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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군부-재벌' 3각 동맹 통한 공포정치, 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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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정희-군부-재벌' 3각 동맹 통한 공포정치, 유신"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42> 민주당 이학영 의원

'이학영', 그는 오랜 시간을 시민운동에 몸을 담고 있었던 원로 시민운동가였다. 그러던 그가 2012년 총선에서 민주당 초선의원으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지 1년 반이 됐다. 총선 과정에서 이슈가 되었던 그의 이력에는 유신 독재 시절, 동료를 대신해 받은 '강도상해죄'라는 전과가 붙어 있다.

"그때는 재벌을 응징하는 일을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의 일환으로 생각했다. 출소 후 내 인생은 마치 암흑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너무 힘들어서 이 현실을 타개하고자 박정희 정권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게 됐다."

젊은 시절, 유신독재와 재벌의 횡포에 맞서 그들을 응징하고자 했던 이학영은 분명히 담대한 청년이었다. 5년간의 옥살이 끝에 출소했지만, 그에게 주어진 것은 '자유'가 아니라 '감시'였고, '요시찰 인물'로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시민운동에 뛰어들었다. 결국 그는 지난해 총선에서 일부 후배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치영역으로 활동범위를 확장했다. 시민 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치를 하겠다는 이학영 의원, 그는 과연 어떤 정치를 소망하고 있을까.

"시민운동과 정치 모두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목표가 같다. 현장에서 사람들과 함께 운동했던 경험을 가지고 정치영역으로 가서 막힌 정치가 아닌 시민과 함께 소통하는 정치를 할 수 있다면 시민운동권에서 정치가가 배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일반 대중 다수의 목소리보다 정치인 한 명의 목소리가 훨씬 더 큰 효과를 발휘할 때가 있고, 시민운동을 하면 십년 쯤 걸릴 일이 정치에선 바로 해결되기도 하는데 그럴 때 기쁘다고 했다.

인터뷰를 후 골목 칼국수 집에서 늦은 점심을 때우고, 다시 장외투쟁(9월 24일 마침) 천막 당사로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현실은 아주 천천히, 조금씩 변해간다. 국민들을 이해시키고 설득하면서 1보씩 가야 한다. 그 대신 우리가 꿈꾸는 미래의 사회는 정말 좋은 사회여야 한다. 그런 꿈이 없고 우리가 현실을 그대로 인정해 버리면 정치란 게 의미가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청년들에게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좋은 사회를 꿈꾸기를 당부했다.

▲ 민주당 이학영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 원로 시민운동가에서 초선 정치인으로 활동영역이 확장되었다. 정치인 생활이 이제 1년 반 정도 지났는데 정치인으로서의 요즘 근황이 궁금하다. 어떻게 지내고 있나?

정치는 그동안 내가 했던 시민운동과는 생각하는 방식에서부터 일하는 방식까지 모두가 너무 달랐다. 곧바로 적응이 안됐다. 우선은 육체적으로 적응이 잘 안 되더라(웃음). 시민운동을 할 때는 내가 주도해 일정을 잡고 시간을 배분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이미 다 짜인 시간대로 움직여야 한다. 아침부터 일을 시작해 집에 들어가면 거의 밤 11시, 12시가 된다. 물론 이전에도 거의 주말 없이 일을 하긴 했지만, 그땐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우선순위로 배치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가니까 피곤한 줄을 몰랐다. 지금은 (물론 내가 가고 싶은 곳도 많지만) 의례적으로 가는 곳도 많아 몸과 마음이 좀 지친다. 그래도 이렇게 1년을 하니까 이제 몸이 조금 적응했다.

대중들은 늘 정치인들이 무언가를 보여주길 기대한다.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광대의 모습을 원하는 것 같다. 정치란 대중들이 자기 스트레스를 푸는 영역 같기도 하다. 실수하면 욕도 먹고, 욕 먹을 줄 알면서도 그 자리에 가야한다. 처음에는 의례적인 행사들이 의미 없는 일들이라 생각했는데, 정치라는 게 이런 것까지 요구한다는 것을 알았다.

