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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마음이 드러난 것이고 마음에 들어가는 통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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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마음이 드러난 것이고 마음에 들어가는 통로다"

[알림] 선불교학교 봄학기 참가 안내

선불교(禪佛敎)에서 삶은 늘 경이롭습니다. 삶의 경이로움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선불교의 경이로운 세상을 열어간 사람과 사상의 족적을 살펴보려는 선불교학교(교장 박재현)가 2013년 봄학기 강의를 마련합니다. 주제는 <선(禪)과 말(言語)>.

박재현 교장선생은 불교철학자이며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입니다. 경북 상주(尙州)에서 태어나 같은 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습니다. 경희대학교 상경계열에 다니면서 철학을 엿보다가, 서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불교철학을 연구하여 석·박사를 모두 마쳤습니다. 저서에는 <무(無)를 향해 기어가는 달팽이>와 <깨달음의 신화> <한국 근대불교의 타자들>이 있고 박사학위논문은 <한국불교의 간화선 전통과 정통성 형성에 관한 연구>입니다.


ⓒ선불교학교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선(禪)>에 대한 설명을 들어봅니다.

선은 불교의 역사 속에서 부각된 개념입니다. 하지만 불교에 갇히지 않습니다. 선은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 세상을 가로질러 나가려는 모든 형태의 몸부림입니다.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은 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禪)이라면 불교에만 한하여 있는 줄로 아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불교에서 선을 숭상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선을 일종의 종교적 행사로만 아는 것은 오해다. 선은 신앙도 아니요, 학술적 연구도 아니며, 고원한 명상도 아니요, 침적(沈寂)한 회심(灰心)도 아니다. 다만 누구든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요, 따라서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필요한 일이다. 선은 전인격의 범주가 되는 동시에 최고의 취미요, 지상의 예술이다. 선은 마음을 닦는, 즉 정신 수양의 대명사다."

선(禪)이라는 한자어는 본래 인도어 드하야나(Dhayana)를 번역한 것입니다. 드하야나는 인도인들이 보편적으로 했던 마음수행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발음이 낯선 동아시아인들의 귀에는 '지아나'로 들렸고, 들리는 대로 한자로 옮겨 '禪那'라고 적었다가 '禪'이 되었습니다. 선은 불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이 불교와 밀접하게 결부된 이유는, 인도의 문화 전통 가운데 동아시아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 불교였기 때문입니다.

동아시아인들이 인도에서 불경(佛經)을 들여와 읽기 시작한 시기는 2세기 중반경입니다. 이 무렵부터 시작해서 무려 4백년 넘게, 불교를 흡수하고 이해하고 다시 구축하는 일에 당시 동아시아의 최고 엘리트들이 총동원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불경을 구하기 위해 사막을 걸어서 넘나들다가 가끔은 살아서 돌아왔지만 대개 길에서 숨졌습니다. <왕오천축국전>의 저자 혜초(慧超, 704~787)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8세기 경, 불교에 대한 이론적 이해가 일단락되면서 이제 동아시아인들을 불교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정체가 바로 선종(禪宗)입니다.

선종은 '더 이상 부처는 없다'(殺佛)는 깃발을 내걸고 중국 당나라 시대에 등장했습니다. 그 이후로 선은 불교의 대명사처럼 되었습니다. 선종의 선은 드하야나를 모방하거나 복제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선종의 선은, 드하야나가 도외시했거나 가지 않은 길을 화두(話頭)를 통해 모색했습니다. 화두는 말(言語)입니다. 말이 선에 등장했다는 사실은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경이로운 일입니다. 말을 통해 모색된 선은 인도인의 선이 아니라 동아시아인들의 선이었으며, 이를 통해 선은 더욱 새로워지고 넓어졌습니다.

박재현 교장선생님은 봄학기를 준비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불교학교에서는 '마음'과 '세상' 그리고 이 둘을 이어주는 '말'(言語), 이 셋을 큰 주제로 삼아 학기별로 번갈아 가며 강의를 진행합니다. 지난 가을학기에는 인간이 느끼는 고통의 원인과 치유에 대한 선불교의 '마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모하였습니다. 이번 봄학기엔 선불교의 '말'에 대해 알아봅니다.

중국 선불교 핵심적인 특징은 말(言語)을 통해 드러납니다. 말은 마음이 드러난 것이고 마음에 들어가는 통로입니다. 그런데 선의 말귀는 아득합니다. 오죽하면 잘 알아듣지 못하는 말의 대명사로 선문답이라는 말을 쓸까요. 하지만 이 아득한 선문(禪門)의 말귀가 마음에 이르는 가장 올바르고 빠른 길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2013년 봄학기 강의 주제는 <선과 말(言語)>입니다. 5, 6월 금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총 7강으로 진행합니다.

제1강[5월10일] 붓다는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말하지 않았는가.

성경(聖經)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불경(佛經)을 읽으면 붓다의 뜻을 짐작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서둘러 짐작하지 않기로 합니다. 다만, 어떻게 말하려고 했는지 보려고 합니다. 의미는 형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2강[5월24일] 고백의 언어와 인식의 언어

말들은 외형상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종교언어는 좀 다릅니다. 종교언어의 특징에 대한 이해 없이 선불교의 언어를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종교언어는 표현하고 전달되지 못하는 마음속의 말이고, 그래서 그것은 우리의 마음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제3강[5월31일] 언어의 은유적 속성과 세계의 구성

말을 하면 소통이 이루어진다고 짐작합니다. 그런데 정작 말을 해 보면 말귀는 잘 전달되지 않습니다. 말이 마음을 떠나는 순간, 말은 발설한 사람의 뜻과는 상관없이 제 나름의 세계를 짓습니다. 이것이 말의 속성이고, 선불교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었습니다. 현대 언어학에서 밝혀진 언어의 특징을 통해 선불교의 언어를 이해해 봅니다.

제4강[6월7일] 도가(道家)의 말귀와 선(禪)의 말귀

선불교의 독특한 말귀는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닐 겁니다. 중국 도가의 말귀를 살피지 않으면 선의 말귀로 건너가기 어렵습니다. 말을 통해 말을 넘어서려고 했던 옛 사람들의 아득한 바람을 살펴봅니다.

제5강[6월14일] 선어록의 말귀

선불교의 언어는 어록(語錄) 형식으로 남아있습니다. 말하자면 선불교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형식이 조금 독특하고 내용도 쉽게 파악되지 않습니다. 어록의 형식과 내용을 살펴보고, 선사(禪師)들의 행적과 말귀를 더듬어 봅니다.

제6강[6월21일] 선문답의 대화방식(1)

선문답은 선어록의 내용 가운데 이목을 끌고 사람의 안목을 깨워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조금 낯설고 생경하지만 자주 접해보면 그 나름의 맥락이 있습니다. 말로 전달되지 않는, 차마 말하지 못하는 의미가 선문답이라는 형식을 통해 나타납니다. 재미있고 의미 있는 선문답을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제7강[6월28일] 선문답의 대화방식(2)

1700개 공안(公案)이라고 했으니 선문답이 그렇게 많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이 중국의 사례입니다. 한국 선불교에서 있었던 선문답 사례를 중심으로 좀 더 살펴봅니다.

강의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 인문학습원 강남강의실에서 열리며 자세한 문의와 참가신청은 인문학습원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을 이용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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