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보길도의 숲과 하천,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6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2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으며,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 Ⓒ이상희 |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가 있다. Ⓒ섬학교 |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 섬은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다. Ⓒ섬학교 |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앞으로 <섬학교>의 섬 여행은 다리나 제방 등으로 육지와 연결되지 않고 온전히 바다 위에 있는 섬들만을 답사합니다. 크든 작든 섬에서의 이동 수단은 가급적 두 발에 의존합니다. 섬 여행은 가급적 월 1회 떠나며, 작은 섬은 걸어서 일주, 큰 섬의 경우 섬의 가장 걷기 좋은 길 걷기를 기본으로 합니다.
섬에 남아있는 문화유적, 유배지, 당산, 어부림, 마을 숲, 당집, 사찰, 설화의 무대 등도 답사합니다. 해상 경관이 좋은 섬은 어선을 이용해 해상 일주도 하며, 마을 안길을 산책하기도 합니다. 또 답사 간 사람들끼리만 어울리다 오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섬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섬과 소통합니다. 섬의 토속 음식 맛보기, 섬 노인들로부터 특산물 구매하기 등으로 섬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고 오도록 합니다.
▲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섬학교 |
올 3월, <섬학교>가 가는 첫 번째 섬은 <무욕의 섬, 욕지도>입니다. 통영의 환상, 욕지도를 오가면서 통영의 맛 기행도 겸하려 합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욕지도(欲知島)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欲知蓮華藏頭尾問世尊(욕지연화장두미문어세존)
연화세계를 알고자 하는가? 그 처음과 끝을 세존께 물어보라.
세상의 모든 물음에는 답이 들어 있습니다. 답이 없는 물음은 물음이 아닙니다. 망상입니다. 이 물음 속에 우리가 이르고자 하는 섬들, 유토피아를 꿈꾸던 섬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통영 바다의 연화열도에는 욕지도, 연화도, 두미도, 세존도가 있습니다. 미륵도와 반야도가 있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연화세계라면 섬으로 가는 여객선은 반야용선입니다. 오래전 섬들은 스스로 이미 연화세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욕지도를 비롯한 통영 섬들의 이름은 불국토, 이상향을 염원하는 누군가의 기획 하에 지어진 것처럼 아귀가 맞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이름의 섬들이 통영바다에만 몰려있을까요.
▲ 욕지도 풍경. 오래 전 섬들은 스스로 연화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섬학교 |
통영은 섬나라입니다. 통영 바다에는 526개의 섬이 있고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44개입니다. 연화열도의 가장 큰 섬, 욕지도는 통영의 섬들 중에서도 최고의 비경을 자랑합니다. 통영항에서 32km. 한 시간 거리의 뱃길입니다. 청보석의 바다와 점점이 떠 있는 섬과 여들. 욕지도의 풍경은 한 편의 산수화를 방불케 할 정도로 숨 막히게 아름답습니다. 욕지도는 주변에 크고 작은 섬들을 올망졸망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탁 트인 바다 남태평양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습니다. 다도해의 소담함과 대해의 장쾌함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섬입니다. 욕지도는 통영시 욕지면의 중심 섬입니다. 욕지면은 10개의 유인도와 45개의 무인도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욕지도에 면소재지와 각종 관공서가 위치해 있습니다.
욕지도와 그 옆의 작은 섬 상노대도에는 신석기 시대 유물인 조개무지(패총)가 있습니다. 조개무지에서는 각종 석기와 함께 인골 2구도 발견된 바 있습니다. 신석기시대부터 이미 욕지도 일대의 섬들에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삼한시대나 가야시대,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도 사람살이가 이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왜구의 등살에 공도정책이 실시된 조선시대에는 사람들의 거주가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주로 군선들의 정박지로 이용됐습니다. 욕지도에 공식적인 사람들의 입주가 허락된 것은 조선시대 말에 와서입니다. 1887년(고종24년) 조정에서 입주 허락이 내려지고 1888년부터 20여명의 사람들이 처음 들어가 살게 됐다고 합니다. 1988년에는 욕지개척 100년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개척 당시 욕지도에는 사슴이 많아서 '녹도'라 불리기도 했답니다.
