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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한국이 피난민 정서 벗어나야 남북화해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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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한국이 피난민 정서 벗어나야 남북화해 가능"

[이재정ㆍ유시민 대담] 2007년 남북 정상회담의 진실

지난해 10월 8일,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북방한계선(NLL)을 포기하는 발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정 의원의 발언으로 촉발된 노 전 대통령의 NLL 포기발언 논란은 이후 정상회담 대화록 파기 공방, 대화록 무단 유출 공방으로 이어지며 정치권의 핵심 이슈로 떠올랐다. 이 과정에서 지난 해 대선의 화두였던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국민대통합 등의 의제는 완전히 묻혀지고 말았다.

급기야 검찰은 참여정부 말기 대화록 이관에 관여한 인사들을 줄줄이 소환하기 시작했고 결국 15일 참여정부가 대화록을 의도적으로 삭제했다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다른 한편 검찰은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을 소환해 대화록을 유출한 정황도 파악하고 있다.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의 선거캠프에서 중책을 맡았던 인사들도 줄줄이 검찰 소환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NLL과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은 1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국내정치의 모든 이슈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 공방에서 10.4정상선언의 전제척 내용과 목표와 의미는 무엇인가, 나아가 이명박정부가 '비핵개방 3000'을 통해 10.4선언을 사실상 무효화 함으로써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은 사라지고 말았다. 남북관계 개선의 결정적 계기가 될 수도 있었던 정상회담의 본질적 내용이 실종되고, NLL 포기 논란과 대화록 이관 여부라는 가짜 이슈에 우리 사회가 홀려 있는 형국이다.

<프레시안>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최근 <노무현 김정일의 246분>이라는 정상회담 대화록 해설서를 출간한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2007년 정상회담 당시 현장에 배석했던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을 만나 당시 정상회담 합의의 실제 내용과 의미는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고, 지난 1년간 오로지 'NLL 포기 논란'에 매몰된 우리 사회 담론의 문제점을 짚어봤다.

당시 정상회담에 배석했던 이재정 전 장관은 노 대통령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남북 간 우발적인 군사적 충돌을 막아 전쟁 발생을 원천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가'였다"며 "노 대통령의 기본적인 입장은 기존의 NLL을 그대로 지키면서 서해의 평화를 유지할 방안을 찾아보자는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이미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 "해상경계선은 당분간 양측이 관리하는 지역으로 하고, 최종적인 확정은 추후 남북 간 협의한다"고 합의했기 때문에 2007년 정상회담에서 NLL 문제를 굳이 거론할 필요가 없었다는 주장이다.

유시민 전 장관은 정상회담 대화록 어디에도 노 대통령이 NLL을 포기하겠다는 발언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담론이 급속히 퍼져 나가는 현상에 대해 "우리가 피난민 정서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6.25전쟁 발발 이후 이미 6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고 남북 간 체제 경쟁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을 정도로 한국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정서는 전쟁 당시 피난민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북에 대한 적개심과 공포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유 전 장관은 "이미 대화록이 공개됐으니 집권 세력이 이 대화록을 편견 없이 읽어 봤으면 좋겠다"며 북한을 적대적 협력 파트너로 대해야 하는 남한의 지도자들이 (향후 남북화해와 정상회담에 대비해) 대화록을 참고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번 대담은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의 사회로 지난 13일 <프레시안> 회의실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대담의 주요 내용이다.<편집자>

▲ 왼쪽부터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박인규 <프레시안> 이사장,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오늘 대담은 유시민 장관이 최근에 낸 책 <노무현 김정일의 246분>을 계기로 마련됐다. NLL 포기 논란과 2007년 남북정상회담 녹취록 소재 문제가 1년 이상 국내정치의 최대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민생과 남북관계 개선 등 실제로 중요한 이슈들이 모두 이 논란 속에 파묻혀 버렸다. 정파적 이익을 위한 가짜 이슈가 국민적 이익을 위한 진짜 이슈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는 형국이다. 지난해 대선 이전부터 여당이 문제제기 하는 방식은 바닷물 한 컵을 떠와서 '이게 바다다'라고 우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도 심하게 오염된 바닷물 한 컵을 바다 전체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녹취록 어디를 봐도 노무현 대통령이 NLL을 포기하겠다는 발언을 하지 않았고, 지금 현재도 NLL이 남북간의 현실적 해상경계선으로 남아있는데도, 마치 'NLL 포기'가 우리들의 삶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인 것처럼 부각되고 있다.

이성적 토론이 필요한 시점이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남과 북이 이루려 했던 것은 무엇이고, 10.4선언이 이명박 정부 이후 무산되면서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차분히 점검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유시민 장관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의 대화 내용을 전체적으로 짚어보는 <노무현 김정일의 246분>을 낸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다 알다시피 유 장관은 노무현 대통령의 생각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분이고, 이재정 장관은 당시 정상회담에 직접 배석했던 분이다. 두 분을 모시고 당시 회담에서 남북의 두 정상은 무엇을 논의했고 합의했는지 알아보려 한다.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북한에 가서 정상회담을 하면서 남북 간 평화를 이야기했고, 이를 이루기 위한 촉매제로서 경제협력을 제안해서 북측의 합의를 이끌어냈다. 우선 2007년 10월 초 남북 정상회담에서 무엇이 논의됐고 노 전 대통령은 무엇을 얻으려 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이재정 : 정상회담 준비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의 관심사는 '어떻게 남북 간 우발적인 군사적 충돌을 막아서 전쟁 발생을 원천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가'였다. 1999년과 2002년, 이미 두 차례 서해에서 남북 간 교전이 있었는데, 이를 막기 위해 2005년에 남북 해운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으로 해군 함정 간 문제가 있을 때 서로 교신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이를 작동시킨 것이다. 그런데 100% 작동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협정만 갖고는 남북 간 우발적 충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판단이 들었다.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생각하게 됐고 거기서부터 '서해를 어떻게 큰 틀의 평화지대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당시 정상회담에서 노 대통령의 기본적인 입장은 기존의 NLL을 그대로 지키면서 서해의 평화를 유지할 방안을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이미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서 '당분간 해상경계선은 양측이 관리하는 지역으로 하고, 최종 확정은 추후 남북 간 협의한다'고 했기 때문에 정상회담에서 NLL 자체를 협의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당시 회담에서 NLL을 의제로 삼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 논의를 본격적으로 하면 정상회담 자체가 진전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유시민 : 그래서 남북 정상이 기본입장을 발표할 때 노 대통령이 NLL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것 아닌가?

