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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웅진백제-부여백제 고미술 기행> 떠나요"

[알림] 8월의 국토학교, 답사 키워드는 <서해 해양문화유산 새롭게 살피기>

국토학교(교장 박태순, 소설가)가 여름의 한복판에서 제26강을 준비합니다. 이번 주제는
<웅진백제-부여백제 고미술 기행>, 답사 키워드는 <서해 해양문화유산 새롭게 살피기>입니다. 8월 13(토)∼14(일)일 1박2일로, 공주의 송산리 고분군과 무령왕릉 특별전을 돌아보고, 계룡산 갑사→성흥산성 미륵불→익산 왕궁리 유적→서천 마량포(1박)→서산 간월암과 부석사→태안 마애삼존불→서산 마애삼존불→예산 4면석불을 답사하는 코스입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답사지 배경 설명을 듣습니다.

백제문화유산 탐구는 경이롭고 신비한 여운을 늘 지닌다. '미완의 완성'이라 할 탐미의 고아(古雅)가 백제 고미술과 건축물들에 서려 있는 때문이기도 하고, 세련되었으면서도 광활하게 교류 전파되었던 백제의 정신문화영토 탐구가 미진한 쪽인데다가 애조(哀調)의 정조를 간직해놓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의 한국은 신(新)해양시대를 내세운다. 실제로도 3면의 해양은 <들끓는 바다>의 토건-중공업-해운 진흥 양상을 나타내고 있음에도 우리가 '열린 바다'의 해양문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쇄국의 바다'에 갇혀 있는 듯한 분위기인 것은 무엇 때문일까. 삼한시대 이래 '위대한 항해'의 문화전통이 있어왔으나 이러한 해양문화 마인드가 오늘에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는 까닭이 있을 터.



AD 5세기의 동북아시아는 대륙성국가 체제인 고구려의 광개토 정책, 곧 영토 넓히기 약진에 따라 풍운에 휩싸인다. 특히 백제는 고구려의 압박을 받으며 북방대륙루트를 차단당한 채 서해 및 서남해 진출의 해양성국가 체제로 전환된다. 한성백제(BC 18∼475)-웅진백제(475∼538)-부여백제(538∼660)의 전개를 1면의 육지성과 3면의 해양성을 지니는 '동아시아 페닌슐라'의 개방형 지정학으로서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한강 중심의 <한성백제>를 지탱할 수 없게 된 것은 굴욕적인 상황이었지만, 금강 중상류(웅진)의 1차 천도와 중하류(부여)의 2차 천도를 통해 백제는 해상왕국의 면모를 더욱 뚜렷하게 갖추어가고 있었다.



중국은 5호16국의 혼란기를 거쳐 북쪽의 '위'나라와 남쪽의 동진(후일 '양'나라)이 대치하는 남북조시대를 펼쳐놓는데 백제는 특히 양나라와 우의를 돈독히 하였고 백제 이주민과 유민들의 동중국해 왕래와 교역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울러 백제는 금강 일대만 아니라 섬진강과 영산강 및 탐라(제주도) 방면으로 영역을 넓히어 해상 진출 루트를 다변화하면서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 소국들과 연맹하고 일본열도를 자기 집 안마당처럼 드나들었다. 동아시아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한반도를 중심축으로 삼아 파란만장한 대하 서사의 <세계사>를 펼쳐 보이고 있었다.



'해양왕국 백제'의 새로운 전개양상을 오늘의 충청남도 일대의 문화역사지리를 통해 요약해본다. 우선 475년에 고구려군의 침공으로 한수 위례성이 함락되어 임금(개로왕)이 피살되고 왕족과 왕민들이 잡혀가는 와중에서 황황히 도망을 해야 했던 <피난 백제>의 남행 루트는 어떻게 되는가. 조선시대 9대로 중에서 제6로(삼남대로 : 서울-천안-공주-논산)와 8로(서울-온양-보령)의 이동행로를 따라 우선 천안과 온양, 예산, 서산 일대에 방어진을 구축했을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곳이 바로 차령고개이다. 이 고개는 북방 요새의 역할을 하면서 금북정맥의 산줄기를 이루어 금강의 물줄기를 감싸고 있으니 새로운 왕도 건설지로서 웅진(공주)의 지정학이 돋보였을 것이다. 이로부터 위례성 남하의 왕족과 구귀족, 그리고 천안 온양 공주 부여 등지의 토착세력 사이의 권력재편성 과정이 전개되면서 백제 왕토의 새로운 질서 체제가 정비되어 간다.



