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영 달아 앞바다의 일몰. 저 새는 대체 무엇을 학수고대하고 있을까? ⓒ이상희 |
강 교장선생님은 시인, 에세이스트, 여행자이며 인문학습원 섬학교 교장선생님이기도 합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에 등단했으며, 문화일보 평화인물 100인에 선정되었습니다. 2006년부터 사람 사는 한국의 모든 섬을 걷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그동안 250여 개의 섬을 걸었습니다. 지금도 섬들을 걸으며 섬의 문화와 풍속, 사람 사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2011년 3월부터는 통영 동피랑 마을에 거주하며 통영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기록하는 일도 병행해 왔고, 현재 프레시안에 <통영은 맛있다>를 연재 중입니다. 저서로 <바다의 황금시대, 파시> <어머니전>(문광부 우수문학도서) <섬을 걷다> <그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자발적 가난의 행복>(문광부 우수문학도서) <보길도에서 온 편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등 다수가 있습니다.
▲ 새벽 미륵산 정상에 서면 통영 앞바다에 선경이 펼쳐진다. Ⓒ이상희 |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통영학교를 열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변방의 소도시지만 통영(統營) 사람들의 통영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합니다. 사람들은 통영을 '동양의 나폴리'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항구란 뜻이지요.
통영은 예향(藝鄕)입니다. 박경리, 윤이상, 유치환, 김상옥, 전혁림, 김춘수 등 수많은 예술가들을 배출한 곳이지요.
통영은 또 이순신 장군이 한산해전을 승리로 이끈 구국의 땅이기도 합니다. 통영은 300여 년간 삼도수군통제영의 사령부가 있던 군사도시였지요. 통영이란 이름도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런 역사, 문화적 전통이 통영 사람들의 자부심을 키운 자양분이었을 것입니다. 박경리의 <토지>에도 꼬마 아이의 입을 통해 그 자부심이 표출됩니다.
"갯가라 카지마는 옛날에는 사또보다 높은 수군통제사가 있었던 곳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명정리에는 이순신 장군을 모시놓은 사당도 있고요. 저어기 저, 왜놈들을 몰살시킨 판데목도 있고 통영 사람들 콧대가 얼마나 높으다고요? 그래서 왜놈 서장도 보통내기가 와서는 맥도 못춘다 안캅니까?"
아직도 통영과 충무를 별개의 도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통영과 충무는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통영의 일부가 한때 충무였던 때가 있었지요. 본래 통영은 하나였으나 1955년 통영군 통영읍이 충무시로 승격되면서 통영은 충무시와 통영군 둘로 나뉘어졌습니다.
1995년 충무시와 통영군의 통합으로 충무란 이름은 사라지고 통영시만 남았습니다. 통영이 다시 하나가 된 것이지요. 면적 234.8㎢, 인구 14만. 바다의 땅, 통영은 250여 개(최근에는 바위섬들까지 포함해 500여 개라고도 합니다)의 섬이 있는 '섬나라'이기도 합니다.
▲ 통영 바다는 굴과 멍게, 물고기들을 기르는 양식장이기도 하다. ⓒ이상희 |
1603년 제6대 이경준 삼도수군통제사가 두룡포란 작은 포구에 터를 닦고 1605년 세병관, 백화당 등 삼도수군통제영 건물을 지으면서 통영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군사도시 통영이 생기면서 살림을 뒷받침 해주는 12공방도 함께 들어왔습니다. 통제영은 이경준 통제사부터 208대 홍남주 통제사까지 300여 년간 존재했지요.
최고의 풍광을 자랑하는 통영은 예향인 동시에 맛의 고장이기도 합니다. 멋은 맛에서 왔다 합니다. 맛이란 물산이 풍부할 때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배를 채우기에도 급급하다면 맛 같은 거 따질 여력이 없습니다. 척박한 지역일수록 음식이 맛 없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풍요로워야 맛이 생기고 마침내는 음식에 멋까지 부리게 됩니다. 그렇게 문화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통영은 풍요로운 땅입니다. 그래서 통영의 음식은 각별히 맛있습니다.
통영의 바다는 사철 풍성합니다. 서해바다는 겨울이면 텅 비다시피 하지요. 대부분의 어류들이 추위를 피해 남쪽 바다로 떠나거나 동면에 들어 깊은 바다 속으로 숨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동해는 어종이 단순합니다.