이재정 : 그렇다. 이러한 기본 입장에서 (개성공단에 이어) 해주에도 공업단지를 만들자는 것이 우리 측 제안의 첫 번째 주제였다. NLL을 지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NLL 북방 지역의 군사적 긴장을 어떻게 완화시키느냐는 것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해주에 공업단지를 만드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개성공단을 만들면서 북의 군사력이 후방으로 물러났듯이 해주에 공업단지를 만들면 남북이 경제적 실리를 도모하면서 서해 일대의 군사적 긴장이 완화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해주 공업단지 이야기가 나오니까 북의 응답이 "해주는 군사력이 너무 촘촘하게 들어가 있어서. 개미 한 마리도 들어갈 수 없다"고 하더라. 심지어는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 이야기를 하면서 "(지난 1999년) 정 회장하고도 해주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런 이유 때문에 해주에 공단을 건설하지 못하고 개성에 한 것 아니겠느냐"라는 식으로 말했다. 북이 군사력을 후방으로 물리면서까지 개성을 내주었지만 실질적 혜택은 미미한 판에, 군사력의 요충인 해주까지 내달라는 것은 북한 군부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라는 것이었다. 즉 군사적인 이유 때문에 해주공단 건설은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유시민 :
현안으로 보자면 해주 공업단지가 가장 처음에 제기된 것으로 보이는데 노 대통령이 이러한 제안을 한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 대통령 취임 초기에 북·미 관계와 한반도 정세를 살펴보면, 당시 북·미 관계가 굉장히 험악했다. 9.11사태 직후인 2002년 초, 부시가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 국가로 지목하고, 악의 축 국가에 대해서는 선제핵공격을 할 수 있다는 발언도 나왔다. 2002년 10월에는 제임스 켈리 동아태 차관보의 평양 방문으로 북한의 '우라늄농축' 문제가 불거지면서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1994년 미국과 북한 간에 체결된) 제네바합의가 파기됐다. 나아가 2003년 3월에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다. 미국에서 북한에 대한 독자적 군사 공격을 검토한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이러한 제반 상황 탓에 노 대통령 취임 초기부터 한미 관계 역시 굉장히 어려웠다.

당시 노 대통령의 가장 큰 고민은 한반도 정세를 좌우하는 문제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점이었다. 당시 상황이 한반도가 전쟁으로 갈 수도 있는, 민족 전체의 생사가 걸린 위기 상황이었는데 한반도 정세를 좌우하는 것은 북·미 간에 생긴 문제들이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북·미 간 갈등을 비롯해 어떤 돌발 요인이 생기든 한반도 정세를 관리하는 주도권을 남이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제기된 동북아 균형자론 등을 보면 어떻게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의 주도권을 우리 손에 넣을 것이냐 하는 것이 전략적 관심이었다.

그러한 전략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 남북경협이었다. 남북이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협력을 공고히 하면서 중장기적으로 한반도 정세의 주도권을 우리가 갖고 평화체제를 만들어가려는 의도였다. 그래서 동해에도 조선 산업단지를 만들려고 했고, 서해에서 해주 공업단지를 중심으로 해주-인천을 아우르는 평화구역을 조성하려 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군사적 신뢰와 서해의 안정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복안도 있었다. 노 대통령이 정상회담 당시 NLL 문제를 바로 건드리지 않은 것도 경제협력을 통해 평화문제의 주도권을 쥐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사실 정상회담 오전 회의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제기한 서해의 공동 어로 구역 문제는 전두환 전 대통령 때부터 나왔던 이야기다. 1982년 손재식 국토통일원장관이 전두환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을 근거로 해서 북에 제안했기 때문에 양쪽이 이미 알고 있는 이슈였다. 그래서 노 대통령도 이야기를 안 꺼냈고, 김정일 위원장이 기본입장을 발표할 때 다른 말을 안 하고 공동어로구역 하나만 이야기하면서 공세적으로 내놓았다. 북측이 주장하는 해상경계선과 남측이 관리해온 NLL 사이의 수역을 공동어로구역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이재정 : 2002년이 한반도의 굉장한 위기였다. 우선 제임스 켈리 미국 특사가 2002년 10월 북에 가서 회담하고 돌아와 보고서를 냈는데, 그 내용은 북이 고농축우라늄 생산을 진행하고 있고 이를 시인했다는 것이었다. 근데 북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한다. 당시 켈리 특사가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 김계관 부상과 만남을 가졌다. 강석주 제1부상은 직설적이고 성격이 좀 괄괄하다. 켈리 차관보가 우라늄 농축 문제를 강력하게 추궁하자, 강 제1부상이 반어법으로 이야기한(북한은 우라늄 농축의 권리를 갖고 있다는 취지의) 것을 미국이 사실로(우라늄 농축을 실제로 하고 있다는) 받아들이면서 오해가 생긴 것이다. 혹자는 통역의 미숙함이었다고도 말한다. 실제로 그런 점이 있었다고도 하고.

어쨌든 당시 이 사건 때문에 미국은 북한에 짓던 경수로 공사를 중단한다. 당시 공사가 35% 정도 진척이 됐는데, 지하의 콘크리트 타설까지 끝내 놓은 상태라서 사실 그 이후로는 공사를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즉 공사가 상당히 진행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미국이 북한의 우라늄 농축 의혹을 제기했고, 여기에 경수로 건설과 중유 지원을 중단하면서 결국 제네바합의는 2003년 1월 파기되고 말았다. 더군다나 부시는 북한이 악의 축이고, 미국은 핵선제공격을 할 수 있으며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는 식으로 대응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 대통령의 마음이 급했을 것이다. 이 사안은 해운협정으로 막을 수 있는 사안도 아니고 남북문제도 아니다.

그래서 해주 공업단지와 같은 보다 더 큰 틀의 적극적인 안을 제시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상당히 큰 틀의 제안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노 대통령은 NLL을 평화적으로 지켜내지 못하는 한 한반도가 위기가 온다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프레시안 : 그런데 실제 대화록을 보면 오전 회담 때는 굉장히 분위기가 딱딱했고 서해 평화문제는 거의 진전이 없었다. 오후가 돼서 김정일 위원장이 군부와의 협의 끝에 해주를 내줄 수 있다는 반응을 보이면서 협상이 급진전을 이룬 것 같던데?

