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나리오 작가 생활을 접고 <음란서생>(2006)을 통하여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김대우 감독의 <방자전>은 21세기 대한민국이 지니고 있는 창조적 음란성과 생산적 현실인식, 그리고 풍자적 역사 코미디와 진실성 있는 멜로드라마의 화려한 혼합을 보여준다. 관객들의 음란한 욕망을 생산적 웃음으로 해소시키면서 2010년의 현실과 조선시대 역사의 유사성에 대한 지적 통찰력은 가슴 뜨거운 감동을 선사한다. 물론, 이러한 화려한 혼합은 유교의 이성적 논리로 무장한 상류층 양반 이몽룡(류승범 분), 백치의 여성미로 등장한 춘향(조여정 분), 그리고 화류계의 달인으로 나오는 마노인(오달수 분)과 권력형 변태의 전형으로 등장하는 변학도(송새벽 분), 권력형 비리의 전형으로 등장하는 남원 관아의 호방(오정수 변)을 담당하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로 더욱 빛을 발한다. 시대와 역사를 초월하여 진정한 친구와 연인의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소수자였던 방자(김주혁 분)와 향단(류현경 분)이의 열연 또한 볼만하다.
<방자전>을 통하여 21세기 음란 역사 코미디 드라마의 새로운 장을 연 김대우 감독 또한 봉준호나 이창동 혹은 박찬욱이나 임상수 만큼 21세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성장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음란서생>(2006)을 통하여 감독으로 데뷔했을 뿐만 아니라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2003), <로드무비>(2002), <반칙왕>(2000) 등등과 같은 뛰어난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로 유명하다. 이러한 그의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의 경험은 장르의 혼합과 시간 이미지의 등장을 특징으로 하는 21세기 대한민국의 탈근대적 영화, 즉 음란 역사 코미디 드라마라는 성숙한 성인 영화관객을 위한 새로운 장르를 열기에 충분한 지적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의 등장과 더불어 모든 것이 과거로 퇴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영화만이 스크린 이미지의 진실성을 보여주는 현실 속에서 대한민국의 탈근대적 역사 비틀기를 보여주는 김대우 감독의 등장은 새로운 영화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II. 에로티시즘의 역사성과 코믹함의 쾌락
김대우 감독의 <방자전>은 음란하고 에로틱하다. 그래서 미성년자 관람불가이다. 탈근대의 시대에 "성적 욕망으로 자아의 존재가 어지럽다"라는 의미의 음란하다거나 에로틱하다는 관계의 욕망은 숨길 일이 아니다. 하나의 남성과 하나의 여성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인간은 개체적 존재에서 관계적 존재로 변형되어야만 한다. 개체적 존재는 나무나 돌, 혹은 들풀처럼 존재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 근원적인 서열관계를 부정하는 탈근대적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어린이나 소년, 소녀는 존재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 어린이나 유아, 혹은 소년이나 소녀는 존재 그 자체로 아름답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무나 돌, 혹은 들풀을 존재 그 자체로 돌보아주어야만 하듯이 그들을 존재 그 자체로 돌보아주어야만 한다. 따라서 가족과 사회, 그리고 국가는 어린이나 유아, 혹은 소년이나 소녀를 존재 그 자체의 이유로 인하여 보호하고 양육하여야만 한다. 그래서 탈근대의 사회와 국가는 가족관계를 떠나 보육과 양육, 그리고 교육의 공적인 책임을 수행해야만 한다.
그러나 성인은 다르다. 성인은 그 사회와 국가 속에서 그 사회와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관계들의 구성물이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관계적 존재이다. 이러한 관계의 가장 근원적인 것이 남녀관계이다. 그래서 소년과 소녀에서 벗어나 남성이나 여성이 되기 위하여 인간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적 대상을 성적으로 욕망한다. 그러한 성적 욕망을 음란하다고 하고 에로틱하다고 한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성적 욕망은 그 누구의 보호와 양육을 받아야만 존재하게 되는 개체적 존재에서 그 누구를 보호하고 양육함으로 말미암아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관계적 존재의 가장 필수적인 조건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리고 아무런 보상 없이 그 누구를 보호하고 양육하고자 하는 욕망은 그러한 성적 관계로 존재하기 때문에 얻어지는 즐거움이다. 따라서 음란하고 에로틱한 쾌락은 성적 욕망의 부산물이지 성적 욕망의 대상이 아니다. 성적 욕망의 대상은 관계적 존재가 존재하기 위한 관계 그 자체이다.
따라서 수많은 사회적 관계들로 존재하는 사회와 국가는 근원적으로 관계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인간의 성적 욕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전근대의 출신을 통한 신분제도나 근대의 자본을 통한 계급제도는 그 사회와 국가의 권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관계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인간의 성적 욕망을 신분제도나 계급제도의 욕망으로 왜곡시킨다. 그래서 전근대나 근대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 속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신분을 욕망하고 계급을 욕망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자신들의 성적 욕망이 좌절되는 것은 관계 그 자체의 잘못이 아니라 자신의 신분이나 돈 때문이라고 착각하게 되고, 근원적으로 숨길 수 없는 관계에 대한 성적 욕망을 달성하기 위하여 신분이나 돈이 없음을 한탄하거나 신분이나 돈을 욕망하게 된다. 그러한 왜곡된 욕망의 관계로 말미암아 근대 국가와 전근대 사회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는 존속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생명체가 지니는 욕망 그 자체의 생산성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자본과 계급의 노예에서 벗어나 자율적인 탈근대의 인간이 될 수 있다.
