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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앞산이며 남산인 목멱산과 청학동천에 깃든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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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앞산이며 남산인 목멱산과 청학동천에 깃든 사연"

[인문학습원] 서울학교 <시즌2> 시작, 10월 답사는 <목멱산과 청학동천>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 인문역사지리기행 전문가)의 <시즌2> 첫 번째 일정인 10월 기행(제19강)은 서울의 앞산이며 남산인 목멱산에 올라 한창 무르익은 가을의 정취를 감상하며 목멱산과 청학동천에 깃들어 있는 문화유산을 답사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서울학교 제19강은 10월 20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6번 출구를 나와서 장충파출소(지구대) 앞에서 모입니다.

▲ 서울의 앞산이며 남산인 목멱산의 잠두봉(왼쪽 뒤편 바위 봉우리)과 조선신궁 터(앞쪽) ⓒ서울학교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장충단→박문사 터→벌아현→남소문 터→남산소나무길→경봉수대→목멱신사 터→잠두봉 전망대→조선신궁 터→안중근기념관→백범광장→숭례문→점심식사 겸 뒤풀이(막내회집)→상평창 선혜청 터(남대문시장)→동래정씨 세거지→남산골 골목길 탐방→경성방송국 터→통감관저 터→옛 중앙정보부→청학동천→한옥마을→천우각

▲ 서울학교 <목멱산과 청학동천> 답사로 ⓒ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0월 답사에 대해 들어봅니다.

목멱산(木覓山)은 한양(漢陽) 도성의 내사산(內四山) 중에 남쪽에 위치하여 풍수지리적으로 안산(案山)의 역할을 하며 이 산줄기에서 북쪽 사면인 도성(都城)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청학동천(靑鶴洞天)이라고 합니다. 흔히들 남산(南山)으로 부르고 있지만 본래 이름은 목멱산이고 동쪽의 봉우리가 누에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잠두봉(蠶頭峯)이라고도 합니다.

목멱산이란 명칭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遷都)하면서 이곳에 목멱대왕(木覓大王)을 모신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 큰일이 일어났을 때 하늘에 제사지냈기에 그렇게 붙여진 이름이며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남산(南山)은 고유명사가 아니고 대명사입니다.

전통적으로 우리의 전통부락인 마을은 대개가 전해져 오는 풍수 지리적 생각에 따라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남향(南向)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그래서 큰 마을이라 할 수 있는 고을들은 대부분 주위가 산으로 둘러쳐지고 앞에는 내(川)가 흐르는 분지형(盆地形)입니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모든 고을의 앞산은 남산(南山)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국사당(國祠堂)이라고 불리던 목멱대왕을 모신 사당은 일제강점기에 이곳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세우면서 인왕산(仁王山) 선바위 아래로 강제로 이전하여 그 규모가 많이 축소되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 목멱산 꼭대기의 경봉수대 ⓒ서울학교

목멱산에는 조선의 통신체계의 하나인 경봉수대(京烽燧臺)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조선의 통신체계는 파발(擺撥)과 봉수(烽燧)의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파발은 말을 타고 가서 직접 전하는 방식이고 봉수는 불을 피워 연락을 하는 방식입니다.

불을 피우는 봉수대는 멀리 바라보기 좋은 높은 산봉우리에 설치하여 밤에는 횃불[烽]을 피워, 낮에는 연기[燧]를 올려 외적이 침입하거나 난리가 일어났을 때 위급한 소식을 궁궐에 전달하였습니다.

봉수 제도가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의종 때 확립되었으므로 봉수대의 시설도 그 때 확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는 세종4년(1422년)에 각 도의 봉수대 시설을 정비하기 시작하여 세종20년(1438년)에 완비하여 전국에 650여 개의 봉수가 설치되었습니다.

