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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 죽이기' 동시대극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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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명숙 죽이기' 동시대극의 재구성

[기고] 검찰 주연 '블록버스터'는 수준 이하 '자뻑쇼'였다

1.글쓰기를 시작하며 - 세기적 재판

선고일(4월 9일)을 목전에 두고 있다. 문득 35년전 그날의 끔찍한 과거사가 떠오른다. 이것은 필자의 오랜 직업병 탓이다.

1975년 4월 10일자 동아일보는 4월 9일에 인혁당 관련자 8명의 사형집행이 있었던 사실을 그림과 같이 보도했다. 그로부터 35년 후인 같은 일자 동아일보에는 '한명숙 징역5년 선고'란 1면 톱 기사가 실릴지도 모른다. 상상만 해도 섬뜩하다.


주지하듯이, 공안당국은 1974년 민청학련의 배후에 인민혁명당이 있다고 발표했다. 인혁당 관계자는 물론 민청학련 관련 학생들에게도 사형이 선고되기도 했다. 사형을 언도 받은 어떤 학생은 '영광입니다'라고 외쳤다. 사형집행이 있기 전날인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39명에게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했다. 아래 그림은 조선일보 4월 9일자 지면을 캡쳐한 것이다.


그런데 대법원의 확정 판결 다음날, 8명에게 사형이 전격 집행되었다. 이 사실을 전하는 신문 지면에는 미국무성이 전격적인 사형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했다는 단신이 보도되었을 뿐이다.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이 날은 국제적으로도 사법사상 가장 치욕적인 날로 기록되고 있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후에 각종 과거사위원회의 조사를 거쳐 2007년 1월 23일 인혁당사건은 무죄 선고되었다. 검찰도 항고를 포기했다. 인혁당관계자뿐만 아니라 민청학련 관련자들도 2009년 9월 24일 재심 재판에서 무죄선고 받았다.


위 그림은 조선일보 2009년 9월 25일자 기사이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무죄를 알리는 이 기사 바로 오른편에 한명숙 사건의 실마리가 된 대한통운 비자금사건 관련 기사가 실려 있다. 35년전의 '사법살인'과 같은 야만이 되풀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우를 떨칠 수 없다.

'빨갱이 사냥' 차원에서 '사법살인'이 버젓이 용인되던 '야만'과 '극단'의 시절이 있었다. 최소한의 법적 절차마저 사치스럽게 여겨지던 적도 있다. 그런데 지금 다시 그런 '야만'과 '극단'의 시절로 되돌아가려 하고 있다. 한명숙 사건과 같은 것이 21세기에도 이 땅에서 연출된다는 것 자체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극이 무대를 넘어 현실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 사건을 '한명숙 죽이기극'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래서 참담하게도 필자의 전공을 넘어 이글을 감히 쓴다.

필자의 글쓰기가 만용의 소치임을 잘 알고 있다. 막강 권력 검찰을 비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검찰 조서와 공소장 원문과 같은 1차 자료도 살피지 못했고, 재판을 직접 방청한 적도 없기 때문에 글쓰기가 조심스럽다. 하지만 공개된 자료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사건의 실재를 재구성해보려 한다.

이 사건에서 수많은 논점이 제기되지만, 오직 한가지 논점에만 집중하려 한다. 역시 핵심은 "곽영욱이 한명숙(who)에게 석탄공사 사장이 되기 위해(why) 2006년 12월 20일(when) 총리공관(where)에서 5만달러(what)를 건넸다(how)"는 사실이다.

기사 작성에서 6하원칙(六何原則, five W's and one H)은 기본이다. 공소장 작성에도 이 6하원칙은 필수이다. 이러한 6하원칙에 입각하여 검찰-언론-곽영욱 등이 그것을 집단 창작하는 과정을 면밀히 추적할 것이다.

일일이 각주를 달아 근거를 밝혀야 하지만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출처는 최소화했다. 하지만 결코 근거 없거나 신빙성이 없는 팩트를 근거로 이 글을 작성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자신한다.

2.언론 특종을 통해 본 사건 재구성(피의사실 공표)

▲ *'체포영장'과 '공소장'을 원문으로 확인하지 못하여 약간의 착오가 있을 수 있음.

이 표를 힘들여 작성한 것은, 언론 특종을 통해 사건을 재구성하기 위해서이다. 한편 검찰과 언론이 공모한 범죄(피의사실공표죄)를 고발하기 위해서이다. 이 글에서는 전자에 중점을 두고 살펴보겠다. 배경 색깔이 있는 부분이 특종에 해당하므로, 그 부분만 자세히 살피면 족하다.

다만 노무현의 죽음이란 비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범법 의식조차 못 느끼고 죄행을 되풀이 자행하고 있는 검찰과 언론 그리고 세태에 간단히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검찰은 피의사실을 유출한 적이 없다고 누차 말했다. 언론 기사들과 공소장의 내용이 다른 것이 피의사실 유출에 대한 검찰의 결백을 반증한다는 능청스런 지껄임을 듣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결국 귀신이 유출했거나 기자들이 창작했고 언론이 오보했다는 것이다. 한편 언론은 피의사실공표죄가 엄연함에도 불구하고, '검찰' '검찰관계자' '검찰소식통' 등 그 취재원을 구체적으로 버젓이 적시하고 있다.