또 한 가지 느끼는 것은 정치영역에서는 실수하지 않을 정도로 내용을 충분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참 쉽지 않다. 차분하게 앉아서 생각을 하면서 자료도 읽고 또 현장에도 가봐야 하는데, 그럴 시간 없이 의제들이 막 몰려온다. 하루에도 행사가 여러 개씩 있고 거기에 맞게 대응하려면 공부를 해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게다가 이 일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하는 일이다. 이제 신입생으로써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5월 축제기간이 끝나 중간고사를 본 기분이랄까. 1년을 그렇게 보냈다.

-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1971년에서 1985년까지 15년 동안 다녔다. 당시 엄혹한 유신체제 하에서 대학생활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대학교에 입학해서 3학년까지 다니고 4학년 1학기에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됐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후 10여년 만에 다시 복학했다. 그리고 나머지 1년을 15년 만에 채웠다.

내가 대학에 입학할 당시는 박정희 정권이 독재 체제를 완비하던 시기였다. 박정희는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억지로 대통령이 된 이후, 이제는 기존 선거제도로는 안 되겠다고 여겼는지 유신헌법을 발표했다. 마음에 드는 사람 1000명을 뽑아서 장충동체육관에서 99.9%로 당선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또 대학에서는 '교련'이라는 군사 훈련 시간을 만들어 발랄한 대학생들에게 총을 쥐여주고 군기를 잡으며 훈련을 시켰다. 그때가 1학년이었는데, 너무 낯설었다. 많은 학생들이 이에 반대했다. 73년까지는 시위가 그렇게 심하지 않아서 공부와 병행할 수 있었는데, 그 이후로는 시위가 굉장히 많아졌다. 그러자 박정희는 그런 학생들을 군대로 끌고 가거나, 무기정학을 시키고 퇴학을 시켜버렸다. 바른말을 하는 학자들과 언론인들을 비롯해서 학생들까지 억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 1979년 4월 재벌 2세들의 일탈 문제를 부각하기 위해 동료들과 동아그룹 회장 집에 들어갔다 구속된 이후, '남민전 사건'(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가 유신체제를 비판하며 유인물과 기관지를 제작·배포하다 공안기관에 적발된 사건. 당시 민청학련 등 학생 운동가들이 대거 구속됐다. 2006년 정부로부터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음)으로 병합되면서 5년간 실형을 살았다. 작년 총선 당시 현장에 함께 있었던 동료 차성환 씨가 경비원을 칼로 찌른 사람이 자신이었고, 이학영 의원이 잡혀서 자신이 한 것으로 하고 실형을 살았다고 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나.

70년대 말은 박정희 정권이 국민을 극심하게 억압했던 독재의 최전성기였다. 그때 우리는 정말 숨도 못 쉬고 살았다. 노동자와 농민들은 살기조차 어려운데, 이들의 저임금 노동을 통해 성장한 재벌들은 독재 정권과 유착해서 설치고 다녔다. 박정희 정권이 차관(借款)을 얻어 기업에게 주면 기업은 그 돈으로 투자하고 이윤을 얻어 일부를 정치에 헌납했다. 이런 식으로 '박정희 유신독재-군부-재벌'의 3각 관계가 국민을 통치했다. 박정희 독재 정권과 재벌들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심했지만, 두려움에 누구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의분에 찬 나와 동료들이 일을 벌인 것이다. 그때는 재벌을 응징하는 일이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의 일환으로 생각했다.

내가 먼저 잡혔으니까 당연히 '내가 다 한 일이다'라고 했다. 수사기관도 잡힌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지워 얼른 사건을 마무리 지어야했기 때문에 굳이 묻지도 않았다. 내가 아니라고 밝힌다고 해서 바로 풀려날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다(웃음).

