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실에 와서 김용택 시인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조상 대대로 있었다는 오래된 기와집이시인을 닮아 아담하고 소박하다. 일행 외에도 다른 취재진들이 와서 좁은 마당이 북적거렸다. |
워낙 알려진 시인이라 그날 장암 마을엔 우리 답사팀 이외에도 한국일보와 전북일보 취재팀이 우리와 자리를 같이 했다. 내가 그 때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위원장으로 복귀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취재 기자들이 양수겹장으로 온 모양이다.
그의 마을은 섬진강가에 자리 잡은 전형적인 마을이었다. 그는 먼저 자기의 마을에 대해 얘기를 시작했다.
조상 대대로 여기에 터를 잡았다고 하는 데 그의 장암 마을은 당산나무로 느티나무를 심었다. 임진왜란 당시부터 마을이 시작됐다고 하니 마을과 느티나무가 다 같이 500년 가까이 되는 셈이다.
당산목인 느티나무는 수령이 오래가고 풍요로워 동네 가운데 빈터에다 심는다. 또 마을입구에 심으면 마을의 경계표시이면서 일종의 동구나무가 되고 마을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고개를 넘어와야 하는데 거기에 심으면 돌무덤도 쌓아 성황당이 되는 거다.
마을엔 마을의 안정을 위하여 이렇게 동네 빈터에 또는 입구에 심지어는 들판에도 휑한 것을 막기 위해 나무를 심었다. 다 마을을 지켜주는 장치라고 한다.
▲ 김시인이 호방한 말투로 주로 나무와 관련된마을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옛부터 마을이 만들어질 때는 마을 곳곳에 나무를 심어서 그 형식을 갖추었다고 한다. 시인의 집 입구에는 시인이 40년 전에 옮겨 심었다는 느티나무도 우람하게 자라있다. |
그는 자기가 어려서 심은 느티나무 얘기와 강가에 심은 나무가 애들이 빠져 죽는 것을 막아 준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여름에 강가 나무 밑에 마을 어른들이 앉아 있다 얘들이 빠지면 건져 주기도 했다면서 자기도 애들이 빠진 걸 직접 2,3명 구해주기도 했다고 자랑(?)한다.
마을 나무는 그 아래 자연스레 마을 주민들이 모여 놀기도 하고 거기서 마을 대소사를 의논도 하고 해서 자연스레 마을의 '문화센터' 노릇을 한다. 이제는 정부에서 정자를 지어줘서 정자가 나무의 역할을 대신한다고 한다.
▲ 빼곡한 책들로 한층 작은 방에 모여 앉아 본격적으로 시인의 마을이야기를 들었다. 같이 먹고 같이 일하고 같이 노는, 일과 놀이가 결합된 문화로 유지되는 농촌마을 공동체에서는 평생을 같이 사는 만큼 지켜야할 약속이 있다. 서로 믿음을 깨지 않는 것이다. |
나무 이야기가 끝나자 그 다음 순서는 본격적인 마을 이야기다. 농촌마을공동체라는 게 딱 세 가지라고 그는 말한다. 같이 먹고, 같이 일하고, 같이 노는 거.
옛날에 농사라는 게 힘드니까 놀이로 만들었다고 한다. 일과 놀이가 분리가 안 되고 서로 꼬리를 물고 돌아가야 서로 힘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들이 뭉쳐 있으면 힘이 생기니까 이러한 일과 놀이의 순환을 정치권력이 찢어 발겨 놓았다고 하면서 그것을 우리의 노동운동에 비교해서 말했다. 노동판에 놀이가 있었듯이 농촌문화의 상징으로 나타난 게 농악이다. 농악은 가장 화려하고 대동적인 놀이를 할 수 있는 농촌문화의 꽃이라고.... 그런데 이제는 농민들의 이러한 자생적인 문화활동이 정지되었다고 한탄을 한다.
여기 장암 마을은 김, 양, 문씨 집성촌이다. 아마도 김씨와 문씨의 목소리가 큰 것 같다. 그래서 이장은 항상 양씨네가 한다. 너무 한쪽으로 기울면 안되니까, 동네의 이장을 양씨네가 맡으면서 중재를 서기도 하고 어느 쪽 편을 들어 옳고 그름이 갈리기도 한단다.
이런 성씨들 사이의 힘겨루기도 꼭 지켜야할 마을의 암묵적인 규약이 있다. 막말과 도둑질이다. 몇 십 년 동안을 같이 살려면 이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 어차피 마을 농사를 같이 지어야 하기 때문에 이것만 잘 지키면 자연적으로 화해가 된다.
그는 이 마을에 쭉 살면서 마을 공동체가 자본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마을을 한마음으로 묶는 정월달의 대동놀이, 굿을 치고 춤추고 놀면서 화해하고 새해 일을 시작하는 농악들이 사라진 것은 새마을 사업 등으로 산업화가 시작되고 이농인구가 생기고 점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때로, 이렇게 마을이 끝장났다는 것이다.