필자는 검찰 조서와 공소장도 보지 못했다. 언론이 그것들을 전해 주어서 그 대강을 파악하게 되었다. 형법에 엄연히 중죄로 명문화되어 있는 피의사실공표죄가 기소독점권을 누리고 있는 검찰 자신의 범법과 직무유기로 사문화된 덕분이다. 그리고 언론의 공모 덕분이다. 필자가 범죄의 증거들을 활용하여 진실의 대강을 다행히도(?) 재구성했으니 지독한 역설이라고 해야겠다.

필자는 언론보도를 면밀히 살피는 과정에서, 검찰의 수사 내용이 거의 실시간으로 그리고 잘 기획되고 선별적으로 언론에 유출 보도되었다는 심증을 굳혔다. 실제로 곽영욱도, 전날 조사받은 내용이 다음날 언론에 보도되었다고 받은 진술했다. 따라서 표에 제시된 특종 기사들은 전날쯤의 취조 내용을 각각 보도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또 특은 언론에게 특종이 독점되지 않고, 한겨레가 막판에 특종했던 것 등은, 검찰의 언론 유출 과정마저 기획되고 선택적이 있었다는 것을 증거한다. 검찰 조서와 동영상을 살필 수 있다면 이에 대해 보다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필자는 그것에 접근할 수 없다. 물론 검찰에 불리하다고 여겨지는 조서와 동영상은 검찰이 이미 숨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표를 실마리로 조서와 동영상을 면밀히 대조하면 검찰-언론의 피의사실 공표 범죄행위와 대강의 사건 재구성이 가능할 것이다.

필자가 추적한 바에 의하면, 한국일보의 특종으로부터 시작하여 40여일 동안 7건의 특종이 생산되었다. 그 특종의 생산 유통과정은 검찰의 공소장이 완성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검찰은 필요한 정보를 특정 언론에 누설하고 언론은 약간의 상상력을 더하여 특종을 생산한다. 또 이 특종에 대한 세간의 반응을 살피며 공소장은 조금씩 그럴듯하게 가다듬어 졌다. 곽영욱도 (검찰이 흘린) 언론 기사를 들이밀며 추궁했다고 법정 증언하지 않았던가.

최근 재판과정에서 공소장과 배치되는 결정적 증언들이 있었는데 이것마저도 이들 특종 지면에서 그 흔적을 살필 수 있다.

특종은 표에서 보듯이 한국일보-조선일보-중앙일보-CBS 노컷뉴스-동아일보-한겨레신문의 순이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특정 언론이나 보수 언론에 치우치지 않고 골고루 특종을 생산했던 점이다. 언론의 특종 경쟁을 검찰이 최대한 활용한 결과일 것이다. 또 그 내용에 따라 선별적으로 뿌렸던 점도 주목된다. 비판적인 언론으로 지목되는 CBS와 한겨레가 특종한 내용은 총리공관 모임에 동행자가 있었다는 것과 동행자 실명(정세균 강동석)을 공개한 것이다. 표적수사이고 야당탄압이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검찰은 오히려 비판언론으로 지목되는 CBS와 한겨레를 적절히 활용했다고 추정한다면 과도한 것일까. 결국 CBS와 한겨레는 특종하여 그 성가를 높였을지 모르지만 검찰의 기획대로 놀아난 셈이다.

이 표를 토대로 하여, 이하에서 6하원칙의 각 항목별로 살펴보자.

3. WHAT - 5만달러 낙착 과정

표에서 보듯이, 뇌물액은 거액(11.13)-수만달러(12.4)-5만달러(12.5)로 변화하고 있다. 조선일보가 1면톱으로 한명숙의 실명을 폭로하며 본격 사건화하면서도 가장 중요하고 또한 관심 대상인 뇌물액수를 '수만달러'라고 보도한 것이 주목된다. 그런데 다음날 중앙일보는 '5만달러'라고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이 항목은 6하원칙 항목 중 가장 일찍 확정되었다.

곽영욱이 구속된 직후, 검찰의 최고 관심과 조사시간의 대부분은 그 뇌물액수에 두어졌을 것이다. 당시 지면에는 20만 10만 5만 3만달러설 등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설들이 근거가 없지 않음이 재판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공소장은 물론 검찰조서에도 누락되어 있는 10만달러와 3만달러 관련 진술들이 그것이다.

우선 10만달러설부터 살펴보자. 3월 15일자 재판에서 곽영욱은, 검찰조사시에 한명숙에게 10만달러를 주었다고 진술한 적이 있음을 분명히 증언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독고탁의 상세한 글이 있으니 부연 설명은 생략하겠다.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121353#pre).

