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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문제의식을 갖춘 체계적인 글로 발전하자

18세를 위한 철학캠프' 4강 후기 수상작 및 강평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 상상마당이 공동 주최한 '18세를 위한 철학캠프' 4강을 듣고 4명의 학생이 수강 후기를 보내왔습니다. 이 가운데 이병록, 정다은 학생의 글이 수상작(우수상)으로 결정됐습니다. 이번 심사는 4강을 강연해 주신 서영화 선생님(한신대 외래교수)과 김성우 선생님과(상지대 교양학부 겸임교수)이 함께 해주셨습니다. 강평과 함께 두 글을 싣습니다. 수상 학생에게는 소정의 책을 부상으로 드립니다. 편집자

문제의식을 갖춘 체계적인 글로 발전하자 : 4강 후기 강평

김성우(상지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이번 18세의 철학 강의 후기 강평을 죽 하면서 가장 신경을 쓴 사항들은 1. 글쓰기의 기본 규칙을 이해하기, 2.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구성하기, 3. 문제의식을 드러내기입니다. 강의가 진행되면서 학생들의 글이 좋아지는 것을 보면 마음이 흐뭇해집니다. 그러나 아직 체계적인 구성과 문제의식의 균형을 잡은 글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더욱 큽니다. 우리 학생들이 독서와 글쓰기 연습을 더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4강 후기 강평은 강연을 해주신 서영화 교수님께서 직접 해주셨습니다. 다만 글이 고만고만해서 대단히 아쉽다는 의견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그래도 서 교수님께서 성심성의껏 평가를 해주셨습니다. 다만 저와 상의해서 최우수상은 뽑지 않고 우수상 두 편만을 선정하기로 했습니다. 선정의 기준의 교수님이 밝히신 대로 글쓰기의 완성도보다 문제의식의 날카로움과 체화의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어려운 강의내용을 듣고 이 정도로 훌륭한 정리를 한 것을 봤을 때 학생들의 이해 능력이 매우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추가적으로 말씀해주셨습니다. 다음은 교수님의 강평입니다.

"여기 우수상을 선정하고 저의 선정이유도 간단하게 아이들에게 전달하고 싶어 몇 자 적어 보았어요. 부분적으로라도 저의 의도가 아이들에게 전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강의가 어렵게 느껴졌다면 여러분들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요. 제가 강의할 때 원칙으로 삼은 것은 여러분들에게 철학적 지식 혹은 정보를 전달하지 않고, 가급적 스스로 물음을 던지고 대답을 찾아 나가는 시간으로 강의를 만들어 가자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강의 시간에도 가급적 3분이나 5분 동안의 생각하는 시간을 주면서 강의를 진행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저의 의도와 무관하게 미숙함으로 인하여 오히려 학생들에게 생각을 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풍부하게 전달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라는 후회가 강의 후에 많이 남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우수상 선정 이유는 이러한 저의 강의 의도와 관련됩니다. 마지막의 남천참묘라는 선불교의 화두에 등장하는 남천스님, 그 중에서도 특히 조주의 행동에 대해 저는 가급적 학생들에게 적게 말하고 가능한 답을 주지 않는 것이 가장 철학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철학하는 선생이 학생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예의라고도 생각했어요. 미숙한 선생이 학생들에게 갖는 기대는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질문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 보기를 바란 것이죠. 강의 후기를 보내준 학생들이 대부분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찾으려 하는 노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우수 후기를 뽑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병록 학생과 정다은 학생의 강의 후기는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으려 노력한 점이 글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좋았습니다.

참고로 제가 생각한 조주의 행동이 갖는 의미를 어떤 작가의 입을 빌러 말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낙원은 일상 속에 있든지 아니면 없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 중)". 일상은 매일 매일이 지겹고 익숙한 것들이지만 동시에 매일 매일이 새롭고 창조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의 장소는 거기에 있다는 것이죠."

강의 후기들에 대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김한올- 절대적인 미의식이 우리에게 소외와 무력감이 아니라 위안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점이 좋습니다.

2. 심상욱- 강의 내용을 이해하고 정리한 점이 매우 뛰어났습니다. 부족하지만 조주의 행동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자 하는 면이 좋습니다.

