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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가 여럿에게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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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가 여럿에게 가는 길

[김지하 시인의 '신경제론']

줄탁을 생각한다 - 연재를 시작하며

나는 시 쓰는 사람 김지하올시다.
기억하시겠습니까?
어릴 때 본명은 영일(英一)이고 김지하는 필명입니다. 중년에 얻은 아호에 '노겸(勞謙)'이 있고 또 '남조선 화엄개벽모심의 길'을 공부하다 스스로 좋아서 붙인 '현람애월민(玄覽涯月民)'이 또 있습니다.

이름 여럿 가지면 고생 많이 한다죠? 고생 많은 제 인생이 어느덧 칠순을 맞았습니다. 후천정역(後天正易)으로는 올해부터 윤달이 없다하니 후천개벽 믿고 사는 나 홀로 동학당 김지하에겐 올해가 바로 칠순이 됩니다.

음력 2월 4일이니 양력 3월 19일입니다. 두보(杜甫)의 곡강시(曲江詩)에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했으니 못난 사람의 못난 한마디가 없을 수 없겠습니다. 분명히 못난 한마디라 했습니다. 감안하소서.

제 소위 나라를 위한답시고 열아홉 살, 사월혁명 이후 오늘까지 수십 년을 헐떡이게 살아왔습니다. 이런 내게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고희에는 누구나 제 잘못을 되돌아본다 했습니다. 무엇이었을까요?

누가 내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아무리 봐야 빨갱이가 아닌데 어째서 맨날 빨갱이 대접만 받는가? 더군다나 해괴한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북쪽과 남쪽의 빨갱이들이 당신을 그렇게도 못 잡아먹어서 미워하고 틈만 나면 갈아마실려고 이를 벅벅 가는 것인가? 간단히 해명할 수 없는가?'

나는 늘 그때마다 쉽사리 대답을 해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덕이 없는 탓이다'
'과격해서 그렇다'
'중보진보이어서 이쪽저쪽이 다 미워한다'

이 세 가지는 사실 지금까지도 다 합당한 까닭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연관된 내 개인사의 울분, 분노 또한 참으로 적지 않습니다. 참으로 못난 이야기를 고희에 다 털어놓고 울적한 마음이나 달래보고 싶은 마음 한두 가지 아닙니다만 참으로 못난 것은 겸(謙)이라하니 진정 못 나려고 칠십 나이답지 않은 울끈불끈 다 그만두렵니다.

네.

스스로 못나야 스스로를 기른다해 그리하죠. 그러나 '수십 년 헐떡임'과 '빨갱이 아닌데도 빨갱이로 취급받고 그럼에도 빨갱이에게 미움 받는 그 못남'의 정체를 개인적 문제영역을 떠나 사월혁명 이후 오늘날까지 수십 년 동안 우리를 사로잡아 온 경제 제도 문제에 대한 새로운 공부의 차원에서 무언가 해명해간다면 그도 역시그냥 애오라지 못나기만 한 것이 될까요?

아니면 그 또한 지금 당장의 통용화폐 수준은 아니므로 역시 못난 소리가 돼버리고 마는 것일까요? 경제 관련의 최근 에세이가 다섯 편 쯤 되는데 왜 내가 경제에 대해 그런 큰 변화를 생각하는가를 먼저 알고 싶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에 대한 비난이 근본에서 경제문제로부터 시작되는데도 나에게 그걸 묻습니까? 또 현실적으로 봐서도 그 원인은 먼저 현실 경제 자체 안에 있고 다음은 나의 새로운 모색 안에 다 들어 있을 것이지 그걸 어떻게 미리 이러고저러고 마치 아까 말 않겠다던 개인 사정 고백하듯 떠벌리겠습니까?