하지만 남해 바다는 겨울이야말로 제철입니다. 동서남해 모든 바다의 어류들이 모여드는 까닭입니다. 그 남해에서도 통영은 가장 많은 해산물들의 집산지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통영을 걸으며 통영의 맛있는 해산물 음식과 역사와 문화를 맛보고 느낄 것입니다. 통영학교는 그 길라잡이가 될 것입니다. 맛있는 통영, 멋있는 통영. 여행자라면 누구나 통영의 맛과 멋에 깊이 중독되고 말 것입니다.
▲ 통영 미륵산 정상에서 본 야소골 풍경 ⓒ이상희 |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답사지에 대한 설명을 듣습니다.
겨울 보약 대구탕과 타락죽처럼 부드러운 물메기탕
통영 여행의 절반은 음식입니다. 통영은 시작부터 끝까지 맛있습니다. 통영은 어느 계절이나 맛있지만 겨울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맛을 자랑합니다. 겨울 통영은 굴과 대구와 물메기와 복어의 계절입니다. 시원한 복국과 물메기탕, 진한 생대구탕은 잃었던 입맛을 되돌아오게 하는 묘약입니다. 통영 음식문화의 대명사 다찌도 겨울이 가장 풍성하고 맛있습니다. 굴의 산지답게 어느 식당을 가나 생굴은 밑반찬으로 거저 나옵니다. 이번 통영학교 답사에서 맛보게 될 음식이야기부터 시작해 볼까요.
통영 사람들은 계절마다 통과의례처럼 꼭 먹어야 하는 제철 음식이 있습니다. 봄은 도다리쑥국이고 여름은 하모회나 장어구이, 겨울은 단연 물메기국과 대구탕입니다. 서울 사람들이 보신탕이나 삼계탕을 먹어야 여름을 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통영 사람들은 마치 물메기탕이나 대구탕을 챙겨먹지 못하면 겨울을 날 수 없기라도 할 것처럼 안달입니다. 우리도 통영에 발을 딛자마자 생대구탕이나 물메기국으로 지친 속을 달랠 것입니다.
한류성 어족인 대구는 겨울 대구가 최고입니다. 대구는 동서양 어디나 즐겨먹는 물고기입니다. 대구는 그 큰 입만큼이나 탐욕스럽게 먹어대는 물고기입니다. 전형적인 탐식성 어류인데 심지어 제 알이나 제 새끼를 잡아먹을 정도로 무자비한 식성의 소유자지요. 하지만 그 포악한 성질과는 달리 대구의 맛은 담백하고 부드럽습니다. 한동안 멸족의 위기까지 갔던 대구가 다시 잡히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 전부터 거제시에서 대구 치어를 방류한 덕분입니다.
물메기탕 또한 통영의 겨울 별미지요. 물메기는 지역마다 그 이름도 각각인데, 동해에서는 곰치나 물곰이라고 하지요. 통영에서는 흔히 '미기'라 합니다. 물메기는 동중국해에서 여름을 나고 겨울이면 산란을 위해 한국의 연안으로 올라오는데 이때가 산란철이라 살이 올라 가장 맛이 있습니다.
나는 통영의 물메기탕보다 더 부드럽고 속을 편하게 달래주는 해장국을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정약전의 <자산어보(玆山魚譜)>에도 "곧잘 술병을 고친다"고 했겠지요.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는 "살이 타락죽(駝酪粥, 우유죽) 같아 양로(養老)에 가장 좋다"고 한 것처럼 살이 살살 녹습니다.
▲ 통영 다찌 상차림. 다찌는 다양한 해산물 음식을 골고루 맛 볼 수 있는 통영의 보물이다. ⓒ이상희 |
해산물 요리의 알파와 오메가, 다찌
싱싱한 제철 해산물은 발품만 팔면 어느 바닷가에서든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딜 가든 우리가 맛볼 수 있는 요리는 제한적입니다. 봄이면 쭈꾸미나 도다리회 한 가지만 수북하게 쌓아놓고 배가 터지도록 먹어야 하고 가을이면 대하만 질리도록 먹어야 합니다. 아무리 맛난 음식도 물리도록 한 가지만 먹어야 하는 것은 고역입니다.
맛있는 해산물을 조금씩 다양하게 맛 볼 수는 없을까요. 생선회도 조금, 생선구이도 조금, 쭈꾸미도 조금, 꽃게도 조금, 멍게도, 굴도, 도다리도, 물메기도 조금씩 다 맛볼 수는 없는 걸까요. 통영에서는 가능합니다. 다찌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통영의 다찌집에서는 계절마다 제철 생선회와 해산물들이 다 있습니다. 싱싱함과 맛깔스러움, 무엇하나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경상도 음식은 맛없다는 편견을 보기 좋게 깨주는 곳이 통영의 다찌집입니다. 술을 시키면 안주는 주인이 주는 대로 먹는 술집이 다찌입니다. 다찌집에서는 그날그날 시장에 나온 식재료에 따라 메뉴가 바뀌고 계절마다 제철 음식이 나옵니다.