이재정 : 오전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해 공동어로안을 냈는데, (당초 NLL 포기 논란을 제기한) 정문헌 의원이 이를 근본적으로 오해한 것이다. 북한이 제안한 해상 경계선이 2개가 있다. 1973년도에 처음 제안한 것이 있고 1999년에 다시 제안했던 것이 있다. 1973년 제안한 계선은 1999년 것에 비해 훨씬 남쪽에 있다. 우도에서 아래쪽으로 직선을 그은 것이다. 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의 제안은 1999년 북한이 제안한 해상경계선과 NLL 사이를 공동어로구역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문헌 의원은 그 경계선을 1973년 것으로 착각한 것 같다. (<노무현 김정일의 246분> 중 33쪽과 35쪽에 있는 지도 참조)

그런데 사실 김 위원장은 우리가 제안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회담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 안과 김 위원장이 제안한 안을 비교해보면, 김 위원장의 제안이 좀 소극적인 방안이었다. 그런데 그것마저 제안할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생각에 김 위원장이 오전 회담에서 서둘러서 제안을 한 것으로 본다. 한편으로는 김 위원장이 가볍게 제안한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문서로 다 제안했던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으로 '김 위원장이 다 알 텐데 왜 저 이야기를 끌어낼까, 속 의도가 뭘까' 라고 생각했는데 당시 노 대통령이 대응을 잘했다.

노 대통령은 유연하면서도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도록 잘 넘어갔다. 이미 NLL 문제는 남북기본합의서에서 나와 있는 이야기니 재론할 필요 없고, 우리가 그걸 다 인정하는 차원에서 큰 틀에서 가면 어떻겠냐고 대응했다. 회의의 기술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유연하지만, 진지하고 진정성을 갖고 이야기했다. 한편 해주 공업단지에 대해서는 김 위원장은 처음에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군부를 설득하지 못한 것 아닌가 싶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오전 회의를 끝내면서 김 위원장이 노 대통령에 대한 신뢰를 갖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원래 오전 회의를 마치면서 김정일 위원장은 회담을 끝내려고 했다. 왜냐하면 서해에 대한 이야기는 다 끝냈으니까 이것으로 충분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또 하나는 남북 간 자세한 사업 계획에 대해 서로 합의한 것이 과연 이행이 가능하겠느냐는 의구심도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쪽이 정권 말기다 보니 양쪽이 합의해서 서명 후에 내놓은 것을 진행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감이 북에 있었던 것 같다.

유시민 : 그래서 김 위원장이 북측 단독 배석자였던 김양건 통일전선부장한테 "부시 대통령도 얼마 안 남았지" 라고 말하지 않나. 부시 대통령'도' 라고 말한 것은 노 대통령도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임기가 얼마 안 남았는데 남북 간 합의한 것이 이행되긴 하는 거냐는 의구심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이재정 :
김 위원장은 대단히 능란한 사람이다. 또 김 위원장이 회담을 굉장히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발언에 필요한 자료를 갖다 놓고 하나하나 넘겨가면서 말하더라. 이게 1차 정상회담 때와는 다른 부분이었다. 우리 논리에 대한 대응논리도 갖고 나왔다. 김양건 부장한테도 수시로 물어보고, 사실 문제도 확인해보고. 또 김양건 부장이 대신 대답할 수 있도록 만드는 능란함도 갖고 있었다.

2007년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동안 2000년 정상회담에 참석했던 사람으로부터 전체적인 분위기와 상황을 쭉 전해 듣고 준비를 했다. 양자의 회담을 비교해보면 북측에 굉장한 변화가 있었다. 2000년 회담에서는 양측이 대단히 긴장된 분위기에서 진행했지만 2007년 회담에서는 훨씬 유연한 분위기에서 대단히 구체적인 문제까지 논의가 됐다. 우리 대통령이 저자세로 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대화록을 보면 아시겠지만 노 대통령이 굉장히 긴 연설을 세 차례나 하는데 그 때마다 김 위원장이 굉장히 경청하더라. 말을 끊지도 않고. 또 경청이 끝난 다음에 그 이야기에 공감을 표시했다. 이게 대단히 중요한 대목이다. 이를 평가해야 한다.

유시민 : 회의 자체를 보면 성공한 회담이었다고 본다. 거기서 합의가 돼서 서명도 하고 발표도 했으니까.

이재정 : 양 정상이 합의하고 발표한 것을 보면 김 위원장이 본인이 제안했던 평화지대를 스스로 접은 셈이 됐다. 대신 노 대통령의 제안을 100%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는 단순히 NLL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동북아 전체의 평화적 관계를 유지해나가는 데 있어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주도적 역할을 확보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었다고 본다.

오후 회의 시작할 때 김 위원장이 노 대통령에게 하루 더 묵고 가라고, 아리랑 공연 보는 것 하루 연기하라고 하고 오늘 비도 온다고 하면서 분위기를 끌고 가는데, 그걸 보면서 내심 오후 회의는 잘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문화에는 친척이 집에 찾아오면 하루 더 머물다 가라고 권하는 정서가 있는데, 김 위원장이 그렇게 말한 것도 이런 정서 때문인 것 같았다. 이제 어려운 회의는 다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는 분위기였고, 실제로 오후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프레시안 : 회담 끝나고 나서 결과에 대한 노 대통령의 소회라든가 평가 같은 것은 있었나?

이재정 : 노 대통령은 회담 결과에 대해 만족했다. 당신이 생각한 최대 목표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서해에서의 우발적인 군사적 충돌을 막는 구체적이고 확고한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경제협력을 통한 평화구조를 진작시켜 나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경협 확대 중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인 해주 공업단지 건설과 조선업계가 강력히 요청했던 남포와 안변의 조선산업단지가 일정 부분 합의됐으니 성공적인 회담이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김 위원장이 회담을 많이 준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우리는 조선 산업단지를 원산에 만들자고 했다. 그랬더니 김 위원장이 원산은 명승지인데, 조선단지가 들어서면 오염문제가 생겨 안 된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안변과 남포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김 위원장이 대안을 내놓는 것을 보면서 구체적인 계획안을 거의 다 갖고 있었고 준비해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프레시안 : 그런데 아까 잠깐 '부시대통령도 얼마 안 남았지'라는 김정일의 언급이 나왔지만 사실 정상회담을 했을 때가 노 대통령 집권 마지막 해였다. 현실적으로 가능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정상회담을 그보다 이전에 할 수는 없었을까?