간단합니다. 읽어보시면 됩니다. 경제는 우리 모두, 인류 모두, 생태계와 우주 모두의 급박한 일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한 조그마한 고민도 도움이 되는 때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고희에 할 수 있는 한마디라고 감히 생각돼서 이리 못난, 그래요 정작 학자도 아닌 사람이 경제 이야기하는 거 분명 못난 짓이니 못난 소리 한마디 하겠다고 미리 말씀드리는 것이올시다. 빨갱이 이야기는 본래 경제학부터 시작되는 거 아닌가요? 잘 모르면서도 경제 이야기하는 그 까닭입니다. 부디 경인년 하아얀 호랑이해에 하아얀 호랑이처럼 선뜻 이제까지의 시시껄렁한 경제의 문을 열고 다들 달걀 밖으로 한 번 훌쩍 나오십시오. '줄탁(啐啄)'말입니다. 병아리가 때가 돼서 나오려고 안에서 부리로 쪼는 바로 그 부위를 밖에 있는 어미가 정확히 탁 쪼아서 달걀을 깨트린다는 절집의 깨달음 이야기 말입니다.

우리는 그 새 경제라는 이름의 병아리에게 엄마나 절집의 조실스님 아닌가요? 아니면 우리가 아직도 병아리인가요? 하아얀 호랑이해에 어디 한번 성큼성큼한 어미 닭 노릇 좀 해보십시다. 이 글들 괜찮다면 '줄탁'은 너무 어렵고 '혁신'이라는 제목으로 한번 책을 내볼까 합니다. 고희 기념인 셈이지요. 의견 주십시오. 부디 안녕하소서.

고희를 맞으며
배부른산 無實里에서
참으로 못난 사람, 김지하 모심


글 싣는 순서

1. 하나가 여럿에게 가는 길
2. 물
3. 님
4. 도깨비
5. 혁신

하나가 여럿에게 가는 길
(2009년 11월 13일, 인천 드림시티, 동아시아 경제공동체 포럼 기조강연)

▲ 김지하 시인. ⓒ인디코
무엇이 지금 우리들 앞에 놓인 과제인가?
그 과제의 이름이 무엇인가?
그 이름은 다름 아닌 '하나가 여럿에게 가는 길'이다. 왜 그런가?

하나와 여럿사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돈과 마음 사이의 관계를 제대로 보지 못한 지난날의 모자람이 축적된 결과가 바로 지금 여기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요 문화위기요 대혼돈(Big Chaos)이라는 이름의 세계위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여기 모인 것이고 그래서 오늘 우리가 논의하고 해결을 모색해야 할 명제가 다름 아닌 '하나가 여럿에게 가는 길'이요. 또한 '그 길에서 돈과 마음의 관계를 이제야말로 제대로 이해하고 해결하는 것'으로 된 것이다.

나는 십 수 년 전 마르크스에 관한 옛 원고로부터 다음의 한 구절을 문득 읽은 적이 있다.

'화폐는 마음과 무관하다. 그리고 여럿은 하나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실제 이런 구절은 마르크스 안에 없다. 그러나 그의 여러 가지 언급으로부터의 총괄적 결론이 그렇다는 말이다.

인류는 그 자각적 역사가 시작된 이후 단 한 번도 자기 마음으로부터 화폐를 해방한 적이 없고 화폐로부터 자기 마음을 통상적으로 해방시켜 본적이 없다. 그것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삭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불교 이야기다.

인류는 그 동굴 앞 모닥불 앞에 모여 앉기 시작한 이후 단 한 번도 한 사람이 여럿으로부터, 여러 사람이 한 사람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거나 이탈해 본 적이 없다. 도대체 고립과 이탈이 애당초 불가능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삭발을 했을 때뿐이다. 감옥이야기다.

그런데 위대한 마르크스는 어째서 그런 바보 같은 말씀을 감히 주장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는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즉 그를 통해서 인간은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이른바 교통신호로서의 빨간불이다.

빨간불이 영원히 지속되는 교통질서는 없다. 곧 파란불이 켜지고 사람들은 하나에서 여럿으로, 돈에서 마음으로 또는 그 반대로 바삐 길을 건너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빨간불은 왜 켜졌던 것인가? 차가 지나가기 위해서다. 차가 무엇인가? 그것은 문명이고 기계이고 인간의 발명품이니 인간의 어떤 희망의 표현이었다.

빨리 가고 싶다든가 편하게 가고 싶다든가 멋지게 또는 문명인답게 가고 싶다든가 등등일 것이다. 그것이 나쁜 것일 리는 없다. 문제는 그 이전에 무언가 불편함, 너무 느림, 멋없음, 너무 옛스러움 등이 한참을 우리에게 불편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하겠다.

