는지 답답해했다. 대변인의 답변만 들어도 질문을 알고도 남았고 또 그런 질문만 쏟아지는 이유도 짐작은 갔다. 개개인의 목소리를 담는 것보다는 단체의 강령이나 구호를 한 줄 적는 편이 늘 더 쉽다. 서울에서 전화 취재를 했더라면 내 질문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 같아, 뜨끔해하며 눈을 감았다.

▲ 1일 산외면 보라 마을 입구에서 희망 버스 참가자들과 밀양 주민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문화제가 열렸다. 한 희망 버스 참가 여성과 밀양 주민이, 헤어지기 전에 포옹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무뚝뚝한 경상도 노인, 서울에서 온 외지인의 손을 잡다

창문에 머리를 박아가며 졸다가 오후 4시께 상동면 여수 마을에 진입했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는 "희망 버스에 낼 회비가 있거든 불우 이웃 돕기를 하십시오"라고 적힌 펼침막이 나부끼고 있었다. 버스로 너댓 시간은 족히 걸리는 곳의 일을 내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불우 이웃 돕기도 이미 어련히 알아서 잘했겠거니 싶어 웃음이 나왔다.

추위에 죽을 각오로 옷을 잔뜩 껴입었건만, 생각보다 바람은 매섭지 않았다. 사람들은 손수건만 한 깃발을 들고 걸었다. 특별한 구호도 없었다. 도보 순례단이라 해도 무방할 듯했다.

마을 골목마다 경찰이 빼곡했다. 손에 깃발을 든 사람들을 상대로 경찰들은 방패를 들고 서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그저 고맙다며 또 와달라고 부탁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말주변도 없고 무뚝뚝한 성격일 경상도 노인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처음 보는 서울 젊은이들의 손을 잡고 연신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설명 한 번 듣지 못한 채 평생 일궈온 내 집, 내 논·밭에 765킬로볼트 초고압 송전탑이 들어서는데 누가 보고만 있을까. 그런데 반대에 나서자 사람들이 돈 욕심을 낸다고 손가락질한다. '돈은 필요 없다. 살던 대로만 살게 해달라'고 백 번 천 번 말해도 그렇다. 심지어 그 송전탑이 들어서는 이유도 석연치 않다는 사실이, 국정 감사에서까지 드러났다. 근 10년째 이렇다.

이런 상황에서 전국 각지에서 손을 내미니 그 벅찬 마음을 말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굳이 왜 고마워하느냐고 묻지 않아도 이해가 갔다.

"주민에게 희망 버스는 천군만마"

다음날인 1일, 상동면 고답 마을 109번 공사 현장 입구를 찾았다. 주민들은 보통 새벽 6시에 나와서 오후 6시까지 자리를 지킨다고 했다. 그렇게 12시간을 앉아 있어도 경찰의 저지로 공사 현장은 구경도 할 수 없다.

마을 주민 조모(여·65) 씨는 전날 드디어 110번 현장을 한번 볼 수 있었다. 희망 버스 참가자들과 함께 현장으로 올라간 덕분이다. 조 씨는 "희망 버스 아니면 우리는 현장 못 가"라고 말했다.

밥을 먹었느냐고 묻기에 아직 먹지 않았다고 하자 화들짝 놀라며 조 씨가 식사 차량으로 손을 잡아끌었다. 본인들은 매일 같이 12시간을 길에서 보내며 하루하루 전쟁 같을 텐데, 고작 하루 왔다 가는 사람이 배곯을까 걱정해주는 모습이 매우 넉넉해 보였다.

마지막 일정은 마무리 집회였다. 집회가 열리는 보라 마을에서 이계삼 '밀양 765킬로볼트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을 만났다. 지난해 1월 이치우(당시 74세) 씨가 분신 자살한 보라교 입구에 이 씨의 사진이 놓여있었다. 그 앞에서는 향이 타고 있었다. 이 사무국장은 그것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많이 지친 얼굴이었다.

그에게 "주민분들이 희망 버스를 정말 좋아하셔서 놀랐다"고 말하자 웃으며 한 마디로 답했다.

"여기 주민분들한테는 희망 버스가 천군만마죠. 뭐."

문득, 요즘 세상에 재화가 아닌 사람으로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을 느낀다는 것이 얼마나 드문 일인지 생각해 봤다. 서울로 향하는 내내 그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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