유시민 : 대화록을 보면서 고민해봤는데, 남북간의 신뢰 형성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측면이 있었다고 본다.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이 임명장을 받은 날 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고 보고한 것이 2006년 여름이었다. 이후 김 원장이 근 1년 가까이 김양건 부장과 교신을 했던 것 같다. 시간이 좀 걸린 이유는 취임 초기 노 대통령의 대북 특검 수용 문제, 미국 방문 당시 '미국이 아니었다면 나는 포로수용소에 있었을 것'이라는 저자세적 발언 등을 보고 노 대통령에 대한 김 위원장의 신뢰가 확고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양측이 신뢰를 쌓을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또 다른 요인으로는 김 위원장의 수세적인 태도가 있다. 김대중 대통령 때도 2000년이 되어서야 정상회담이 이뤄졌고 이후에도 진도를 빨리 못 나갔다. 노 대통령이 집권 초기에 확고한 햇볕 정책을 계승하는 입장이 있었음에도 북측이 진의를 못 믿었다. 진도가 빨리 나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김 위원장과 김양건 통전부장의 말 속에 녹아있기도 하다. 자기들이 감당이 안 되니까 속도 조절의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김양건 부장이 대규모의 이산가족 상봉도 북의 행정력의 부족, 재정능력의 부족이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재정 : 정상회담이 일찍 열리지 못한 직접적인 원인은 북핵을 둘러싼 북·미 간 갈등 때문이었다고 본다. 고농축우라늄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이 열리고 2005년 9.19 합의를 했는데, 합의 직후 미국 재무부가 바로 BDA(방코델타아시아) 문제를 터뜨리면서 북한에 대해 금융제재를 가했다. 이 때문에 1년여간 합의 이행이 지연되다가 북한이 2006년 10월 9일에 1차 핵실험을 하지 않았나? 2002년 미국의 대북정책으로부터 시작해서 여기까지 일관된 하나의 과정이었다. 양쪽의 갈등이 상승해나가는 과정이었다. 여기서 북은 다 끝났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라 본다.

한편으로는 회의 석상에서 김 위원장의 진정한 의도는 뭐였을까, 무엇을 기대했을까를 생각해보면 전쟁상태 종식과 평화체제를 이루는 것이었다고 본다. 김 위원장이 정상회담 당시 노 대통령에게 부시 미국 대통령의 진의가 무엇이냐고 굉장히 진지하게 물었다. 북한의 1차 핵실험 후 9.19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2007년 2.13 합의가 나왔다. 북한의 핵시설과 핵물질을 신고하고 이를 불능화한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0.4 정상선언이 발표되기 직전인 9월 30일에는 베이징 6자회담에서 추가 합의가 도출됐다. 실제 발표는 10월 3일에 이루어졌지만(10.3 합의). 김 위원장은 종전과 평화체제에 상당히 무게를 뒀다고 본다. 김 위원장은 한국정부가 이를 미국의 정책 변화라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진심이라면 좀 적극적으로 추진해달라는 뜻을 피력한 것 같다.

유시민 : 오후 회의 때의 발언을 봐도 김 위원장이 종전과 평화체제를 염두에 뒀다는 것이 드러난다. 점심 때 군 장성들을 불러서 해주 공업단지를 이야기한 뒤에 오후 회의 때 군 장성들 요구라고 인용하면서 평화체제로 가는 첫 단계로서 군사적 신뢰조처가 담보되어야 하고, 그 군사적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NLL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 위원장은 NLL 문제 해결을 물질적 이익의 측면보다 평화체제로 가는 첫 단계의 담보로서 요구했다. 결국 김 위원장이 노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경협 자체에 대한 관심도 있었겠지만, 경협이 진행되면 남북의 군사적 신뢰를 바탕으로 해서 장차 6.25 교전 당사국 사이에 종전선언과 완전한 평화체제 이행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정상회담 중간에 김계관 북한 6자회담 수석대표에게 6자회담 관련 보고를 시킨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10.3 합의는 북한의 핵물질, 핵시설, 핵계획을 다 신고하고 연말까지 무력화한다는 것이었는데, 김계관이 보고를 마치고 나가기 직전에 노 대통령 들으라는 듯이 북한의 핵 폐기 3대 원칙을 말한다. 한반도 전체의 비핵화, 북한의 평화적 핵 활동 보장,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적대시정책 철회가 그것이다. 그리고 나서 "단, 무기화된 정형은(핵무기) 신고 안 한다"고 했다. "교전 상대방에게 우리의 무기를 신고하는 것이 어디 있겠나. 우린 그렇게 안 한다"는 논리다. 이는 6자회담 틀 안에서는 핵에 대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자신들이 한 차례 핵실험을 통해 이미 확보한 무기에 대해서는 조건을 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최종적으로 미국이 적대 국가나 교전 상대국이 아닌 상태, 완전한 평화체제로 갈 때라야 핵무기 폐기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확실히 한 것이다.

위의 발언들과 회담 과정을 지켜보면 이 모든 것들이 수렴되는 지점은 '확고한 평화'다. 국제적으로 보장되고 미국이 자의적으로 북한을 무너뜨릴 수 없게 하는 완전한 평화체제와 자신들의 체제안전보장. 이것이 북이 원하는 것이었고 김 위원장도 이를 위해 해주공단과 조선산업단지를 내주고 우리가 원하는 요구사항을 상당 부분 받아줬다고 볼 수 있다. 회담 과정에서 자신들이 도달하려는 최종적 목표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는 판단을 확고히 한 것으로 본다. 시작할 때는 가능성만 봤다면 오전 회담 뒷부분을 통해 가능할 수 있겠다는 판단을 했고, 이후 점심시간 때 군 장성들 불러 모아서 다짐을 받았고, 그리고 오후 회의에 와서 합의한 것이다.