백제 구귀족 해(解)씨의 쿠데타와 문주왕의 피살, 진(眞)씨 가문의 전횡과 왜국에서 귀환한 모대(牟大, 동성왕)의 즉위, 이로부터 웅진 일대 토착세력의 성장과 금강 일원의 백제왕권 기반 확보 그리고 무령왕-성왕의 부국강병 실현과 부여(사비성) 천도…, 이러한 역사 전개 과정은 한강의 백제에서 금강의 백제로 전환돼가는 국토 대하 서사를 갈무리해 놓고 있다. 여기에 동성왕의 왜국 귀환 즉위와 왜국에서 태어났다는 사마(무령왕) 출생에 관한 미스터리는 선진문물의 해상왕국 백제인들이 실제적으로 일본 열도의 주도세력이 되어갔음을 추론케 하는 무한가능성의 역사 상상력 자원이 되기도 한다.



고구려에서는 <다물>이라 하였고 백제에서는 <담로>라 하였다. 웅진시대의 백제는 왕경에 <고마>를 두고 전역의 지방행정 조직으로 22군데 담로를 두었다 하였다. 최근 학계 일부에서는 백제의 이러한 <담로>가 대단히 광활하게 포진되고 있었다고 살핀다. '탐라' '대마도' 더 나가서는 '대만'이라는 명칭이 <담로>에서 유래되거나 관련이 있으리라 살피는 견해까지도 나타난다. 백제 해양문화 역사연구가 국토인문학을 통해서도 본격화되어야 할 것이다.



제26강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8월 13일(토)>

07:00 출발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지하철 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유진여행 <국토학교> 버스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09:30-10:40 웅진백제 송산리 고분군, 무령왕릉 특별전 탐방

무령왕릉은 1971년 7월 7일에 발굴되었는데 신비에 가득한 고대 타임캡슐의 개방이었다. 백제 당대 문화사를 새롭게 이해하게 하는 획기적인 계기를 열게 했다. 올해는 발굴 40주년이 되는데 무령왕릉 유적 유물 조사를 아우르는 학제(學際)의 발굴 성과와 연구 성과에 대한 진지한 종합평가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무령왕릉을 포함하여 7기의 능묘가 있는 송산리 고분군과 공주박물관은 근거리에 놓여 있는데, 박물관은 '무령왕릉실'을 별도로 마련하여 특별전시를 하고 있다. 관련 자료를 충분히 챙기어 현지를 찾아 나서고 발굴 유물을 살펴야 할 까닭이 충분히 있다.

▲국립공주박물관의 무령왕릉실ⓒ국립공주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 바로가기 : http://gongju.museum.go.kr/home.do

<주변의 기볼만한 곳 : 곰나루 국민관광단지>

'비단 강'이라는 뜻이 되는 금강(錦江)은 후대에 붙여놓은 명칭이고, 백제시대에는 곰강(고마강)이었다. <공산성>이라는 산성은 조선시대에 조영한 군사기지의 명칭이고 백제시대의 왕성은 <웅진성(또는 고마성)>이라 하였다. 동북아대륙 곰 토템 정통성을 지녀온 고조선-부여의 대통을 고구려 아닌 백제가 계승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한 지명들이었다. 공주시는 웅진동 금강변에서 옛 백제의 명칭을 회복시켜 <고마나루 축제>를 매년 여름 개최하기도 한다. 곰과 인간의 애틋한 사랑의 전설이 이 나루에 전해져 오거니와 비록 국민광광단지로 조성되기는 하였음에도 문화역사경관이 제대로 보존되고 있지 못한 것은 아쉽기만 하다.

11:30-11:50 점심 (갑사 들머리 <수정식당>의 산채비빔밥)

11:50-13:30 계룡산 갑사 탐방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계룡산과 금강은 백제왕토의 랜드마크를 이룬다. 계룡산 산행은 공주 쪽의 갑사와 대전 쪽의 동학사, 논산 쪽의 신원사를 대표적으로 꼽지만 암용추-숫용추의 산태극-수태극 명당이라 하는 <신도안> 일대는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공주 갑사는 계룡산의 남성성- 여성성 산악미를 입체적으로 압축시켜 갈무리해놓고 있는데, 사색과 명상의 심호흡 공간을 이루어 놓고도 있다.

