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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18세를 위한 철학캠프' 1강을 듣고

이명주ㆍ이병록ㆍ정다은의 수강후기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그리고 상상마당이 주최한 '18세를 위한 철학캠프'의 첫 수업이 2011년 12월 27일(화) 서울 홍대앞 상상마당아카데미에서 있었습니다. 이번 철학 캠프는 '문학고전'을 통해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동서양의 고전을 통해 철학적 사고의 깊이를 쌓아주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첫 강연 '인생의 의미, 어떻게 볼것인가?-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소크라테스로'를 듣고 3명의 수강생이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적어보냈습니다. 세 학생의 글을 소개합니다. 다른 수강생들도 이 글들을 통해 첫 강의를 다시 한번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수강 후기를 보낸 세 학생에게는 '18세를 위한 철학캠프' 강사 중의 한 분이신 김성우 선생님의 최신 저서 <20세에 만난 철학 멘토> 한 권씩을 드립니다. <편집자>

이명주


한 치 앞만 보고 내달리지 말고, 내 진정한 목표를 향해 인생을 설계하자고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진정한 목표' 다시 말해서 제 가치관을 찾는 과정은 이제 막 고등학생 2학년이 되는 제 딴에는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대한민국 고등학교 2학년인 저는 부모님 기대라는 압박감과 친구와의 경쟁이라는 초조함을 이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목표를 찾을 수 있는 방법도 잘 몰랐고 찾을 수 있다는 확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의 그 생각은 그저 생각으로만 오랫동안 묵혀있었습니다.

이런 저에게 18세를 위한 철학캠프 1강은 한줄기의 빛과도 같았습니다. 이 강의는 인생의 의미,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주제로 막을 올렸습니다. 이 강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소크라테스를 통해서 그 주제처럼 우리의 삶의 의미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하게끔 했습니다.

이 강의를 맡으신 정준영 선생님께서는 일리아스의 철학적 의미에 대해서 먼저 설명을 하셨습니다. 일리아스는 전쟁 장면 묘사에 초점을 둔 '죽음의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의 200가지가 넘는 죽음의 장면을 묘사하고 그 전후 배경인 아킬레스의 출생과 죽음은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죽음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고민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정준영 선생님은 인생의 의미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달려있다고 합니다. 일리아스에서는 고대 그리스인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일단 일반적으로 인간의 삶의 의미를 외부 또는 내부에서 보는지에 따라 초월주의와 내재주의로 나뉩니다. 초월주의는 우리의 삶을 초월한 신, 사후세계에서 그 의미를 찾는 것인 반면, 내재주의는 우리의 삶 안에서 그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인의 인생관은 행복(객관적인 좋은 상태)입니다. 그들은 무엇이 좋은지, 행복의 실현을 어떻게 할지 고민했습니다. 여기서 잠시 한국인의 '행복'의 기준은 무엇인지 깊이 성찰해보아야 합니다. 흔히 '잘산다'고 했을 때 그 기준은 돈이 많다는 것입니다. 과연 돈이 좋음의 실현이 될지, 즉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있을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고대 그리스인은 불사의 기준에 따라 인간과 신을 구별했습니다. 그만큼 고대 그리스사람들이 죽음에 예민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어에는 moira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몫, 운명, 죽음의 뜻을 가진 이 단어를 통해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고대 그리스사람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죽음은 운명이다, 그렇다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운명론을 믿었던 걸까요?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적극적인' 운명론을 믿었습니다. 운명론이라는 것은 대체적으로는 자유롭지만 부모님, 죽음과 같은 것은 외부에 의해서 결정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극적인'운명론은 죽음과 같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여 그 것을 뛰어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과보다는 행동방식을 더 중요시 여기는 것입니다. 일리아스에 나오는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와의 결투에서 자신이 질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도망치지 않고 결투에 나갑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아킬레우스와 싸우고 영광스럽게 죽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리아스에서는 승자인 아킬레우스에 대해 서술하지 않고 헥토르의 장례에 대해서 기술합니다. 여기서 헥토르의 결과는 패배이지만 그의 행동방식은 훌륭했고 당시 사람들도 그 점을 더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 적극적인 운명론은 인간은 죽음이라는 운명에 영향을 받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믿으며 행동방식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는 삶의 조건을 받아들이고 인간의 능동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운명론과 공통점을 이룹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삶의 조건, 즉 운명에 자신의 영혼이(행동방식)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입장입니다. 다시 말해 나의 몸보다 나의 영혼이 더 중요하다는 것으로 몸의 죽음은 영혼의 깨끗함(신념)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강의에 임했지만 결코 만만한 강의가 아니라는 것을 들으면서 점점 알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수업이 끝난 후에 선생님께 따로 질문을 드릴만큼 적극적인 운명론과 소크라테스와 구별하는데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줄기 빛과 같았던 이 강의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깊게 고민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특히 일리아스의 영웅들의 인생관과 소크라테스의 인생관은 저에게 큰 자극이 되었고 한국인의 인생관과 더불어 제 인생관에 대해서 성찰하게끔 했습니다. 바쁘다고 무시했던 제 삶의 진정으로 필요한 목표를 이 강의를 통해서 실마리를 잡은 것 같아 기쁩니다.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다보면 제 삶의 목표도 찾으리라 믿습니다. 물론 그 목표 또한 가치관에 따라 변하겠지만요. 이 강의를 통해서 얻는 점도 많았지만 철학적인 주제라서 그런지 오히려 듣는 내내 재밌고 흥미로웠습니다. 이 강의를 기획하고 후원해주신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과 KT&G상상마당 분들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저희가 질문을 많이 안 해서 강의의 질이 안 좋았다고 자체 평가를 내리신 정준영 선생님께 그렇지 않고 강의가 매우 유익했고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다음번 강의가 기대됩니다.

