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불가능' 시대라고 합니다.
과열된 입시 경쟁,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학교 폭력, 공교육을 대체하다시피 팽창해버린 사교육 등. 가르침과 배움은 사라지고 오로지 '등수 매기기'에만 골몰하는 교실 풍경은 이제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식상할 지경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육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다들 이런 식상한 이야기를 하곤 하지요. 누구나 알고 있는 현실 진단을 기계적으로 읊조리는 정책 당국자, 학자들의 모습에서 진정성을 느끼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런 뻔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풍경, 그 맞은편에는 학교 폭력, 입시 부담, 혹은 어른들이 짐작하지 못하는 그밖의 어떤 이유로 자살을 고민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세상을 떠나고 싶을 만큼 심각한 문제 앞에서, 어른들은 왜 '뻔한 이야기'만 반복하는 걸까요. 어쩌면 이런 간극이야말로 우리 교육의 절망적인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지금 진짜 필요한 미덕은 '솔직함'일 수 있겠다고 봅니다. 짧은 자기 경험으로 섣부르게 단정짓기보다 교육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아주 하찮은 수준이라는 걸 솔직히 인정하고 시작하는 태도 말입니다. 또 근대적인 학교 모델이 이젠 어떤 구조적인 한계에 부딪혔다는 점, 그리고 그 한계와 모순에 대한 우리의 인식 역시 한계가 있다는 점 역시 솔직히 인정하는 게 필요해 보입니다.
대안교육 격월간지 <민들레>에 주목한 건 그 때문입니다. 지난 1999년 창간된 이 잡지의 시선은 '학교 너머'를 향하고 있습니다. "학교가 바뀌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만큼 우리는 학교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 시스템을 만들자"라는 <민들레>의 목소리가 교육에 관한 '뻔한 이야기'들에 갇혀 드러나지 않았던 '학교의 빈 곳'을 살피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편집자>
'자본론'을 고발한 학생과 하버드의 문제아들
<맨큐의 경제학> (김경환·김종석 옮김, Cengage Learning 펴냄)이라는 책이 있다. 1997년 출간되어 세계적으로 100만 부 이상 판매된 이 책은 10여 년째 세계 주류경제학을 이끄는 보수주의 경제학의 바이블로 읽히고 있다. 2011년 11월 2일, 이 책의 저자 그레고리 맨큐의 강의실에서 작은 반란이 일어났다. 맨큐 교수의 '경제학 10'강의가 시작되자 갑자기 70여 명의 학생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강의실에 남기고 간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늘 우리는 당신의 경제학 입문 수업의 깊은 편향성에 불만을 표하고자 수업에 출석하지 않겠다. 우리는 당신의 성향이 학생, 대학 나아가 더 넓은 사회에 끼칠 영향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한다. 편향된 당신의 강의 '경제학 10'은 미국의 경제적 불평등을 상징하며 이것을 확대시키고 있다. 때문에 기초 경제이론의 부족한 토론에 반대하며 당신의 수업에서 나와 미국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을 이야기하는 미국의 변화를 지지하러 갈 것이다. 우리의 이런 우려와 항의를 깊이 숙고해 주기를 바란다.
- '경제학 10'을 우려하는 학생들이
강의실을 빠져나온 학생들은 '기득권에 편승하지 말자', '월가 시위대와 연대하자' 등의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월가 점령 시위에 참가했다.
지난 9월 한국에서도 그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경희대에서 '마르크스 경제학' 등을 강의하는 임승수 씨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학교 관계자로부터 한 학생이 국정원에 자신을 고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이다. 임 씨를 신고한 학생은 그가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반미사상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 민주노동당에서 간부로 일한 전력도 문제 삼았다. 고발당한 임 씨는 "주위에 최근 나처럼 신고당한 강의자가 또 있다. 학생이 저를 국정원에 신고했다는 사실보다 그 학생이 신고한 사실을 학교에 떳떳하게 알리는 태도에 충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맨큐를 CIA에 고발했다면?
'군사부일체' 따위의 고루한 훈계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강의를 선택하고 거부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주어진 권리다. 맨큐를 거부한 하버드 학생들과 <자본론>을 배우길 거부한 경희대 학생, 자신들에게 불편한 강의를 능동적으로 거부했다는 점에서 둘의 행동은 다르지 않다. 그런데, 둘의 행위에서 느껴지는 감흥은 무척이나 다르다. 강의실에서 나온 하버드 학생들은 월가 점령 시위에 참가했고, 경희대 학생은 국정원에 고발장을 접수했다. 이 차이는 무엇이며, 어디서 오는 걸까?
