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 한복판 대릉원과 노서동의 동산만한 고분 수십개 말고도 경주에는 신라의 왕 55명과 그들의 왕비를 다 합친 것보다 많은 300여기의 고분이 있다. 번잡한 상가 건너편부터 논밭 한가운데, 도로 옆, 산속, 어디에나 있다. 박물관은 발굴된 무덤 속의 보물상자 뚜껑을 열어 보여주며 '잊히지 않는 존재'의 흔적을 보여준다.
2011년 경주박물관 특별전에서 황남대총 남분 출토 금으로 된 왕비의 말갖춤 유물을 보는 관람객들. c 이순희 |
경주에 축적된 시간을 되새겨보는, 한가하지만 소설 같은 흥분을 찾아보려는 시도는 이들 능에 가보는 것이기도 하다. 두터운 흙과 돌더미 아래 금은과 수많은 쇠뭉치 등 보물상자와 함께 누워있는 존재들은 오래 전 신라사의 전면에서 최강의 힘을 과시했을 사람들이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서기전 57-4)부터 시작이다. 작가 이태준은 1942년 한여름 오릉을 "부드러운 모필로 그은 듯한 곡선으로 허공을 향해 솟은, 바라볼수록 그야말로 초현실적인 기이한 풍경이다" 고 단편 <석양>에 썼다. 그와 동행한 여성은 '니힐(허무)'이라고 기분을 표현하고, 가끔씩 찾아보는 이곳이 "무서운 맛이 아주 없음 무슨 맛이게요." 한다.
경주고분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해낸 작가라고 할 만하다. 2011년에 보는 혁거세왕의 비 알영의 우물에 고인 물빛 또한 깊은 시간의 심연이다.
박 석 김씨들의 왕권쟁탈전을 역사는 점잖은 말로 기록해 놓았다. 지금의 오릉은 반월성 전체만큼 넓은 6만평 능역 안에 무덤 다섯 개가 한자리에 모두 모여있다. 혁거세 왕이 죽자 몸을 여러 부분으로 나눠 묻었다는데 얼마나 격렬한 최후였으면 그렇게 말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요즘 치과에서 말랑한 물체를 꽉 물게 해 치열을 떠내는 것처럼 신라초기 왕권후보자들은 떡(아마도 인절미)에다 이 형태를 떠내 자기 나이를 입증하는 과학적 증거로 삼기도 했다.
2세기 일성왕릉은 저수지를 끼고 있다. 해 질 무렵 저녁놀이 이곳에 비친다. c 이순희 |
저수지로 내려가는 숨은 듯 좁은 길을 따라 엄청 긴장하며 능으로 접근했다. 한 청년이 거기 꼼짝않고 앉아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다.
2010년 12월14일부터 2011년 2월6일까지 경주박물관에서 열린 '황남대총의 신라왕, 왕비와 함께 잠들다' 특별전. 1973-1975년에 발굴된 유물 5만9천점중 5만2천점이 전시됐다. c 이순희 |
황남대총 남분출토 왕의 관 머리맡에 들어있던 상자 속의 유물. 은제 갑옷장식, 금동칼, 열십자형 뚜껑장식의 함과 금장신구, 금그릇, 청동그릇 등이 보인다. 왕비의 머리맡에도 이와 비슷하지만 조금 단순한 유물이 든 상자가 놓여있었다. c 이순희 |
황남대총 남분출토 왕의 유물인 금동고리 자루 칼들. 칼은 금동으로 된것부터 작은 칼이 덧붙은 것, 쇠로 된 것, 왕비의 칼 등 셀수 없이 많았다. 백자루는 본 것 같다. c 이순희 |
두텁게 녹이 슨채 쌓여있는 쇳덩이들. 무기, 농기구, 철편 등으로 된 이들 엄청난 물량을 접하면서 국가라는 실체가 실감된다. c 이순희 |
왕과 왕비 모두 비단벌레 날개와 금동으로 장식한 마구를 갖췄다. 호화옵션을 갖춘 말 자동차 같은 것이었겠다. 순장된 사람들도 있었다. 13명이나 된다는 것을 비공식으로 들었다.
칼과 무기, 쇠로 된 가래 같은 농기구 일체는 왕의 유물 칸에서 나왔다. 두껍게 녹슨 채 쌓여있는 쇳덩이들은 '동북아에서 출토된 최대 물량의 철물'이라고 한다. 나라의 힘은 바로 이들 쇠와 말에서 나왔다. 지금의 미사일 무기 같은 비중이었을 것이다.
여성의 역할은 도대체 어디까지였을까? 왕비의 관은 금관이고 왕의 관은 금동관을 넣었다. 말을 타고 칼을 지닌 신라 왕릉의 여성 유물을 보면 역사책에서 보는 순종적 여인상과는 많이 다른 느낌을 받는다. 설빔인 듯 고운 치마 저고리의 소녀 둘이 왕비의 찬란한 금 마구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섬 씩은 들어감직한 거대한 토기 항아리. 무거운 흙과 돌더미로 덮인 무덤 안에서 어떻게 안전하게 자리했는지 궁금해진다. c 이순희 |
왕의 유물인 파란 구슬은 서리서리 몇무더기나 고여있다. 그 앞의 빨갛고 검고 노랗고 푸른색 나는 구슬은 깨알만한 것들이다. c 이순희 |
뱀처럼 서려있는 구슬 무더기 중에는 깨알보다 잘은 고운 색깔의 구슬도 있었다. 어떻게 이들을 끈으로 꿰었단 말인가. 이 전시회는 이 시대 최고의 전시였다. 2011년 2월 전시회 끝 무렵에는 하루 1만명씩의 관객이 밀려왔다고 했다.
법흥왕릉엔 햇살이 시냇물처럼 맑고 길에는 소나무 숲이 길게 뻗어 있었다. 무덤가의 제비꽃을 보았다. c 이순희 |
"여기에 봄이면 제비꽃이 그렇게 지천으로 피어요. 너무 아름다워서 봄이면 늘 이곳을 와보리라고 맘먹습니다."고 경주 사는 한의사 오소저 씨가 말했다.
경주 낭산 꼭대기에 있는 선덕여왕릉. 여느 왕릉보다 산 정상에 위치해 있는 느낌이 강하다. 여왕은 생전에 자신이 불교의 극락세계인 도리천에 묻힐 것을 예언했다. c 이순희 |
놀라운 것은 선덕이 건립한 첨성대에서 수학적인 어떤 선을 산출할 때 만나는 자리가 바로 여왕의 무덤자리를 가리킨다는 한 관측연구였다. 한가한 능길 산책이 고도의 수학 천문학 철학 군사가 어울린 시대사를 관통하는 것이다.
여느 왕릉처럼 굽어진 경주 소나무로 가득한 산속 봉분만 있는 별 특징없는 대지에 여왕이 누워있었다. 기이한 것은 이곳은 나무숲 울창한 숲속으로 꽤 들어온 언덕임에도 불구하고 사방에서 들리는 차소리 등 소음이 그대로 전달되어 다른 능에서 느낀 적막감은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다. 진덕여왕릉은 좀 떨어져 아파트 동네 뒷 숲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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