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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마침내 서울의 으뜸산 삼각산의 품에 들다"

[인문학습원] 9월의 서울학교 참가 안내

9월의 서울학교(교장 최연. 인문지리기행학자, 서울 해설가)는 제18강으로, 삼각산(三角山, 북한산)과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서려 있는 사연을 찾아갑니다. 비록 산성 위까지는 올라가지 못하더라도 산성 안에 있었던 행궁 터와 산성을 지키기 위해 승려들이 기거했던 사찰들을 둘러보면서, 시대를 바꿔가며 오랜 세월 산성과 애환을 함께한 다양한 사람들의 얘기를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 서울의 으뜸산 삼각산 ⓒ북한산국립공원

그리고 아쉽지만 이번 18강으로 서울학교 <시즌1>을 마칩니다. 10월부터는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비했던 부분을 보완하여 더욱 알찬 내용으로 새롭게 <시즌2>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서울학교 제18강은 9월 15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30분 북한산성 탐방지원센터 앞에 모입니다. 서울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1번 출구로 나와서 34번, 704번, 8772번 버스를 타고 북한산성 입구에서 하차(구파발역에서 북한산성 입구까지 15분 소요), 바로 앞에 있는 탐방지원선터로 찾아오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북한산성 탐방지원센터→대서문→등운각→중성문→비석거리→중흥사(절에서 점심공양)→태고사→행궁 터(금위영 터/어영청 터)→다시 북한산성 입구로 돌아옴→책걸이 회식(오후 3시쯤 북한산성 입구의 <시골밥상> 02-387-1178)

▲ 서울학교 삼각산 답사로 약도 ⓒ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9월 답사에 대해 들어봅니다.

서울이 나라의 수도(首都)가 된 것은 조선시대의 도읍 한양(漢陽)이었기에 그러하였고 한양이 조선의 도읍으로 선택된 것은 삼각산(三角山)이 부려놓은 터전이 풍수지리적으로 예사롭지 않았기에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백두대간 상의 추가령(분수치)에서 갈려나온 한북정맥(漢北正脈)이 적근산, 대성산, 광덕산을 지나 광덕고개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솟구쳐 백운산, 국망봉, 청계산, 운악산을 높낮이를 달리하며 이어오다가 포천과 의정부를 넘나드는 축석고개에서 그 높이를 현저히 낮추고 불곡산, 도봉산을 지나 우이령에서 정맥의 본줄기는 서향(西向)하여 노고산으로 뻗었다가 장명산에서 임진강 하류로 숨어들어 그 산줄기의 뻗음을 마감하고, 또 다른 한줄기는 남향(南向)하여 영봉(靈峰)을 지나 백운대(白雲臺, 836.5m), 인수봉(仁壽峰, 810.5m), 만경대(萬鏡臺, 787m)를 솟구쳐 일구어 놓았으니 이를 삼각산(三角山)이라 합니다.

산(山)의 격(格)을 말해주는 기준으로 최고의 지위를 일컬어 12종산(宗山)이라 하는데 삼각산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12종산 중에서 백두산, 원산, 두류산, 낭림산, 분수치(추가령), 태백산, 속리산, 장안산, 지리산은 모두 백두대간(白頭大幹) 상의 분기점이라는 조종(祖宗)적 위치인데 비해 삼각산은 금강산, 오대산과 더불어 그런 지위에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종산의 반열에 들었습니다.

천하명산 금강산(金剛山)이야 중원(中原)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이고 오대산(五臺山)은 불법(佛法)의 보고(寶庫)이니 종산으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할 수 있으나 삼각산은 이도 저도 아니면서 종산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삼각산이 부려놓은 터가 조선의 도읍지로 가능케 한 명산이니 종가(宗家)의 산이 안 될 까닭이 굳이 없었을 것입니다.