<맨큐의 경제학>과 마르크스의 <자본론>, 각각 보수주의 경제학과 사회주의 경제학의 정수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두 책은 서로의 대척점에 있다. 부시 행정부와 공화당 롬니 대선 예비 후보 캠프에서 일했던 <맨큐의 경제학>의 저자 그레고리 맨큐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를 옹호하는 인물이며, <자본론>의 저자 칼 마르크스는 잘 알려진 대로 20세기를 뒤흔든 사회주의 경제학의 창시자다. 하버드 학생들은 맨큐의 강의가 세계 경제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걱정했고, 경희대 학생은 임 씨의 자본론 강의가 한국 사회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걱정했다. 두 걱정의 당위를 따지고 싶지는 않다.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그들이 택한 걱정의 '방식'이다.
만약 하버드 학생들이 맨큐 교수를 CIA에 고발했다면 어땠을까? 미국에서는, 아니 보통의 민주국가에서는 불가능한 이런 일이 한국에서는 가능하다. '맨큐의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것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반대하는 것은 학문적 견해차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그런데 미국에서 맨큐는 저항과 논쟁의 대상이었지만, 한국에서 자본론은 고발의 대상이다. 물론 이 차이를 만드는 것은 한국의 실정법 국가보안법이다.
학생의 고발은 정당한 것일까?
경희대 학생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며 임 씨를 고발한 근거는 세 가지다. 임 씨가 <자본론>을 강의한다는 것과 반미사상을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간부로 일했다는 경력이다. 한국에서도(지구의 어떤 나라에서도) <자본론>은 금서가 아니다. 나는 임씨가 어떤 내용의 강의를 했는지 알지 못하지만, 한국의 보수사회에서 통용되는 '반미사상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폭력적인 팍스아메리카나에 반대하는 담론을 뜻한다. 이를 '반미'라는 불친절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도 문제지만, 설사 임 씨가 특정국가에 대한 호불호를 갖고 있다 한들 그것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합법적인 원내정당에서 당직자로 근무했던 경력을 문제 삼은 대목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결국 임 씨가 국정원에 의해 기소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제로다. 학생은 무고(誣告)를 한 것이다.
이번 해프닝은 박물관에나 전시되어 있어야 할 매카시즘이 대학가에도 잔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학생의 어리석은 치기를 탓하고 싶지는 않다. 국정원장이 국민의 절반을 종북세력이라 규정하고 여당의원이 공공연하게 '좌파와의 전쟁'을 외치는 나라에서 저 학생의 '도발'은 차라리 귀여운 수준이다. 진짜 비극은 이 학생의 행위가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이 나라의 현실에 있다. 학생의 고발은 헛발질이었지만, 자본론 강의를 듣고 국가보안법에 따른 반역을 의심했던 학생의 행위는 이 나라 보수진영에서 '애국'으로 칭송받기에 충분한 것이다. 실제로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를 비롯한 몇몇 극우 사이트에서는 이 학생이 영웅처럼 묘사되고 있다. 여전히 반공을 국시로 삼고 있는 그들의 시각에서 볼 때 저 학생이야말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애국자다.
학생 역시 그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임 씨를 고발한 학생은 고발사실을 자랑스레 학교 측에 알려왔다. 저 학생이 강사를 고발하고 느꼈을 공명심은 80년대 이근안이 학생들을 고문하면서 느꼈던 공명심과 같은 종류의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탄압하는 사람들이 자부심을 느끼는 나라다.
'다른 생각'이 고발.처벌될 수 있는 나라에서 이성적인 토론은 불가능하다. 민주주의를 어떤 식으로 해석하더라도 '다른 생각'을 고발하는 것이 용인될 수는 없다. 이번 해프닝은 국가보안법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것의 '사용자'들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든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나쁜 생각'을 고발하라?
