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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총 자작나무와 개마고원의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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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천마총 자작나무와 개마고원의 회상

[김유경의 '문화산책']<11>

경주시 대릉원의 천마총은 1973년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천마도 발굴을 기념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이 정확히 누구 무덤인지는 안 밝혀졌지만 5-6세기의 왕이었으리라 짐작한다.

말안장 양쪽에 달아 늘어뜨리는 장니에 그려진 천마도는 가로 75㎝, 세로 53㎝, 두께 약 6㎜로, 자작나무 껍질 여러겹을 겹치고 좌우에서 빗금으로 14줄씩 누볐다. 그 위에 광물 채색을 써서 혀를 빼어물고 질주하는 백마를 그렸다.

자작나무 껍질을 누빈 위에 질주하는 흰말을 그린 천마총의 천마도. 미술사의 말그림만이 아니라 자작나무에 대한 논의도 생겨났다. Ⓒ문화재청

발굴당시 땅속의 이 그림판은 썩지도 않았고 빛깔도 선명한 채였다. 김정기 발굴단장은 "천마도를 보고 발에 힘이 다 빠져서 주저앉을 뻔 했다. 1500년 된 나무껍질에 만든 제품이 남아있다는 것은 기적이다."고 했다. 신라 회화를 처음으로 보여주는 이 보물은 즉시 햇빛과 공기를 차단하는 처리를 거쳐 제한된 조건에서 이제까지 1997년과 2009년 두 번만 일반에 공개됐을 뿐이다.

자작나무껍질을 쓴 천마총의 다른 유물은 말에 기수가 올라탄 그림, 봉황 등 서조를 그린 것이 나왔고 왕의 모자가 있었다. 세모꼴 자작나무껍질 모자는 황남대총 남분, 금관총, 식리총 등 경주의 여러 고분과 몽고, 러시아에서도 출토되었으며 왕의 머리맡 유물상자에 남아있는 자작나무껍질 부스러기가 최근의 황남대총 전시회장에서 보였다.

그런데 2011년 5-6월에 걸쳐 경복궁 민속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모자와 신발특별전'에는 중국 원나라때 천자의 후비와 대신의 부인들이 쓰는 화라고고관(花羅姑姑冠)이란 모자가 나와있는데 '자작나무나 대나무로 틀을 만들고 비단으로 겉을 쌌다'고 했다. 몽고풍이 물씬한 이 모자 또한 자작나무 껍질이 관계된 것으로 보인다.

윗 사진의 천마도는 발굴 직후의 사진인 듯 바닥의 흙과 아랫부분이 약간 우그러든 자작나무 형태까지 모두 보인다. 말그림의 미술사적 가치를 넘어 1500년 된 자작나무에 대한 상념을 일으켜 주는 기록인 것이다. 추운 데서 자라는 대표적인 나무이자 시베리아 몽고일대에서 우주목으로 성스럽게 받들어지는 자작나무가 경주처럼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왕의 무덤 속 유물로 나왔다는 것은 묘한 향수를 일으키게 했다.

경주 대릉원의 천마총. 경주에서 유일하게 내부가 공개된 무덤이다. Ⓒ이순희

천마총 안은 발굴당시의 공간처럼 트여있고 자작나무 껍질위의 그림 기마인물상과 서조도의 여러 조각들 복제품이 둥글게 맞춰져 전시돼 있다. Ⓒ이순희

국문학자 주종연 국민대 명예교수는 자작나무에 관한 가장 원초적인 기억을 지닌 사람일 것이다. 개마고원에 속하는 함경북도 무산 태생에 웅기에서 13살까지 살았던 주교수는 1937-1950년에 이르는 개마고원 자작나무에 대한 기억을 수필집 '하나의 영혼을 위하여'에 썼다.

'개마고원의 사람들에게는 시신을 자작나무 껍질로 싸서 땅 속에 파묻는 풍속이 있다. 내가 아직 철이 채 들기도 전 조부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입관하기 전에 넓은 두루마리 같은 번쩍이는 횐 나무껍질로 싸는 것을 둘러선 어른들의 다리 틈새로 지켜보며 고모들이 일제히 터뜨리는 울음소리를 들었었다.