▲ 삼각산 세 봉우리, 백운대·인수봉·만경대(왼쪽부터) 아래 육중하게 자리잡은 노적봉 ⓒ서울학교

삼각산은 각 시대에 따라 그 이름이 달랐는데 삼국시대에는 부아악(負兒岳), 횡악(橫岳)이라 하였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삼각산(三角山), 화산(華山), 중악(中岳)이라고 불렀습니다.
부아악이란 이름은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 중 시조 온조왕 기사(記事)에,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의 아들 비류(沸流), 온조(溫祚) 형제가 졸본부여에서 여러 사람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도읍지를 물색하기 위하여 부아악에 올랐다는 기록에 나옵니다.

마치 아기를 업은 어머니(負兒岳) 같다는 의미로서 삼각산의 한 봉우리인 인수봉이 꼭 어머니가 어린애를 업고 있는 형상과 같이 삐죽 튀어 나온 바위가 있어 이를 한자명으로 표기한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는 진흥왕 때에 비봉(碑峰)에 순수비(巡狩碑)를 세워 나라의 경계로 삼고 제사를 지낼 정도로 전략적 요충지와 명산으로 대접 받았습니다. 그리고 삼국이 서로 삼각산을 가로 놓고 대치하여 서로 길항(拮抗)하고 있었으니 이 때문에 그 지역 형세에 따라 '가로 횡(橫)자'를 사용하여 횡악(橫岳)이라 부른 것 같습니다.

또 <북한지(北漢誌)>에는 "삼각산(三角山)은 인수봉, 백운봉, 만경봉의 세 봉우리가 우뚝 서서 깎아 세운 듯한 세 뿔과 같다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는데, 일명 화산(華山) 또는 화악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중국이 자기 나라를 세계의 중심이고 기운이 결집되어 꽃같이 피어난다는 의미를 지닌 중화(中華)라고 칭하고 있듯이, 화악 또한 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여집니다.

<고려사(高麗史)>를 비롯한 고려시대의 여러 기록에는 삼각산이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데 고려의 도읍인 개성에서 바라보면 세 봉우리가 뫼 산(山)자의 형상으로 삼각 모양이라 그리 불렀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삼각산의 한 봉우리인 만경대는 달리 국망봉(國望峰)이라고도 불리는데 신라 말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만경대 아래 작은 초암(草庵)을 짓고 수행하다가, 봉우리에 올라 지금의 개성 땅을 바라보며 새로운 왕조의 기운이 서려 있다고 하여 만경대를 국망봉이라 하고, 만경대 아래 도선대사가 수행했던 초암이 지금의 도선사(道詵寺)입니다.

이후 조선시대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여지도서> <증보문헌비고> <북한지> <대동지지> 등의 역대 지리서와 <조선왕조실록>에도 북한산을 한결같이 삼각산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북한산(北漢山)으로 부르고 있고 국가에서도 북한산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역사적 연원으로 따져 보면 정확한 이름은 삼각산입니다.

북한산이라는 이름이 사용된 연원을 따져보면 <삼국사기>에 이르기를 "진흥왕 16년 10월에 북한산에 순행(巡行)하여 강역(疆域)을 획정하였다"고 한 기록이나 비봉(碑峰)의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에 '북한산주(北漢山洲)'라고 새겨진 것 등으로 미루어 보아 한강 이북의 '북쪽 한산주'란 의미로 '북한산주'라 불리면서 북한산이란 명칭이 비롯되었다고 보여 집니다.

북한산성(北漢山城)은 삼각산의 세 봉우리를 정점에 두고 서쪽으로 염초봉을 지나 원효봉까지, 남쪽으로 석가봉, 용암봉, 시단봉 지나 문수봉에 이르러 다시 북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나한봉, 나월봉, 증취봉, 용혈봉, 용출봉을 지나 의상봉까지 둘러쳐진 말굽 모양의 산성으로, 세 봉우리에서 문수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주능선(主稜線)이라 하고 문수봉에서 의상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의상능선(義湘稜線)이라 하며 원효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원효능선(元曉稜線)이라 합니다.

원효봉과 의상봉에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일찍이 원효봉 중턱에 초암을 짓고 수행을 하던 원효가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의상에게 건너편 봉우리에 와서 함께 수행하자고 권했다고 하는데 원효와 의상이 머물러 수행했던 곳이라 그리 불렀다고 합니다.

