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성백제의 몽촌토성과 목책 Ⓒ서울학교 |
서울학교 제17강은 8월 18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잠실 롯데월드호텔 앞 서쪽 석촌호숫가 삼전도비 앞에 모입니다. 지하철 2호선, 8호선 잠실역 3번 출구로 나와 약간 직진하면 됩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삼전도비→석촌호수길→백제고분군→올림픽공원 정문→한성백제박물관→몽촌토성→움집 터 →몽촌역사관→올림픽공원 북1문→강동구청 앞→점심식사 겸 뒤풀이(하늘빛우렁쌈밥)→풍납토성→광진교→광나루역
▲ 한성백제 답사로 Ⓒ서울학교 |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8월 답사에 대해 들어봅니다.
역사의 전개과정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시기구분 작업은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수도(首都)의 이동에 따라 백제시대를 구분해 보면, 한강유역에 머물렀던 한성백제시대(漢城百濟時代), 고구려의 침략으로 개로왕이 죽고 황급히 남하하여 금강 유역의 공산성에 머물렀던 웅진백제시대(熊津百濟時代), 그리고 백제의 전성기이자 패망을 지켜보아야 했던 백마강 유역의 사비백제시대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부여(夫餘)로부터 떨쳐 나와 10명의 신하와 함께 남하한 온조(溫祖)와 비류(沸流)는 송파구 일대인 한강 유역과 인천 문학경기장 근처인 미추홀(彌鄒忽)에 각각 머물렀는데 온조를 도운 10명의 신하를 내세워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다가 미추홀의 비류가 죽고 그의 백성들이 즐겁게 온조에게로 왔다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습니다.
▲ 풍납토성 Ⓒ서울학교 |
남하한 온조 집단은 당시 경기, 충청, 전라도 지방에 자리 잡은 마한(馬韓) 연맹체 54국 중에 맹주국인 목지국(目支國)으로부터 100리의 땅을 할양받아 나라를 세운 뒤 미추홀의 비류집단과 지역연맹체를 형성하고 그 세력을 키운 뒤 맹주인 목지국을 병합시키고 마한연맹체의 새로운 맹주가 되어 마침내 한성백제의 초기체제를 형성하였습니다.
한성백제의 초기 시기는 5개의 부(部)로 나누어 5부장(部長)을 통해 간접 통치하는 5부체제(五部體制) 형식이었고 왕은 왕성이 있는 직할지만을 통치하였습니다. 이처럼 초기 고대국가로의 틀이 갖추어지자 늘어나는 인구도 수용하고 방어체제도 강화하기 위해 도성을 건립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 진 것이 풍납토성(風納土城)과 몽촌토성(夢村土城)입니다. 풍납토성은 평지토성(平地土城)으로 평상시에 주거하는 도성이고 몽촌토성은 자연 구릉을 이용하여 만든 비상시에 대비한 산성적(山城的) 성격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아울러 부를 때는 한성(漢城), 위례성(慰禮城), 왕성(王城), 대성(大城)이라 하였고 각각으로 부를 때는 위치에 따라 풍납토성을 북성(北城), 몽촌토성을 남성(南城)이라 하여 고구려의 국내성(國內城), 환도산성(丸都山城)과 마찬가지로 남성, 북성의 이성체제(二城體制)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 봉토분 Ⓒ서울학교 |
나아가서 남쪽으로 남한산성(南漢山城), 동쪽으로 이성산성(二聖山城), 북쪽으로 아차산성(峨嵯山城), 서쪽으로 삼성리토성(三成里土城)의 외곽 방어기지를 갖추기도 하였고 한강변에는 홍수 피해를 방지하는 제방의 역할과 한강을 타고 침략해 오는 적군을 방어하기 위하여 사성(蛇城)도 쌓았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초기백제의 중심지에 대한 명칭이 위례성→왕성→한성의 순으로 변했는데 이것은 세 개의 지명이 뜻하는 의미가 같다는 것입니다. 한성(漢城)은 '큰 성(大城)'의 중국식 표기이고 위례성은 한성을 달리 부른 이름일 것입니다.