10만달러설은 이 사건의 실체를 가늠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것이므로 번거롭지만 당시 법정 문답을 인용하겠다.

변 : (검찰의 조사과정에서) 10만 달러를 줬다고 말한 적도 있나?

곽 : 눈을 막 이렇게 뜨고 그러니깐, 무서워서 그랬다. 나중에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겠다.

檢 : 그 10만 달러는 곽영욱 사장 부인의 계좌를 추적하니 뉴욕에 있는 누군가에게 10만 달러를 보낸 자료가 나오더라. 그런데 그 근처에 한 총리가 미국에 갔더라. 그래서 한 총리에게 10만 달러 준 거 아니냐고 물었던 거다. 그때 곽 사장이 처음에는 한 총리에게 준 게 아니라 했다가, 그런 것 같다고 했다.

곽 : 무서워서 그랬어요… 한 총리님에게 안줬는데… 원체 다그치니깐… 줬지 않느냐고 다그치니까… 검사님이 무서워서… 줬다고 말했다가… 나중에 부장님에게 10만불 줬다고 했는데, 거짓이다. 안 줬다고 했어요.

변 : 왜 10만 불을 줬다고 말했나?

곽 : 검사님이 죄를 맞추잖아요. 죄를 만들잖아요. 내가 보니깐, 다 수사한 거잖아요. 내가 미국에 10만 불을 보냈는데, 하필이면 한 전 총리가 미국에 간 시점에 줬느냐고 물어서 난 절대 안 줬으니깐. 그런데 (검찰이) 줬다고 하니깐 줬다고 했죠. 양심이 있으니깐 나중에… (말을 바꿨지만). 내 돈을 맞춰 가지고.


정말 쇼킹한 해프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10만달러 해프닝은 검찰조서에도 누락되어 있는 듯하다. 검찰이 이런 부끄러운 기록을 남겼을 리가 없다. 이 해프닝이 정확하게 언제 일어난 것인지 궁금하다. 위 인용문에서 검찰의 진술에서 주목되는 점은, 당시에 검찰은 이미 한명숙의 출입국 기록 등 과거사를 파악해두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표적수사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여기서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곽영욱이 검찰이 제시한 10만달러설이란 황당한 각본에 쉽게 동의했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변호사였다면 10만달러 해프닝건을 최대한 추궁했을 것이다.

그리고 10만달러 각본이 폐기된 이유 역시 궁금하다. 곽영욱측이 뉴욕의 누군가에게 10만달러를 부쳤고 그것이 복잡한 경로를 통해 한명숙에 전달되었다는 각본도 제법 그럴듯한데 의외로 폐기되었다.

검찰이 10만달러와 3만달러설과 관련된 취조 내용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잘 알 수 없지만, 추정하자면 다음과 같다. 10만-3만-5만달러 순으로 변화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검찰은 계좌추적과 한명숙의 미국 방문시기를 근거로 곽영욱을 압박하자, 곽영욱은 10만달러 뇌물설에 동의했다. 그런데 송금한 돈의 출구가 분명했던 탓인지 10만달러설은 곧 폐기된다. 검찰은 곽영욱의 거짓과 이로 인한 뺑뺑이에 엄청 화났을 것이고 더욱 거세게 겁박했을 것이다. 이에 곽영욱은 3만달러설을 문득 내뱉았다. 10만달러 각본은 이내 폐기되었지만 나름대로 각본의 구성에 일조했다. '달러'라는 것만은 '3만(5만)달러' 식으로 계승되었던 것이다.

3만달러설은 어느 순간에 결국 5만달러로 낙착된다. 이에 대해 곽영욱은 한명숙이 '좋은 분이라 좀 줄여야 돼서' 3만달러라고 거짓말 했다가 정정한 것이라고 재판에서 말했다. 곽영욱의 이 진술 역시 신뢰성이 없어 보인다. 곽영욱이 순순히 그리고 자발적으로 거짓을 실토하고 정정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검찰이 3만달러설이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또 번복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검찰은 거짓 횡설수설 모르쇠 등에 번번이 당했으므로, 곽영욱의 3만달러설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검찰도 무척 갑갑했을 듯하다. 거짓임을 증명할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검찰도 공소장에서는 물론 재판에서도 돈의 입구와 출구를 전혀 밝히지 못했다. 3만달러와 5만달러는 양자 모두 거짓일 수도 있고 참일 수도 있다. 이런 사정을 미루어 볼 때 3만달러가 5만달러로 수정되는 과정이 궁금하다.