그렇다고 마르크스 만세를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리는 있었으나 이리는 없었다. 더욱이 한 가지 방편적 정당성을 영원한 보편진리로 착각하여 한 세기 가까이 교통질서를 끊임없는 빨간불 위주로 긴장시키려 한 죄는 역사에서 지우지 못한다.

다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방편적 정당성을 이제는 차가운 머리로 그야말로 정당하게 평가하는 자세다. 오늘 이 자리에서의 논의를 바로 그곳으로부터 시작하는 것도 의미 있으리라 생각되어서 하는 이야기다.

미국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의 적신호와 대혼돈은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던가?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했으나 이런 것은 어떤가? 마르크스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화폐질서에 마음이 끼어든 결과, 그것도 혹독하게 끼어든 결과 아닌가라는 이야기다. 엄정하고 냉냉한 화폐의 객관적 질서에 '버블' 즉 '거품'이라는 기괴한 표현을 갖다 붙이는 것, 그것만으로도 불가사의한데 이것은 '슈퍼 버블' 즉 '거품 할아버지'의 경우라 하니 그렇지 않은가!

거품이 카지노 자본주의의 그 카오스 현상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헤지펀드에 압축된 돈과 이윤에의 탐욕을 말하는 것이겠고 그렇다면 '슈퍼 버블' 즉 '거품 할아버지'는 '마음의 마음'이라고 부르는 '귀신'일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10여 년 전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금융자본주의를 '귀신 자본주의'라고 부른 바 있다. 우선 귀신 상태에까지 이른 마음, 저승에 가서까지도 잊을 수 없는 막대한 돈과 이윤에 대한 집착이 좌지우지하는 바로 그 엄정한 화폐론 속의 뒤죽박죽으로 기괴한 그 언필칭 객관적 질서에 대해 버블이나 슈퍼버블 정도의 우아한 표현으로 예우하는 것도 딴에는 매우 재미난 현상이다.

이미 화폐론에 대한 마르크스식의 속류 유물론이나 잉여의 노동회귀라는 뱃장 편한 변증법적 필언의 신화가 매우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박살이 난 대규모 스펙타클이 바로 지난번의 금융폭발일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꼬꾸라졌다고 해서 지난번의 월가의 폭발사건이 그리도 고소하고 재미나기만 한 사건일수 있을까? 물론 마르크스식의 '열문벽(列文壁 · 맹자의 문자로서, 쓰여진 글자 이외엔 그 밑에 감추어진 뜻 같은 것을 전혀 읽어내지 못하는 서푼짜리 지식인)'이 그가 그토록 매달리던 엄정한 역사법칙의 현장에서 도리어 가차없이 처형당한 것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겠으나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째서 그 '열문벽 마르크스'에 대한 동서 지식인들의 열광이 근 한 세기동안 도무지 그칠 줄을 몰랐던가 하는 것에 대한 반드시 필요한 점검인 것이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모두 다 미쳤거나 멍청이들이었던가? 근대라는 이름의 과학만능시대의 일반적 정신병에 불과한 것이었던가? 그것으로 끝인가? 그렇지 않다는 데에서부터 오늘 논의의 진정한 출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실질적 주장이다. 처음 명제로 다시 돌아간다.

'하나에서 여럿으로 가는 길에서 돈과 마음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해결하는 것'

어떻게 할 것인가? 돈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현실이다. 드러나는 차원.

마음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현실 속의 비현실이다. 숨은 차원.

이제 인류는 지난번 미국 금융위기를 교훈삼아 삶이 다만 드러난 현실만도, 숨겨진 생각만도 아닌 드러남 속에 숨김이, 숨김이 어느 날 드러나는 그러한 생동하고 교체하는 안팎의 관계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경제가 다만 드러난 바깥만의 삶이 아니고 마음이나 문화가 다만 숨겨진 내면의 소망만이 아닌, 분명히 안팎 상호융합의 소통관계임을 뉴욕의 시커먼 거품을 통해 아프게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배움을 여기서 또 하나 반드시 얻어야 한다. 2500여 년 전 석가모니 붓다는 그 깨달음의 과정에서 한때 마구니, 즉 마귀와 맞부딛치게 된다. 그때 이야기다.

한 마구니가 부처님께 묻는다.

'이것이 무엇이요?'