이병록


올해 17세. 이제 2개월 후면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또 3년 후면 성인이 되어 대학교에 입학을 할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지금을 '준비하는 시기'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그 말처럼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또 어떤 목표를 세워야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나 고민은 하지만 매번 해답을 찾지 못해서 항상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프레시안에서 '18세를 위한 철학캠프'에 대한 광고를 보게 되었고 나의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 캠프에 참여하게 되었다.

첫 번째 강의에서는 책 '일리아스'와 고대 그리스 시대에 대해 소개하며 '인생의 의미를 어디다 둘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책 '일리아스'는 고대의 트로이 전쟁을 묘사한 이야기이다. 강의에서는 그 이야기 속의 영웅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야기 속의 영웅들은 각각 자신들의 운명이 정해져있는 운명론적인 삶을 산다. 그러나 그들은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들의 삶을 개척하기위해 노력하는 능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결과는 정해져있지만 그들은 삶의 결과 보다 삶의 과정에 의미를 두었다. 강의에서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설명하며 삶의 과정이야 말로 인생을 평가하게 될 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삶의 과정이 어떠해야 하는지 구체적이게 말해주지는 못해 아쉬웠다.

나는 책 '일리아스'를 읽으면서 '인간이 사는 사회는 결국 소수의 엘리트들에 의해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인가'하는 생각을 했다. 이야기는 영웅들을 중심으로 흘러갔고 그 밖에 대해서는 별로 묘사하지 않는다. 또 신들 중 최고인 제우스의 뜻을 아무도 거스를 수가 없다. 이야기를 주도하는 인물들은 모두 힘을 가진 인물, 재능을 가진 인물이다. 그래서 한국의 사회적 경쟁을 비판적으로 보는 이번 강의와는 달리 '그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마지막으로 강의에 참여했던 학생들과 서로 대화하며 생각을 나눌 시간이 없었다는 점이 아쉬웠다. 사실 나는 내 또래 학생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며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여러 학생들과 소통해보면서 배우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의시간이 부족했던 탓에 서로 생각을 나눌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다음 강의 때는 그런 시간을 꼭 가졌으면 좋겠다.