이 문제에 대한 가장 간단한 해답은 우리 교육현장에 서구식 토론교육을 도입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토론학습을 통해 유연한 사고능력과 '다름의 인정'을 배운다면 저런 참사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만약에 당장 한국의 교실에서 프랑스나 핀란드식 토론수업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최근 혁신학교를 중심으로 일부 공교육 현장에서도 토론수업이 장려되고 있지만 토론수업을 지도하는 교사들은 하나같이 조심스러움을 토로한다. '나쁜 생각'의 고발을 장려하는 실정법이 존재하는 이상 '상대의 생각을 어디까지 용인해야 하는가'를 지도하는 일은 매우 민감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토론 중 누군가가 상대의 발언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국가보안법 4조)'고 판단하거나 '사회질서의 혼란을 조성할 우려가 있다(국가보안법 7조)'고 판단할 경우 해당 학생은 언제고 수사기관에 고발당할 수 있다. 물론 실제로 교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사실 잘 모르겠다), 그럴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토론수업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국가보안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진부한 주장은 의미가 없다. 이 법은 애초부터 자의적 해석을 위해 만들어진 법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교육이 이 곤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방법은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것뿐이다.
고발-처벌을 각오해야 하는 토론이라면 그걸 어찌 자유로운 토론이라 말할 수 있으며, 어떤 교사가 정상적인 토론수업을 진행할 수 있을까? 이것을 그대로 둔 채 토론교육의 장려를 이야기하는 것은 순서가 틀렸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국가보안법 폐지를 가장 강하게 주장해야 할 곳은 다름 아닌 교육계다.
낭만이 되어버린 토론
몇 해 전 목포 XX여고에서 국사를 가르치던 교사 이 모 씨는 자신이 맡았던 수업에서 강제로 교체되어야 했다.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이 씨의 토론 수업 방식에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단체로 학년실(교무실)로 몰려가 "성적도 안 오르는 토론 수업에 억지로 참여시킨다"며 이 씨의 수업방식에 항의했고, 그날 이후 이 씨는 더 이상 그 학년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었다. 취지가 무엇이었든 이 씨가 도입했던 토론 수업은 '입시'라는 정언명령이 지배하는 한국의 교실에서 받아들여지기에는 너무 '급진적인' 것이었다. 학생들은 입시라는 공통의 목적 아래 이 씨의 토론 수업을 '공통의 적'으로 인식했다. 우리는 저 인식을 '틀렸다' 말할 수 있을까?
학교와 학부모-학생 모두가 제도교육의 궁극적 목적을 대학입시로 상정하고 있는 이상 학년이 올라갈수록 토론수업이 부담스러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대입이 가까워질수록 토론교육은 음악-미술-체육과 같이 사치스러운 낭만쯤으로 치부된다. 현장의 분위기가 이러하다면 서구식 토론학습법을 제도적으로 이식한다 해도 일선 현장에서 무용화될 가능성이 높다.
초등-중등 교육과정부터 토론학습이 일상화되어 있는 서구 국가들의 예는 너무 먼 이야기일지 모르나, 우리와 가장 유사한 교육문화를 가졌다는 일본조차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논술과 스피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고등교육과정에 토론수업을 포함시켰다는 점은 생각해볼 문제다. 우리나라도 1986년부터 대학별로 논술고사를 도입했지만 학생들의 논술-토론 능력은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논술만큼 중요한 것이 논변(論辨)이다. 구어적인 논증 실력이 뒷받침되지 못한 논술이란 반쪽짜리 기형일 수밖에 없으며, 정상적인 토론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을 상대로 치러지는 대입논술시험은 그 자체로 난센스다. 30년 가까이 실시된 대입 논술고사가 학생들의 토론 실력을 키워내지 못한 이유다.
경희대에서 벌어진 해프닝은 관용을 배우지 못하고 자란 학생과 다름을 탄압하는 사회가 만나 빚어진 참사다. 관용은 결코 '주입'으로 학습될 수 없다. '다름의 인정'을 배우지 못하고 자란 학생들이 매카시즘과 같은 배제의 논리에 동조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럽다. 다른 생각의 고발을 장려하는 국가보안법이 살아 있고, 과도한 입시부담이 교실을 짓누르고 있는 환경에서 '토론하자'는 말은 공허하기만 하다. 토론을 가르치기 전에 토론이 사치스럽지 않은 교실을 만드는 것이, 다름을 인정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먼저다. 아직 우리가 아이들에게 고전을 읽고 철학을 공부하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다.
* 위의 글은 <민들레> 89호 "교장 그리고 리더십"에 실린 글입니다. (☞ <민들레>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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