조선의 봉수는 5개 노선으로 제1봉수로는 경흥을 기점으로 함경도, 강원도에서 오는 봉수를 양주 아차산 봉수대(신내동)에서, 제2봉수로는 동래 다대포를 기점으로 경상도에서 오는 봉수를 광주 천림산(천천현) 봉수대에서, 제3봉수로는 강계를 기점으로 평안도, 황해도에서 오는 봉수를 무악 동봉의 봉수대에서, 제4봉수로는 의주를 기점으로 평안도, 황해도의 해안에서 오는 봉수를 무악 서봉의 봉수대에서, 제5봉수로는 순천을 기점으로 전라도, 충청도에서 오는 봉수를 개화산(양천) 봉수대에서 받아서 목멱산에 있는 경봉수(京烽燧)로 전해주면 그 정보는 병조(兵曹)에 종합 보고되고 병조에서는 매일 새벽 승정원(承政院)에 알려 임금에게 보고하였습니다. 평안도와 황해도를 잇는 노선이 두 개인 것은 당시 조선이 중국을 사대(事大)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쪽의 통신망이 발달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봉수는 전황(戰況)에 따라 5번을 올리는데 이상이 없는 평상시에는 1홰, 적이 나타나면 2홰, 경계에 접근하면 3홰, 경계를 침범하면 4홰, 접전 중이면 5홰를 올리도록 되어 있었으며 그래서 각 봉수대마다 5개의 굴뚝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개가 끼고 비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는 화포나 나팔 등과 같은 소리를 이용하여 전달하기도 하였고 이 방법도 여의치 않을 경우 깃발이나 봉수군이 직접 다음 연락 지역으로 달려가 소식을 전했습니다.

목멱산의 북쪽자락 중앙에 위치한 청학동천에는 출사(出仕)하지 않은 사대부들이 많이 모여 살았을 뿐만 아니라 북촌에 있는 출사한 사대부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열었던 정자(亭子)와 시단(詩壇)도 많았습니다.

그중에서 특히 이안눌(李安訥)의 집에 있었던 동악시단(東岳詩壇)이 유명하였는데 동산 기슭에 단을 쌓고 당대 명인인 이호민, 권필, 홍서봉 등과 어울려 글을 외우고 시를 읊기도 하여 그 단(壇)을 이안눌의 호를 빌러 동악시단이라고 불렀고 동악선생시단(東岳先生詩壇) 이라고 바위에 음각한 글씨가 지금의 동국대학교 중문 근처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영조 때 문신인 조현명의 귀록정(歸鹿亭)과 고종 때의 영의정인 이유원의 쌍회정(雙檜亭), 정원용의 화수루(花樹樓) 등의 정자가 있었습니다. 특히 남별영(南別營) 계곡물에 세워진 천우각(泉雨閣)은 여름철 피서지로 유명했습니다.

또한 이곳에는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집터를 잡아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운 건국공신(建國功臣)인 권람의 집이 있었고 그 집터 위에 소조당(素凋堂) 유적이 있어 후에 후조당(後凋堂)이라 했다가 녹천정(鹿川亭)으로 이름이 바뀌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녹천정에서 동쪽으로 필동 골짜기에는 둔덕 바위 위에 청학동이상국용재서사유지(靑鶴洞李相國容齋書舍遺址)라 새긴 암각 글씨가 있는데 이곳이 청학도인(靑鶴道人)이라 불리는 이행(李荇)의 집 터입니다. 이행은 우의정, 대제학의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몸이건만 이곳에 공부방을 꾸미고 퇴궐 후에는 망건에 무명옷 차림으로 동산을 거닐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이곳에 남산 한옥마을이 들어서 있습니다.