- 피 끓는 청년이 감옥에 갇혀 괴로웠을 것 같다. 특히 독방에서 오랫동안 생활했다고 하던데, 5년이라는 감옥생활은 어땠나?

1974년에 '민청학련 사건'으로 1년 동안 복역한 적이 있었는데, 힘들기는 사실 그때가 더 힘들었다. 당시 22살이었고 박정희 정권이 뭔가 잘못하고 있고 군사정권은 나쁘다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잡혀갔다.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데, 정말 견디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다. 1심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2심에서 7년형을 받았다. 그 기간 동안 감옥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힘들었다. 가족들도 무척 보고 싶었다. 다행히 1년만 복역을 하고 나왔다.

형을 살고 나와 4~5년 동안 너무 힘들게 살았다. 학교에 바로 돌아가지도 못했고, 먹고 살려고 공장에 다니려고 하면 경찰이 나를 감시한다고 따라다녀서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내 인생이 마치 암흑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너무 힘들어서 이 현실을 타개하고자 박정희 정권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후 5년 동안 감옥에서 살 때는 차라리 편했다. 가족들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웠지만, 매일 경찰이 찾아와서 귀찮게 하지 않고 수사과정에서 받는 고문으로 공포에 떨 필요도 없었다. 그 안에서 삼시 세 끼 먹을 걱정도 하지 않고, 평생 처음으로 조용하게 책만 보며 지냈다. '열심히 공부해서 언젠가 나가면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며 살아야지'하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생각보다 쉽게 적응했다. 사람은 역시 적응하는 존재인 것 같다.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사람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게 몸에 익숙해지면 그걸 잊고 또 사는 것 같다. 당시 감옥에는 비슷한 처지의 청년들이 많았다. 그들과 같이 운동하고 공부하면서 서로 많은 대화를 하면서 견뎠다. 그래도 아우슈비츠 수용소보다는 낫지 않았겠나(웃음).

- 주로 어떤 공부를 했나?

그때는 '사회'자만 들어가도 책 출판을 금지시켰기 때문에 사회과학 서적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주로 역사와 문학 서적을 봤다. 문학, 역사, 외국어 등 다양하고 잡다하게 공부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책만 봤으니, 대학 때 못한 공부를 감옥에 있으면서 다 한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20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정의 의식을 갖게 되고 세상에 더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했다. 사회의식에 대해 생각하게 된 '전환점'은 언제였나.

본래 나는 사회의식이란 게 없었다. 농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농촌 사람들이 힘들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기본적으로 '가난을 없애야 겠다'는 생각은 했다. 그런데 사회시스템이나 제도를 바꿔야겠다는 생각까지는 못 했다. 대학 졸업 후, 교사나 공무원이 돼서 가족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줘야겠다는 소박한 의식만 있었다.

그런데 1973년 군인들이 내가 다니던 대학에 탱크를 몰고 들어온 것을 목격했다. 그것을 보며 '아,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하고 시위에 뛰어들었다. 그러다 잡혀서 문초를 엄청나게 당했다. 다음 날 새벽에 풀려나 집으로 돌아오는데, 처음으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어떻게 국가가 '국가'라는 힘을 이용해서 이렇게 국민을 탄압하고 감옥에 넣을 수 있나. 이게 옳은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처음으로 잘못된 국가권력에 분노를 느꼈다. 어떻게 해서든 국가가 인간을 억압하거나 부당한 제도로 국민들에게 불이익을 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때부터 내게 사회의식이 조금씩 생긴 것 같다. 74년 민청학련 사건 이후, 감옥을 오가며 공부하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회의식이 성장한 것 같다.

-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이후 정책학과 교육학 석사과정을 거쳐 NGO 관련 박사과정까지 마쳤다. 다양한 관심사를 가지고 활동하게 된 계기가 있나?