금덩어리었다. 부처님이 대답한다.

'내 마음이다'
'어째서 내 마음이라고 하는가? 이것은 금이고 또 마음이라고 하더라도 마구니인 내 마음이지 네 마음이 아니지 않는가?'

이 대목이 중요하다. 부처님 대답이다.

'마음 안에는 금덩어리도 있고 똥덩어리도 있다. 또 너도 있고 나도 있다. 그리고 마구니도 있고 부처님도 있다. 그러므로 마음은 아직 드러난 이것저것 이전의 그 전체로서의 주인공이다. 그래서 내 마음이고 내 금덩어리고 내 마구니다'

산속의 한 맵씨나무('보루라밀' 생나무) 밑에서다. 그렇다. 세월이 아무리 흐르고 장소와 주인공이 몇 번을 바뀌어도 이것은 변하면서도 변함없는 진리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원천의 길로 돌아가야 한다. '마음과 돈', '부처님과 마구니'가 서로 소통하는 그 길로. 그래서 오늘 우리는 여기 모여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에 또한 문제가 있다. 무엇인가? 화엄경(華嚴經) 대종이과(大宗二科)에는 다음과 같은 불교 정통경제원리가 나타난다. '장바닥의 먼지는 함께 뒤집어쓰되 탐욕엔 결코 물들지 않을 것. 이것이 중생의 삶을 이롭게 하는 항상된 진리의 길이다(同塵不染利生常道)'

'장바닥에서 함께 먼지를 뒤집어 씀(同塵)'은 바로 '교환(交換)'을, '탐욕에는 결코 물들지 않음(不染)'을 '호혜(互惠)'를, 그리고 그 '교환'과 '호혜'를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는 것이 천만 아니라(바로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 그 양자가 혼돈적 질서 안에서 상호 양립하는 객관적 시장패턴(호혜가 단순한 종교적 자선을 넘어 이제부터의 새로운 동아시아 경제에서는 교환과 똑같은 객관적 시장패턴으로 현실화해야 한다는 것이 선결의 전제조건인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 논의의 한계 안에서의 현실적 종결점일 수 있다)이라는 드러난 질서 밑에 숨어서 하나의 불가사의한 숨은 진실로서 그 드러난 호혜와 교환을 양립도 하고(구분) 융합도 하게끔(상호영향) 추동(推動), 조정(調整), 수정(修正), 비판(批判)하다가 어떤 큰 차원 변화의 시점에서는 그 스스로 드러나기도 하는 숨은 영적 생명력의 존재. 이것이 '중생의 삶을 이롭게 하는 항상된 진리의 길(利生常道)'인 것이다.

경제학적으로는 바로 이것이 '획기적 재분배(劃期的 再分配)' 또는 그 재분배의 기획력의 굴재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이제 나의 경험을 예로 들면서 조금씩 정리를 해보자.

첫째, 나는 수년전 중앙아시아 기행 중에 파미르 고원 가까운 키르키즈스탄의 고도 1500미터 산 위의 호수 '이쉬쿨' 바로 그 물가에 열리는 약 1000여 년 전통의 재래시장 '야르마르크트'에서 참으로 희귀한 광경을 이른 아침에 목격한 바 있다. 그들은 머나먼 남미대륙을 포함, 유럽, 중국, 일본, 인도와 아랍 등에서까지 장보러 온 바자르계(契)꾼들이었다. 서로 카드놀이를 하며 안부를 묻고 차를 나눠 마시며 서로의 뺨을 어루만지면서 건강을 걱정하고 있었다. 수많은 상품 종류에 대한 참으로 놀라운 '가격다양성(價格多樣性)'과 신축자재한 '협의가격(協議價格)'의 존재는 그야말로 현대 동아시아의 아직은 실험영역에 불과한 '생명경제학'에서 탐구 논의 중인 이른바 '탈상품화(脫商品化)'를 통한 '재상품화(再商品化)'라는 새로운 명제를 그대로 연상시키고 있었다. 그 안에 이미 호혜와 교환, 그리고 막연하지만 어떤 형태의 획기적 재분배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1000여 년 전통을 가진 바자르다.

둘째,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바자르의 경험이다. 티무르 대제의 저 유명한 한 황후의 성전인 비비하눔 바로 앞마당에 사마르칸트 최대의 바자르가 열리고 있었다. 나는 사마르칸트 주립대학 부총장인 경제학자 사하로브 박사에게 물었다.

