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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 백운면 마을조사 사업에 대한 회고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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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 백운면 마을조사 사업에 대한 회고와 전망

[김정헌의 '예술가가 사는 마을']<11>

늦은 저녁을 먹고 진안읍에 있는 '전통문화전수관'에 세 명의 마을조사단장들과 우리 답사팀이 자리를 같이 했다. 1기 단장인 손내옹기의 이현배만 백운면에 있는 그의 옹기공방에서 따로 출발해 합류했다. 2기 단장인 오인규는 지금 '전통문화전수관'에서 일하며 거의 여기서 숙식을 하니 여기가 그의 일터이며 집인 셈이고 3기 박명학 단장은 우리 답사팀의 멤버인 까닭에 자연스레 그 동안의 마을조사 단장이 한 자리에 같이 모이게 되었다.


내가 마을조사사업을 알게 된 것은 몇 년 전 일이다. 그 이전부터 마을에 대해 이 생각 저 생각을 해서 얻은 결론은 마을조사가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마을조사를 통해 그 마을의 중요한 자원과 가치가 무엇인지를 주민들이 알게 되면 자기 마을에 대한 주민들의 인식도 달라지리라 여겼던 것이다.


한 마을의 자원과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경제적 자원, 인적 자원, 자연생태적 자원만이 아니라, 마을의 인문적 가치, 민속적 가치, 경관적 가치 등등.


이런 마을의 자원과 가치를 주민들 스스로 들어내고 발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민 스스로의 자발적인 조사는 그 사례도 없을뿐더러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사업은 어쩔 수 없이 외부 전문가의 지원과 이러한 조사의 중요성을 알고 관이나 민간 기업 등에서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마을 조사사업의 중요성을 알고 먼저 나선 것이 '생명의 숲'의 활동을 지원한 유한킴벌리의 문국현사장이다. 그는 2006년도 '생명의 숲'의 김재현 건국대 교수와 함께 제천의 백운면과 진안의 백운면 두 군데를 선정해 계획을 세우고 두 백운면 마을 조사사업을 시작한다.


제천의 백운면(1차 답사를 했던 판화가 이철수가 사는 마을)은 우리가 1차 마을답사 때 밝혔듯이 그 동네에 대규모 리조트 단지 개발 사업으로 인해 한 해로 조사사업이 마감됐다. 아쉬운 일이다.


진안의 백운면은 그간 진안군을 '마을 만들기' 메카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 온 덕분인지 작년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진안 백운면 마을 조사 사업은 지금까지 명맥이 끊긴 것은 아니지만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

먼저 단장들의 마을조사사업에 대한 견해를 들어보았다. 백운면에서 마을조사사업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단장일은 어떻게 맡게 되었는지? 등을 물었다.

(* 3명의 단장이 돌아가면서 발언했는데 한꺼번에 말한 것으로 정리했음.)


이현배(1기 마을조사 사업단장)


-2006년도에 이 사업이 처음 시작됐다. 진안군에 들어 온 것은 진안군에 마을 간사제가 실시되고 있을 때였는데, 이것이 농촌형 사회적 일자리 창출과 관련 돼 있어서, 이때 진안군에서 이 일과 관련된 전문직으로 10명 정도의 계약직 공무원을 채용하면서 진안군의 마을만들기 사업을 전담을 시켰다.


- 당시 지리산에서 진안군에서 마련한 마을만들기에 대한 워크숍을 할 때 군 관계자와 나는 많은 토론을 벌였다. 문화자원조사가 없는 마을만들기의 한계 즉 지역사회, 농촌사회 마을구성체의 한계에 대해 교감을 나눴다.


- 마을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는 공동체성과 자치 아닌가? 일본이 영주제로 자치가 일반화된 것에 비교하면 우리에게는 삼국통일 이후로 중앙집권화 됐기에 마을은 하나의 이상향으로 아나키즘적 요소가 강하다. 이런 마을만들기가 정부주도형으로 가는 것은 사실 모순된 것이다........


- 농촌의 어려움은 근본적으로 농업의 어려움에서 형성된 것이고 글로벌화 되면서 국가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어서 굉장한 시간을 요하는 것이다....


- 군 관계자는 처음 진안군 전체를 '마을만들기'사업으로 제안했는데 나는 군 전체 보다는 면단위의 마을만들기가 의미가 있다고 했다. 농촌의 현실에서 최소한의 규모가 면단위라고 본다. 초등, 중등학교를 같이 다닌 정서적 기반과 현실적인 삶을 기반으로 한 사회조직이 많아서 훈련화 되어 있다.


- 새로운 마을만들기는 기존의 마을에 링겔을 꽂는 게 아니라, 인문학적 배경을 찾는 것에 의미를 두면 좋겠다고 했더니 그 일을 주관해 달라기에 내 삶의 반경 안에서 이루어지면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백운면에서 하게 되었다.