계룡산은 웅진성과 사비성의 두 백제 왕성을 상하로 건사할 뿐 아니라 조선 창업의 이성계에 의해서는 유력한 왕경 후보지가 되어 <신도내-新都內>라는 궁궐터까지 조성되었던 바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묘향산을 북악, 지리산을 남악, 계룡산을 중악이라 하여 사당을 세웠는데 중악 사당만 신원사에 현존하고 있다. 이 산의 풍수지리를 새로운 안목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14:40-15:40 성흥산성 미륵불 탐방 (부여군 임천면, 장암면)

왕도를 웅진에서 부여로 천도하고자 준비하던 501년 무렵 금강-서해로 나가는 수로와 육로의 요충지에 축성한 '가림성'이 곧 부여 성흥산성이다. 이 산성의 대조사(大鳥寺)에 세워진 미륵보살입상은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은진미륵)과 함께 대표적인 고대 미륵신앙 유적이다.

가림성은 동성왕 암살 및 무령왕 집권과 관련된 비사(秘史)를 간직하기도 하였지만, 백제가 어찌하여 웅진에서 부여로 천도할 필요를 갖게 되었는가 하는 데 대한 역사추리를 제공한다. 금강 수운을 통하여 웅진에서 서해로 나가는 데에는 애로가 있어 왕도의 바닷길 틔우기로서 부여 천도가 요청되었던 것.

성흥산성은 새로운 왕도를 수호하면서 금강 수로를 지켜주는 전망대의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요충지의 환경을 오늘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여-논산-강경-군산으로 이어졌던 금강 수운과 서해 해운이 현재 완전히 막혀버린 만치 백제의 해양문화 유적이 더욱 소중한 까닭이 되고 아울러 미래의 금강 환경이 어떠해야 하겠는지 이 산성이 예시해주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김억 화백의 작품인 <대조사 미륵보살입상>. 성흥산성 아래에 있다.

6:40-17:40 익산 왕궁리 유적 답사 (왕궁면 왕궁리)

민요 '서동요'의 서동(백제 무왕)과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는 익산 금마면의 미륵사 터에서 미륵메시아니즘의 소망을 아로새겨 놓고 있지만, 옛 사원의 터전은 지금 어수선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찾지 아니한다. 익산 금마면과 왕궁면 일대는 옛 마한의 도읍지였다고 전해오는 역사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왕궁리 일대에는 제3단계의 백제 왕경 천도 유적들이 전해오고 있어 특히 주목을 받고 있다.

왕궁리 유적지는 1989년부터 20년 동안 발굴 조사한 결과 백제 무왕 시대에 왕궁으로 건립되어 경영되다가 후대에 왕궁의 중요 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사찰이 건립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왕궁의 외곽 담장과 함께 왕이 정사를 돌보던 정전을 비롯한 14개의 건물지와 정원유적, 그리고 금 유리 동을 생산하던 공방지 등이 조사되었는데 2008년에 <왕궁리유적전시관>이 세워져 왕궁의 축조 과정과 왕궁에서의 생활 내용도 파악해볼 수 있다.

<왕궁리유적전시관> 바로가기 : http://wg.iksan.go.kr/home/

익산 왕궁리 천도에 관한 역사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없지만, 적어도 별도(別都)의 왕궁 건립이 있었으며 어쩌면 천도를 했으리라는 것은 백제사를 새롭게 살펴보아야 할 역사적 사실이 된다. 백제는 어찌하여 웅진의 금강, 부여의 금강에서 다시 익산의 금강으로 나가려 했던 것인가? 이에 관한 종합적인 금강 문화역사지리 이해와 인식이 필요하게 되었다. 금강은 백제의 시대에서 오늘의 시대로 어떻게 흘러오고 있는지 물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알아보기 : 역사의 물줄기 금강에 대하여>