정다은


2011년 12월 27일 KT&G 상상마당 아카데미에서 '18세를 위한 철학 교실'이 시작되었다. 약 70~80명의 중고등학생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인 자리였다. 이번 강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이자 정암학당 연구원이신 정준영 강사님께서 강의를 해주셨다. 강의의 내용은 이러하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노력한다. 그와 비례해서 많은 책들과 강좌들이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자신의 인생인데, 자신이 그 의미를 모른다는 사실이 어떻게 보면 이해가 안 되지만, 한 편으로는 누군가 나에게 "너의 인생의 의미는 뭐니?"라고 물어보면 대답하기 힘들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누군가가 알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알아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도움은 받을 수 있다. 이번 강좌가 그 '도움'의 일환이다. 이 강좌의 목적은 서양 문명의 대표적 고전인 일리아스에서 영웅들이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을 알려줌으로써, 인생의 의미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방법들 중 하나를 알려주는 것이다.

먼저 이 강좌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인 일리아스 영웅들의 인생관에 대해 알아보자. 영웅들을 포함한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운명'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그리스 신화에도 잘 드러나는데, '신들의 계보'(헤시오도스 지음)에 따르면 "밤이 운명의 여신들과 무자비하게 응징하는 죽음의 여신들을 낳으니," 운명의 여신들은 세 자매로, 한 명이 실을 자으면 다른 한 명은 이를 감고, 나머지 한 명은 명(命)이 다하면 이를 끊음으로써 수명을 조절하였다. 이처럼 인간의 운명은 신이 정해준 것으로, 인간이 어찌할 도리가 없다. 운명을 피하려고 노력해봤자 헛수고이다(대표적인 예가 오이디푸스다).

그렇다면 정해진 운명 속에서 인간은 수동적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죽음(moira)을 자신의 몫(moira)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자신들을 '필멸의 존재'로 칭한다. 어찌 보면 이 관점은 위험할 수도 있다. 인생을 덧없는 것으로 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기력함에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리아스의 영웅들은 그러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위험을 '선택'해서 맞서 싸우기 때문이다. 비록 싸우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라 할지라도, 여기에서 도망치고자 할 수도 있다. 헥토르조차도 아킬레우스가 자신을 향해 달려올 때 트로이의 성벽 뒤에 숨을 것인지, 아니면 맞서 싸울 것인지 고민한다. 그렇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아킬레우스와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다. 영웅들은 왜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일까? 그들이라고 해서 편히 살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 헥토르의 경우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이 있었다. 가족을 누구보다 사랑했고, 그런 만큼 오래도록 가족과 행복하게 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헥토르는 전쟁터로 뛰어들었다. 그것이 명예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한다. 과거의 사람이든, 현재의 사람이든, 미래의 사람이든, 그 점은 변함없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행복이 자신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운명의 도움이 있어야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전부알지는 못한다. 다만 신탁을 통해 짐작할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운명이 그렇게 정해져 있지 않다면, 영영 행복하게 살 수 없는 것일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에 대한 답을 찾아낸 것이다. 그들은 행동하는 방식에서 행복을 찾았다. 자신의 삶의 결과를 선택 할 수 없다면, 그 과정이라도 '잘' 살고자 한 것이다. 그 '잘' 사는 방법의 일환으로 '명예롭게 사는 것'이 등장했다. 위의 헥토르의 예로 돌아가 보자. 헥토르의 머릿속에서는 이런 생각이 전개되지 않았을까?