전주의 막걸리 골목처럼 다찌는 본래 술값만 받고 안주값은 안 받는 술집문화입니다. 대신 술값이 좀 비쌉니다. 술값에 안주값이 포함되니 그렇습니다. 하지만 안주를 생각하면 결코 비싼 것이 아닙니다. 음식만으로도 충분한 값어치를 하고도 남지요. 요즘은 다찌에서도 수지타산을 맞추기 어려워 기본요금을 받기도 합니다.
대체로 통영 사람들은 다양한 해산물 안주를 원하지만 안주를 많이 먹는 편이 아닙니다. 맛있는 안주를 고루고루 조금씩 먹는 것을 즐깁니다. 다찌 문화가 유행할 수 있는 배경이지요. 통영 사람들도 다찌의 어원은 잘 모릅니다. 통영문화원 김일룡 향토사연구소장은 다찌가 "일본 선술집을 뜻하는 다찌노미(立(ち)飲み)에서 왔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름의 유래야 어떻든 겨울 다찌집은 통영 해산물요리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천계(天界)의 옥찬(玉饌) 마계(魔界)의 기미(奇味), 복국
통영에서의 아침 해장은 복국입니다. 통영은 이 땅에서 복국 문화가 가장 발달한 고장이지요. 더구나 겨울은 복이 제철입니다.
"복어는 천계(天界)의 옥찬(玉饌)이 아니면 마계(魔界)의 기미(奇味)다. 복어를 먹으면 신통하게도 체내의 불화(不和)가 사라지고 엄동설한의 추위도 잊어버리게 한다."
<미미구진(美味求眞)>이란 책에서 인용했다는 정문기 선생의 <어류박물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독이 있는 물고기들은 대체로 맛이 뛰어납니다. 한중일 세 나라만이 아니라 동남아, 이집트 사람들도 복어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 위험한 물고기를 탐식합니다. 복어 중에서도 맹독을 가진 복어일수록 맛이 일품이니 그 유혹 또한 강렬합니다.
미국 FDA도 복어회를 캐비아, 푸아그라, 트뤼플(송로버섯) 등과 함께 세계 4대 진미 식품으로 정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소동파는 복어를 먹어본 뒤 "복어의 신비한 맛은 생명과도 바꿀만한 가치가 있다"고 찬양했습니다.
복어가 독이 있는 위험한 물고기지만 전문가의 손길을 거치면 안심하고 먹을 수 있습니다. 아가미와 알, 내장을 따내고 뼈를 다져서 물에 담가 핏물을 빼내면 무탈합니다. 더한 자극을 즐기려는 욕심이 화를 부르지요. 술꾼들에게 복어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유혹입니다. 복어 회 한 접시는 천상의 안주이고 북국 한 그릇은 술독을 푸는데 명약입니다.
요즘 통영 복국집들의 주재료는 졸복입니다. 통영 복집들이 본래부터 졸복을 썼던 것은 아닙니다. 졸복은 작아서 손질하기 성가시고 품이 많이 드는 까닭에 예전에는 잘 취급하지 않고 밀복류를 썼다 합니다. 그러나 크기는 작아도 졸복의 맛이 밀복류보다 더 깊고 더 개운합니다. 육질도 더 쫄깃하고 국물도 시원합니다. 복국으로 속을 달랬으니 이제 통영의 길을 걸으러 가봅시다.