YMCA에 있을 때 아이들을 위한 교육프로그램도 만들고 학부모들과 상담도 해야 하는데, 그 분야에 문외한이다 보니 교육학 공부를 했다. 또 여러 가지 정책들에 대해 정부나 관청에 문제제기를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그 정책에 대해 모르면 안 됐다. 제대로 실천하려면 '잘 알아야겠다' 싶어서 정책학 공부도 했다. 다 필요에 의해서 한 것이다.

- YMCA와 인연으로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특별히 시민운동을 선택한 계기는 무엇인가?

'남민전 사건'으로 복역하고 나오니, 내가 '요시찰 인물'이 된데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에 강도 전과까지 있어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다고 취직해서 내 생계나 꾸리며 나를 위해서 살 생각도 없었다. 그때 이미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섣불리 어떤 운동 조직에 들어갔다가는 그 단체도 요시찰 대상이 될 수 있으니 '일반 시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던 찰나에 YMCA에서 함께 하자고 제안이 왔고, 그 덕에 시민운동을 하게 됐다.

- 오랫동안 시민운동가로 살았다. 특히 지방 시민단체에 대한 정부의 열악한 지원에 많은 부분이 소외당했을 텐데, 어떻게 오랫동안 활동할 수 있었나?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했으니 열악한지도 몰랐고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실은 시민운동이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작한 것이지, 편하다고 생각했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모두 회비를 걷어서 활동했다. 경제적으로 조금 힘들었을 뿐이지, 늘 사람들과 모여 공부도 하고 아이디어를 짜 새로운 프로그램도 만들고 하는 것이 좋았다.

특히 전라남도 순천만에 축제를 유치한 것이 뿌듯하다. 원래 순천만은 때가 되면 모래가 차오르는 그냥 개펄이었다. 당시 시(市)가 순천만에서 골재를 채취해 파괴하려고 할 때 우리가 '순천만을 생태적으로 보존하자'고 이야기했고, 민간에서 돈을 걷어 '순천만 축제'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순천 주민조차 반대했다. 시에서도 골재 채취 계약을 통해 생기는 이익이 있으니 반대했다. 그럼에도 축제를 10년 정도 꾸준히 하다 보니 해마다 관광객이 늘어 사람들의 인식도 바뀌었다. 실은 최근까지도 주민들의 반대가 심했는데, 순천시가 마음을 바꿔서 주민들을 함께 설득해줬다. 이런 일을 하다 보면 힘들어도 재밌고 즐겁다.

- "시민으로서의 목소리보다 정치인으로서의 목소리가 더 효력이 있더라. 답답해서 정치를 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답답한 정치'를 어떻게 풀고 싶은가?

정치가 답답한 이유는 정치가 시민들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통 정치인들은 사회 하층민보다는 중상층의 이해에 귀를 기울이고, 무엇보다 여론을 장악하고 있는 쪽의 입장을 많이 대변한다. 그러니 하층민들은 답답할 노릇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일반 시민들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좀 더 낮은 자리에서 그들과 소통하는 정치를 해보고 싶다. 눈높이를 낮춰서 거리에서 다양한 시민들을 많이 만나 그들의 요구를 정치 의제화하고 법으로 만들어 정책에 반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잘했다고 못하겠지만, 연습을 많이 하고 있다.

- 시민운동을 하는 활동가가 정치가가 되기 어려운 구조이다. 정당 공천에서부터 현실의 벽이 높다. 그래서 젊은 정치가들이 나오기도 쉽지 않다.

일반인들이 정치권으로 진입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 기존 선거제도도 그렇고, 정당 내에서 공천을 받는 과정도 너무 어렵다. 공천을 받더라도, 선거에서 당선되는 과정에 어려움이 많다. 정당에서 공천을 받으려면, 대부분 그 정당에서 오래 일을 하거나 현실적으로 인지도가 높거나 재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일반 시민이나 시민운동가, 그리고 청년들은 그런 힘이 없다. 오히려 의사나 변호사, 대학 교수 등 얼굴 내밀고 나오는 사회 상층들에게나 있는 힘이다.