이재정 : 정상회담 합의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를 3자, 또는 4자가 한다고 했는데 이에 대한 내 해석은 이렇다. 정전협정을 깨고 종전을 선언하는 것은 정전협정 체결 당사국들인 미·중·북 3자가 할 수밖에 없다. 이후 평화체제 논의를 하는 4자회담에는 남한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정전협정 당사자들이 정전이 아니라 종전을 선언해야 끝나는 것 아니겠나.

유시민 : 종전선언은 국가 원수들이 해야 한다. 정전협정은 교전 당사국의 군사령관들이 한 것이고, 협정문을 보면 평화체제 논의는 한 급 높은 정치회담을 통해 하기로 명시되어 있다.

이재정 : 분명한 것은 종전은 정전협정 협정 당사국들이, 평화체제는 남한을 포함한 4자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저의 해석이다. 회담에서 이를 분명하게 하지는 않았다. 논쟁도 없었고. 서로 다른 계산도 가능하다는 문을 열어둔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2013년 한국사회에서의 10.4선언은

▲ 박인규 <프레시안>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문제는 10,4선언이 소중한 합의이기는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현실화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남북 간 평화체제를 이룰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얻었는데 이명박 정부가 '비핵개방 3000'을 내세우며 대북정책이 180도 달라지면서 실현시키지 못했다. 나아가 대선 직전인 작년 10월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에 의해 제기된 노 대통령의 NLL 포기 논쟁까지 이어지면서 서해평화협력지대라는 본질은 사라지고 NLL포기 논란이 지엽적 문제가 국내 정치의 최대 이슈가 돼버렸다. 노 대통령이 이루고자 했던 것이 5년이 지난 후, 보수세력의 문제제기에 의해 국민들에게 다른 형태로 제시됐는데,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이재정 : NLL을 피로 지킨다, 사수한다는 말을 거침없이 하고 있는데, 그럼 사람도 죽이고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것인가. 정말 그런 마음으로 NLL을 지키겠다고 한다면 심각한 일이라고 본다. 그런데 정상회담 당시 노 대통령이 NLL을 포기한다고 말한 적도 없고, 지난 6년 동안 북측이 어느 회담에서도 노 대통령이 NLL 포기했으니 NLL에서 물러나라고 말을 한 적도 없으며 북한이 NLL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시도한 조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문제가 더 있어서 이런 문제제기가 나오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는 본질에서 멀어진 정치적 모략, 정치적 목적에 의한 또 하나의 새로운 북풍전략이라고 본다.

프레시안 : 2008년 이명박 대통령 당선 이후 10.4선언은 전혀 이행이 않았다. 오히려 2010년 천안함, 연평도 사건이 터지면서 반북정서가 고양됐다. 이런 것들이 NLL 포기 논란을 증폭시킨 원인이 된 것 아닐까?

유시민 : 그런 사건이 아니더라도 이런 이야기를 들고 나오면 시끄러워진다. NLL이 적어도 남북관계에서 보면 북을 적대시하면서 남을 결속시키는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다. 이는 NLL의 기본적 속성이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NLL을 해상 경계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또 이 문제를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NLL의 국제법 지위, 성격, 연혁과 더불어 이 사안이 남북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자세하게 알지 못한다. 단지 남북관계가 적대적인 관계에 있고 NLL은 우리가 지금까지 지배해왔던 선이라는 인식만 있다. 이게 기본적인 정서인데 노 대통령이 NLL을 북에 상납했다고 하니, 실상을 잘 모르는 국민들은 내용을 들여다볼 것도 없이 기분이 나쁜 것이다. 물론 내용을 좀 들여다본 사람들은 "자세히 보니까 그게 아니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평소에 새누리당을 지지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싫어했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새누리당이 대선 때는 중도 세력을 끌어들이고 문재인 후보를 공격하기 위해 NLL 카드를 꺼냈다. 대선 이후에는 도로 집어넣을 수가 없으니까 민주정부 10년의 주축 세력을 국민들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해 계속 공세를 하는 것이다. 또 가짜 이슈인 NLL을 편드는 보수언론, 지식인, 당, 정부기관이 한통속이 되어 이것으로 국민들을 겁박하는 측면도 있다. 모든 권력을 잡고 있는 세력이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어떻게 국내 정치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 수 있겠나.

그런데 이와는 별개로 NLL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60년 넘게 지속되어온 정전체제가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결국 정전체제를 끝내고 종전선언을 해야 한다. 그런데 종전을 하기 위해서는 평화체제가 확고히 보장된다는 전망이 있어야 한다.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은 맞물려 있는 것이다. 여기서 평화협정을 체결하려면 협상을 시작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양측간의 경계를 확정지어야 한다.

평화협정을 위해 협상을 시작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경계선 문제다. 그런데 해상에는 남북이 합의한 경계선이 없다. 이는 이미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부속불가침합의서를 체결할 때 남북이 모두 인정한 사안으로, 앞으로 남북이 협의해나가기로 했고 결론이 날 때까지는 기존 구역을 불가침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그 말은 북한은 기존 NLL을 무시한 채 남으로 넘어오면 안 되고, 남한은 NLL을 확정된 해상경계선이라고 주장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남북기본합의는 양측이 한발씩 물러나 타협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평화협정을 하려면 양측이 합의할 수 있는 해상의 경계선을 새로 정해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외국 군대의 철수문제다. 정전협정에 따르면 평화체제가 이뤄지면 한반도의 모든 외국 군대는 철수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평화체제의 한반도에서도 미군의 지위와 역할 변경을 통해 미군이 주둔하는 것을 북한이 양해할 수 있는 안을 내든가, 아니면 우리 국민들이 주한미군의 철수를 동의하든가, 나름의 방법을 찾아야 평화협정 협상을 할 수 있다.