▲ 산들 사이로 강을 끼고 길게 늘어선 마을이 아름답다. 마을 자체가 문학관이니 자본을 들여와 새로건물을 짓고 분란이 일어나게 하는 대신, 기존의 것을 보존하고 보수하며 오래된 것의 소중함을 지켜야 한다는 시인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
농촌공동체를 사라지게 한 '자본'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자본이라는 게 외부 자본이 아니라, 농약도 해야 되고 농사가 기업농이 되면서 축산과 과수원 등 다 자본이 있어야 움직인다는 것이다. 자생적인 농업이 사라지면서 국가의 지원이 늘어날수록 농촌은 망가졌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대표적으로 체험마을, 테마마을, 생태마을 등 정부 주도로 유행처럼 농촌에 지원이 쏟아지는데 그의 말로는 하나도 성공한 것이 없단다.
이 마을도 농촌개발사업에 선정되었다. 그러면서 이 마을의 유명한 '문화상품'인 김용택시인을 그냥 둘 리가 없다. 군에서 그의 문학관을 지어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는 딱 거절했다.
그의 거절 이유가 걸작이다. 문학관을 짓는 데 몇 십억이 들어가, 또 그 것을 운영하는데 1년에 2,3억이 들어가, 농민들한테는 돌아가는 게 없고, 다 단체장들 과시적인 성과로 하는 게 아니냐? 내 문학이 한 50년은 갈 수 있는지는 생각해 봤냐? 나보고 그걸 운영하라고 하는데 글 쓰는 사람이 어떻게 그걸 운영해? 라고 따지다가 결국 못하겠다고 거절한 모양이다.
▲ 김시인은 마을과 무관하게 돈을 들여 만드는 문학관 대신, 그의 오래된 집을 조금 손봐서 '가끔 열리는 학교'를 열 계획이라고 한다. 그의 집 마당에 서면 낮은 담 너머 오가는 사람들과 그 너머 밭과 길, 강과 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
이런 식으로 군에서 문학관 짓겠다는 것을, 기존의 집을 조금 넓혀서 거기다가 '가끔 열리는 학교'를 여는 것으로 결론이 낫다고 한다.
가끔 열리는 학교니까 가끔 안 열어도 되고 그때그때 편하게 자연학교로 운영을 할 모양이다. 찾아오는 아이들과 부모들을 상대로 글짓기, 그림그리기를 함께 하고 동요도 짓는 그런 학교다. 일종의 '자연학교'다. 재작년부터 서울의 노영심씨가 제안을 했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의논을 해 볼 심산이라고 한다. 올해는 연습 삼아 해보고 내년부터는 전국적으로 순회까지 계획하고 있다. 몇 십 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쳤으니 어련히 잘하랴 싶다.
그는 마을 자체가 문학관이라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마을 자체를 잘 보존하는 게 중요하고, 군 같은 데서는 이런 마을을 잘 보존하는데 지원을 하라고 군에 권했다고 한다.
그러나 군의 공무원들이 그렇게 녹녹한가? 섬진강 옆의 아름다운 길을 다 파헤쳐
쓸데없이 넓히고 포장을 하겠다고 안하나, 길옆에 들꽃이 지천인데 야생화 화단을 만든다고 요란을 떨질 안나, 하여튼 아름다운 자연의 길을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고 그는 혀를 끌끌 찾다.
그는 이렇게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마을과 아이들, 나무와 야생화와 섬진강, 그리고 강 길이 다 그의 문학관이다.
끊임없이 쏟아내는 그의 '마을학'은 가끔가다 아이들 교육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그는 21세 때부터 40년 넘게 교직에 있다 얼마 전 은퇴를 하고 이제는 학교 밖에서 아이들과 자유스럽게, 즉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만나게 되었다. 위에서 말한 '가끔씩 열리는 학교'식으로 말이다.
그는 점심 겸 못다 한 이야기를 풀어 놓으러 우리를 섬진강가의 매운탕 집으로 안내했다.
그 곳에서는 김시인보다 나에 관한 얘기가 많아졌다. 위원장 복귀문제하며 '예술과 마을 네트워크'의 사업과 취지, 그 동안의 마을답사들에 대해 내가 주로 얘기를 많이 했다.
점심 후, 김시인은 섬진강가에 있는 최고로 아름다운 마을로 우리를 안내했다. 정말 마을이 아담하고 예뻤다. 특히 그는 당산나무 옆의 봉분을 가리키며 이곳은 당산나무에서 동제를 지내고 그 때 잡은 동물의 뼈(돼지 머리뼈 등)를 수습해 묻어 놓는 다고 했다. 아주 특이한 풍습이다.
또한 마을 정면의 커다란 산의 위압감을 완화하기 위해 마을 앞 빈터에 작은 숲을 만들어놓았고, 풍수지리상 좌청룡 우백호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 왼편에도 소나무 숲을 일구어 놓았다.
그리고 마을 아래쪽에는 미나리깡이 있었는데 이 미나리깡을 통해 마을의 오수가 정화되어 강으로 흘러든다고 했다. 정말 옛날 사람들의 삶의 지혜가 놀라웠다.
우리는 다음 '가끔 열리는 학교'가 열릴 때 쯤 해서 다시 오마고 약속했다. 그와 마을에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우리 일행은 서울로 출발했다.
▲ 마을의 옛형식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아름다운 마을 앞에서 김용택 시인과 인사를 나누고, 일행은 3차 마을탐방의 마지막 여정을 마무리했다. 평생 아이들과 함께한 김시인의 '가끔 열리는 학교'가 가끔이지만 꾸준히 열리길 기원한다. |
(예술과마을네트워크 까페http://cafe.naver.com/yem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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