▲ 법정스님이 행자생활을 했던 미래사 설경 ⓒ이상희 |
수도승과 처녀와 호랑이와 도솔암
통영에서의 첫날 트레킹이 예정된 미륵산은 통영의 대표적인 산이고 한국의 100대 명산에 뽑혔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산세도 험하지 않아 쉬엄쉬엄 걸어도 정상까지 1시간이면 충분하지요. 미륵산에 오르는 길은 미래사와 야소골 코스 등 여러 곳이 있지만 우리의 걸음은 봉수골 해물찜집 거리 끝자락 용화사 입구에서 시작됩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은점(恩霑)이 정수사(淨水寺)로 창건했다는 용화사를 들러 띠밭등 방향으로 가는 코스는 초입은 평탄하고 좋지만 중간쯤부터는 너무 가팔라서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관음암과 도솔암을 지나는 통영시 상수도 제1수원지 오른쪽 코스를 택합니다. 이 길은 약간의 경사가 있지만 대체로 평탄하고 숲길이 아름답습니다. 더구나 절벽 끝에 서 있는 도솔암의 풍광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도솔암은 고려 태조 20년(943년)에 창건 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창건 설화가 흥미롭습니다. 17세에 지리산 칠불암으로 출가해 수도하던 도솔은 25세 때 이곳 미륵산으로 옮겨와서 바위굴 속에서 수도생활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호랑이 한 마리가 찾아와 괴로워하며 입을 벌리고 도와달라고 합니다. 도솔은 호랑이의 입에 걸린 비녀를 뽑아줍니다.
그 후로 호랑이가 늘 도솔 곁에 머물렀는데 어느 날은 아름다운 처녀 한 사람을 물어다 놓고 떠나버립니다. 도솔은 처녀를 간호해서 소생시킵니다. 처녀는 전라도 보성 관아의 배이방 딸인데 혼인날을 받아놓고 목욕을 하다가 호랑이에게 물려왔던 것입니다. 도솔이 처녀를 배이방에게 데려다주자 300냥을 시주했다지요. 도솔이 그 돈으로 도솔암을 지었다는 것이 창건 설화의 결론입니다.
오래된 산속 암자의 경우 도솔암과 엇비슷한 창건 설화들이 적지 않습니다. 굳이 설화의 의미를 풀어 해석할 생각도 없습니다. 호랑이란 도솔선사 자기 안의 야수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만 암튼 도솔암을 둘러보며 각자 의미를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도솔암 위쪽에는 도솔이 수도하였던 천연암굴이 있다 하는데 나는 아직 거기까지는 가보지 못했습니다.
한때는 남방제일선원(南方第一禪院)으로 불리기도 했다 합니다. 또 한국전쟁 직후에는 법정스님의 스승이고 조계종 종정을 지낸 효봉(曉峰)선사가 제자인 구산(九山)스님과 함께 이곳으로 와 기거하기도 했다 합니다.
▲ 미륵산 정상. 선경이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이상희 |
미륵부처님을 기다리는 산, 미륵산
도솔암에서 30여 분을 오르면 미륵산 정상입니다. 약간 가파른 구간이 한 두 곳 있긴 하지만 쉬엄쉬엄 최대한 보폭을 작게 해서 걸으면 별로 어려운 길이 아닙니다. 지금은 미륵산에도 쉽게 오를 수 있는 케이블카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땀 흘리며 산길을 걸어 오른 미륵산 정상은 케이블카를 타고 쉽게 오른 사람들이 결코 느낄 수 없는 감동과 희열을 안겨줍니다.
통영 시내와 통영 앞바다의 섬들, 멀리 삼천포와 남해, 고성, 사천, 거제, 지리산까지도 한 눈에 안겨옵니다. 정지용 시인이 어째서 미륵산 정상에 올라 "통영과 한산도 일대의 풍경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고 고백했는지 절로 이해가 갑니다. 풍경은 언어도단의 경계에 있으니 어찌 필설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외마디 탄성이나 지르며 바라볼 뿐이지요.
미륵산 정상 바로 아래 신선대에는 정지용 시인이 미륵산에서 느낀 소회를 기록한 문장비가 서 있습니다. 정상에는 과거 삼도수군통제영의 봉수대가 있었다 합니다. 그래서 산 아래 마을 이름이 봉수골입니다.
법정스님이 출가해서 나뭇꾼 노릇하던 절
정상에서 하산은 미래사 방향으로 잡았습니다. 미륵을 기다리는 절, 미래사. 미륵산 미래사는 법정스님이 출가한 절입니다. 대학생 박재철은 전남대 상대를 다니던 중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며 고뇌하다가 1954년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서 당대의 고승 효봉스님을 만나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합니다. 그는 다음날 바로 통영 미래사로 내려와 부목(땔깜 담당 나무꾼)이 되어 행자생활을 시작했지요.
법정스님의 스승인 효봉스님(1888~1966)은 통합종단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고승입니다. 일제 치하에서 판사 생활을 하다 법복을 벗고 스님이 된 당대의 고승이지요. 미래사는 오래된 절은 아니지만 산속에 푹 파묻힌 모습이 더없이 고즈넉합니다. 절 주변에는 효봉암과 구산대 등이 있습니다.