훗날 조금은 철이 들어서 아버지와 함께 조부님의 산소를 찾았을 때 거기 빼곡히 둘러싼 아름드리 자작나무들이 하늘을 찌르듯 늠름히 서 있던 모습들이 오랫동안 나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겨 놓았다. 쭉쭉 뻗어 오른 줄기며 희뿌연 우유빛 표피며 구김 없이 아스라이 펼쳐 나간 가지들이 함께 이룩한 자태는 피보다 더 짙게 내 가슴속 깊이 간직되어 왔다.'

개마고원 자작나무 숲과 장례풍습을 회상하는 주종연 교수. Ⓒ이순희

2011년 4월에 만난 주교수는 개마고원과 자작나무 이야기를 좀 더 풀어냈다.

"개마고원은 함경남도 혜산진 뒤쪽, 장진호 부전호 있는 위쪽 지역, 말도 키우던 곳으로 함경도의 상징적 지명입니다. 순수한 자작나무 숲을 보려면 우리나라에선 개마고원에 가야할 것입니다. 자작나무는 그렇게 둥치가 크진 않으나 높게 뻗어요.

인문학적으로 자작나무는 알타이족이 신성시하던 수목으로 우리 민족이 이동하면서 지니고 내려온 민족적 집단기억의 나무라고 생각합니다. 함경도에서는 장례용품 파는 데서 자작나무 껍질 둘둘 말아놓은 것을 팔았어요. 이 껍질로 시신을 감싸는 풍속이 있었지요. 흔하게는 칠성판(죽은 사람을 뉘는 널)에 깔기도 했습니다. 성스러운 곳에 자작나무 껍질을 썼어요."

몽골에서는 자작나무를 그들 무속의 종교적 성수(聖樹)로 여긴다. 몽고인들이 성지라고 여기는 기도처, 제사지내는 곳 등에는 어김없이 자작나무가 있다. 무당이 매개자가 되어 초월적 세계로 가는 통로인 우주목이 자작나무다.

우리나라에서도 무당의 굿에 자작나무가 등장한다. 자작나무가 흔치 않으니까 그대신 흰 종이를 오려 만든 지화를 무구(巫具)로 사용하는 것을 흔히 본다. 길게 오린 흰종이 다발을 쇠붙이 막대기에 붙인 무구를 신칼이라고 한다. 굿의 여러 과정중 무녀들이 이 신칼을 양손에 들고 춤춘다. 이 춤만 따로 안무해 무용가들이 무대에서 추기도 한다.

임학적으로 자작나무는 한대기후에 가장 강한 나무이고 재질이 단단하며 껍질에는 기름기가 많이 포함돼 잘 썩지 않기 때문에 고대에서는 역사적 기록을 보관하는데 이 나무 껍질을 활용하기도 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의 일부도 자작나무이다.

황남대총 남분출토 왕의 유물중 자작나무껍질 모자(아래단 오른쪽). 금장신구 운모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순희

천마도가 자작나무 껍질위에 그려진 것이나 자작나무 껍질 모자같은 것이 통치권자의 무덤 안에 놓인 데 대한 주교수의 견해는 단호했다.

"난 문화인류학 전공은 아니지만 천마총의 자작나무 유물은 실용적 기록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북방에서 내려온 민족이동으로 남은 유습, 조상과 떠나온 출신지에 대한 외경, 성스러움의 표상으로 택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봅니다."

"천마도가 그려진 자작나무 껍질 그만한 것 당시 신라 땅에서는 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분명 그 껍질은 당시에도 북방에서 구해왔을 겁니다. 무덤 속에 들어가 오래 갈 자료로만 생각해 택했다기보다는 민족의 근원을 말해주는 물건으로서 임금같은 민족적 상징인물과 영원히 동반할 무덤 속 유물로 자작나무를 썼을 겁니다."

천마총, 천마도 이야기는 무지 많이 들었지만 자작나무에 대한 생생한 언급은 주종연 교수를 통해 들은 것이 유일하다. 근대작가 이효석도 한동안 그의 처가가 있는 함경북도 북경성에서 살면서 자작나무를 보았다. 그는 '뽀얀 피부를 한, 헌칠한 여인의 몸매같다.'고 자작나무를 표현했다.