결국 NLL은 어차피 앞으로 논의해야 할 사안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서로 평화롭게 잘 지내기로 한다는 전제 위에서 차분하게 상의해서 풀어나갈 문제다. NLL은 신성불가침의 것이고 피와 죽음으로 사수할 것이라는 유치한 발상을 하는 한, 남북관계가 박근혜 정권에서 단 한 발짝도 못 나갈 것이라고 본다. 실제 이번에 남북관계발전 2차 기본계획을 보면 기존에 하던 것을 지키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지 않나.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의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고 이 상태로 4년을 간다면, 남북이 서로 전술적으로 의미 있는 것만 주고받은 채 현 정부의 임기가 끝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산가족 상봉, 혹은 개성공단 재가동 유지를 위한 추가 협의 또는 금강산 관광 재개 등 기존에 합의했었지만 지키지 못했던 사안 몇 가지를 복구시키는 것 외에 현 정부에서 남북관계의 새로운 청사진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이재정 : 정문헌 의원의 발언으로부터 시작된 대화록 공개 및 검찰 수사 등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대체 저들이 무엇을 위해 이러는지 모르겠다. 뭔가 바라는 것이 있을 텐데, 예를 들면 노 대통령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것인가. 만약 이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이뤄진 것이라면 이렇게 불행한 역사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지금 한국의 정치적 대치 상태는 6.25 이후 최대의 비극적인 상황이라고 본다.

심지어 대화록의 초안이 대통령기록물이냐 아니냐는 논란도 있는데, 초안이건 뭐건 간에 대통령의 결재가 끝나지 않은 문서는 미완의 문서고 이는 문서로서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걸 놓고 이렇게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1년 동안 난리 법석을 피고 여러 사람들을 잡아다가 큰 중죄를 진 것처럼 난리를 치는 것을 보면, 이건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오히려 거꾸로 서해 평화를 위해, NLL을 평화적으로 지키기 위해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보다 더 좋은 방안이 있으면 내놓아 보라고 말하고 싶다. 현 정부의 방안은 NLL 근처에 중무장한 군함들 배치시키고 몇 명이 죽어 나가든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것인데 그게 무슨 이익이 되겠나. 그렇게 전쟁 나면 한국 경제는 무너지고 우리만 손해 보는 건데. 맞는 손이 아니라 때린 손만 아픈 결과다.

유시민 : 특히 안타까운 것은 지난 6년 동안 남북 경협사업이 진전을 보지 못하면서 북한의 자원을 중국이 빨아들이고 있고, 북한의 대중국 경제 의존이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상회담 당시 노 대통령이 북한의 철강을 중국이 다 가져가는 것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시하면서, 우리 철강 및 조선 산업의 애로사항을 말하지 않았나. 그러면서 중국이 북한 북부지역에 있는 희토류, 철광석에 눈독을 들이고 이미 작업을 시작했다는 것도 대화록에 나와 있다. 노 대통령은 이런 차원에서 (북한의 대중 경제 의존 심화를 막기 위해) 남북 경협을 빨리 진행하자고 했었다. 김 위원장은 자기들 인민들이 더 불만이 많다는 이야기도 했었고. 그런데 6년 동안 남북 경협은 제자리였는데 그동안 중국과 북한은 신(新)압록강대교 건설, 철로 설비 등을 하며 더욱 가까워졌다. 무산철광의 노천광 단지에 중국이 지선 철로를 깔아 컨테이너로 북한의 자원을 중국으로 이동시키고 있는 상황에까지 온 것이다.

이재정 : 중국은 북한의 국경선에 철도를 부설했고 러시아는 나진-하산 철도를 연결했다. 또 신압록강대교가 내년 7월에 개통 예정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북한 투자가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있다. 이 거대한 힘 앞에 북한이 무너질 수도 있다고 본다. 이런 위기를 북한도 깊이 느끼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 정부가 남북관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프레시안 : NLL 포기 논란이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정확하게 계량화 할 수는 없겠지만, 대선 국면에서 새누리당이 이를 이용했던 것은 사실이다. 또 당선 후에도 국내 정치적인 문제가 있을 때마다 정치적 목적으로 NLL을 많이 이용했다. 현 정부가 남북관계를 화해와 평화의 목적으로 관리하기보다는 이른바 정권 안보를 위해 이용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유시민 : 당연하다. 남북관계를 국내 정치에 이용하는 것이 이 세력들이 대북정책에 임하는 기본적인 태도다. 그래서 이런 상태라면 남북관계가 한 걸음은 고사하고 한 발짝도 못 나갈 거라고 말씀드린 것이다. 이는 정치적으로 매우 우둔한 짓일 뿐만 아니라 한국경제에 대한 자해행위이고 매우 사악한 짓이다. 형법상의 범죄는(crime) 아니지만 민족사적인 죄악(sin)이다. 도덕적인 죄악이다.

프레시안 : 현 집권 세력이 북한을 적대시해서 이득을 얻고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 야권이 국민들에게 제대로 설득하고 지지를 끌어내지 못한 것 같다. 작년 대선 당시 문재인, 안철수 후보도 남북관계가 우리 민족의 장래에서 굉장히 중요하다는 인식이나 이를 국민들에게 설득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비판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국민의 70% 정도가 북한에 대한 막연한 증오나 두려움을 갖고 있고, 이를 쉽게 깨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측면에서 야권이 노 전 대통령이 지향했던 것, 남북간 화해와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국민들에게 알리거나 설득하는 데 좀 미진하지 않았느냐는 비판도 나온다.

이재정 : 북에 대한 평가와 이해가 우리 사회에 상당히 부족하다고 본다. 언급하는 것 자체가 두렵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요즘 종북이니 어쩌니 하니까 이제는 말도 함부로 못하는 상황이 됐다. 그런데 남북은 지금 체제대결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현격한 수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가령 무역량만 비교하더라도 우리가 2012년에 1조 6천억 달러였는데 북한은 87억 달러였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데도 우리가 지금도 종북이니 북한이 두려운 존재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두 번째로 한반도에 문제가 생겼을 때 미국은 핵잠수함, 핵항공모함, 전략폭격기 B-2, B-52 등등 핵무기를 장착한 미군 무기들을 한반도에 전개시킬 것이다. 실제 올해 3월 북의 3차 핵실험 이후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자 미국은 이러한 무기들을 한반도 근처까지 보냈다. 이런 강력한 화력을 가진 무기들이 있다는데 그래도 겁이 난다고 하면 어떤 방법으로 안보를 해야 이 민족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안보는 그런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서로를 용납하고 공존하고 함께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이 시점에서 해야 할 일이고 평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말하는 신뢰 프로세스의 '신뢰'는 상대방을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 아닌가? 또 상대방으로부터 나를 믿게 하는 것이 우선 아닌가?