▲ 미래사 편백숲은 치유의 숲이다. ⓒ이상희 |
치유의 숲, 편백숲
미래사를 잠깐 둘러보고 이제 치유의 숲, 편백숲으로 갑시다. 나그네가 보기에 미래사의 가장 큰 보물은 건물들이 아니라 절 주변의 편백나무 숲입니다. 일제 강점기 일인들이 심었던 편백숲을 후일 미래사에서 매입했다 합니다. 편백숲이 암을 비롯한 난치병 환자들에게 좋다는 소문이 나 많은 환자들이 찾고 있습니다. 일반인들도 건강을 위해 찾아듭니다.
모든 나무는 상처를 입을 경우 병균이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피톤치트라는 물질을 뿜어
내는데 편백의 경우 소나무 등 다른 침엽수보다 세배 이상의 피톤치트를 뿜어낸다 합니다. 그래서 편백숲의 치유효과가 뛰어나다지요. 편백나무에서 나오는 피톤치트는 수령 60∼100년 사이가 가장 많다 하는데 일제 때 조성한 미래사 편백숲의 수령이 그 정도 됩니다. 편백숲은 모두 5만여 평. 통영의 숨겨진 보물입니다. 곧게 뻗은 편백숲을 걸으면 움츠러들었던 정신의 갈기가 곧추 서고 피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 겁니다.
지는 해를 보라! 달아전망대의 일몰
달아전망대(달아공원)는 통영에서 일몰이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한 곳으로 꼽힙니다. 왼쪽은 한산대첩의 현장인 한산도 바다, 오른쪽은 당포해전의 전승지 당포바다입니다. 통영 8경중 하나입니다. 공원은 일몰과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작은 정자 하나와 나무 데크가 전부지만 어느 공원보다 많은 것을 보여줍니다. 인공조형물을 적게 만들수록 사람은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과 혜택을 더 많이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달아전망대는 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내판에는 달아란 이름이 이곳의 지형이 코끼리 어금니[牙]를 닮은 데서 유래됐고, 또 한편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임금이나 대장 깃발인 아기(牙旗, 깃대 끝을 상아로 장식)를 꽂은 전선이 당포에 도달했다는 데서 달아란 지명이 유래했다고도 적혀 있습니다. 코끼리 어금니를 닮았다는 유래도 그다지 신빙성 있어 보이지 않지만 임란 관련 지명 유래는 지나친 견강부회처럼 느껴집니다. 지명 유래란 것이 원래 그렇습니다. 작명의 기록이 뚜렷이 남아있지 않은 한 시대를 달리하면서 몇 번씩 바뀌고 또 엉뚱하게 변하기도 하는 것이니 대부분의 지명 유래란 전설의 고향이기 십상입니다.
왜구들의 영혼을 떠받들기 위해 팠다? 해저터널
해저터널 위를 흐르는 좁은 해협은 통영운하입니다. 통영의 야경은 어느 항구도시보다 아름다운데 그 아름다운 야경은 상당부분 통영운하에서 비롯됩니다. 미륵도와 통영을 잇는 통영대교와 충무교 두 다리 아래 바다가 통영운하입니다. 오랜 옛날 통영반도와 미륵도는 하나로 이어진 땅이었습니다. 미륵도는 섬이 아니라 육지였는데 뱃길을 단축시키기 위해 미륵도와 통영 사이의 좁은 목을 파 운하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미륵도는 섬이 되었습니다. 충남 안면도와 같은 경우입니다.
통영운하 아래에 뚫린 해저터널은 1931년 7월 26일 착공하여 1년 4개월만인 1932년 11월20일 완공됐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일제는 해저터널을 파기로 한 것일까요. 그 당시에도 미륵도와 통영 사이에는 나무나 돌로 된 다리가 있었습니다. 그것들을 대체하고 새 다리를 건설하면 될 터인데 굳이 해저터널을 판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도 야담이 전해집니다. 해저터널 부근 바다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들이 수없이 빠져 죽은 곳입니다. 일제는 이곳에 다리를 놓게 되면 그들 조상들의 영혼을 밟고 다니게 되는 형국이기 때문에 터널을 팠다고 합니다. 터널을 파고 바다 밑으로 다니면 오히려 자기 조상들의 영혼을 받들고 다니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에 다리를 놓지 않고 해저터널을 팠다는 것이지요. 기록이 없으니 확인할 수 없지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마을공동체의 '오래된 미래', 동피랑 벽화마을
동피랑 마을은 가파른 비탈에 들어선 통영의 대표적인 달동네였습니다. 용역들에 의해 철거될 뻔했던 낡은 집과 오래된 골목에 벽화가 그려지면서 관광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동피랑 마을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얼마 전(10월 26일) 동피랑 마을에 안철수 대통령 후보가 다녀갔습니다. 경남 순방 길에 들른 통영에서 오로지 동피랑 마을만을 방문한 것은 상징하는 바가 큽니다. 안 후보는 주민들과 간담회에서 동피랑을 "공동체 복원의 모범사례"로 꼽으며 "진즉부터 꼭 방문하고 싶었던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우리들에게는 앞이 아니라 옆과 뒤를 돌아보는 공동체 삶이 더 시급하다"며 "동피랑 마을가꾸기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라고 평가했습니다. 개발의 바람 앞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했던 통영의 대표적인 달동네 동피랑이 이제는 대선 후보들에게도 마을 만들기와 공동체 복원의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이미 동피랑은 이 나라 마을공동체의 '오래된 미래'가 된 것이지요.