만주 졸본에서 보는 압록강 넘어의 개마고원. 이 너머 중강진이 있다. Ⓒ이순희

우리나라의 자작나무가 시베리아 북방민족의 집단기억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 시베리아 무속에서 전승된 자작나무의 흔적이 한국의 굿에 남아있다는 논거를 1980년대에 전개한 사람은 미국 출신의 동먕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박사였다. 임학자 국민대 전영우교수가 주종연, 코벨의 글에 덧붙였다.

"자작나무는 우리에게 과연 무엇일까? 왜 개마고원의 사람들은 시신을 자작나무껍질로 싸서 땅 속에 파묻었을까? 평소에 가졌던 이런 의문은 존 카터 코벨의 글로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즉, 시베리아 무속에서 샤먼은 상징적으로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에 올라 하늘 높이 있는 신령과 대화하는데, 그 사다리가 바로 자작나무라는 것이다. 시신이 신령의 땅으로 순조롭게 되돌아가도록 자작나무 껍질로 싼 것은 아닐까?" (산림, 1999년 5월호)

그는 코벨 박사의 주장이 "우리 문화의 깊이를 누구보다 폭넓게 이해한 고고학적 창의력" 이라고 평가했다.

주종연 교수의 자작나무 기억은 현대로 와서 더 이어졌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타고 에카테리나부르그-하바롭스크-치타를 거쳐 시베리아 바이칼호수 부근의 이르크츠크, 옴스크 지나 우랄지방에 가는 동안 자작나무를 제대로 보게 되요. 자작나무 뿌리는 소나무 뿌리만큼 단단하지는 못한지 숲에는 쓰러지고 자빠지고 한 나무들도 많이 보입니다.

이르크츠크에서 며칠 묵는 동안 사우나에 갔을 때 보니 물을 끓이는데 불 때는 장작이 자작나무였어요. 껍질이 벗겨지고 일어나고 한 자작나무 장작더미가 쌓여있었습니다. 껍질은 불쏘시개로 쓰고. 시베리아에서 파는 종교용품에는 자작나무로 조각한 것도 많았습니다."

졸본성(오녀산성; 만주 길림성 환인시 부근) 오르는 길의 밝은 회색으로 빛나는 자작나무 숲. Ⓒ이순희

사진가 이순희씨도 2010년 겨울 주몽이 처음 고구려를 도읍한 환인시 부근 졸본의 오녀산성 가는 길목에서 밝게 빛나는 자작나무 숲 여러 군데를 지나쳤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그 은빛 자작나무 숲에서 북한 땅의 중강진이 마주 보였죠. 그곳이 개마고원줄기라고 했는데 처음 보는 광경인데도 웬지 오래된 기억 속의 장소인 듯해 눈물이 나왔습니다."

최근엔 남쪽 땅에도 조경용으로 자작나무를 더러 심지만 아무래도 잘 자라지 못한다. 자작나무를 영상으로 담아낸 최고의 필름은 1998년 러시아 미칼로프 감독의 영화 '시베리아의 사랑(The barber of Siberia)'을 추천할 만하다. 기찻길 옆 자작나무의 새하얀 줄기들이 빽빽한 장면을 배경으로 사관생도들이 떼를 지어 기차를 타는 장면이나 여주인공(줄리아 오몬드 출연)이 자작나무 숲 사이로 옛사랑을 찾아가는 광경 등에 낙엽든 숲속의 자작나무가 멋지게 영상처리 되었다.

미칼로프 감독은 러시아의 감성을 극대치로 나타내려는 용의주도한 연출 아래 자작나무숲을 등장시킨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모스크바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가에서도 자작나무가 많이 보였다.

남쪽 끝 경주의 왕릉에서 나온 자작나무의 흔적은 멀리 개미고원을 거쳐 북방 시베리아의 자작나무 숲으로 이끌어 간다. 북방에서 떠나온 이래 수없이 많은 세대가 이어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보는 풍경에도 끌리는 것은 민족의 집단 기억이 갖는 힘 때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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