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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혈의 메리'와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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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혈의 메리'와 박근혜

[박동천 칼럼] 시대변화 수용 못한 '박정희 한풀이' 정치

메리 튜더(1516-1558)와 엘리자베스 튜더(1533-1603)는 영국왕 헨리 8세의 두 딸이다. 메리의 어머니는 카스티유의 이사벨라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사이에서 태어난 캐서린(카타리나)이고, 엘리자베스의 어머니는 장사꾼 출신 토머스 불린의 딸 앤이다.

캐서린(1485-1536)은 원래 헨리의 형 아서와 결혼했었지만, 불과 5개월 후인 1502년 4월에 아서가 죽었다. 장미전쟁의 혼란을 틈타 무력으로 왕좌를 차지한 헨리 7세는 어렵게 성사시킨 가톨릭 강국 에스파냐와의 정략결혼을 무산시키기가 아까웠다. 그래서 에스파냐에서 시집왔다가 청상과부가 된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보내는 대신에 둘째 아들 헨리(1491-1547)와 맺어주기로 했다.

헨리와 캐서린을 결혼시킨다는 발상에 대해 이사벨라, 페르난도, 교황청 등 관계자들은 다양한 명분과 다양한 계산에 따라 다양한 반응들을 보였다. 게다가 당사자인 헨리가 열 살밖에 되지 않아서, 처음에는 캐서린을 에스파냐 대사의 자격으로 잉글랜드에 머물게 한다는 모호한 편법으로 시간을 벌었다. 헨리는 처음부터 이 결혼을 원치 않았지만, 부왕이 죽고 자기가 왕위를 계승한 1509년에는 죽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형수와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이 결혼은 줄곧 순탄하지 못했다. 헨리는 아들을 원했지만, 캐서린은 유산과 사산을 반복한 끝에 겨우 딸 하나를 낳아줬을 뿐이다. 여섯 살 연상인 형수를 사랑할 수 없었던 헨리는 연애 상대를 늘 찾아 다녔다. 여성 편력의 도중에 메리 불린을 만났고, 그 와중에 메리의 동생인 앤 불린(1501-1536)과 만나게 된다. 앤 불린은 왕의 애인 역에 만족하지 않고 왕비가 되고자 했다.

헨리가 앤과 결혼하려면 가톨릭의 율법에 따라 먼저 캐서린과 이혼을 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교황청으로부터 이혼을 허락받아야 했다. 교황청이 이혼을 허락할 리 만무했기 때문에, 헨리는 결국 1534년에 영국 교회를 로마 가톨릭과 분리하는 결단을 내린다. 이에 반대하던 토머스 모어와 존 피셔는 참수형을 당한다. 이렇게 해서 앤은 왕비가 되었지만, 엘리자베스를 낳은 후 3년 간 아들을 낳지 못했다. 아들을 얻기 위해 새 왕비가 필요했던 헨리는 앤을 반역죄로 몰아 처형한다. 그리고 결혼한 세 번째 왕비 제인 시모어에게서 마침내 아들을 얻는다. 이 아이가 에드워드 6세(1537-1553)이다.

헨리 8세가 사망한 1547년에 에드워드는 열 살이었다. 모친은 이미 1537년에 사망한 다음이어서 처음에는 외삼촌 에드워드 시모어(서머세트 공작), 나중에는 존 더들리(노덤벌랜드 공작)에게 의지했다. 선왕의 종교개혁을 유지해서 가톨릭 세력의 발호를 막았지만, 병약한 탓에 왕위에 오른 지 6년 남짓, 1553년 7월 6일에 죽었다. 유언에 의해, 왕위는 에드워드에게 조카뻘이 되는 제인 그레이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제인 그레이의 외할머니가 헨리 8세의 여동생이었던 것이다. 제인 그레이는 실권자 노덤벌랜드에 의해 7월 10일에 영국 여왕으로 선포된다.

법률적으로 따지면, 1553년 메리 튜더에게는 왕위계승권이 없었다. 헨리가 캐서린과 이혼할 때, 캐서린의 후손을 왕위계승에서 배제한다는 왕위계승법이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리에게는 후원 세력이 있었다. 헨리 8세의 종교개혁 이후 숨을 죽여야만 했던 모든 가톨릭 세력이 메리의 등극을 지지했다. 이 세력의 준동을 막기 위해 노덤벌랜드가 1553년 7월 14일 출동하면서 런던을 비우자, 그 틈을 타고 추밀원은 7월 19일에 메리를 여왕으로 선포하고 제인 그레이를 반역자로 규정했다. 메리의 군대는 8월 3일 런던에 입성하고 노덤벌랜드는 8월 22일에 처형되었다. 제인 그레이는 1554년 2월에 참수형에 처해졌다.