정치가 특정 엘리트들이 가는 길이라고 할 때 정치인으로 당선될 수 있는 조건들이 하루아침에 바뀌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정치 엘리트나 정당별 정치인들의 직업을 분류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새누리당에는 주로 판검사·의사·교수 출신의 전문가나 지역에서 사업으로 자수성가한 돈 많은 분들이 많다. 민주당에는 언론 종사자나 시민운동가·학생운동가 출신들이 많고, 진보당에는 노동자 혹은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을 하던 분들이 많다. 이렇게만 보더라도 정당 차원에서 청년이나 일반 시민운동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정당이 없으니, 벽이 높은 것이다. 앞으로 지도자를 선택하고 배출하는 정당시스템 또는 선거시스템을 대폭 바꾸지 않는다면 청년이나 시민운동가들의 정치 진출은 쉽지 않을 것이다.

- 기존 정치 엘리트의 충원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다양한 정치가 충원을 위해 신경 쓰는 부분이 있는가?

정당 공천으로 후보자를 선출할 때 시민참여형의 개방적 시스템으로 하자고 이야기했다. 민주당은 당원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참여해서 대선 후보를 뽑는 참여경선제를 실시했다. 정당 내에서는 '정당의 주인을 당원이 뽑아야지 무슨 소리냐'라며 반발이 거셌다. 하지만 당원들의 의지만으로 후보를 뽑으면, 그 후보가 시민 눈높이에 맞지 않은 경우가 많이 생긴다. 국회에 시민운동가 출신 의원들의 모임인 '시민정치포럼'이 있는데, 이곳에서 시민참여형 정치제도를 어떻게 하면 잘 만들 수 있는지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갑자기 정치에 입문한다고 했을 때 동료 시민운동가들이 만류하거나, 안 좋게 볼 수도 있었을 것 같다.

현실적으로 시민운동이 갖는 어려움이 크기 때문에 내가 정치를 하겠다고 했을 때 후배들이 못마땅하게 보기도 했다. "시민운동은 누가 하라고?"와 같은 원망도 들었다. 그런데 나는 시민운동도 일정 수준이 되면 순환 시켜야 한다고 본다. 한 시민운동가가 40~50대 후반 정도가 되면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다른 영역에서 일을 찾아야 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정치'이다. 시민운동 하는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시민운동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시민운동과 정치 모두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목표가 같다. 현장에서 사람들과 함께 운동했던 경험을 가지고 정치영역으로 가서 막힌 정치가 아닌 시민과 함께 소통하는 정치를 할 수 있다면, 시민운동권에서 정치가가 배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또한 시민운동이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이라고 본다.

- 정치인으로 경험하는 갈등과 상처도 있을 것이다. 초선 정치인으로서 가장 힘든 것은 무엇인가?

끊임없이 첨예한 갈등이 일어나는 곳, 정치 현장은 바로 그런 곳이다. 늘 갈등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 하지만 정치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갈등을 조정하고 최고의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닌가.

정치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무리를 짓는 일인데 그 중 정당도 하나의 무리라 할 수 있다. 하나의 정당 안에서도 어떤 사안과 입장에 따라 새롭게 무리가 생기는데, 이걸 두고 부정적으로 '파당' 혹은 '계보'라고 표현한다. 이 무리를 짓는 과정에서 함께하지 않으면 적대적 관계로 인식해버린다. 서로 욕하기도 하고 없는 이야기도 지어내서 공격할 때면 정말 마음이 불편하고 힘들다. 인간 사이의 갈등, 그 갈등에서 오는 감정적인 상처들을 잘 극복해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힘들다.

- 그럼에도 정치를 하면서 보람을 느낀 순간은 언제인가?