▲ <노무현 김정일의 246분> (유시민 지음, 돌베개 펴냄)ⓒ돌베개
유시민 :
남북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NLL 문제를 어떻게 풀지 고민하고 정전체제의 문제가 무엇이고 평화체제로 어떻게 이행할지 등등의 문제는 모두 이성적인 영역이다. 그런데 이성을 작동한다는 것은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좀 더 좋은 사회를 만들려면 좋은 지도자가 중요하다. 인간들이 갖고 있는 것이 감정과 충동이라는 측면이 하나 있고, 다른 한쪽으로는 이성과 사유라는 한 측면이 있는데 이성과 사유가 발휘하는 위력을 최대화할 수 있는 지도자가 그 사회를 앞으로 끌고 나간다. 중세 말에는 계몽군주가 그런 역할을 했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지성적인 지도자들이 그런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 빨갱이라고 몇십 년 동안 모함을 받았지만 평양에 가지 않았나. 그것이 용기이고 지성이라고 본다.

길게 보면 국민 수준이 모든 것을 결정하지만 단기적으로 보면 리더의 역량과 지성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그런데 현재 상황은 국민의식보다 지도자들의 의식이 밑으로 내려간 상황이다. 지도자들의 역량과 지성의 수준이 대중들보다 밑으로 내려가니까 대중은 일정 부분 지도자를 따라 내려갈 수밖에 없다. 현 집권세력이 NLL 논란 등을 일으키는 이유는 국민 수준을 본인들과 가깝게 끌어내리려는 것이다.

현재의 분단체제는 민족사에서 보면 일종의 '남북조시대'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감정이 이미 60년 이상 나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나누어진 기간을 겪어본 역사가 없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갈 때는 내전이 없이 사실상 궁정 쿠데타로 왕조가 바뀌었다. 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갈 때는 후삼국 시대에 내전이 잠시 있었지만 이후 내전이라고 말할 것이 없이 1000년을 이어왔다. 그리고 나서 6.25라는 혹독한 내전을 겪고 60년 이상 분단된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 마음속에는 이미 한반도가 남북조 시대로 접어들어 있다. 그런데 양쪽은 체제마저 다르다. 게다가 늘 으르렁거리며 싸워왔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합쳐서 잘 살아야 한다는 이성적인 부분도 있는가 하면, 양측이 견제하고 대결하는 상황으로 가다 보니 각자 소속 집단의 편을 들 수밖에 없는 정서적인 부분이 있다. 이런 부분을 정치에 작동시킨 것이 현 정부를 비롯한 집권 세력들이다. 남북 간 무엇이든 싸움이 붙기만 하면 대결 정서를 불러일으킬수록 북에 대해 평소 강경하게 말한 쪽이 유리하니까.

이재정 : 남북 간 증오의 대결뿐만 아니라 영호남 간 증오의 대결, 진보·보수 간 증오의 대결을 조장하면서 그 대결 정치를 그대로 이용해 정치적 이득을 보고 있는 셈이다. 국민들이 잘 깨닫는 길밖에 없지 않겠나 싶다.

프레시안 : 그런데 박근혜정부 들어 개성공단 같은 경우 폐쇄될 것처럼 보였는데 결국 살아났다. 박 대통령이 남북관계에 있어 뭔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나?

유시민 : 개성공단은 문 닫으면 서로가 입는 손실이 너무 크니까 그런 것 같다. 왜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남북문제를 풀기 위해 경제협력으로 접근했냐 하면, 사람 관계에서도 그렇고 상호 의존관계가 생기게 되면 참게 된다. 예를 들어 중요한 거래처의 사장이 나를 좀 기분 나쁘게 했다고 해서 그 사장한테 돌 던질 수 없지 않나,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런데 개성공단만큼은 북이 입는 손실보다 우리가 입는 손실이 더 큰 사업이다. 북은 인건비 수익을 얻는 것이지만 우리는 인건비 빼고 나머지를 다 갖고 오는 사업이다. 막말로 북은 중국 자본가들 유치해서 공장 돌릴 수 있지만 남은 납품업체나 협력업체 등등 타격을 받는 곳이 많아진다. 개성공단은 경제적 상호의존성이 대규모로 깊게 설정이 되면 서로가 험하게 싸우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결국은 남북 사이의 전쟁 가능성을 최소화시키려면 경제적 상호의존성을 가능한 한 빠른 시간 안에 넓고 깊게 증대시켜야 한다. 그래야 서로 못 싸운다. 설사 싸운다고 해도 옷자락이나 한번 잡고 말지 진짜 주먹질은 못하는 것이다. 갈라서면 엄청난 타격을 받으니까. 이게 소위 역진이 거의 어려운 교류협력이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남북 경협 사업에 집중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본다.

그런데 기본적으로는 이명박 대통령도 그렇고 박근혜 대통령도 지성의 결여가 가장 큰 문제라고 본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해야 합리적인 대안이 나오는데 이데올로기에 눈이 가려서 비즈니스를 못 보는 것이다.

프레시안 : 올해도 채 두 달이 남지 않았다. 올 한해는 정전협정 60주년이었고 북핵 문제가 발생한 지 20년이 되는 해였다. 현시점에서 정말 중요한 이슈는 민생문제와 남북관계라고 보는데, 사이비이슈인 NLL이 남한을 1년 내내 지배해왔다.

이재정 : 민생문제를 풀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 남북관계의 개선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경제 성장 동력을 키우려면 제조업이나 사회간접자본투자를 강화해 나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남북관계를 개선해서 북과 공동으로 협력하는 사업을 확대해나갈 수 있다. 사실 개성공단도 지금은 숨만 쉬게 만들어 놓은 것인데, 실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개성공단 2단계 사업에 착수해야 한다.

남은 피난민 정서에서, 북은 혁명의 신화에서 벗어나야

프레시안 : 현 정부 집권이 이제 곧 있으면 1년이 된다. 정부가 향후 남북관계를 어떻게 풀어가야 한다고 보나?

이재정 : 박 대통령이 7.4 남북공동성명의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3대 통일 원칙으로 돌아가서 거기서부터 진지하게 고민하고 문제를 풀어갔으면 좋겠다. 또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만들어놨던 남북기본합의서, 한반도 비핵화 특별선언도 계승해야 한다고 본다. 이를 통해 '남북관계는 동반자 관계다, 적대적 관계가 아니다'라는 것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한 것까지 다 껴안고 가라는 것이 아니다.