검찰관계자는 이에 대해 "총리에게 준 돈으로 3만달러는 아무래도 좀 적은게 아니냐며 불신감을 표현하자 곽씨가 액수를 5만달러로 높였다"고 한다(조선일보 3월 15일). 검찰의 이 해명보다 필자의 아래 가설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


한명숙의 죄목이 특가법상의 뇌물죄이다. 이 법이 적용되어야 가중 처벌된다. 특가법 2조에서 보듯이, 3천만원 이상의 뇌물을 받아야 특가법 대상이 된다. 그런데 3만불은 당시 3천만원에 미치지 못했다. 뇌물이 건네졌다는 2006년 12월 20일(물론 당시에 검찰도 이 날짜를 몰랐지만) 당시 환율은 그림에서 보듯이 1달러에 925.8원이었다(이 그림은 조선일보 12월 21일자 경제면 상단을 캡쳐한 것이다). 물론 당시 검찰도 정확한 날짜를 몰랐다. 다만 07년 (초)무렵이라고 대충 알고 있었는데, 그 당시도 역시 900원대 초반이었다. 검찰도 필자처럼 당시 환율자료를 찾아보았을 것이다.


검찰과 곽영욱은 모종의 타협 혹은 거래한 결과 5만달러로 낙착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리하여 한명숙은 5만달러 즉 46,290,000원의 뇌물을 받은 파렴치범으로 낙인되고 특가법상 뇌물죄로 기소되었다. 내 추정이 맞다면 5만달러란 3천만원 이상의 무수한 수치 중 하나 그리고 가공의 수치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5만'이란 단어가 검찰과 곽영욱 중 누구의 입에서 처음 발설되었는지 자못 궁금하다. 차마 검찰의 입에서 '5만'이란 단어가 먼저 발설되었다고 상상하고 싶지 않다. 곽영욱이 말바꾸기를 거듭했으니, 검찰 스스로도 곽영욱의 5만달러 진술조차 확신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5만달러의 출처와 사용처를 검증하지 못했으니 더더구나 그러리라.

검찰은 곽영욱의 5만달러 진술만은 일관성이 있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이 5만달러 진술도 일관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심지어 5만달러설을 검찰 스스로도 믿지 못할 것이고 또 전혀 검증하지도 못했는데 5만달러설을 그 누가 신뢰할 수 있겠는가? 5만달러설은 검찰의 맹신에 불과하다.

4. HOW - '건네 주었다'로 낙착되는 과정

일반 뇌물사건에 비견해보면, 한명숙 사건에서 뇌물의 입구와 출구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는 것은 이례적이다. 신뢰도 높은 증거와 물증이 없고, 오직 곽영욱의 증언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건인지라, 뇌물 제공자 진술의 구체성과 일관성 등 신뢰도가 중요하다. 특히 뇌물이 전달된 정황이 설득력있게 제시되어야 한다. 실제로 '어떻게'에 대해 검찰도 무척 고심한 듯하고, 세간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고 현재까지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물론 재판부도 가장 눈여겨 살펴볼 부분이다.

그런데 재판부가 이 부분에 대한 공소장 변경을 검찰에 권고했고, 결국 공소장이 변경되는 우여곡절을 겪고 있다는 것은 이미 신뢰도에 결정적 문제가 있음을 단적으로 증거한다. 곽영욱이 아무리 연로하고 병약해도 돈을 준 상황을 설마 헷갈리고 기억하지 못할까?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

표에서 보듯이, 조선일보 특종(12.4)이 있던 다음날, 중앙일보(12.5)가 5만달러설을 특종하면서 '직접전달'이라고 처음으로 언급했다. 그로부터 5일후에, CBS는 2차 특종 보도(12.10일)에서 아래와 같이 보다 구체적으로 보도했다.


"곽(영욱) 전 사장은 총리공관에 들어갈 당시 양복 왼쪽 오른쪽 주머니에 각각 2만달러와 3만달러 등 모두 5만 달러를 넣고 한(명숙) 전 총리를 만나 돈을 직접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곽 전 사장은 최근 검찰 조사과정에서 이같은 모습을 직접 시연해 보였으며, 검찰은 돈을 전달한 정확한 시각과 당시 총리 공관의 출입기록, 곽 전 사장의 동선 등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있다"


'오찬장 출입문 근처에서 한 전 총리에게 바로 건네줬다' '핸드백 같은 것 들고 다니니 거기에 넣었을 것이다'라는 등등의 내용들이 검찰조서에도 있다고 한다. 앞서 지적한 바 있지만 당시 언론들의 특종들이 언론의 순수작문만은 아니다.

상당히 구체적인 상황 묘사를 동반한 이 특종이 나오자,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기발한 패러디물들이 나돌았다. 그런 와중에 며칠 후 동아일보(12.14)에서 약간 돌출적인 듯한 특종보도가 나왔다. 한 전 총리를 만나러 공관을 갈 때, 여럿이 동행했으며 '동행자 중 몇 명은 공관에서 일정이 끝난 뒤 먼저 나갔고 내(곽영욱)가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다가 5만달러를 두고 나왔다'는 기사가 그것이다.


동아일보 특종 시점은 체포영장이 발부되기 2일전으로, 총리공관 오찬모임 날짜가 대충 파악되면서 그간의 혼란을 극복하고 극본을 거의 완성해 가고 있는 단계였다 다만 '언제' 문제와 이와 직결된 '왜' 문제는 여전히 약간 불확정적이었다. 동아일보 특종에서 2007년초라고 잘못 적시한 것은 강동석의 수첩에 힘입어 총리공관 오찬 일자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검찰도 정확한 일자를 몰랐었기 때문이다('언제' 장에서 상술). 동아일보 특종으로부터 2일후 체포영장에서는 '언제' '왜'마저 확정되었다.