시민운동을 하면 십 년 쯤 걸릴 일이 정치에선 바로 해결되는 게 가장 좋다. 운동은 한 십 년을 계속해야 지역사회 인식도 변하고 지자체 인식도 변한다. 현재 수자원 공사에서 물이 부족하다고 해서 지리산 주변의 아름다운 계곡들을 파헤쳐 수 십 개의 댐을 만들려고 하고 있다. 4대강 사업도 모자라 엄청난 돈을 들여 계곡들을 전부 막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이 공사에 대한 예산 책정이 안돼 아직까지 수자원공사에서 댐 공사를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참 다행이다.

작년에 영유아보육법이나 무상보육법을 추진할 때 예산 심사위원이었다. 이 법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높았지만, 몇몇 국회의원들이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 영유아보육료 4359억 원(0~2세 전 계층 지원), 가정양육수당 2538억 원(0~5세 전 계층 지원. 0세 20만 원, 1세 15만원, 2~5세 10만 원)을 증액했다. 장애인 거주시설을 포함한 보장시설 수급자 주부식비도 189억 원(1인 1789원에서 2069원으로)을 증액했다.

대중 다수의 목소리보다 정치인 한 명의 목소리가 훨씬 더 큰 효과를 발휘할 때가 있다. 정치인의 권한으로 정책을 바꾸는 경험을 할 때면 이 일이 참 의미 있게 느껴진다. 그러면서 전에 있었던 모든 힘든 일이 이때를 위해 필요한 조건이라고 여겨지며 감내된다.

- 국민들의 기초생활보장 강화와 교육 및 보건환경 개선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갖고 의정활동에 임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금융소비자보호법, 에이즈 예방법 개정안, 의료인 폭행방지법,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안 등 다양한 법안도 제출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정치의 목표는 위기에 빠진 국민이 없게 하는 것이다. 최소한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국민이라면, 어떤 위기가 와도 삶의 안전을 해치지 않을 정도의 안전시스템을 만들어 주고 싶다. 여기서 '위기'란 해고를 당해 실업자가 될 위기 일 수도 있고 아프거나 사고를 당해 급하게 치료받아야 하는 모든 위기를 포함한다. 국가는 국민들에게 이런 모든 위기로부터 안전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최소한의 안전이 보장될 때 국민은 불안감 없이 구직 활동도 하고 다른 창의적인 노력도 할 수 있다.

또 대한민국에 살면서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없도록 남북 간 평화체제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밖에 국정원 민간인 사찰 등과 같이 국가기관이 국민을 억울하게 탄압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 역시 중요한다. 이와 관련해 중요 법안이 있으면 만들고, 잘못된 정책이 있으면 고치는 일을 계속할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이학영'은 <시여, 무기여!>, <세계가 만약 하나의 집안이라면> 등 많은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살벌한 정치판에 몸담고 있으면서 냉혹한 현실을 향해 이상과 기대, 꿈 등을 계속 이야기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런 감수성은 표현하지 않을 뿐이지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 같다(웃음). 시를 쓰는 사람은 그 중에서 모두에게 있는 감수성을 표현하는 연습을 좀 더 많이 한 사람일 뿐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문학가가 되고 싶어 대학도 국문과를 갔다. 그래서 마음을 표현하는 훈련이 조금 되어 있을 뿐이지, 특별하게 감수성이 풍부하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다.

"꿈은 높게 실천은 천천히"라는 말이 있다. 실천은 현실에 맞게 천천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커진다. 보통 시민운동가들은 빨리 가려는 마음이 있다. 하지만 급하다고 일이 빨리 진행되는 것도 아니고, 급하다 보면 요구조건이 높아지게 된다. 이렇게 높아진 요구조건은 현실에서 바로 실천되지 못한다. 따라서 현실감 있게 조금씩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 우리 사회를 볼 때 가장 답답하거나 속상한 일은 어떤 것인가.