동피랑은 본래 산이었습니다. 48.5m의 야산에 불과하지만 동암산(東岩山)이라는 번듯한 이름까지 가지고 있었지요. 동피랑. 통영말로 '피랑'은 벼랑 혹은 비탈을 뜻합니다. 동쪽 벼랑이 곧 동피랑입니다. 동피랑은 오랜 세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온 동네입니다. 지금이라고 다를까요. 동피랑의 집들은 대부분 10평 내외의 작은 주택들입니다. 골목의 어떤 집에서는 아직도 저녁마다 군불을 지펴 난방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피랑은 이제 더 이상 달동네가 아닙니다. 누구나 오르고 싶어하는 꿈의 언덕입니다. 파괴를 통한 개발이 아니라 낡고 오래된 것의 보존을 통해 이루어낸 작은 기적입니다.
▲ 동쪽 벼랑에 있는 달동네 동피랑이 이제는 통영보다 더 유명해졌다. ⓒ이상희 |
은하수 물을 끌어와 병장기를 씻다, 세병관
국보 제305호 세병관은 통영의 상징입니다. 세병관은 통제영의 객사였습니다. 객사란 본래 고려, 조선시대 관아의 중심 건물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객사의 형태가 표준화되었으며 전국에 360여 개의 객사가 설치됐었지요. 현재는 그중 10여 곳만이 남아 있습니다.
지방관청에서 수령이 집무를 보는 동헌이 높은 건물인 줄 알지만 실상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은 객사였습니다. 국왕을 상징하는 건물이기 때문이지요. 동헌은 객사 동쪽에 있다 해서 동헌입니다. 객사에는 국왕의 전패를 모셨습니다. 그래서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관리들은 가장 먼저 객사를 찾아 예를 올려야 했습니다.
세병관 현판은 36대 통제사 서유대의 글씨입니다. 세병관의 세병은 두보의 시 <세병마행(洗兵馬行)>의 '만하세병'이란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만하세병은 '은하수를 끌어와 병장기를 씻는다'는 뜻입니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安得壯士挽天河(안득장사만천하) 淨洗兵甲長不用(정세병갑장불용)
"어떻게 하면 힘센 장사를 얻어 하늘의 은하수를 끌어다가, 병기를 씻어내어 길이 사용하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
두보는 안녹산의 난(755∼763) 때 포로가 되는 등 숱한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겪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평화에 대한 바람이 그토록 간절했던 것이지요. 은하수 물로 무기를 씻는 뜻은 전쟁을 준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전쟁을 영원히 끝내기 위함입니다. 임진왜란이란 참혹한 전쟁을 겪었던 이 땅의 평화를 바라는 열망이 이 건물의 현판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 세병관. 통제영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이상희 |
동백꽃 따서 물동이에 띠우던 처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충렬사
충렬사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동백나무 고목들이 있습니다. 400년이나 살아온 동백나무 고목 네 그루가 나란합니다. 옛날 충렬사 근처 마을 처녀들은 새벽이면 경정샘(명정샘)으로 물을 길러갔는데 겨울 처녀들은 물을 긷기 전에 충렬사 경내로 들어가 이 오래된 동백나무에서 동백꽃을 따서 물을 기른 뒤 물동이에 동백꽃을 띄웠다 합니다. 그녀들이 띄운 것은 그냥 동백이 아니었겠지요. 그 붉은 마음이 었겠지요.