욕지도에는 일찍부터 어업이 발달했습니다. 특히 멸치의 주산지였습니다. 솔가지에 불을 켜서 멸치를 유인한 뒤 잡는 챗배 멸치잡이가 욕지도의 전통 어법이었습니다. 일제 때는 고등어, 전갱이 등으로 풍어를 이루었고 남해안의 어업전진 기지였습니다. 당시 욕지도에서 잡힌 물고기들은 서울, 마산, 일본, 만주 등지로 수출됐습니다. 지금 욕지도는 잡는 어업보다는 기르는 어업이 중심입니다. 욕지 내항은 돔, 우럭 등의 가두리 양식장으로 가득합니다. 또 욕지도에서는 처음으로 고등어 양식이 시작되어 성공했습니다. 서울이나 뭍에서 먹는 고등어회는 거의 욕지도 산이라고 보면 됩니다. 욕지도 유동 앞바다에는 참치양식장도 있습니다.
욕지도는 산지 지형이라 논이 거의 없고 비탈밭이 많습니다. 밭은 끈적한 찰황토가 아니라 물이 잘 빠지는 마사토에 가까운 황토밭입니다. 그래서 고구마 농사가 잘 됩니다. 욕지 고구마는 해남 화산 고구마만큼이나 맛있습니다. 고구마를 잘라서 말린 고구마 빼떼기도 유명합니다. 욕지도에서는 고구마를 '고메'라 하는데 욕지도 고메 막걸리는 고구마 케잌 속의 고구마 속살보다 더 스위트합니다. 이번 욕지도 여행길에는 욕지도의 할머니가 집에서 항아리에 직접 담근 고메 막걸리를 맛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열흘 전에만 연락을 주면 고메 막걸리를 담가주겠다는 할머니의 약속을 받아놨습니다.
▲ 욕지도 풍경.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섬학교 |
또 하나, 욕지도의 명물은 밀감입니다. 사람들은 제주도에서만 밀감이 나는 줄 알지만 남해안의 거의 모든 섬들에 밀감나무가 자랍니다. 특히 욕지도의 밀감은 '씨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가 토질을 조사한 후 시험재배하면서 재배가 시작됐습니다. 노지에서 나는 욕지도 밀감은 달고 새콤한 맛이 야생의 밀감 맛 그대로입니다. 욕지도에는 과거 물질을 왔다가 욕지도 총각에게 다리가 잡혀 몇 십 년째 못 떠나고 사는 제주 해녀들이 여럿입니다. 그래서 욕지도 뱃머리에는 욕지도 해녀가 직접 물질해 온 전복, 해삼, 소라, 합자(조선홍합)는 물론 해녀의 남편인 어부가 낚아온 싱싱한 횟감들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섬학교> 제1강 <무욕의 섬, 욕지도> 답사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3월 10일(토)>
07:00 서울 출발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 지하철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11:30 통영 도착, 점심식사(항남동 <풍년식당>에서 통영식 한정식)
13:00 통영 삼덕항 출항
14:00 욕지도 도착
14:20 욕지도 천왕봉 오르기 (왕복 2시간)
혼곡 ⇀ 할매바위 ⇀ 매바위 ⇀ 대기봉 ⇀ 태고암 ⇀ 천왕봉(392m) ⇀ 대기봉 ⇀ 마당바위 ⇀ 새천년기념공원
16:30 욕지도 일주(버스 이동)