일자리도 너무 부족하고, 가난한 사람도 너무 많다. 현장을 다니다 보면, 힘든 사람이 많은데 딱히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하늘에서 돈이나 식량이 쏟아지는 게 아니라면, 결국 서로 도와야 하지 않을까. 세상에 혼자 살 수 있는 존재가 없는 것처럼 '사회는 곧 공동체'이다. 삼성 이건희 회장도 본인이 혼자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산천에 있는 수많은 자원이 없으면 뭘 가지고 원자재를 가공하겠나. 어디선가 열심히 일하는 기술자나 노동자가 없으면, 어떻게 해마다 높은 수익을 낼 수 있겠나. 세상은 하나로 얽혀 있고 그 사이에서 인간은 서로 돕거나 도움을 받으면서 사는 존재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나는 나고 너는 너'라는 식이다.

복지 확충에 따른 증세 논쟁이 뜨겁다. 예를 들어 한집안에 형제가 있는데, 한 명은 대학을 나와 좋은 회사에 취직해 돈을 잘 벌고 다른 한 명은 장애가 있어 일도 제대로 못하고 돈도 못 번다. 이때 돈을 잘 버는 한 명이 자기가 500만 원을 벌었다고, 그 돈을 혼자 다 쓰는 것이 과연 올바른 정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장애인인 다른 한 명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어 돈을 벌지 못한다면, 그대로 죽어야 마땅한 것인가. 그건 아니다. 한집안이고 한공동체라면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며, 있으면 나눠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갈등이 생기고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런 걸 생각하면 답답하다. 하지만 현실은 아주 천천히, 조금씩 변한다. 국민을 이해시키고 설득하면서 1보씩 가야한다. 그 대신 우리가 꿈꾸는 미래 사회는 정말 좋은 사회여야 한다. 그런 꿈도 없이 우리가 현실을 그대로 인정해 버리면, 정치란 의미가 없는 것이다.

- '이학영'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고급스러운 자유도 자유라고 하겠지만 보통 시민들에게 자유란, 아주 치사한 자유다. '세 끼 걱정 없이 먹고사는 것, 아플 때 치료받을 수 있는 것, 자식과 추운 겨울 따뜻하게 쉴 수 있는 것' 등 말이다. 이런 기본적인 자유가 안정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면, 인간에게 자유는 무의미하다.

진짜 자유는 인간답게 자기가 정말 해보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것 같다. 오늘날 우리 중에 의식주 문제와 자녀교육 등의 문제를 뛰어넘어 진짜로 자기가 해보고 싶은 것을 제대로 하면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휴가를 내고 여행 가겠다는 말을 직장에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쉬고 싶을 때 쉬지 못하고, 의식주를 위해서 다른 자유를 포기한다.

인간다움의 기본 근거인 복지 시스템을 만들어야 인간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 이때는 노숙도 자유가 될 수 있다. 국가에서 의식주를 제공하겠다고 해도 나는 이렇게 거리에 나와서 얻어먹고 사는 게 좋다고 하면 그것도 자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노숙자들은 자기가 노숙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니,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나에게 자유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주체적으로 하는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마지막으로, 바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면?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자기 꿈 하나는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항상 기억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항상 함께 살아가는 존재다. 그래서 아무리 힘들더라도 나 외의 다른 것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 두 가지가 있다면, 아무리 어려워도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에게 무언가 강렬하게 하고 싶은 게 하나라도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자살하지 않는다. 그런데 하고 싶은 게 없는 상태에서 삶이 어렵고 통로가 막히면, 좌절하고 절망하게 된다. 희망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아 자기를 버리는 것이다.

또한 나 아닌 이웃들과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요즘 나도 너무 힘들어 나 자신 이외에는 돌아볼 여유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이 없으면 그 사회는 점점 더 나빠진다. 역사를 보면 사람들의 무관심을 이용해 불의를 그대로 옮겨놓는 집단이 항상 존재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눈을 부릅뜨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 불의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불의를 어떻게 없앨 것인지 끊임없이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된다.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인터뷰는 정치경영연구소 조경일 연구원이 진행하고, 정리는 손어진 연구원, 정인선 인턴이 맡았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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