그 뒤 한겨레신문(12.21)이 총리공관의 동행자들이 정세균과 강동석이었다는 것과 거기서 오간 대화 내용들을 보도했다. 돌이켜 보면, 동아일보 특종으로 특종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한겨레신문의 기사는 특종이라 하기에는 미흡하고 극의 막판 들러리 역할만 했다고 할 수 있다. 야당탄압 혹은 표적수사라는 세간의 시선을 감안하여, 야당 대표 이름(정세균)을 폭로하는데 비판언론인 한겨레신문이 선택적으로 발탁된 것이리라.

이상의 과정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동아일보 특종의 '두고 나왔다'가 공소장(12.22)에서 '건네주었다'라고 다시 바뀌었던 점이다. 공소장의 이 내용은 재판정에서 '의자위에 놓아두고 나왔고, 갖고 가는지 보지 못했다'라는 곽영욱의 진술로 다시 전복되었다. 결국 곽영욱의 법정 진술은 동아일보 특종 즉 '두고 나왔다'로 되돌아갔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곽영욱이 검찰조사시의 진술을 번복한 것으로 단순하게 여긴다. 그리고 곽영욱도 '검찰조사에서는 한번도 그렇게('두고 나왔다') 말한 적이 없느냐'고 재판부가 묻자, 곽영욱은 '없다'고 단언했다. 물론 검찰에게 물어도 곽영욱처럼 말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당시에 검찰에게 이를 재확인하지 않았는지 아쉽다). 결국 곽영욱과 검찰은 동아일보 특종이 오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동아일보와 이태훈 기자를 심히 모욕하는 것이다. 필자는 동아일보 특종이 오보가 아닐 것으로 추정한다. 내 추정이 맞다는 것은 동아일보 특종을 생산한 이태훈 기자가 증언해 주리라 믿는다.

'두고 나왔다'는 표현은 특종(12.14) 이틀전의 이태훈 기자의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07년 초 서울 종로구 삼청동 총리 공관을 찾아가 한 전 총리를 만난 뒤 총리 공관에 5만달러를 두고 나왔다"(12.12)라고 보도했다. '여럿이 동행했다'는 부분만 없을 뿐, 나머지는 14일자 기사와 똑같다. 이런 표현은 오직 동아일보에만 실려있다. '직접 전달'의 보편 속에서 '두고 나왔다'는 동아일보만이 특수 표현을 연거푸 썼다는 것은 확실한 정보원(물론 '검찰 빨대'일 것이다)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이 특종은 이명박정권하에서 동아일보의 정보력과 위상을 짐작케 한다.

따라서 필자는 곽영욱이 법정에서 위증했다고 생각한다. 아마 검찰조서에도 이 부분은 남아있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10-11일자 조서와 동영상을 꼼꼼히 검토해 보면 그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다. 결국 '두고 나왔다'는 검찰에서의 곽영욱 진술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공소장을 왜곡 작성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곽영욱의 법정 진술은 진술 번복이 아니라 검찰에서의 진술을 재확인한 셈이고(그렇다고 곽영욱의 진술이 진실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법정에서 곽영욱의 진술이 공소장 내용을 뒤집으면서 검찰이 궁지에 몰리자, 담당검사 권오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 '건네 주었다'에는 의자에 두고 나왔다는 방법도 포괄적으로 담고 있다. 기소할 때부터 손으로 건넸는지 식탁이나 의자에 놨는지 추상적이었다"고 변명했다. 검사의 말이라고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공소장의 가장 핵심 증거마저 추상적인데 기소가 가능한지? 노무현 사건에서 '포괄적 뇌물수수'라는 말이 유행하더니, 이제는 '포괄적 기소'마저 등장한다. 하여튼 '추상적 포괄적 기소'임을 검찰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검찰이 궁지에 몰리자 보수 언론들은, 검찰관계자의 입을 빌리는 형태로, 곽영욱이 진술번복을 검찰도 재판 시작 하루 전에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는 식으로 대신 변명해주었다. 과연 '두고 나왔다'는 곽영욱의 진술이 재판 하루전에 처음 있었던 것일까?