3. 이병록(우수상)- 강의 내용을 잘 이해하고 핵심을 자신의 언어로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조주을 행동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자 하는 면이 돋보입니다. 또한 강의 전체에 대한 자신의 문제의식을 서술한 점도 좋습니다. 그러나 글의 구성이나 체계성을 더 갖추었으면 좋겠습니다.

4. 정다은 (우수상)- 강의내용을 정리하기보다 자신의 문제의식에 기반을 두고 하나의 주제로 반성적인 생각을 정리한 점이 돋보입니다. 그러나 글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입니다.

이병록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해볼 때가 있다. 지금 내가 하는 일들이 정말로 내가 원해서 하고 있는 일일까. 정말로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일까. 그런데 내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던질 때마다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또 내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내 또래의 학생들처럼 내가 왜 공부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대학을 목표로 공부하고 있었다. 오직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른 채로 그저 사회가 우리에게 바라는 대로. 그런 생각이 들자 내가 사는 삶이 수동적이게만 느껴졌다. 이대로 남들과 똑같은 목표를 위해서 똑같은 삶을 살아도 괜찮은 걸까?

이번 강의에는 '금각사' 라는 책과 함께 미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금각사'는 금각이라는 목재 건축물을 절대적인 미라고 생각한 한 소년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어려서부터 금각이라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그로인해 그는 '금각'을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미라고 생각하며 속세의 아름다움이나 본능을 거부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금각이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 있음을 깨닫고 금각을 불태우게 된다. 여기서 '금각'은 플라톤의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미인 '이데아'를 나타내며 금각을 불태우는 행위는 니체의 해체주의를 나타내고 있다. 플라톤에 의하면 절대적인 본질인 '이데아'는 현실과는 다른 이상적인 세계에 존재하고 있으며 이것을 추구해야한다. 그러나 니체에 의하면 현실세계에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미를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뿐이며 우리는 현실세계에서 우리의 존재를 고양하려 노력해야한다.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금각'을 가장 이상적인 미라고 생각하여 추구하고 현실세계에서의 본능을 억제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는 곧 '금각'이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 있음을 깨닫고 '금각'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자신의 자유와 삶의 고양을 위해 그것을 불태우게 된다.

'금각사'의 내용 중에 남천 스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절에 한 마리의 새끼고양이가 나타나자 스님들이 그것을 서로 키우겠다고 다투자 남천 스님이 그것을 베어버린다. 그 뒤에 남천 스님의 제자인 조주가 이야기를 듣게 되자 자신의 신발을 머리위에 얹고 밖으로 나간다. 여기서 고양이는 객관적인 미라고 볼 수 있는데 남천 스님이 이 고양이를 벤 행위는 자아의 미망을 끊어버려 망념과 망상의 근원을 제거하는 행동이다. 그러나 강의에서는 조주의 행위에 대해서는 언급해주지 않고 스스로 해답을 찾아보라고 했다.

조주에 대해서 나의 생각은 이렇다. 모든 스님들이 객관적인 미인 고양이를 원했을 때 그는 혼자서 흙이 묻은 신발을 받들었다. 그 뜻은 어쩌면 객관적인 미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미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이미 정해져있는 '이데아'를 추구하는 것보다 자유로움을 통해 자신만의 미를 추구하며 삶을 고양해나가는 것. 그것이 작가가 남천 스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인 것 같다.

요즘에는 정말 유행에 따라 행동하는 것들이 참 많아졌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들. 서울대를 정상으로 둔 입시경쟁도, 돈 많이 벌고 권력을 가질 수 있다고 보는 취업시험도, 연예인의 미모를 닮기 위해서 하는 성형수술도. 모두 객관적인 것들을 무작정 추구하기 때문에 일어나게 된다. 우리는 어떤 일들이든 주변의 눈치를 보며 이미 정해져있는 객관적인 미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이 계속된다면 개개인은 정체성을 잃어가며 고유성마저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고유함을 존중받지 못한 채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보이게 되고 그로인해 소외현상 등 사회적 병리현상은 더욱 심각해 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객관성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지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정체성과 고유성을 가짐으로써 자신만의 미를 찾아야한다.