북한산성은 시대를 달리 하며 역사의 중심에 섰던 곳으로, 조선시대에 와서 비로소 지금과 같이 모습으로 자리잡았고 그 이전 시대에는 규모가 작았습니다. 최초로 산성을 쌓은 시기가 삼국시대로서 백제 개루왕 5년(132년)에 토성(土城)으로 축조하였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거란의 침입을 받은 현종이 태조 왕건의 재궁(梓宮)을 북한산 향림사(香林寺)로 옮기고 산성을 증축하였으며 우왕은 최영(崔瑩) 장군을 보내 노적봉을 중심으로 중흥동 석성(重興洞 石城)을 수축하였습니다. 이런 연유로 노적봉을 장군봉이라고 달리 부르기도 합니다. 중흥동 석성은 조선 후기까지 중흥사(重興寺) 북쪽에 성문 터와 함께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자취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북한산성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여 북한산성에 대한 축조 논의는 선조 때부터 시작하였으나 남한산성(南漢山城) 수축론에 밀려 뜻을 이루지 못했고 숙종 때에 와서 비로소 지금의 모습으로 석성이 완성되었습니다.

산성 축조는 도성의 방비를 담당했던 삼군문(三軍門)인 훈련도감(訓練都監),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의 군사들이 나누어 맡았고 도성민(都城民)의 출력과 모집한 역군(役軍) 그리고 화엄사 승려 성능(聖能)이 이끄는 승군(僧軍)도 동원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지형이 평탄하여 방어에 취약한 대서문(大西門)이 있는 서쪽을 보완하기 위해 노적봉과 증취봉 사이에 있는 협곡을 가로질러 중성(重城)을 축조하여 행궁을 비롯한 여러 시설물들을 철저하게 지킬 수 있도록 하였는데 중성의 정문이 중성문(重城門)입니다.

▲ 의상능선이 시작되는 문수봉, 나한봉, 나월봉(오른쪽부터) ⓒ서울학교

북한산성의 둘레는 대략 8km쯤 되고 산성을 드나들 수 있도록 14개의 성문을 두었으며 성안에는 행궁(行宮)을 비롯하여 군영(軍營), 군창(軍倉), 장대(將臺), 그리고 승군이 기거하는 사찰들이 세워졌습니다.

행궁은 전란 등 위급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임금이 피신하여 임시로 머무는 궁궐로서 숙종 때 130여 칸의 규모로 지었으나 지금은 장대석만이 남아 있습니다. 산성을 관리하고 사무를 보기 위해 관성소(管城所)와 삼군문의 유영(留營)이 3곳에 설치되었으며 장대는 장수의 지휘소로서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의 3곳에 있었으나 모두 소실되었고 1996년 동장대만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산성을 지키는 병사들의 숙소인 성랑(城廊)이 성곽 가까이에 위치하여 143개소나 있었는데 지금도 성곽 안쪽으로 건물이 있었던 흔적과 여러 조각의 기왓장 파편들이 발견되곤 합니다.

또한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 99개소의 우물과 26개소의 못을 팠으며 규모가 큰 우물은 삼군문 유영 터에서, 작은 우물은 사찰 주변에서 많이 발견 되고 있습니다. 병사들이 먹을 음식과 사용할 무기와 화약을 보관하던 곳인 경리청(經理廳) 상창(上倉), 중창(中倉), 하창(下倉), 호조창(戶曹倉) 등 4개의 창고가 280여 칸 규모로 지어졌으며 더 나아가서 산성 밖 탕춘대(蕩春臺)에 10만 석의 양곡을 비축할 수 있는 평창(平倉)을 설치하였는데 모두 소실되어 버리고 평창만이 평창동이라는 동네 이름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산성 축성 때 동원된 승군은 산성이 완성되자 계속 산성에 머물면서 산성의 수비를 맡게 하였습니다. 승군대장(僧軍大將) 1인에 350명으로 편제된 조직으로, 승군대장은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겸했으며 초대 승군대장은 산성 축성 때 승군을 총지휘한 성능이 임명되었습니다.