싸움터에서 도망치는 것은 명예롭지 못하다.
명예롭지 못한 것은 잘 사는 것, 즉 행복한 삶이 아니다.
싸움터에서 도망치는 것은 행복한 삶이 아니다.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상황(운명) 속에서도 신념과 명예 추구하며 적극적으로 행동했다는 점에서 영웅들은 찬사를 받을만하다. 또한 '신념'은 공동체적인 것이기 때문에 단순이 개인의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윤리, 나아가 도덕적인 삶을 추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적극적 운명론에 반대한다. 먼저, 운명의 범위가 매우 애매하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리스 신화에서는 세 명의 운명의 여신들이 실을 잣고 그 운명을 정한다. 만약, '적극적으로 위험에 맞서 싸우는 것'조차 운명이라면?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운명을 피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운명대로 살았다. 오이디푸스가 한 '노력'조차도 운명으로 정해져 있었던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인생을 정말로 허무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런 시각에서 봤을 때 영웅들도 어쩌면 싸우는 것이 자신들의 운명이라고 체념하고 받아들인 것이 아닐까? 그것을 허울 좋은 '명예'로 포장해버린 것이 아닐까? 사르페돈의 연설을 보자. "만일 우리가 이 싸움을 피함으로써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을 운명이라면, 나 자신도 선두대열에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또 남자의 영광을 높여주는 싸움터로 그대를 내보내지도 않을 것이오. 하나 인간으로서는 면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무수한 죽음의 운명이 여전히 우리를 위협하고 있으니 우리가 적에게 명성을 주든 아니면 적이 우리에게 명성을 주든 자, 나갑시다!" 이 말인즉슨, "지금 이 상황에서 불명예스럽게 도망치든, 명예롭게 싸우든 언젠가 죽는 것은 똑같다. 그러니 지금 명예롭게 행동하라."이다. 물론 이 연설은 필멸이 인간이 '잘' 살고자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영웅들을 비롯한 전사들에게 '잘 사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명예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보면 "어차피 우리는 죽을 운명인데, 차라리 명예롭게라도 죽자."가 되버린다. 사르페돈의 연설의 의미가 후자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또한 나는 일리아스 영웅들이 '명예'만을 너무 중시하다가 오히려 더 큰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런 내 생각을 잘 대표해 주는 시가 있다.

"트로키아의 어떤 자가, 내가 어쩔 수 없어서, 울창한 숲에 버리고 온,
흠 하나 나지 않는 내 방패를 집어 들고 자랑스레 떠벌리고 있구나.
내 생명을 보존했는데, 왜 내가 그깟 방패를 걱정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 방패는 이제 사라졌지만, 이제 똑같이 훌륭한 다른 방패를 사면 되는 것을."
<아르킬로코스 단편집 6번>

아르킬로코스는 트로키아의 어떤 자와 맞서 싸우다가 불리해지자 무거운 방패를 버리고 재빠르게 도망친 것이다. 그 당시 방패는 전사의 명예였기 때문에, 아르킬로코스는 불명예스러운 처지에 놓인 것이다. 하지만 아르킬로코스는 지금 살아있지 않은가? 복수의 기회는 얼마든지 많다. 다시 헥토르의 경우로 돌아가 보자. 전사의 명예? 중요한 가치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언제' 죽느냐도 중요하지 않을까? 만약 헥토르가 그 순간에 트로이의 성벽 안으로 도망쳤다면 어땠을까? 물론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불명예스럽다는 비난을 들을지도 모른다. 성 안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지친 군사들에게 휴식을 주어 회복한다면, 트로이는 이길 수도 있지 않았을까? 전투에서 도망치는 것이 불명예라고 해서, 누가 봐도 질 것이 뻔한 상황에서 맞서 싸우기보다는 그 상황에서 도망치고 나서 반격해서 이기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물론 내가 강의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이런 내 생각도 '결과 중심적인 생각'으로 비난받을 수 있고, 고대 그리스인들이 행위 방식에서 의미를 찾고, 진정한 의미에서 '잘' 사는 것에 대해 고민했다는 점을 보면 내 주장은 틀린 것이 될 수도 있다. 결과에만 중점을 두지 않고, 그 과정에서 제대로 '잘'사는 것에 대해 고민한 것은 정말 배울만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주장은 나에게 여전히 의문점이다. 특히 "운명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는 말이다. 이번 강의 때는 못 여쭤 봤지만, 정준영 강사님께 이메일로라도 꼭 같이 얘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이날 강의에 대한 전체적인 평으로는, 정준영 강사님이 정말 열심히 강의를 해 주신 것에 대해 먼저 감사를 드리고 싶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이날 나누어주신 프린트물을 강의 전에 이메일로 먼저 받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강의 내용 자체도 좀 난해한데다가, 짧은 시간 내에 강의를 하시다보니, 강의의 흐름을 따라가기가 좀 힘들었다. 강의 후 프린트물을 쭉 읽어본 뒤에야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그래도 일리아스를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어서 좋은 경험이었다. 다음 강의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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