노태우 대통령 재임 시절인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다. 얼마 전 부산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가 있었는데 WCC는 198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한반도문제를 풀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1984년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한반도 문제를 풀기 위해 세계 교회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합의를 했고, 이 합의에 의해 1986년 스위스 글리온에서 남북기독교 대표자들이 만나서 제1차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남북 세계교회협의회를 열었다. 이 협의의 진전에 따라 나온 것이 1988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내놓은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기독교 선언이었다. 근데 여기에 나온 내용의 상당수를 노태우정부 당시 이홍구 장관이 반영을 시켜서 남북기본합의서가 나온다.

세계교회 등 여러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나온 이 남북기본합의서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과 정신을 잘 따지고 이해하는 것, 이것으로서 박근혜 정부의 신뢰 프로세스를 여는 중요한 하나의 접근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6.15, 10.4 선언이라는, 남북이 합의하고 유엔이 총회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하고 우리 국회와 여야가 다 함께 받아들인 것을 부인해서도 안 된다. 만약 이를 부정한다면 스스로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2002년 박근혜 대통령이 평양 갔다 온 것은 남북 정상회담 결과로 갔다 온 것 아닌가?

유시민 :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할 당시 정권의 실세들이 모여서 결의를 했다고 한다. 노태우 대통령이 7.7선언을 발표하기 전에 사회주의 붕괴, 미국 중심의 일극적 세계 질서로의 재편, 소련 및 동유럽의 붕괴 등 세계질서의 변화를 보고, 우리 민족이 살아갈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판단했다고 한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대한민국의 살 길은 옛 사회주의 국가와의 국교 수립, 그리고 그 나라들에 대한 경제적 진출이고, 한편으로는 동시에 국제적으로 고립된 북을 포용하고 북이 국제 분업체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그 사람들이 각각의 분야에서 나름의 방법으로 움직인 것이다. 어떤 한 사람의 결단이나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집권세력의 핵심에 있는 사람들이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고민하면서 판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그 판단을 받아서 밀고 나갔기 때문에 남북기본합의서라는 결실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야당이 미우면 야당 대통령이 한 일은 안 봐도 된다. 보면 좋지만.(웃음) 그렇지만 최소한 박정희 대통령 당시 7.4 남북공동선언이 맺어질 때의 상황과 남북기본합의서가 체결되기 전 2~3년의 활동을 비롯해 노태우 대통령의 국정 기조라도 좀 참고했으면 좋겠다.

▲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집권세력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정서에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책의 에필로그에서 북의 '혁명의 신화와 남의 '난민촌 정서'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것이 깨지지 않으면 남북 대결상태를 해소할 수 없고, 특히 북의 변화가 어렵다면 남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남의 변화에 힘을 보태고 싶다고 했다.

유시민 : 책을 다 쓰고 나니 어쩌면 좋은 공부 교재가 되는 이 대화록에 대해 왜 사람들은 저런 식으로 가짜 논쟁을 할까. NLL 포기냐 아니냐, 굽신거렸냐 아니냐만 갖고 이야기를 할까 생각해봤는데 결론은 우리가 피난민정서를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북한이 싫어서, 또는 미워서 남으로 내려온 실향민들은 물론이고 남의 주민들도 북의 무력 도발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난민촌이 아닌데, 전쟁이 끝난 이후 우리 스스로 경제적 효율성, 정치적 정당성을 갖춘 국가로 투쟁과 노력을 통해 이 나라를 60년 전과 전혀 다른 나라로 세워 놨는데. 이렇게 해놓고 왜 난민촌 정서를 못 버리는지. 최근에 군인들이 북한과 싸우면 진다고 말하는 것도 보면서 이것은 정서라는 결론을 내렸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피난민이고. 억울하게 침략을 당했고 북에서 못된 짓을 하는 바람에 우리가 많이 죽었고 그것 때문에 고생을 엄청했고 저 나쁜 놈들이 또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몸은 아파트에 사는데 마음은 난민촌에 있는 것이다. 이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고 본다.

물론 북이 하는 행동이 우리가 보기에 이해도 안 되고 못마땅하기도 하다. 무슨 혁명을 한 나라가 3대 세습을 하나. 북을 보면 혁명은 현실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책 속에서만 일어난 것이다. 북을 지배하는 철학은 봉건이라고 본다. 중요한 것은 북이 그런 사회라는 것을 알고 그 상대에 맞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뜻대로 안 해준다고 해서 화를 내고 짜증을 낼 것이 아니라, 북의 민중들과 인민들이 더 정확한 정보와 더 많은 경험, 풍부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기 삶과 북의 사회에 대해 좀 더 진전된 견해를 갖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북을 껴안으면서 북 주민들이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난민 정서를 버리고 당당하고 정통성 있는 국가, 잘사는 나라의 시민으로서 남북관계에 대한 이성적인 사고를 하자는 것이다.

프레시안 : 대화록을 본 사람 중에는 우리가 북에 매달리고, 사정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실제로 강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북은 약하니까 강한 척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이미 체제 경쟁은 20년 전에 끝났고. 남북관계를 주도하는 것은 남한이다. 이미 20년 전, 군인 출신인 임동원 전 장관이 남측의 주도로 평화체제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러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국민들이 대화록을 포함해서 이 책을 좀 많이 보면서, 남북관계를 전체적으로 봤을 때 남이 주도할 수밖에 없고 남이 북을 끌고 가면서 남북관계를 평화적으로 이끌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

유시민 : 이왕 대화록이 공개된 마당에 집권세력들이 이 대화록을 편견 없이 읽어 봤으면 좋겠다. 적대적인 정전상태에 있는 적대적 협력 파트너랄까, 모순된 관계에 있는 남북 두 나라의 최고 국정 책임자가 만났을 때 대화가 어떻게 이루어졌었는지 대화록에 나타난 대화 흐름을 참고했으면 좋겠다. 향후 다시 대화의 문을 열어나간다고 가정할 때 이명박 대통령 취임 이후 6년 동안 무엇이 남북관계를 막았는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 올 것인데, 그때 이 대화록이 그런 성찰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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