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 아닌 인권위 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우가 알려지면서다. 얼마 전 두 차례에 걸쳐 일일 파업을 벌였던 인권위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지난 12일 만났다. 밖으로는 '인권 경영'을 외치는 인권위가 내부 비정규직에겐 어떤 대접을 하고 있는지, 어쩌다 파업으로까지 사태가 번지게 됐는지 등을 들어봤다. <편집자>
▲ 지난 12일 국가인권위원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일일 파업을 선언한 후, 인권위원장실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공공운수노조 서울경인지부 인권위분회 제공 |
프레시안 : 인권위 안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단 사실만으로도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공공기관 비정규직 문제가 하루 이틀 거론된 것은 아니지만, 명색이 인권위다. 인권위 비정규직으로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처우를 받고 있는지 궁금하다.
정미현 : 인권위 안에는 운전원, 사무 보조원 등 다양한 비정규직이 있다. 여기(인터뷰) 모인 사람들은 모두 인권 센터 상담원들이다. 인권위로 들어오는 수많은 인권 침해나 차별 사례를 상담한 후 어떤 주제로 어떻게 진정 접수를 하면 되는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쉽게 말하면 일종의 '교통정리'를 하는 거라고 보면 된다.
양윤정 : 상담 업무는 인권위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업무이자 상시·지속 업무다. 그런데 상담 센터 상담원 전원이 비정규직이다. 처음 인권위가 생겼던 12년 전엔, 비정규직도 아니었다. 일당 3만 원을 받는, 6개월마다 재위촉하는 위촉직 자원 활동가였다. 말만 멋있지, 사실상 저임금 아르바이트였던 거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셈이다.
비정규직보호법이 시행됐던 2007년, 일당직 직원에서 비정규직 직원이 됐다. 2년 계약직을 거친 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는 방식이 이때 정착됐다. 처음부터 무기계약직으로 채용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데 굳이 2년 계약직 기간을 관행적으로 거치도록 돼 있다. 두 번째 잘못 끼운 단추다.
무기계약직 임금 빼서 기간제 처우 개선?
프레시안 : 저임금과 차별 대우 문제 역시 2007년 만들어진 체계의 연장선인가.
김미숙 : 그렇다. 2007년에 정한 근로 조건이 지금까지 큰 변화 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다른 공공기관 무기계약직에 비해 인권위 무기계약직은 외려 급여가 더 적다. 현재 무기계약직 1호봉 월급이 110만 원을 약간 웃돈다. 공무원 9급 1호봉원 급여의 70% 수준이다. 근속연수가 길어질수록 정규직-비정규직(공무원) 급여 차이는 더 벌어져서 입사 12년 차가 되면 차액이 월 90만 원을 넘게 된다.
법정 최저임금을 간신히 넘는 저임금, 그리고 공무원과의 두드러진 임금 차별을 지난 12년 동안 말없이 참으며 지냈다. 그러다 올 초에 비정규직에겐 별도의 명절 상여금이 없고, 그저 5만 원이 담긴 '격려금' 봉투만 주어진다는 서러운 사정을 내부 온라인 게시판에 적었는데, 순식간에 공론화가 됐다. 그러자 위원장이 비정규직 처우 문제를 검토하라고 지시했고, 3월에 위원회 측에서 새로운 임금 체계를 들고 왔다.
양윤정 : 그 새 임금 체계란 것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오래 일한 무기계약직 직원들의 급여를 깎아 기간제 직원들의 무기계약직 전환 비용으로 쓰겠단 방식이었다. 그 방식대로라면, 나(12년 차, 월 급여 약 200만 원)의 경우엔 월 15만 원이 내려앉는 것이었다. 전체 예산은 고정해 놓고 윗돌 빼서 아랫돌 괴겠단 발상이다.