필자는 이 모든 혼돈과 모순의 출발이 기소유지를 위해 공소장을 왜곡 작성한 것에서 초래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고 나왔다'는 곽영욱의 진술은 동아일보 특종(12.12-14) 전에 이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진술대로 표현한다면 기소유지마저 어렵다고 검찰도 판단한 나머지, 공소장에서 '건네 주었다'라고 추상적 포괄적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내 추정이 맞다면, 이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검찰의 중대 범죄행위다. 이는 국민들은 물론 검찰수뇌부마저 기망한 것이다. 이러한 꼼수 마련에 검찰수뇌부가 직접 개입했을 가능성도 있다. 한명숙사건에 대해 검찰수뇌부가 대책회의를 했다는 신문기사도 더러 있었다. 설사 검찰수뇌부가 직접 관련이 없다 하더라도, 그 꼼수를 간파하지 못한 검찰수뇌부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필자가 이런 과감한 추정을 하는 것은 최근 검찰 행태에서 이와 유사한 꼼수들을 자주 발견했기 때문이다. 표적을 정하여 무리하게 기소했지만 재판에서 무죄로 판정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그 사건을 담당한 검사들의 대부분은 책임지고 문책당하기는 커녕 오히려 영전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전달과정에 대해서도 곽영욱의 진술은 일관성이 없었고, 신뢰하기 어렵다. 더구나 검찰 조사시의 곽영욱 진술마저 공소장에서 검찰에 의해 의도적으로 왜곡된 것으로 추정된다.

관찰자로서의 필자도 이러한 추정들에 무척 조심스럽다. 하물며 검찰이 '곽영욱이 놓아둔 봉투를 보고, 한명숙은 몇 초 사이에... 남의 시선을 피해 재빨리 서랍장에 숨기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히....'식으로 추정하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심지어 이러한 내용은 공소장에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이번 재판을 픽션이고 '동시대극'이라 표현한 것이다.

5. WHEN WHERE WHY - 시간 장소 이유가 정착하는 과정

이번 사건에서 검찰이 밝혀냈다고 인정되는 것은 '언제'와 '어디서' 뿐이다. 즉 2006년 12월 20일 총리공관에서 곽영욱과 한명숙이 만났고, 그 자리에 정세균과 강동석도 동석했다는 사실 뿐이다.

'언제' '어디서' '왜' 역시 표에서 보듯이, 검찰이 갈피를 잡지 못했다. 특히 '언제' '왜'는 한명숙 체포영장(12.16)을 발부하는 단계에서야 정착되었다. 남동발전만을 언론에 흘리다가 체포영장에서 갑자기 석탄공사로 바뀌면서 황당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러한 혼선은 복잡한 듯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총리공관 오찬 일자에 그 열쇠가 있다. 즉 검찰 각본에서 '언제'가 특정되지 않고 유동적이면서 '왜'도 정해지지 못하고 가변적이었던 것이다. 이들 3자는 긴밀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므로 동시에 다루어 보자.

이 셋 중에서 비교적 일찍 확정된 것은 '어디서'이다. 표에서 보듯이, CBS 특종(12.9)은 '어디서'가 바로 '총리공관'이라고 최초로 적시했고 이후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타인을 거쳐 혹은 계좌로 뇌물이 전해졌다고 한다면, 증인이나 증거가 제시되어야 하기에 직접 전해주었다고 하는 편이 채택된 것 같다. 그것도 현금으로 또 달러로. 따라서 '무엇'(5만달러)이 낙착되자, 검찰은 둘이 직접 만난 정황에 대한 파악에 집중했을 것이다.

곽영욱은 총리공관에서의 만남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고 실토했을 것이다(그런데 언론 특종을 통해 보면, 의외로 5일 이상이나 걸렸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수년전 사실이니 정확한 일자는 기억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런데 앞서도 지적한대로 '어떻게'와 '왜'를 기억하지 못했지 정말 의아하다. 그것들은 쉽게 잊혀지거나 헷갈릴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어떻게'와 '왜'를 떠올리면 '언제'도 대충 추정이 가능했을 터인데....

'언제'에 대해 이 건을 사건화 시킨 조선일보 특종(12.4)은 '2007년 무렵'이라 적시했다. 그로부터 수일 후인 10일경부터 '2007년 초' '3월' '1월' 등의 다양한 설들이 보도되었다. 동아일보 특종(12.14)에서도 '07년 초'였다. 그후 무슨 이유인지 '2006년 가을'로 추정되기도 하다가 체포영장(12.16) 단계에서야 그 일자가 정착되었다.

이와같이 '언제'의 오락가락과 모호함이 정리된 것은 강동석의 수첩 메모를 통해 총리 공관 오찬 모임 일자가 확인되면서 부터였다. 검찰조사를 받고 나온 강동석과의 인터뷰 기사(한국일보, 12.21)에서 이러한 사정을 엿볼 수 있다.


애초에 '2007년 무렵' 혹은 '2007년초'라는 설이 파다했던 것은 곽영욱이 놀고 있다가 남동발전사장으로 가게 된 것이 2007년 4월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동발전 사장 선임 결정은 2007년 3월 30일에 있었다(조선일보, 3.31).

2006년 12월 20일은 석탄공사 사장 후보 응모 마감 6일전이었다. 그리고 석탄공사 사장이 선임 결정은 2007년 1월 25일(조선일보, 1.26)이었다. 곽영욱은 1등으로 올라갔지만, 정책적 배려가 작용하여 곽영욱은 최종 선택에서 탈락했다. 결국 석탄공사와 남동발전에는 3달 간격의 갭이 있다.