새천년기념공원 ⇀ 삼여전망대 ⇀ 유동 ⇀ 덕동해수욕장 ⇀ 도동 ⇀ 석양이 아름다 운 쉼터 ⇀ 청사 ⇀ 흰작살 ⇀ 욕지항(숙소 어원펜션)
18:30 저녁식사(<뱃머리횟집>에서 생선회와 매운탕)
20:00 취침
▲ 욕지도 답사 지도 Ⓒ섬학교 |
<3월 11일(일)>
06:30 기상
07:00 아침식사(<뱃머리횟집>에서 성게미역국과 생선조림)
08:00 욕지도 해안길 느리게 걷기 (7km)
혼곡 무명대 ⇀ 거북바위 ⇀ 개미목 ⇀ 고래강정 ⇀ 노적 ⇀ 조선포 ⇀ 관청마을 ⇀ 욕지항 ⇀
메밀잣밤나무 군락지 ⇀ 자부포 ⇀ 대풍암 숲길 ⇀ 제암마을 ⇀ 욕지 항
10:30 면소재지 마을골목 탐방 및 자유시간
11:30 욕지도 출항
12:30 통영 삼덕항 도착
13:00 점심식사(<송학식당>에서 도다리쑥국, 쑤기미매운탕, 멍게비빔밥 중 택일)
14:00 동피랑 벽화골목 탐방
14:30 자유시간, 중앙시장 탐방
15:00 서울 향발
▲ 일몰 풍경. 욕지도는 섬나라다. Ⓒ섬학교 |
<학습자료 : 욕지도의 지명>
천왕봉(天王峰): 욕지도에는 주봉인 천왕봉(392m)을 비롯해 대기봉(355m), 약과봉(315m), 일출봉(190m) 등의 여러 산이 있다. 산에는 등산로가 잘 나 있어서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천왕봉은 욕지도의 최고봉이다. 옛부터 섬사람들이 산기슭의 제당에 천왕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으며 거기서 산의 이름이 유래했다고 전한다. 동항마을 위 상수원 저수지 기슭에는 아직도 산신당이 있다. 천왕봉은 최근까지도 '천황봉'이라 불렸다. 본래 천왕봉이었는데 일제 때 천황봉으로 바뀌었다가 제 이름을 되찾은 것이다. 한국의 산 이름은 대부분 불교에서 유래했다. 천왕봉의 천왕은 사천왕의 그 천왕이다.
자부(自富·自富浦·자부랑깨): 본 이름 '자부랑깨'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좌부랑포(座富浪浦)'가 됐다가 현재의 자부포가 됐다. 자부랑깨는 욕지항 입구 해협의 좌측에 위치한 마을이다. 천연기념물인 메밀잣밤나무 숲이 있다.
동촌(東村): 욕지면 소재지인 동항리 욕지항 동쪽 마을.
서촌(西村): 동항리 서쪽 마을.
상촌(上村·수돗골): 동항리 서북쪽 마을. 수돗물을 공급했던 골짜기. 지금은 상수원 저수지가 있다.
중촌(中村): 동촌(東村)과 상촌(上村)의 중간 마을.
제암(濟巖·서짓골·면소땀): 자연마을인 제곡(濟谷)과 마암(馬巖)을 통합하면서 '제(濟)'와 '암(巖)'자을 따서 '제암(濟巖)'이라 했다. 옛 지명 '제곡'은 재(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의 토박이 지명인 '재골'에서 유래했다. 욕지면사무소가 위치해 있다 해서 일명 '면소땀'이라고도 한다. '마암'은 마을의 뒤편 바위산 봉우리가 말의 형상을 닮은 것에서 유래.
불곡(佛谷·부첫골·부치꼴): 옛날 절터에서 부처가 발굴된 골짜기라 해서 부첫골. 불곡은 부첫골의 한자식 표기.
혼곡(昏谷·어둔골): 산기슭 벼랑 아래에 위치해 있어 해가 빨리 지고 일찍 어두워지는 해안 골짜기다. 혼곡(昏谷)은 '어둔골'의 한자 이름.