충렬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당입니다. 제7대 이운룡 통제사가 선조 39년(1606) 왕명에 따라 지었다 합니다. 음력 2월과 8월 그달의 두 번째 정일(丁日)인 중정일(中丁日)의 춘추향사, 봄가을에 제사를 봉행합니다. 또 양력 4월 28일에는 탄신제를 봉행하지요.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불구하고 이충무공 사당으로는 유일하게 존속된 사당입니다. 1895년 통제영이 폐지된 이후에는 통영의 유지들이 충렬사보존회를 설립해서 제사를 받들고 있습니다. 해방이 되면서 귀국한 김구, 이승만 같은 이들이 모두 충렬사에 와서 참배를 했다 합니다. 한때는 현충원 같은 위상이었지요.
팔만대장경을 보호한 천년의 칠, 옻칠미술관
한국 옻칠의 역사는 유구합니다. 청동기시대 옻칠 유물도 출토된 바 있습니다. 고구려나 낙랑, 백제 고분, 경주의 천마총 등에서 출토된 옻칠 제품은 수천 년을 견디고도 그 빛이 변함없습니다. 도료로 쓰이는 옻나무의 수액을 옻칠이라 합니다. 통영은 옻칠 공예의 본고장이지요. 삼도수군통제영 12공방 중 상하 칠방에서 나전칠기를 생산했었습니다. 그 전통이 400여 년 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온 것입니다. 사라져버린 문화재가 아니라 여전히 전승되고 있는 문화라 그 가치가 더욱 큽니다.
통영에서는 어느 집을 가나 나전칠기 공예품 한둘 쯤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나전칠기의 고장답습니다. 통영에는 옻칠을 현대미술과 접목시켜 옻칠회화라는 새로운 예술 장르를 만들어낸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옻칠미술관의 김성수 관장입니다. 옻칠미술관은 초승달 같은 미늘고개 부근에 김성수 관장이 사재로 건립했습니다.
옛날에는 옻이 진귀한 칠이었습니다. 그러니 특별한 곳에만 썼습니다. 명품 중에 명품만 썼습니다. 그렇게 귀한 칠이다 보니 옻칠 제품은 고가입니다. 그만큼 소비층이 적을 수밖에 없었고 판매가 쉽지 않자 생활고에 시달리던 옻칠 장인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옻칠 대용으로 쓰는 카슈칠이었습니다. 한동안 나전칠기에도 옻이 아니라 이 카슈칠을 사용했습니다. 사실은 칠기가 칠기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가슈칠은 너무 역한 냄새가 납니다. 사람들이 이 냄새 때문에 칠기 제품을 싫어했습니다. 카슈칠은 다시 부흥할 듯하던 나전칠기 공예의 몰락을 재촉했습니다.
옻칠은 반영구적 재료입닌다. 보존성이 매우 뛰어나지요. 고려시대 대장경을 보관하는 경함도 옻칠을 했습니다. 몽고 침입 시절 대장경을 옻칠한 경함에 넣어서 땅속에 숨겼어도 썩지 않고 보존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려시대의 나전칠기 작품이 한국에는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 일본, 영국, 네덜란드 등으로 반출되어 있습니다.
목기에 옻칠을 한 것은 곰팡이나 습기에 강한 방충, 방습 효과 때문입니다. 옻칠 그릇에 음식물을 담아서 배탈이 난 적이 없었던 것은 그 때문입니다. 과거 제사를 모실 때 더운 계절에도 옻칠한 제기를 사용하여 음식을 담아두면 오래 노출시켜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항균 작용이 강했다는 증거지요. 일본 사람들이 옻칠 기술을 발달시킨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일본은 옻칠 그릇을 써서 전염병을 예방했습니다. 옻칠미술관에서는 옻칠 회화를 비롯한 다양한 옻칠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 통영운하 야경.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이상희 |
이순신공원, 평화의 의미를 묻다
이순신공원은 한산해전의 현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만들어진 공원입니다. 한산 바다의 전망이 그림처럼 아름답습니다. 선조 25년(1592) 7월 8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 등과 연합하여 왜군과 일전을 치릅니다. 이순신은 거제와 통영 사이의 바다 견내량해협은 좁고 얕아 전투가 용이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왜적을 큰 바다로 유인해 격파할 작전을 수립하지요. 조선 수군은 견내량을 빠져나와 도망치는 척하다가 왜군 함대가 한산도 앞바다까지 쫓아오자 갑자기 학익진을 펼치고 대포와 화살을 쏘아대며 왜적을 초토화시키는 대승을 거둡니다.