▲ 안중근기념관의 안중근 의사 동상과 태극기에 쓴 혈서 ⓒ서울학교

그리고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과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청학동천 아래 마을에 함께 살았던 것이 인연이 되어 임진왜란 때 영의정 서애에 의해 충무공이 발탁되어 임진왜란의 영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충무공이 자란 곳이라고 해서 청학동천 아래를 충무로(忠武路)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목멱산의 동쪽자락에는 훈련원(訓練院)이 있어 하급 장교들이 많이 모여 살았고 그들에게 월급 대신 필요한 의복을 공급하였기에 그 의복을 그냥 내다 팔기도 하고 그 천으로 댓님과 띠 그리고 댕기 등을 만들어 팔기도 한 난장(亂場)이 들어섰습니다. 이것을 배오개[梨峴] 난장이라 불렀으며 그것이 발달하여 지금의 광장시장(廣藏市場)이 되었습니다.

훈련원 옆에 있었던 군사훈련장인 예장(藝場)은 목멱산 남쪽 자락의 녹사장(綠莎場)과 북악 아래 경복궁(景福宮) 신무문(神武門) 밖의 공터와 더불어 조선시대 씨름대회 장소로 유명했었습니다. 지금의 예장동이라는 동명(洞名)과 녹사평(綠莎坪)이라는 전철역 이름이 이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처럼 청계천 하류에 해당되는 목멱산 동쪽 산줄기 아래 지역에는 훈련원이 있어 무인(武人)인 하급 장교들이 많이 모여 살아서 이곳을 아랫대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경복궁의 궐내각사(闕內閣舍)에 출근하는 문인인 경아전(京衙前)들이 많이 모여 사는 인왕산 아래 청계천 상류지역을 우대라고 부르는 것과 대비가 됩니다. 조선시대에는 아마도 하급관리들에게도 문무(文武)의 차별이 있었나 봅니다.

같은 동쪽 기슭에 남아 있는 장충단(獎忠壇)은 임오군란(壬午軍亂)과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순국한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과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 이하 여러 장병들을 제사 지내던 곳으로 본래의 위치는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장충단을 허물고 그곳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개인 사당을 짓고 이름도 박문사(博文祠)로 바꾸고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을 옮겨와 정문으로 사용하였기에 그 이후 장충단은 지금의 자리로 옮겨올 수밖에 없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넋을 기리는 제향공간(祭享空間)을 나들이 다니는 공원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 장충단비 ⓒ서울학교

장충단을 지나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는 목멱산에서 장충동으로 이어지는 도성이 잘려나가고 지금은 그 언저리에 호텔이 들어서 있습니다만 조선 초기에는 남소문(南小門)이 있었던 자리입니다. 남쪽의 작은 문에 해당하는 문은 광희문(光熙門)도 있고 남소문(南小門)이라고 부르는 문이 하나 더 있었음으로 조선 초기에는 도성을 드나들던 문이 4대문과 5소문의 9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남소문이 위치한 곳이 너무 높아서 백성들이 잘 다니지 않고 광희문 쪽으로 돌아 다녔기 때문에 이 문을 폐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고개는 약수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와 더불어 벌아현(伐兒峴)이라고 불렀는데 이렇게 부르게 된 것은 풍수지리적 요인이 있었습니다. 한양(漢陽)의 종조산(宗祖山)에 해당하는 삼각산 세봉우리 중의 하나인 인수봉은 수려한 자태에 허리 부분쯤에 조그마한 바위가 불거져 나와 있습니다. 이러한 모양이 멀리서 보면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업고 있는 형상이라 부아악(負兒岳)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어머니 품속을 벗어나면 위험하므로 아우르고 달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혼내준다는 벌아현과 떡으로 달랜다는 떡전고개[阿峴]의 지명이 생겼으며 그야말로 당근과 채찍으로 아이를 혼내고 달래며 엄마 등에서 가만히 있기를 바라던 마음에서 그리 하였을 것입니다. 벌아현은 지금의 약수동 고개에 세워진 지하철역인 버티('벌주는 고개'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서쪽자락에는 중종(中宗) 때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鄭光弼)을 비롯하여 12정승을 배출한 명당 터인 동래(東來)정씨(鄭氏) 세거지(世居地)가 있었으나 지금은 우리은행 본점 앞에 큰 은행나무가 그 영광을 대신하여 쓸쓸하게 서 있습니다.