메리는 왕위에 오른 후 "유혈의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을 얻었다. 잉글랜드를 가톨릭의 땅으로 되돌리기 위해 잔혹한 형벌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신교를 버리고 가톨릭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목사와 평신도를 불문하고 "반역죄"로 몰아 죽였다. 신앙과 양심의 차이에다가 "반역죄"라는 정치적인 죄목을 뒤집어씌우고서, 형벌은 주로 화형을 애용했다. 기록된 명단만 봐도 메리 1세 치하에서 화형당한 사람의 수는 2백 명을 훌쩍 넘는다.

메리는 자기가 "신의 뜻"을 따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이토록 잔혹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실상을 말하자면, 메리는 개인적 원한을 무절제하게 풀었을 뿐이다.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에 대한 원한, 그리고 자신을 정당한 왕위계승자로 인정하지 않은 개신교 세력에 대한 원한을 그렇게 푼 것이다. 잉글랜드를 위해 "신의 뜻" 비슷한 것이 이 시기에 있었다고 기어이 봐야 한다면, 메리가 오래 살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마도 첫 번째 후보에 오를 것이다. 메리는 4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엘리자베스는 이복 언니가 실력으로 왕좌를 차지할 때 언니 편에 붙었다. 엘리자베스는 모친이 처형당할 때 만 세 살도 되지 못했다. 유년기와 사춘기 동안 지극히 불안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고, 그 와중에 쓰라린 현실을 직시하는 눈을 길렀다. 원한에 사무친 이복 언니가 복수극을 벌이는 동안, 몸을 낮추면서 언니에게 환심을 구걸했다. 어리석어서 속아 넘어간 탓이든지, 아니면 그래도 일말의 인간성이 남아 있었던 탓이든지, 메리는 엘리자베스를 죽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망설이고 주저했지만, 죽으면서는 엘리자베스를 계승자로 지명하기까지 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이렇게 해서 1558년에 잉글랜드의 여왕이 되었다. 1603년에 죽을 때까지 45년을 다스리면서, 잉글랜드를 유럽의 열강 자리에 올려놓았다. 무엇보다, 종교를 둘러싼 분쟁을 봉합하고 넘어가는 데 성공함으로써, 이른바 "균형 헌정"(balanced constitution)의 초석을 놓았다. 엘리자베스는 영국 교회를 중심으로 삼되, 개인들의 사생활에까지 교회의 "원칙"을 강요하지 않았다. 말꼬리를 잡아 따지기로 하면, 영국 교회 바깥에 위치했던 가톨릭이나 여타 개신교파들이 모두 불법이었지만, 엘리자베스는 그들에게 영국 교회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기 위해 정치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연합뉴스


박근혜를 메리나 엘리자베스와 비교하는 것은 생뚱맞은 짓이다. 박근혜의 아버지가 "아들을 낳기 위해" 이혼하거나 아내를 죽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애당초 현재 대한민국이 박 씨 왕조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박근혜를 엘리자베스에 비견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기어이 비교를 한다면 박근혜는 엘리자베스보다 메리에 가까워 보인다. 무엇보다 시대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원한에 사무쳐서 역사를 뒤로 돌리려는 부질없는 몸짓이 그렇다.

박근혜가 자기 아버지를 숭배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박정희를 숭배할 때까지 정치권력을 동원해서 몰아가려는 시도는 파멸을 부를 뿐이다. 메리는 가톨릭을 숭배한다는 "원칙"을 지킨답시고 모든 잉글랜드인에게 가톨릭 신앙을 강요했지만 실패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신앙을 특별히 드러내지도 않고 내세우지도 않았다. 다만 정치적 평화의 축을 영국 교회로 놓고, 이 체제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는 한 다양한 이견과 논란을 용납했다.

박근혜가 앞으로 남은 4년을 엘리자베스처럼 보내기는 기대난망으로 보인다. 자기가 하는 일들이 한풀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계기가 곧 원한에 사무친 편견에서 벗어나는 계기와 같기 때문이다. 더구나 박근혜의 주변에는 그녀의 원한을 부추기는 자들이 끊임없이 몰려들 것이다. 이런 자들은 '박정희 한풀이' 프로젝트의 그림자 안에 숨어서, 권력의 단물을 정신없이 들이킬 것이다.

가톨릭에 대한 충성과 반대라는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 본 탓에, 메리 1세는 자신에게 충성한다던 신하들이 공무원으로서 실제로 무슨 짓을 벌이는지 파악할 능력이 없었다. 박정희에 대한 충성과 반대라는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한, 박근혜도 공직자들이 실제로 무슨 짓을 벌이는지 파악할 수가 없을 것이다. 장차 4년이 이런 상태에서 흘러 갈 것이고, 4년 후라고 해서 이런 상태가 끝난다는 보장은 없다. 메리가 엘리자베스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은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덕성의 표현이었지만, 대한민국이라는 민주정에서 차기 대통령을 뽑을 때 유권자들이 무슨 덕성을 얼마나 발휘할지는 미지의 봉인 아래 철저히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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