조선일보 특종(12.4)에서 남동발전이 언급된 이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체포영장 단계에서 총리공관 오찬 일자(2006년 12월 20일)를 고려하여, 남동발전(2007년 3월 30일)에서 석탄공사(2007년 1월 25일)로 갑자기 바뀌게 되었다.

28일 밤에 MBC에서 곽영욱을 직접 인터뷰한 화면을 얼핏 보았다. '나이가 드니 수천만원 정도 준 것들에 대해서는 기억이 안난다'고...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뇌물을 '어떻게' 전해주고 또 '왜' 주었는지를 제대로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이 정말 의아하다.

이렇게 '왜'가 변경되는 황당한 국면에서, 김주현 3차장(사건 담당 특수2부 직속 상관) 검사와 조선일보는 다음과 같이 변명했다.

곽 전 사장은 그러나 석탄공사 사장으로 가지 못했고, 다음해 한국남동발전 사장이 됐다. 이와 관련, 한 전 총리측은 "그동안 남동발전 사장 인사청탁이라고 흘리다가, 체포영장에는 석탄공사 사장으로 가기 위해 뇌물 준 혐의라고 돼 있는데, 이는 수사가 아니고 조작"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주현 3차장은 "석탄공사나 남동발전 모두 공기업이어서 이 과정은 다 연결돼 있는 것"이라고 했다. 애초 곽 전 사장의 요구가 공기업 사장으로 보내달라는 것이었고, 그 뒤 5만달러를 건네고 나서 남동발전 사장으로 간 만큼 '대가성 자금'으로 보는 데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조선일보 12.19).

석탄공사나 남동발전이나 공기업이니 '다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고!!! 누차 지적한 대로 이런 '포괄적' '추상적' 공소장도 있나!!! 우선 5만달러가 설사 전해졌다고 하더라도 실패한 청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패한 경우도 과연 댓가성이 인정되는지 논란의 여지가 제기될 것이다(판례가 있겠지만 이것은 문제의 본질이 아니므로 여기서 상론하지 않겠다). 필자는 김주현의 변명과 공소장을 감안할 때, 검찰이 '공기업 사장 청탁'을 했다는 식으로 두리뭉실하게 표현한 것은 의도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곽영욱의 진술과 배치되게 공소장을 작성했다는 의심을 떨칠 수 없다. 곽영욱이 석탄공사를 일찍 진술했지만, 석탄공사 사장건이 실패한 청탁이므로 검찰은 고의로 은폐했다가 막판에 어쩔 수 없이 인정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양자가 '그게 그거'라는 식으로 호도하고.

게다가 재판과정에서 곽영욱은 청탁 관련 공소장 내용을 모두 번복했다(곽영욱이 진술을 번복한 것인지 검찰이 공소장을 위조 창작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그 중 하나의 예만 들어보겠다.

검찰조서에 따르면, 정세균이 나갈 때 '곽사장을 잘 부탁한다'고 한명숙이 말했다고 곽영욱은 진술했다. 그런데 법정에서 곽영욱은 누구를 특정하지 않고, 식탁에서 일어나면서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3월 11일 진술). 그리고 다음날에는 '정확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3월 12일 진술).

결국 곽영욱은 한명숙에게 청탁했다는 사실 자체를 법정에서 전면 부정했다. 한편 검찰은 석탄공사는 물론 남동발전 사장 선임에 한명숙이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는지에 대해 구체적 증거를 단 1건도 제출하지 못했다. 결국 댓가성을 인정할 만한 어떠한 증거도 없는 셈이다.

6. 사건의 총괄적 재구성

6하원칙 중 WHO(누가)의 문제만 남았다. 왜 하필 한명숙이 사냥감이 되었던가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간단하지만 사실은 이 사건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고 좀 복잡하기도 하다. 게다가 검찰이란 존재가 필자같은 일개 서생의 조롱을 받기에는 결코 만만치 않은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미련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 더 시간을 두고 살펴보는 편이 좋겠다. 대신 이상의 글을 전체적으로 정리하고, 지난한 글쓰기 과정에서의 소회를 피력하는 것으로 글을 맺으려 한다.

앞서의 표와 서술을 통해 공소장이란 극본이 작성되는 과정을 치밀하게 추구했다. 그것들을 구태여 요약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차피 필자의 글도 검찰 극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임을 잘 안다. 그리고 필자 글의 내용이 모두 진실이라고 감히 주장하지 않는다. 그래도 검찰의 극본보다는 그럴듯한 진실을 담고 있다고 자부한다.

간단히 핵심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검찰의 조사과정, 공소장과 재판 과정을 통해 사건을 재구성해보면, 6하원칙 중 확실한 것은 오직 한명숙과 곽영욱(누가)이 2006년 12월 20일(언제) 총리공관(어디서)에서 동석자 2명과 오찬했다는 것 정도이다.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무엇을' '어떻게' '왜'에 대해서는 검찰도 전혀 입증하지 못했다. 검찰은 뇌물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물증 등 신뢰도 높은 증거를 단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다. 필자가 공소장을 '허구'에 가깝다고 보는 이유이다.