숭례문 옆에 있었던 상평창(常平倉)은 곡식의 가격을 조절하기 위해 곡식을 사들이고 내다파는 일을 하던 곳으로, 상평(常平)이란 상시평준(常時平準)의 줄임말로 풍년이 들어 곡가가 떨어지면, 곡물을 사들여서 곡가를 올리고, 흉년이 들어 곡가가 폭등하면 상평창의 곡물을 풀어서 곡가를 떨어뜨리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대동법(大同法)이 실시되면서 공납(貢納)과 진상(進上)으로 거둬들인 곡물이나 특산물을 보관하던 기관인 선혜청(宣惠廳)의 창고인 선혜창(宣惠倉)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상평창일 때는 곡물만 있어 난장(亂場)이 서지 않았고 선혜청 창고로 바뀌면서 많은 종류의 물건들이 거래될 수 있는 난장이 섰는데 이를 일러 새로 들어선 창고(宣惠倉) 안에 펼친 난장이라는 뜻의 신창내장(新倉內場)이라 하였고 지금의 남대문시장을 말하며 그 흔적이 남창동(南倉洞), 북창동(北倉洞)이라는 동네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남쪽자락에는 외국인들을 일컫는 이타인(異他人)들이 살았던 곳으로 중국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인들이[還鄕女] 얼굴의 모양새가 다른[異胎] 자식들과 함께 모여 살던 곳이고 임진왜란 이후 미처 일본으로 건너가지 못한 일본인들도 이곳에서 모여 살았습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도 이태원(梨泰院)이라 부르며 외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목멱산의 남쪽 기슭인 용산(龍山)이 일본군과 중국군과 미군이 차례로 점령하여 머물던 외국군 주둔지인 것도 한번 새겨볼 일입니다.

그리고 목멱산의 상징인 '남산 위의 저 소나무'도 이곳 남쪽 기슭에서 자생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곳을 보호구역으로 설정하여 훼손을 방지하고 조림, 육성하고 있어 우리나라 토종 소나무의 멋있는 자태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목멱산 북쪽 자락에는 일본인들과 연관된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남산3호터널 입구인 인현동에는 일본의 사신이 머물면서 묵었던 동평관(東平館)이 있었고 남산1호터널 입구 옛 중앙정보부 자리에는 조선통감(朝鮮統監)의 관저(官邸)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때는 목멱산 전체에 조선신궁을 건설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목멱산 아래 본정방(本町坊, 지금의 명동)에는 일본인 상권(商圈)이 형성되면서 종로와 동대문의 조선인 상권을 압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목멱산 아래 명동 일대는 지금도 일본인 관광객들이 제일 선호하는 관광코스이기도 하여, 최근에는 인현동에서 남산 순환도로에 이르는 가파른 언덕길 골목에는 일본 관광객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들이 많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이번 기행에서는 조선신궁 터 옆에 세워진 안중근(安重根)기념관과 새롭게 단장한 숭례문(崇禮門)을 둘러볼 수 있는 일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점심식사 겸 뒤풀이는 남대문시장 안에 있는 30년 된 맛집인 <막내회집>에서 맛있는 회덮밥과 생선조림, 오징어조림, 감자조림 등에 막걸리도 한잔 곁들일 예정입니다.

▲ 잠두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삼각산과 북악 능선 ⓒ서울학교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차림, 모자, 스틱, 트레킹화 또는 운동화,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서울학교 제19강 참가비는 5만원입니다.(강의비, 점심식사 겸 뒤풀이비, 운영비 등 포함).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현장에서는 참가 접수를 받지 않습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역사지리기행 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역사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가 있으며, 곧 후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 서울 역사인문지리기행의 강의 내용이 될 <서울 이야기>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번씩, 셋째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보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에 1시간 30분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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