위례성(慰禮城)의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신뢰할 만한 것은 하나는 위례가 위리와 음이 비슷하여 '울타리' 라는 주장으로, 목책을 세워 흙을 쌓아 만든 울타리를 뜻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왕성(王城) 또는 대성(大城)이라는 주장으로 위례는 백제어의 어라(於羅)처럼 왕 또는 크다(大)는 뜻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위례성, 왕성, 한성은 같은 곳을 달리 불렀던 이칭(異稱)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같은 기록에 한성에 북성과 남성의 2개의 성이 있다고 했으니 이것은 지금의 조건에 비추어 볼 때 북성은 풍납토성이고 남성은 몽촌토성이라고 생각되는데, 몽촌토성은 왕이 머물렀던 왕성(王城)이고 풍납토성은 백성들의 거주지가 많았던 거민성(居民城)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습니다. 그런데 최근 풍납토성에서 왕궁 유적이 발굴되어 한성백제시대의 왕성은 한성이라 불렸던 풍납토성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되며 한성이란 명칭은 조선시대에도 도읍의 이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 기단식 적석총 Ⓒ서울학교 |
한성백제는 한강변에 2개의 도성을 중심으로 그 남쪽으로는 석촌동, 가락동, 방이동 일대에 당시 지배층의 묘역이, 동북쪽으로는 성내동, 천호동, 암사동 일대에 취락지와 농경지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풍납토성은 전체의 둘레가 3470m, 높이는 6m에서 15m에 이르고 성벽의 넓이는 30m에서 70m에 이르며 성 밖에는 넓은 해자(垓字)가 둘러쳐져 있었습니다. 한강 연변의 평지에 축조된 순수한 토성으로 남북으로 길게 타원형을 이루며 동벽 1,500m, 남벽 200m, 북벽 300m 정도이며 서벽은 1925년 을축대홍수로 유실되었습니다만 지금은 새로 제방을 쌓아 서벽이 완전히 남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안에는 왕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의 표현을 빌리면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하지 않은(儉而不陋 華而不侈)" 많은 건물들이 세워졌을 것입니다.
풍납토성에서는 집단취락시설의 주위나 성곽 둘레에 도랑을 파고 물을 가두어 두는 일종의 방어시설인 환호(環濠)가 3겹으로 둘러싸여진 모습으로 발굴되었고 각종 토기류와 꺾쇠, 숫돌 등의 생활유물들도 원형을 유지한 채 발견되었으며 도로의 유구와 석축유구, 생활유구, 수혈 등이 함께 발견되어 왕궁 내에 많은 국가시설물들이 존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성안 전역에 걸쳐 기와, 전돌, 초석 등 고급의 건축자재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어 풍납토성 안에 살았던 거주민들은 상당히 높은 계급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환호는 몽촌토성의 해자(垓字)와는 달리 군사적인 방어시설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밀집된 주거지역과 외부와의 구획을 짓는 경계시설로서 상징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여집니다.
몽촌토성은 남한산성에서 뻗어 내린 구릉지의 지형을 이용해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의 이중구조로 축조한 독특한 토성으로 진흙을 쌓아 성벽을 만들고 필요에 따라 경사면을 급하게 깎는 등 인공을 가하기도 하였습니다. 북쪽으로는 목책(木柵)을 세웠으며 그 외곽에 해자를 둘렀는데 해자는 성 밖으로 물길을 내어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역할을 해주는 것으로 현재는 연못으로 가꾸어져 있습니다.
▲ 몽촌토성 해자 Ⓒ서울학교 |
성벽의 총길이는 성벽 정상부를 기준으로 서북벽 617m, 동북벽 650m, 서남벽 418m, 동남벽 600m로 총 2,285m이고, 동북쪽 외곽에는 외성(外城)이 약 270m의 직선 형태로 자리잡고 있으며 제일 높은 곳의 고도는 42.9m이며 대부분의 높이는 30m 이내입니다.