'어떤 사상문화적인 이유로 가장 성스러운 자리에 가장 속된 장바닥이 열릴 수 있는가?'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어떤 사상문화적인 이유로 가장 성스러운 자리에 가장 속된 장바닥이 열릴 수 없는 것인가?'

크게 놀랐다. 박사의 설명이 이어진다.

'이슬람 훨씬 이전부터 모든 아시아에서는 가장 성스러운 하늘의 자리에 가장 속된 땅의 가장 삶에 절실한 인간의 장바닥이 열려왔다. 그것이 하늘과 땅과 인간이 결합되는 참으로 성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먼 곳에 사는 바자르계 꾼들이 달을 쳐다보고 장날을 알았으며 달의 기울기와 빛깔을 보고 먼 곳 장꾼들의 마음과 건강이나 결핍, 필요를 예감하면서 거기에 합당한 제 물건을 들고 장터에 모인 것이다.

서로 차를 나누어 마시며 상대의 형편과 날씨와 농사와 살림과 집안의 건강을 물어 가격을 그에 따라 조정하였고 풍악이 울리면 춤과 노래로 함께 신 앞에 나아가 기원을 드렸으며 삶에 대해, 자연 생태계에 대해, 서로의 연대에 대해 그때그때 필요한 부족연맹체나 혹은 상호 이질적인 유목-농경, 남자 여자 등의 관계를 조장하는 정치회의를 집행했는데 바로 이곳을 유목적 정착지, 즉 '솟대', '금성의 땅', '쵸폰아타'라 불렀다"

나는 그 순간 이쉬쿨의 야르마르크트가 열리는 옛 마을의 본래 이름이 '촐폰아타(Chorponatta)'요 사마르칸트의 원래 이름이 '쵸폰아타(Choponatta)'이며 우리 고구려의 첫 이름이 '졸본성(卒本成)'임을 깨닫고 순식간에 가슴이 서늘하였다. '신시(神市)', 바로 '호혜시장(互惠市場)'의 역사인 것이다.

이것은 아시아 도처에 아직도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농촌 오일장(五日場)이 그러하고 터키의 바자르가 그러하고 배트남의 동바시장이 아직까지도 원리적으로는 똑 그러하다.

오늘 우리의 동아시아 경제포럼은 참으로 첨단적인 이상적 신경제를 탐색하는 자리일 것이다. 이 자리의 논의 내용에 바로 이 같은 아시아 전통의 불교적 경제원리, 또는 옛 바자르, 그리고 신시의 경제 양식은 참고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인가? 그저 구닥다리 옛 흔적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그렇다면 묻자. 일본의 경제전문가 '요사노 가오루'의 '따뜻한 자본주의'나 '착한 경제'는 무엇을 뜻하는가? 교세라 명예회장 이나모리 가즈오의 '자비를 근본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무엇을 뜻하는가? 유명한 경제통 待天豊雄의 '축적순환'과 '환류시스템(페르낭 브로델의 아날경제학 개념)'은 그저 그렇고 그런 또 하나의 '워싱턴 컨센서스'나 '베이징 컨센서스'에 불과한가? 새로운 기축 통화 이야기에 불과한가? 현상적인 '한·중·일·미국 네 나라 사이의 스와프 차원'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이제 막 유럽에서 떠오르기 시작하는 새로운 경제제도 논의 중의 하나인 아날학파의 '페르낭 브로델'의 '콩종튀르'와 '환류시스템' 그리고 칼 폴라니의 '호혜, 교환, 획기적 재분배' 사이의 복합적 추진의 첫 샘물과 같은 것인가? 여러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마취 귀신불처럼 번지고 있는 징후들인 '마이크로 크레디트', '페어 트레이드' 또는 형태는 다르지만 '지역통화'나 '포트라치' 등은 과연 무엇의 도래를 예감시키는 작은 불빛들인가?