김미숙 : 우리가 반발하자 위원회 측은 '국가기관 예산은 전년도에 이미 결정된 것이니 당장은 이게 최선'이라고 했다. 여기서 오래 일한 사람들은 그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전년도에 정한 예산이라도, 그것을 초과하는 돈이 필요하면 가능한 범위 내에서 다른 용도의 예산을 전용하는 게 관행이다. 그런데 비정규직 인건비를 늘리기 위해서는 못하겠단 거다. '이건 아니다' 싶어서 그때 옷을 입었다(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공공운수노조 서울경인지부 인권위분회 제공. |
밖으로 권고한 콜센터 감정 노동자 '업무 중지권'…인권위 상담원은 '예외'
프레시안 : 노조가 생긴 후 진행된 위원회와의 임금·단체 협상 과정에서 웃지 못할 일들이 많이 생겼다고 들었다.
정미현 : 밖으로 '권고'한 인권 개선안이 안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업무중지권' 문제가 대표적이다. 인권위는 얼마 전 콜센터 감정노동자들이 욕설이나 폭언을 들을 경우 전화를 끊을 수 있는 권리, 즉 업무중지권을 사업주가 보장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런데 인권위 상담원들에겐 이 권리가 보장돼 있지 않다.
김미숙 : 위원회 쪽에선 '욕설을 들으면 그냥 끊으면 되지 그걸 뭣 하러 단협에 넣으려고 하느냐'고 말한다. 물론 지금도 정도가 너무 심하면 관행적으로 전화를 끊기는 하지만, 종종 이를 문제 삼아 상담원들에 대한 진정을 접수해 버리는 일도 적지 않다. 졸지에 상담원이 피진정인이 돼 인권위 조사관의 조사를 받게 되는 경우다. 여기 진정 한 번 안 당해본 상담원이 별로 없다. 이런 이력이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으려면 단협으로 업무중지권을 보호하는 게 필요하다.
정미현 : 화가 나는 것은, 지금 위원회의 태도는 비정규직에겐 스스로를 보호할 권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위원회에선 내담자가 욕설을 하면 센터장(공무원)에게 조치를 취해달라 요청하라고만 한다. 결국 나를 보호할 권한은 공무원에게 있지, 비정규직인 나 스스로에겐 없단 얘기다.
인권 상담해달라며 전화한 후 "공무원 바꿔라"
프레시안 : 욕설이나 폭언을 하는 내담자가 많은가.
정미현 : 인권위로 상담 전화를 하는 사람들 중에는 앞서 여러 정부 기관에 인권 침해를 호소하고 도움을 요청했는데도 만족할 만한 도움을 못 받은 경우들이 많다. 차곡 차곡 쌓인 분노가 인권위에 와서 빵 터지는 걸 많이 본다.
항의성 욕설 전화도 제법 많다. 일례로 성범죄자의 얼굴을 공개할 때, 관련 절차를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고 권고한 다음날 정말 많은 항의 전화를 받았다. '네 딸이 성폭행당할 거다'라는 저주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린다.
김수연 : 무작정 '너 공무원이냐', '거기 남자는 없느냐'라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많다. '공무원은 아니고 비정규직이다'라고 답변하면, '네가 뭔데 상담을 하느냐. 공무원(남자)을 바꾸라'며 성을 낸다. 비정규직은 자신의 문제를 제대로 처리할 수 없는 권한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비난을 들으면 눈물이 나올 정도로 정말 서럽다.
정미현 : 이곳 상담원들은 그래도 대체로 참고 들어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막 욕을 하던 사람도 상대방이 가만히 들어주면 가라앉지 않나. 그러고 나면 차분히 자기 얘기를 하게 되고, 듣는 나도 '정말 억울하겠구나' 싶을 때가 있다. 그러다 보면 인권위가 실제 나서야 할, 나설 수 있는 일들이 표면에 드러나기도 한다.
다만 이런 상담이 가능해지려면, 상담원들의 정서가 안정적이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업무중지권을 요구하는 건 이런 맥락이다. 정말 참을 수 없는 욕설까지 들으면서 휴식 없이 시달리면, 필요한 상담을 충분히 못 하는 사태가 생긴다. 이걸 막자는 거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연속 보도 ① 경찰서 무기계약직 주무관 : "경찰서에서 경찰 업무 보는 저보고 '미스 리'래요" ② 인천공항 서비스 직원 : "추석 해외 여행, 누구한테 공항 서비스 받으셨나요?" ③ 도로보수원·과적단속원 : 공무원 죽으면 국가유공자인데, 이들은 '개죽음' ④ 국립대병원 비정규직 : 제대로 세척 못한 내시경, "병균 옮길 수 있는데…" |
'이율배반' 인권위의 인권
프레시안 : 인권위의 이율배반적 태도가 다른 사안에서도 많이 드러났다고 하던데.