한산도 전투에서 왜군의 총대장은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라는 장수였습니다. 육전에서 그는 3천 병사로 조선군 5만 명을 혼비백산하게 만든 자였지요. 당시 함포는 조선이 절대적인 우세였지만 화약에 불을 붙여 철환을 날리는 함포 공격은 사이 간격이 너무 길었습니다. 배 숫자가 적은 조선으로는 불리한 조건이었지요. 와키사카는 조선수군이 배 숫자를 많게 보이게 하기 위해 일자진을 펼칠 거라 예상했습니다. 숫자가 월등한 자신들이 일자진을 깨버리고 포위해 들어가면 절대적으로 우세할거라 확신했다는군요.
그러나 이순신은 일자진이 아니라 학익진을 펼쳤습니다. 조선의 주력선은 판옥선이었습니다. 판옥선은 직사각형 모양의 평저선(바닥이 평평한 배)인데 앞뒤로 2문, 옆으로는 8문씩, 모두 20문의 포를 장착하고 있었습니다. 판옥선은 속도가 느린 대신에 360도 회전이 가능합니다. 앞쪽에서 포를 쏘면 배가 바로 돌면서 옆쪽 포문에서 연달아 포탄을 쏟아냈고 다시 뒤쪽, 옆쪽으로 쉬지 않고 이어집니다. 1척이 앞쪽에서만 포를 쏘는 전함 10척의 몫을 해냈지요.
그런 전함들이 학날개처럼 펼쳐져서 왜선을 향해 연달아 포를 쏘아대니 왜선은 감당해낼 도리가 없었습니다. 1592년 7월 8일 조선군 연합함대 55척이 거의 손실이 없이 왜군 전함 73척 중 46척을 부수고 12척을 나포하는 대승을 거둔 것은 전적으로 이순신의 학익진 전법에 힘입은 바 크다 합니다.
학익진 전법은 함대함 진법의 전형이고 근대적 전법의 시작이라 합니다. 한산대첩의 또 하나 의미는 전면전 최초의 승리라는 점입니다. 한산대첩 전에도 전투에서 연승했지만 그것은 기습전이었지요. 전면전을 통한 한산대첩 승리로 조선군은 자신감을 완전히 회복했으니 한산대첩은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집은 아주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이순신공원 앞 한산 바다는 비할 데 없이 평화롭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이순신공원에서 한산해전의 승리에 도취하기보다는 이 바다의 평화가 영원히 지속되길 기원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 저물녘 통영 바다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울 때가 많다. ⓒ이상희 |
통영학교 제1강의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2월 22일(토)>
07:00 서울 출발(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 지하철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통영학교> 버스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11:00 통영 도착
11:30-12:30 점심식사(북신동 <새풍화식당>에서 시원하기가 일품인 통영의 겨울 별미 생대구탕요리)
12:50 숙소 도착(강구안에서 가깝고 바다 전망이 뛰어난 한산호텔콘도)
13:20-15:20 가벼운 차림으로 통영 걷기(3km) 용화사입구→관음암→도솔암→미륵산 정상(461m)→미래사
15:20-16:00 통영의 숨겨진 비경 편백숲 산책
16:00-16:40 미래사에서 산양일주로까지 걸어서 하산(20분) 및 버스 이동
16:40-17:20 달아전망대 일몰 감상
17:40-18:10 해저터널 걸어서 건너기
18:20-20:20 저녁식사 겸 뒷풀이(항남동 <대추나무 다찌>에서 통영 해산물 요리의 향연)
20:30 숙소 도착, 자유시간 및 취침
<12월 23일(일)>
07:00 기상
08:00-09:00 아침식사(통영 최고의 복국집 <동광식당>에서 복국, 매운탕, 물메기탕 중 택1)
09:00-11:00 가볍게 통영 걷기
동피랑 마을탐방→세병관→충렬사→명정샘→백석시비
11:10-11:50 이순신공원 산책
12:00-12:50 옻칠미술관 관람
13:00-14:00 점심식사(<풍년식당>에서 생선회와 장어구이, 해물뚝배기 등 통영식 한정식)
14:00-15:00 중앙시장에서 장보기 혹은 강구안 거북선 산책
15:00 서울 향발
▲ 통영학교 답사로 약도 ⓒ통영학교 |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여벌 방한복, 윈드재킷, 장갑, 아이젠, 우의(+접이식 우산), 스틱, 물통, 간식, 자외선 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통영학교 제1강 답사 참가비는 왕복 교통비, 숙박비, 4회 식사비,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23만원입니다.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통영학교 www.huschool.com 문의는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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