입석(立石·선바우·선돌빼기): 마을 입구 해안에 큰 바위 하나가 우뚝 서 있다 해서 입석마을이다. 입석은 '선바우' '선돌빼기'의 한자 이름.
관청(觀淸·옥섬안): 욕지도 남쪽의 푸른 바다가 보이는 욕지항의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하지만 이는 견강부회식 해석일 것이다. 옥섬(玉島)의 안쪽 해안이라 해서 본래는 '옥섬안'이었다.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임의로 정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야포(冶浦·불멧개·불묵개): 옛날 불멧간(불묵간·대장간)이 있었던 마을이다. 야포는 '불멧개' '불묵개'의 한자 이름.
노적(露積·노적구미): 마을 앞 해안에 곡식을 쌓아 둔 노적가리의 형상의 구미(곶)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 노적은 '노적구미'의 한자 이름.
통단(桶丹): 통포(桶浦)와 단초포(丹草浦) 두 마을을 통합하면서 머리 글자를 따서 '통단(桶丹)'이라 했다. 통포(桶浦·통개)는 옛날 해안 기슭에 으름덩굴(通草)이 많이 자생한 것에서 유래한 토박이지명 '으름개' '통개'의 한자 지명. 포구의 형세가 통(桶)처럼 둥글게 생긴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단초포(丹草浦·단촛개)는 옛날 해안 기슭에 단초(丹草)라는 초목이 많이 자생한 것에서 유래했다.
조선(造船·조선개): 옛날 선박을 건조했던 해안 마을이다.
목과(木果·모개정·모가지): 옛날 고을개(谷浦) 마을과 연이어지는 산등성이의 잘록한 모가지에 형성된 마을이라 해서 생긴 이름이다. 목개는 본래 지명 '모가' '모개정'의 한자 이름.
흰작살(白沙場): 해안에 흰 작살(자갈)이 많이 있어서 생긴 지명.
청사(靑沙·포린작살): 해안에 검푸른 색의 작살(자갈)이 많이 깔려 있어서 생긴 지명. 청사는 '포린작살'의 한자 지명.
금장골: 옛날 금을 채굴하던 광산이 있었던 골짜기.
논골(沓谷): 논이 많이 있는 골짜기이며, '답곡'은 한자 지명.
딱밭골: 옛날 딱나무(닥나무)가 많이 자생했던 골짜기.
젯고닥: 재(고개) 아래의 고닥(구덩)처럼 우묵하게 생긴 골짜기.
고올개재: 상촌 마을길을 지나 서산리 도동(道洞)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모가지개: '고올개'에서 '모가지'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고을개(고올개·邑浦): 욕지항의 옛 포구와 해안 마을을 칭했던 토박이 지명이었는데, 속칭 '고올개'다. 옛날 욕지도에서 가장 큰 고을과 포구였다. '읍포' '읍동(邑洞)'은 한자 지명.
대풍바우(大風巖): 태풍과 동남풍이 심하게 닿는 큰 벼랑 바위.
광주여(가동섬, 광주섬): 섬 모양이 광주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생긴 이름.
삼여(삼례도): 세 개의 여인 '삼여도(三礖島)'에서 변천된 지명으로 사료된다.
옥섬(玉島): 욕지항에 떠 있는 둥글게 생긴 작은 섬이 옥같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에서 유래한 섬 이름.
펠리칸바위: 펠리칸처럼 생겼다 해서 근래에 붙여진 바위 이름.
거북바위: 거북의 발톱처럼 생긴 바위.
▲ 욕지도 양식장. 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어업으로. Ⓒ섬학교 |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일부 풀숲 구간에선 필히 긴 바지^^), 스틱, 물통, 윈드자켓, 우비(+접이식 우산),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지참하세요.
<무욕의 섬, 욕지도> 답사 참가비는 왕복 교통비, 숙박비, 4회 식사비, 여행보험료, 운영비 등 포함 23만원입니다.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섬학교 www.huschool.com 문의는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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