일본의 가장 강력한 생활협동조합인 후꾸오까의 '그린코프'는 수많은 유기농 생협들과 환경단체들, 시민권익단체와 여성운동그룹들을 중심으로 하고 거기에 지난 20년 동안 '민중교역'을 진행해온 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 '동티모르, 말레이시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등의 민중생명운동들과 연대하여 작년 말부터 '호혜를 전면에, 교환을 일상으로, 재분배를 준비하며'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워 우선 '호혜를 위한 아시아 민중기금' 조성사업부터 착수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이들 시민, 민중, 여성운동은 그 가장 큰 고민이자 사업의 초점을 호혜와 교환이라는 종교적 자선과 자본주의적 시장 경제기능을 객관적 시장패턴 안에서 함께 현실화시키는 것은 어느 정도 낙관하면서도 가장 골치 아픈 영역을 그 두 기능 밑에서 그 두 기능을 사실상 좌우하게 될 '획기적 재분배'의 구체적 실천에 두고 있다.

이때 그 '재분배'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최종깃발인 '평등 분배'일 때는 마르크스주의와 똑같이 추상적 낭만주의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 경제사적인 새카만 강박감인 것이다. 여기에 세 가지 하얀 촛불이 켜졌다.

그 하나는 나 자신이 관여한 한국의 '신시연구그룹'의 연구 성과이고 고조선 신시조정기능의 정치력이 단군과 왕검으로 이원화 돼 있었다는 결론과 함께 칼 폴라니 그룹의 제안인 획기적 재분배의 그 획기성의 판단, 기획, 집행, 정의보다 섬세한 기능 확보를 위한 '중심성(Centrity)' 즉 정치적 조정기능의 이원집정제(二元執政制)의 불가피성이 그 둘이고 마지막 셋은 1만 4000년 전 파미르 고원 마고성 시대 이후의 우주생명질서인 팔여사율(八呂四律) · 혼돈성 · 생동성 ··여성성 ·· 개체성 · 우연성 여덟과 균형성 · 대칭성 · 남성성 · 집단성 · 필연성 넷 사이의 융합인 혼돈적 질서에 입각한 여성 중심의 남녀이원집정제에 의한 신시체제(호혜 · 교환 · 획기적 재분배와 축적 순환의 환류 시스템의 동시융합)와 그 이후 19세기 후천개벽역학인 김일부(金一夫) 정역(正易)의 '여율(呂律 · 양은 눌러서 다스리고 음은 도리어 높이 뜀뛰게 하는 체제)'의 기본 원리에 따라 동학 최수운의 '산 위의 물(山上之有水 · 유목적 정착시장 즉 신시)의 근현대적 실행인 해월 최시형의 '비단 깔린 장바닥(일종의 '따뜻한 자본주의')을 실현해보자는 나의 제안이 그것이다.

이 자리에서 한번 논의해볼 용의가 있는가? 미국과 유럽은 아직 오리무중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지금 형편은 어떤가? 우리들, 동아시아 경제의 모범이 될 만한가? 그들이 좋아하고 자랑하는 역계(易計)로 따져서 표현한다면 한 마디로 '艮爲山(산이 산이다)'이다. 그 첫 괘사는 다음이다.

"艮其背 不獲其身 行其庭 不見其人 无咎'(그 등에 그쳐서 그 몸을 얻지 못하고 그 뜰에 가서 그 사람을 보지 못함이니 허물이 없느니라)

기이하다. 마지막 말은 '허물이 없다(无咎')'이니 매우 좋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참으로 좋은 것인가? 어째서 등에 그치고 몸을 얻지 못하며 그 집안의 뜰에까지 들어가 그 집주인인 사람을 보지 못하는데도 허물이 없는 것인가? 참으로 기이하고 또 기이하다.

이 괘상을 명나라 때의 큰 장수 소손녕(蘇遜寧)이 히수전쟁(夏水戰爭)에서 병법의 대원칙으로 굳게 믿고 산 위로부터의 대공격 전투를 벌였다가 크게 대패한 뒤 바로 이 괘를 두고 대취 끝에 욕을 하며 개걸개걸댄 한 마디가 지금껏 남아 있다고 전한다.

霧實

한글로 해석하자면 '안개가 가득 끼어 잘 가려 볼 수 없는 목적지'의 뜻이다. 무엇이 그 목적지였을까? 물이다. 물이 무엇일까? 소손녕의 경우는 전락 목표인 하수(夏水)겠지만 이는 '돈과 마음의 상관'을 압축하는 중국 전래 상도(常道)의 메타포이기도 하다. 최근 한국에서도 인기리에 방영된 중국 기업영화 '거상쯔융' 가운데서도 튀어 나오는 말이다.