이들 승군들은 낮에는 무술을 익히고 아침저녁으로 불경을 공부하면서 유사시에 대비하였는데 이들이 머물 수 있도록 산성 안에 중흥사, 태고사, 서암사, 용암사, 보국사, 보광사, 부왕사, 원각사, 국녕사, 진국사, 상운사 등 11개의 사찰과 원효암, 봉성암 등 2개의 암자가 지어졌습니다. 이들 대부분의 사찰들은 전통적인 가람 배치를 따르지 않고 대부분 성문에 가까운 곳에 자리잡았으며 그 이름 또한 성문의 이름과 거의 일치하고 있습니다. 북한산성의 승군도 남한산성의 승군과 마찬가지로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 강제로 해산되었습니다.

▲ 최근 일부가 복원된 중흥사 전경 ⓒ서울학교

중흥사는 중흥산성 남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고려 말에 보우대사(普愚大師)가 중수한 사찰로서 북한산성 수축 때에는 도총섭 성능이 주석하며 승군을 이끌었던 곳으로 136칸의 규모로 지어졌으나 1915년 홍수 때 노적봉 산사태로 무너진 뒤 주춧돌과 축대만 남아 있던 것을 최근 조계종 불광사(佛光寺)에서 불사를 통해 그 일부가 복원되었습니다.

태고사(太古寺)는 보우대사가 중흥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개인 수도처로 마련한 동암(東庵)으로서 그 때 보우는 동암에 태고(太古)라는 편액을 내걸었는데 보우대사 입적 후 태고암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태고사에는 보우대사의 묘탑(廟塔)인 원증국사탑(圓證國師塔)과 탑비인 원증국사탑비(圓證國師塔碑)가 전해지고 있으며 비문은 이색이 짓고 글씨는 권주가 썼습니다.

이렇듯 북한산성의 대부분의 시설물들이 폐허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소상히 그 내역을 알 수 있는 것은 승군을 이끌고 산성 수축을 지휘하고 산성이 완성된 이후에도 승군을 지휘하여 산성을 지켰던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성능 스님이 <북한지(北漢誌)>라는 책자에 상세한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새삼 기록문화의 중요성을 실감케 합니다.

높은 것은 멀리 뻗친다고 했던가.
1. 송악의 보부상이 개성인삼을 가득 지고 임진나루에 당도하여 도강(渡江)을 기다리며 잠시 다리쉼하며 곰방대 빨며 지긋이 바라본 곳이 삼각산이었을 것이고, 백년서생 날건달이 문전옥답 처분하여 마련한 엽전을 괴나리봇짐에 꿰어 차고 한양에 말단관직 하나 돈 주고 얻어 차려고 한양 가는 길에 과천현감에게 돈푼 꽤나 주고 도성 안 힘깨나 쓰는 대감 소개받고 남태령 비껴가며 우면산 돌아서서 말죽거리 당도하여 처연하게 바라보았던 곳이 삼각산이었을 것이고, 강원도 첩첩산골 금강송 베어내어 임금님 사시는 궁궐 다시 짓는 목재로 사용하려고 정선 아우라지 포구에서 뗏목 엮어 한양길 떠난 뗏목꾼이 양수리 지나 두물머리 어름쯤에서 불암산 너머로 아스라이 보았던 것도 삼각산이었을 것입니다.

하여, 삼각산은 한양이 도읍으로 터를 잡은 이후 한양을 드나들던 백성들의 애환을 두루 포용하는 넉넉한 품을 지닌 으뜸산[宗山]으로서 그 역할을 다해 온 것입니다.

▲ 보현봉과 문수봉 사이에 위치한 대남문 ⓒ서울학교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모자, 스틱, 등산화,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서울학교 제18강 참가비는 5만원입니다.(강의비, 책걸이 회식비, 운영비 등 포함).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현장에서는 참가 접수를 받지 않습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 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가 있으며, 곧 후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 서울 역사인문기행의 강의 내용이 될 <서울 이야기>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번씩, 셋째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보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에 1시간 30분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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