북측의 외곽 경사면과 외성지의 정상부에는 목책(木柵)을 설치하였던 흔적이 나타났고 동측의 외곽 경사면에는 생토를 깎아내어 경사를 급하게 만들고 해자(垓子)를 설치하였던 점으로 보아 북쪽으로부터의 침략에 대비한 기지 구실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물건을 저장하는 창고와 같은 역할을 하는 저장혈(貯藏穴)의 유구와 망루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판축성토대지(版築盛土臺地)와 같은 군사시설들이 발굴되어 이곳이 왕성이 아니라 위급시 대피하는 한성백제의 최후의 보루였던 것 같습니다.
몽촌토성에서 현재까지 밝혀진 한성시대 백제 시설물로는 적심석(積心石)을 갖추고 있는 지상 건물지 1기, 판축성토대지(版築盛土臺地) 1개소, 수혈주거지(竪穴住居址) 9기, 저장혈(貯藏穴) 31기, 저장혈과 유사한 방형유구(方形遺構) 2기, 적심유구(積心遺構) 7기, 지당지(池塘址) 2개소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몽촌토성은 네 곳이 끊겨 있기 때문에 당시 성으로 통하는 문이 4개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곳이 문이 있었던 문지(門址)였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석촌동 고분군(古墳群)은 석촌동과 가락동에 걸쳐 있으며 한성백제 시기의 중심 묘역입니다. 일제강점기의 발굴 보고서에 따르면 지상에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분묘가 토축(土築)으로 된 것이 23기, 적석(積石)으로 된 것이 66기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대형 돌무지무덤[積石塚] 7기와 함께 널무덤[土壙墓] 독무덤[甕棺墓] 등이 30여 기 정도 남아 있습니다.
고구려의 영향인 돌무지무덤이 석촌동에 산재한다는 것은 백제의 건국 세력이 문화적으로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분군 지역에는 3, 4호분과 같은 대형분 이외에도 소형의 널무덤과 같은 평민이나 일반 관리의 것도 섞여 있고 서로 시기를 달리하면서 중복되게 형성된 것도 있어서 석촌동 일대는 오랫동안 다양한 계급의 사람의 묘지로 쓰여진 것으로 보여집니다.
석촌동 고분군에서 제일 거대한 3호분은 긴변 45.5m, 짧은변 43.7m, 높이 4.5m의 규모의 사각형 기단형식의 돌무덤[基壇式積石塚]으로, 기단은 3단까지 확인되었으며 그 시기는 3세기 중엽에서 4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여 한성백제를 강력한 고대국가로 건설한 근초고왕(近肖古王)의 무덤으로 비정(比定)되기도 하였습니다.
4호분은 한 변이 23~24m의 정사각형으로 연대는 3호분과 비슷한 시기로 보이나 널무덤과 판축기법을 가미하여 순수 고구려 양식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1호분의 경우 왕릉급의 대형 쌍분임이 확인되었고 그 쌍분 전통은 압록강 유역이 환인형 고력묘자촌에 보이는 이음식돌무지무덤과 연결되고 있어 백제 지배세력이 고구려와 관계가 깊다는 또 하나의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들 고분은 대체로 3세기에서 5세기에 걸친 약 200여 년 동안 만들어졌으며 특히 4세기 약 100년 동안은 한성백제 지배세력에 의해 돌무지무덤 위주의 고분이 축조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 후 공주(公州)로 천도(475년)한 웅진백제 지배 세력의 무덤은 돌무지무덤[積石塚]에서 돌방무덤[石室墓]으로 바뀌게 되는데 웅진백제 시기의 무령왕릉(武零王陵)이 바로 최초의 횡혈식석실묘(橫穴式石室墓)입니다. 이때부터 왕실의 묘제로 횡혈식석실묘가 정형화되어 삼국시대의 보편적인 왕실의 묘로 자리잡게 됩니다.
▲ 움집 터 Ⓒ서울학교 |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차림, 모자,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서울학교 제17강 참가비는 5만원입니다.(강의비, 점심식사 겸 뒤풀이, 운영비 등 포함).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현장에서는 참가 접수를 받지 않습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 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가 있으며, 곧 후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 서울 역사인문기행의 강의 내용이 될 <서울 이야기>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번씩, 셋째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보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에 1시간 30분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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