더블유(W) 수로의 금강…. 금강은 대청댐을 기준으로 할 적에 그 상류 쪽과 하류 쪽이 완연히 구분된다. 대전과 청주의 두 도시 첫 글자를 따서 합성시킨 '대청'의 댐과 호수는 실제로는 크게 맑은 쪽은 못되지만, 특히 댐 하류 쪽의 문화지리가 각별하다. 곡류의 굽이굽이마다 역사의 사연을 담아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금강 흐름이 '더블유(W)'라는 글자의 형상을 보인다고 하였을 적에 그 오른쪽 꼭짓점이 대청댐이다. 그 아래쪽의 밑바닥 꼭짓점이 연기군 금남면 대평리가 된다. 바로 이 경사면이 <행정복합도시> 건설지역이다. 금강은 대평리에서 급커브를 틀어 북류하는데 그 꼭짓점이 곰나루(고마나루)이다. 이 경사면이 바로 <웅진백제>의 왕경지역이 되었다. 곰나루에서 금강은 다시 급커브를 틀어 남류하는데 그 꼭짓점이 부여군 부소산성 아래의 구드레나루이다. 이 경사면 하단이 <부여백제>의 왕경지역이다. 금강은 다시 곡류하여 익산 방향으로 내려가는데 백제 무왕이 익산 천도를 단행코자 했던 왕궁면 일대는 드넓은 호남평야의 입구가 되면서 양양한 서해바다 해운의 출구가 된다.

후일 신라 문무왕은 고구려 병사들을 이끌고 투항한 안승을 금마면에 정착시키기도 하는데 백제유민과 고구려유민을 함께 다독거리고자 함이었다. 백제의 못 다 이룬 꿈이 서려 있는 익산 땅에서 과연 백제 무왕의 꿈은 어떠하였던 것인지 되새겨본다. 오늘의 토건사업 위주의 금강에서 문화역사 흐름의 금강을 어찌 구출할 수 있을지 모두들 궁리해보아야 할 때다.

19:00-20:00 저녁식사 겸 뒤풀이 (서천 마량포 <칠구지횟집>의 해물요리)

21:00 숙박 (마량포 해오름관광농원)

<바쁜 도시생활 속에 잃어버린 고향의 정취>가 있다고 한다. 마량포 해수욕장의 해변을 둘러싸고 주변의 관광 위락 시설이라든가 산책코스, 야영장 등도 정비되어 있다.

8월 14일(일)

05:30-06:30 마량포 해돋이 산책 (서천군 서면 마량리)

마량포는 서천의 돌출반도 끝머리에 매달린 갯마을이어서 바다의 동쪽과 서쪽을 함께 살필 수 있다. 아침의 해돋이와 저녁의 해넘이를 한 곳에서 조망할 수 있는데 주변에는 동백 숲으로 둘러싸인 동백정과 해양박물관, 춘장대 해수욕장 등이 명소를 이루고 있고 금강 삼각주 하구와 서해 비인만의 조망이 광활하기도 하다.

▲마량포 해돋이ⓒ서천군

<알아보기 : 백강전투와 기벌포에 대하여>

<기벌포(伎伐浦)>라는 지명이 역사서에 나오는데, 대체로 오늘의 서천군 장항 앞바다 일대일 것으로 추정하는데 물론 마량포 일대일 수도 있고, 그러가하면 군산 앞바다라고 비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 옛 지명을 구태여 풀어보면 '기술 재간으로 토벌을 성취했던 포구'가 되겠거니와 백제 말기의 성충은 바다 쪽으로 외적이 침범한다면 기벌포를 넘지 말도록 해야 한다는 충언을 남겼다. 660년의 사비성 함락으로 백제는 멸망한 것으로 기록되지만 백제부흥운동과 전쟁은 금강 하구와 군산-장항 앞바다에서도 계속된다.

663년 여름에 왜군 함선 4백여 척과 4만2천여 병력이 왜국으로부터 파견 출동되어 백제부흥군 5천여명과 연합군을 형성한다. 8월 27일과 28일에 걸쳐 '세계대전'을 벌이는 바 상대는 나당연합군이었다(당군 7천여명, 신라군 5천여명). 이를 <백강전투>라 하는데 백강은 오늘의 금강 하구 삼각주 일대를 가리킨다. 나당연합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왜군은 참패당하는데 현지 정세의 판단 미숙과 조수 간만 차이의 착오 때문이었다. 이 전투는 일본역사서에 크게 기록되지만 한국역사서는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않아 왔다.