검찰도 그런 사실을 인정하는듯이, 후원비 유학비용 골프채 골프빌리지 등의 주변적 정황 증거에 집착했다. 이들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상론할 여유가 없다. 다만 그것들의 대부분도 법정 진술이나 한명숙측의 해명 과정에서 설득력을 상실했다는 것만 지적해둔다.

그래도 검찰이 믿는 구석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바로 상황 증거인데 그 중에서도 곽영욱의 총리공관 오찬 참석이 그것이다. 곽영욱이 어떤 이유로 어떤 과정을 거쳐 누구 연락을 받고 참석했던가. 이것이 정황 증거의 핵심이다.

이점과 관련하여 필자가 그려본 상황은 다음과 같다.

공기업사장 인선 과정에 대해서는 당시 인사수석이었던 박남춘이 증인으로 법정에 출두하여 명쾌하게 해명한 바 있다. 곽영욱은 현재 비자금 조성, 횡령, 뇌물제공 등의 파렴치범으로 지목되고 있지만, 당시 언론 지면을 통해 보면 유능한 CEO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연세경영자상(조선일보 1999.11.23과 12.3)을 받았으며,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우수법정관리인으로 선정되었다(조선일보, 2004.4.23과 2005.4.22).

서울지법은 2002년부터 법정관리기업의 관리인을 대상으로 실적 평가를 통해 우수 관리인을 매년 선정했는데, 2005년 곽영욱은 4년 연속 우수법정관리인으로 선정되어 3000만의 특별보수까지 받았다(아래 그림은 조선일보 신문 캡쳐, 2005.4.22).


그다지 친밀하지는 않지만 곽영욱이 한명숙을 도운 적이 있고 그리고 개인적 인연도 약간 있는데다, CEO로서 평판이 좋은 곽영욱을 공기업 사장이 될 수 있도록 한명숙이 총리로서 일정한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필자는 그것이 법적으로 문제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곽영욱이 석탄공사 사장에 1등으로 추천되었지만 최종 결정 과정에서 탈락한 것은 공식적인 인사 선발 시스템이 침해받지 않았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필자는 한명숙측이 이 문제에 대해 적극 해명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검찰의 직접 신문에 대해 한명숙측은 진술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리고 재판부에 이에 대해 해명하는 문서를 제출했다는 뉴스만 접했다.

물론 한명숙측의 진술거부권 행사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림에서 보듯이 현행 형사소송법에서 명문화되어 있는 피고인의 권리이다(그림은 법제처 사이트에서 캡쳐). 이미 한명숙을 법적으로 단죄하기 보다 흠집내기로 일관해온 검찰과 언론의 반칙과 불법을 감안할 때 더욱 그러하다. 검찰 질문에 한명숙이 답하는 부분이 TV화면과 신문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했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런 점에서 진술거부권 행사는 불가피하고 현명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진실에 목마른 만년서생의 입장에서, 일말의 아쉬움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서두에서 살펴본 인혁당사건에서 그 판결 결과에도 관심이 있지만 인혁당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물론 그 실체적 진실을 밝히고 단죄할 1차적 책임은 검찰에게 있다. 누차 말했지만 검찰은 그 책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 피의자와 피고인에게 그 무죄와 결백을 증명하라는 것은 법원칙에도 맞지 않다.

공안검찰을 동원하여 '빨갱이 사냥'이 연출되었던 불행한 과거사를 떠올리게 된다. 요즘은 특수검찰을 동원한 '바보 사냥'이 추가되고 있다. 노무현 강금원 정연주 박원순 그리고 무수한 촛불 사건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한명숙 사건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극본 작성에 막대한 인력과 돈이 투입되었지만 그 극본은 수준 이하였다. 대한민국 특수부 검찰의 반칙과 불법에 분노하고 한편 그 무능에 실망했다. 극본이 무대나 극장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에 비애감을 느낀다. 더구나 검찰의 무리한 기소가 최근 빈발하고 있는 일련의 '자뻑쇼'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자뻑쇼'들을 권력핵심부가 연출하고 있는 현실에 깊은 좌절감을 느낀다.

한편 검찰이 진용까지 보강하며 '한명숙 죽이기'에 막판까지 필사적인데도, 결정적 약점이 드러나지 않는 한명숙이란 사람을 다시 보게 된다.

재판부는 물론 심지어 검찰마저 '포괄적 기소' '추상적 기소'임을 인정했다. 이따위 '포괄적' '추상적' 기소가 허용된다면 기소당하지 않을 이가 과연 있을까? 검찰 앞에 발가벗겨져 치부가 드러내지 않을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검찰의 망나니 칼춤에 다치지 않을 이가 있을까? 검찰과 한명숙 이 양자가 당분간 필자의 화두가 될 것 같다. '세기의 재판'은 법정에서도 그 진실이 가려지지만 역사와 현실에서도 가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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