이번 강의를 듣고 나서 '18세를 위한 철학 캠프'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려고 했는지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형성하게 해주는 '실존'이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강의들이 객관적이 아닌 주관적, 수동적이 아닌 능동적인 나를 형성하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인생의 목표를 정하는 일부터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에 이어 사회정의를 형성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미를 정하기까지가 모두 '나의 생각'을 이끌며 '나'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공부하기에 바빠 '나'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조차 없었던 학생들에게 너무나도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지금껏 그저 철학 강의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나'와 '나의 인생'을 설계하는 작업을 했다고 생각하니 이 캠프가 사뭇 진지하게 느껴진다. 다음 강의에서는 어떤 면에서 나를 바라보게 될 지 정말 기대가 된다.

정다은

2011년 1월 17일 18세를 위한 철학 캠프 제 4강이 시작되었다. 이번 강의는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에서의 '미'에 대한 것이었다. 미조구치는 말더듬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미'에 대해 매우 민감했다. 그런 그에게 금각사는 매우 중요했다. 아버지를 통해 들어오던 금각사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미조구치에게 금각사, 즉 미는 영원불변한 것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전쟁을 겪으면서 그 생각이 변했다. 금각사가 파괴될 수도 있다... 그 오랜 세월을 굳건히 서 있던 금각사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은 그에게 충격이었다. 그것을 계기로 미조구치는 금각사의, 미의 불변성에 의문을 느끼게 시작했다. 그 허무함에 진저리를 내면서, 미조구치는 이 모든 것의 근원인 금각사를 불태우고 만다.

우리는 김태희, 아이유 등 많은 사람들에게 '이름다운 사람'이라는 칭호를 붙여준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림, 노래, 건축물, 책,...... 많은 것들에 아름다운, 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준다. 우리는 '아름다움'의 기준에 대해 서로 암묵의 약속을 한 것에 아닐까. 사람을 예로 들자면, 여자는 가슴이 크고, 눈도 크고,쌍커풀 있고 콧대가 높으면 많은 이들이 그 여자를 미인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 현상 자체에 대해서는 옳고 그름의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일종의 '절대적 기준의 미'를 과도하게 추구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플라톤은 이데아, 즉 절대적 진리가 있고, 우리는 그 그림자만을 보고 있으며, 철학자들만이 진정한 이데아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니체는 영원불멸의 절대적 진리는 없다고 반박했다. 나는 니체의 의견에 동의한다. 플라톤의 이데아 논리는, 사회 현상에 접목시켜서 보면, 현재 사회의 몇몇 문제들의 원인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미, 특히 외모의 아름다움에 대해 공통의 기준을 세우고서는 그것을 과도하게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의 성형 문화가 그 단적인 예이다. 심지어 내 친구는, 성형은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내게 "야, 성형은 예의야"라고 말한 적도 있다. 미조구치가 금각사를 태운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도, 처음에 금각을 영원불멸한 것으로 믿고, 그것을 너무 깊이 추구해서가 아닐까? 미조구치가 절대적인 미를 그렇게 깊이 믿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미에 대해 소외감을 느끼지도 않았을 것이다. 과연 현재 미조구치만 그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 외모에 관해서뿐만이 아니다. 많은 외적인 조건들에 대해서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옳은 것' 혹은 '절대적인 것'이라고 설정해 놓은 것들이 너무 높이 있는 것 아닐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닿을 수 없는, 그런 높은 곳에. 우리는 그것을 추구하다가, 인생을 다할 때 즈음에서야 그 허무함을 깨닫게 되는 것 아닐까? 한 실례로, 예전의 나는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많은 것을 기대했다. '남자친구라면 이러이러 해야 한다', '나와 가장 친한 친구라면 나한테 이런 것들을 해줘야 한다' 등, 나는 스스로 각 관계들에 대해 절대적인 규범들을 정했었다. 그리고 친구들이 나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끝없이 실망했다. 마치 미조구치가 하숙집의 딸을 만질 때 금각이 그의 눈 앞에 나타나 욕망을 가로막았던 것처럼, 나의 그 기준들은 내 눈을 가로막았다. 지금의 나는 다르다. 지금의 나는, 관계에서의 절대적 기준이란 없다고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며 친구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노력한다.

우리는 흔히 높은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본받고 싶어한다. 하지만 우리가 절대적인 것으로 추구하는 그것들이 정말로 영원불멸한 것인지, 혹은 그저 허무한 허상일 뿐인지를 항상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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