백강전투에 이어 13년 후에는 기벌포전투가 전개되는데 676년 11월 당나라의 설인귀가 이끄는 병선이 기벌포를 침범하자 신라 함선이 이를 맞아 22번에 걸친 싸움 끝에 침략군 4천여 명을 섬멸하여 퇴치시켰다. 기벌포는 670~676년의 7년간에 걸친 신라의 대당(對唐) 전쟁의 최종 승전장이었다고 기록되지만 그러함에도 그 장소성을 고증 추정해볼 방도가 없게 되었으려니와 앞으로는 더욱 그러하리라.

▲ 마량포 일대

07:00-07:40 아침 식사 (<칠구지횟집>의 된장찌개백반)

09:00-10:40 간월암 및 부석사 답사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

천수만 일대는 거대 토건 제방사업으로 간월호와 부남호의 두 인공호수가 생겨나고 광활한 간척지가 조성되었는데 어리굴젓의 명산지 간월도와 간월암 일대의 풍광도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 암자에서 천수만에 비낀 달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무학대사와 근대의 고승 송만공의 암자 중수 일화가 있는데 간월도는 더 이상 섬 구실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부석사는 경북 영주만 아니라 충남 서산에도 있는데 의상의 중국 유학 및 귀국과 관련되는 유적지로서는 되레 서산의 문화역사지리 환경이 주목된다. 영주와는 달리 서산 부석사의 부석(뜬돌) 수호여신은 절 아래 바다에 떠 있는 <여>에 있다 하는데 서산 부석사는 천수만-서해 해양경관의 전망대가 되고 있다. (서산 부석사, 태안 마애불, 서산 마애불의 위치에는 공통성이 있다. 서해 방비 내지 영접의 전망대로서 탁월한 환경을 이룬다.)

11:40-12:20 태안마애삼존불 (태안군 태안읍 동문리)

미술사학자 중에는 태안마애불과 무령왕을 관련짓고 서산마애불은 성왕의 초상일 것이라 추정하는 견해를 내놓기도 하는데, <서해 바다 실크로드>의 루트가 백제 무령왕과 성왕 시대에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었는지 흥미로운 테마가 된다. 백제의 서해 해양문화 진출의 여러 코스를 탐색해볼 필요가 있다. 예산-서산-태안-당진 방면의 여러 유적과 공주-부여-익산-군산 방면의 자취들이다.

<서해 탐구>는 오늘의 지정학 사정에만 머물 수는 없다. 되레 분단한국인들의 '서해쇄국주의-분쟁주의'가 미련하기 그지없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것도 제대로 진맥해볼 까닭이 있다.

12:50-13:30 점심식사 (서산시 <산해별미>의 꽃게장&우럭젓국정식)

14:20-15:00 서산마애삼존불 탐방 (서산시 운산면)

2009년 8월의 국토학교 제5강 ('내포 지방에 부는 바람') 때에도 순방했던 바 있지만 이 삼존불이 보여주는 <백제의 미소>는 찾고 또 찾아뵈어 '인터뷰'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국보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 그리고 일본의 국보 1호인 목제반가사유상의 서로 다른 듯 하면서도 탁월하게 유사한 '미소'와 함께 백제의 순결한 향기를 서산마애불이 품어내고 있으려니….

▲ '백제의 미소' 서산마애삼존불ⓒ국토학교

<주변의 가볼만한 곳 : 보원사지>

폐허 그 자체가 소중한 문화역사공간으로 보존될 필요가 있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서산 가야산 자락의 보원사 터가 그러하다. 남아 있는 것은 당간지주, 5층석탑, 탑비 등일 뿐이지만 사적 316호로 지정된 이 절터는 들머리 쪽의 마애삼존불과 함께 어울려 백제 불교문화의 망향동산으로 찾아가 볼만한 곳이 된다.

15:30-16:00 예산 4면석불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

역사의 온갖 신산고초를 겪어온 석불이다. 동서남북의 얼굴이 서로 다른 4면석불이지만 상처투성이가 된 채로 오늘에 이르도록 <백제인들의 문화역사 표정>을 보여주고 있다. 내포지방 일대의 백제 불교유산 중에서 가장 먼저 이루어진 조형물이므로 이의 미학 탐구를 세밀히 준비해볼 필요가 있다.

16:00 서울 향발


국토학교 8월 참가비는 20만원입니다(교통비와 숙박비, 4회 식사비와 뒤풀이, 입장료, 여행보험료,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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