김수연 : 임신하고 나니 그게 피부로 느껴졌다. 지금 임신 7개월 차다. 막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모성 보호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었다. 그러자 '비정규직이라 협의를 해봐야 한다'며 일단 반려를 했다. 굉장히 서러웠다. (공무원들은 관련 법에 따라 임신 후 12주 이내이거나 36주 이상에 해당하면 하루 2시간의 모성 보호 시간을 쓸 수 있다. 편집자)
김미숙 : 이건 너무 완벽한, 그리고 명백한 차별이다. 노조 눈치를 봤는지 며칠 지나지 않아 조치를 취해주긴 했지만, 여전히 제도적으로 딱 보장해준 것은 아니다. 36주를 넘어가면 다시 눈치를 보면서 허락을 구해야 한다.
정미현 : 이는 지난 5월 인권위가 발표한 '인권 경영 자가 진단 도구(체크리스트)'를 인권위가 스스로 따르지 않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체크리스트 2조 1항 : 회사는 비정규직 근로자임을 이유로 사업장 내의 동동 또는 유사 업무를 수행하는 근로자에 비하여 차별적 대우를 하지 않는다. 편집자)
정리해고 요건 강화를 권고했던 인권위가, 우리와의 교섭에선 근로기준법 24조를 고집했던 것도 모순적이었다. (인권위는 지난 2월, 고용노동부에 근로기준법 24조 1항을 개정하라고 권고했다.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란 해고 요건이 너무 추상적이니, 이를 명확히 정의해 무분별한 정리해고를 예방하란 취지였다. 그러나 인권위는 내부 비정규직 노조와 한 단협에선 근로기준법 24조 그대로를 단협안에 명시하자고 고수했다. 노조는 '위원회의 해산'과 같은 구체적인 상황을 정리해고 요건으로 명시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편집자)
이렇게 안팎이 다른 모습에 대해 따지면 인권위 쪽에선 '우리는 국가기관이니 일반 기업과 다르다'고 반박한다. 그런데 국가기관이면 외려 더 잘해야 하는 것 아닌가. 교섭을 하면서 답답한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남이 하면 '차별', 인권위가 하면 '원칙'?…"현병철 위원장 만나자"
▲ 임신 7개월 차인 인권위 비정규직 김수연 씨가 입고 있었던 티셔츠. 인권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최근, 각각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새겨 넣은 티셔츠를 만들었다. 또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 정미현 씨가 입은 티셔츠엔 "외면하기엔 미안하고 대면하기엔 불편한, 우리는 인권위 비정규직 노동자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프레시안(최하얀) |
정미현 : 특히 인권위가 '법과 원칙'을 강조할 때가 그렇다. 지금도 교섭을 진행하면 인권위에선 언제나 '법과 원칙'이란 표현을 강조한다. 법상 문제가 없고, 정해진 인건비 예산 안에서 급여를 주는 게 원칙이란 것이다.
그런데 '법과 원칙'으로 인해 인권이 침해되는 것을 우리는 늘 본다. 얼마 전엔 보증금을 체납해 영구임대아파트서 쫓겨난 사람을 상담했다. 법원 집달관이 명도 집행을 한 건데, 법과 원칙상으로는 별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추운 날씨에 갑자기 집에서 쫓겨나 옷 한 벌 더 걸칠 수 없는 상황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법과 원칙은 누굴 위한 건가.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권력자들만을 위한 것은 아닌가란 생각이 계속 든다. 두 번이나 파업을 하고 계속 만나달라고 했는데도 여태껏 현병철 위원장과 공식 면담이 단 한 차례도 성사되지 않았다.
김미숙 : '비정규직 차별을 시정해 달란' 우리의 요구가 거부되는 수준을 넘어서 비하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우리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무시해도 되는 사람으로 치부되고 있는 것 같다. 이미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현 위원장을 만나고 싶다. 인권위 비정규직의 인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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