괜찮을까? 정말 괜찮을까? 두 번이나 되풀이 했다. 현존 중국의 정치문화와 함께 그 경제형편이 정말 걱정스럽다는 뜻이다. 나는 이제 마지막 결론의 말 한 마디를 아니 할 수 없다. 물. 바로 그 물 말이다. 물은 첫 샘물을 떠나 거대한 강물을 이루고 더욱 더 거대한 바다로 바다로 나아가지만 결국은 하늘로 증발하고 땅으로 스며들고 인간의 기억 속의 기이한 '원천열(怨天熱)'을 따라 결국은 그 첫 잊어버린 샘물로 반드시 돌아가는 법이다.

문명도 한가지다. 전 인류 문명의 첫 샘물은 아시아다. 이제 그 문명의 역사는 다시 아시아의 첫 샘물로 '환귀본처(還歸本處)'하고 있다. 누구도 이것을 막을 수는 없다. 우리는 지금 그래서 이 자리에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1000년 전통의 '야르마르크트'가 산 위 1500미터의 물가에서 지금까지도 열리는 있음을 결코 잊지 말기 바란다.

돈과 마음의 상관의 상징이 물이고 하나에서 여럿으로 나아가고 또 나아가는 막을 수 없는 흐름이 또한 물이다. 참 경제, 사시, 또는 '비단 깔린 강바닥'은 바로 이러한 물이었기에 옛 신시를 일러 '산 위의 물(山澤通氣, 艮兌合德, 山上之有水)'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진정한 경제는 화엄(華嚴)이다. 그러나 이 화엄세계는 근본적으로 공동체와 세계 통일을 뜻하는 '한송이 세계꽃'이 아니다.

이 포럼도 공동체 포럼인데 다시금 깊이 자기성찰을 하기 바란다. 공동체는 이미 옛이야기다. 작게는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몬드라곤', 이스라엘의 '키브츠', 일본의 '야마가시'가 모두 다 끝장났고 신자유주의 세계 무역공동체이고 '워싱턴 컨센서스'도 그 짝퉁으로 등장했다가 온 세계의 비웃음 속에 금세 자취를 감춘 '베이징 컨센서스, 그리고 한국의 일부 멍청한 헛똑똑이들의 망상인 '서울 컨센서스' 역시 전혀 그 설 자리가 없다.

현대는 공동체의 시대가 아닌 것이 다. 미국의 현존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의 '내부공생(內部共生 - Endosymbiosis - 互惠)과 현대 진화론의 '개체-융합(identity-fusion)' 그리고 동학의 주장인 '각지불이(各知不移 화엄적 대융합을 각자 제 나름으로 깨달아 실천하는)'를 잘 살피기 바란다.

현대가 요청하는 화엄세계는 '달이 천 개의 강물에 모두 다 다르게 따로따로 비침(月印天江)' 이요 '작은 먼지 한 톨 안에도 우주가 살아 있음(一微塵中含十方)'이니 먼지 같은 돈 안에 우주 같은 마음이 살아있음이고 하나가 여럿에게로 나아가는 가장 이상적인 길 그 자체인 것이다. 이 시대의 모든 사회인들이 그 누구도 남의 일이나 공동체를 걱정하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제 이익만 생각한다. 그렇다. 말세다. 그러나 바로 이 말세가 다름아닌, '월인천강'의 현실적인 시작이 되는 것이다. 착각 없기 바란다. 참다운 흰 빛은 언제나 시커먼 그늘로부터 탄생하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그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우주적 대융합이 숨겨져 있음을 자기 나름으로 발견하고 자기 나름으로 실천하는 길을 찾는 것, 이것이 하나가 여럿에게 가는 길이고 돈과 마음을 융합하는 길이다. 이것을 화엄세계에서는 '물' 즉 '삼인삼매(三印三昧)'라고 부른다. 물은 여성성, 여성 특유의 생활적 지혜와 소비패턴의 상징이이기도 하다.

물의 변함없는 이 기이한 상징성에 깊이 착안하길 바라면서 나의 말을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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