인종차별주의나 성차별주의를 배격하는 탈근대의 영화들이 신분제도나 계급제도, 혹은 지배와 피지배의 권력관계가 인간의 근원적인 남녀관계를 왜곡시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김대우 감독이 인간의 근원적인 에로티시즘을 보여주기 위하여 에로티시즘의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춘향전』을 <방자전>으로 패로디하는 것은 그의 탈근대적 생산의 욕망일 것이다. 조선시대의 유교 신분사회에서 보여주는 에로티시즘을 탈근대의 에로티시즘으로 변환시키는 것은 근대적 계급제도가 만든 권력과 자본의 욕망을 인간의 진정한 성적 욕망으로 착각하고 있는 근대성의 왜곡된 욕망이 아직도 우리의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수많은 관계들 속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방자전>에 등장하는 이몽룡이 지니는 유교의 이성적 논리로 무장한 상류층 권력에 대한 욕망은 이 시대의 검사나 판사들의 권력에 대한 욕망을 보여주며, 변학도와 호방의 왜곡된 욕망은 이 시대 권력형 변태와 비리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김대우 감독은 조선시대 에로티시즘 문학의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춘향전』의 내용을 하나도 변형시키지 않았다. 판소리와 이야기 책이 지니는 『춘향전』의 수많은 에로티시즘의 표현은 김대우 감독의 <방자전>으로 인하여 더욱 풍요로워졌다. <방자전>으로 인하여 『춘향전』은 계급사회와 신분사회에서 만들어진 왜곡된 욕망으로 인하여 선인이거나 악인, 혹은 창녀이거나 처녀성의 천사라는 이분법으로 판단하도록 만드는 변학도와 호방, 그리고 춘향이와 향단이를 인간이 관계적 존재로 존재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성적 욕망이 사회적으로 왜곡되거나 좌절된 인물들로 바라볼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신분사회나 계급사회에서 만들어진 왜곡되거나 좌절된 욕망을 보여주는 변학도와 호방, 그리고 향단이의 코믹스러움은 근대 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나 자신을 비롯한 관객들의 왜곡되거나 좌절된 욕망이 그들의 이미지 속에 투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보스러운 낭만주의적 권력형 욕망의 전형으로 등장하는 이몽룡을 보며 한없이 비웃다가, 변학도의 권력형 변태의 모습에 배꼽을 잡고 웃다가, 혹은 호방의 간사스러운 현실주의가 변학도의 권력에 무참하게 짓밟히는 모습을 보면서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혹은 강남의 벼락부자들과 같은 향단이의 대단한 출세에 박수를 보낼까 말까 하다가, 혹은 신분사회 속에서 몸과 마음이 어디로 갈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춘향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마침내 영화의 끝마무리에서 관객들은 자기 자신의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이몽룡과 변학도, 이방과 춘향이 그리고 향단이가 보여주는 신분사회의 다양한 사회적 욕망의 코믹스러움이 보여주는 쾌락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나 자신, 혹은 관객들 자신의 이미지 그 자체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방자가 정신이 나간 춘향이를 없고 "이리 오너리 같이 놀자"하고 노래를 부르는 순간, 불현듯이 2010년 한국사회에 살고 있는 영화관 객석에 앉아있는 나 자신이나 관객들이 이몽룡, 변학도, 호방, 그리고 춘향이와 향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III. 마노인의 탈근대성
김대우 감독의 <방자전>이 보여주는 21세기의 탈근대적 음란 역사 코미디 드라마 장르영화의 실험은 대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성공의 근원에는 이몽룡, 변학도, 호방, 춘향이, 향단이 등등의 고전 『춘향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감독의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인물에 대한 김대우 감독의 애정이 고전 『춘향전』이 지니고 있는 시대적인 드라마의 한계를 극복하고 과거의 이야기를 현대적인 영화 드라마로 성공시킨 요인이다. 그러나 고전 『춘향전』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에 대한 영화감독의 애정은 『춘향전』에 전혀 등장하지 않을뿐더러 <방자전>을 조선시대의 에로티시즘이 아닌 오늘날의 에로티시즘으로 승격시킨 "마노인"의 등장으로 인하여 더욱 빛을 발한다. 탈근대의 순수한 관계적 욕망을 지닌 "마노인"의 등장은 <방자전>을 탈근대적 음란 역사 코미디 드라마 장르영화로 성공시킨 가장 큰 요인이라고 할 것이다. "마노인"의 시대초월적이고 역사초월적인 탈근대적 욕망은 <방자전>이 역사 드라마이며 21세기 현실인식의 리얼리즘 영화가 되는 가장 큰 요인이다.
김대우 감독이 영화 <방자전>에서 "마노인"을 창출한 것은 영화 <방자전>이 근대적인 남성 중심주의와 후기 근대의 페미니즘에서도 벗어나게 만든다. 소위 "성의 달인", 혹은 에로티시즘의 달인으로 등장하는 "마노인"은 사회적이거나 역사적인 맥락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이 오직 인간의 근원적인 성적 욕망의 관계에 대해서만 달인이다. 마치 박정우 감독의 <바람의 전설>(2004)에 등장하는 박풍식(이성재 분)과 같은 "마노인"은 <방자전>이 지니는 탈근대적 음란 역사 코미디 드라마 장르영화를 더욱 풍요롭고 알차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영화에서 "마노인"은 "방자"가 역사적 인물로 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되는 인물이고, 영화 <방자전>이 후기 근대 페미니즘의 희생물이 되지 않고 탈근대의 남성과 여성 모두가 에로티시즘으로 즐길 수 있는 영화가 되게 만든 원동력이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마노인"의 시대초월성이나 탈근대성은 "마노인" 스스로 소수자 되기를 한다는 점에서 김대우 감독의 예술성을 더욱 빛나게 하는 예술적 인물의 전형이다. "마노인"과 같은 탈근대적 인물의 전형을 창조한 김대우 감독에게 찬사를 보낸다.
* 격주 일요일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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