- 그러나 막상 그 역할을 맡아 놓고 보니 쉽지가 않았다. 이게 아마 행정에서 하는 것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업의 사회발전기금을 받고 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 근본적으로 아나키즘 입장에서 해야 의미가 있지 않나 해서 했다.


- 사업을 주관하는 입장에서는 사회적 일자리 창출의 틀을 유지하는 것을 우선시 할 수밖에 없었으나, 지역 입장에서 보면 지역문화 재생이 먼저였다.

박명학(3기 마을조사단장)


- 이현배 선생이나 오인규 단장, 그리고 저까지 길지않은 기간의 단장 역할에 말 못할 곡절이 많았던 듯 하다. (일동 웃음)


- 마을조사단을 바라보는 입장은 매우 스펙트럼이 넓다. 직간접적으로 이해 당사자들이 어차피 어떤 하나의 일을 할 때 모든 사람이 똑같은 공감을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진폭이 컨트롤할 수 없게 넓으면 굉장히 힘들다. 진안의 마을조사가 그렇다. 시간이 더디더라도 처음 시작할 때 진폭을 컨트롤하고 시작해야 했는데 할수록 진폭이 커졌다. 행정관청, 당사자, 마을주민, 같이 일하는 단원들... 정말 아쉽다. 나 자신의 역량의 한계를 절감했다.


- 마을 조사에서 어떤 사람은 '왜 하느냐?, 무엇을 할 것이냐?'에 초점을 맞추고, 또 어떤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이냐?'에 집중한다. 3년 정도 됐으면 이제 노하우나 방법론이 아니라 '왜 하는지?, 무엇을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 로드맵이란 것도, 방법론도 일 년 안에 잡힌다. '왜 하는지?' 대체 '무엇을 할 것인지?' 끊임없이 행정계통이나 주민들의 반복적인 성찰과 학습 그리고 백업이 이루어졌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오인규(3기 마을조사 단장)

- 원래 (마을조사의) 로드맵이 없이 시작했다.
그런 담론(박명학이 말한 마을조사를 '왜 하는지?, 무엇을 조사할 것인지?')을 만들다 보면 싸움이 된다. 서로 입장이 나뉜다. 주민, 마을조사단 단장, 단원의 입장이 일치가 안 된다.


- 사전에 조율이 돼서 그림이 그려지면 좋을 텐데 그러지 않으니까 하던 방식대로 정해지고 그 입장을 다 가지고 가게 된다. 그런 부분이 처음부터 방치된 것이다. 2006년 6월부터 5명의 단원(오인규는 1기 때 단원으로 시작했다)들의 입장에서 그림을 그리며 시작했다. 현장성 있는 그림을 그려서서로가 공유하고 나가야 되는데 그러질 못하다 보니 바꾸기가 쉽지 않고, 단장이든 뭐든 안 되는 부분이 많았다.

(잠시 쉬었다 다시 시작했다. 이번에는 마을조사 사업이 아직도 할 만한 가치가 있고 유효하다고 보는지를 물었다.)

이현배


- 매우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굉장히 위험요소도 있다. 경제적 가치가 우선시되다 보니까 주변의 공감대를 얻기 위해 문화관광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삶의 문화를 상품화 할 때 이미 삶의 문화라는 것이 개념화되어 굉장히 쉬워진다. 마을조사라는 것이 오늘날의 행태에 맞고 그 자체로 스토리텔링이 되어 있어서, 농촌의 굉장히 유효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 마을조사단을 지역에 소개하고 그러지만 매우 조심스런 마음이 늘 있다. 마을조사에 대해 처음에 로드맵을 제시했을 때, 오랜 시간에 의해서 적어도 단계적으로는, 문화자원을 조사하고 분석, 재구성해서 계획을 세워서 실행하고 4단계로 구성해서 제시를 했었다. 그러나 2006년도에는 그에 부합할 만한 조사 성과가 없다는 게 고민이었고, 그런 경우 조사단에서는 박명학 전단장께서 말씀하신대로 '왜 하느냐'는 문제가 걸리는 거다.


- 지역 재생과 지역 활성화를 위해서 한다고 하면 이걸 가지고 어떻게 활성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고, 그러면 '그건 지역에서 고민할 문제다.'라는 식의 논쟁이 벌어졌다.


찜찜한 부분도 있었지만 그 시점에서 사업을 일 년 더 연장시켜주면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봤다.


- 2007년도에는 젊은 세대들이 팀으로 모여 공공미술이라던지, 간판개선사업, 면지발간, 일상창작공간사업 등 문화를 매개로 하면서 지역을 활성화 할 수 있는 일들이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조사단 입장에서는 '마을조사단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며 말이 많았다. 그런데 그 때는 반대했던 이들이 이제는 성과로 얘기하고 있다.


- 이것이 단기적으로 된 사업(마을 조사사업)이라, 자생력을 가지려면 '대단'해야지 '대견'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남이 안한 것을 한 퍼포먼스가 됐는데 그러자고 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 내 입장에선 어디에 성과물로 보이긴 민망하다. 나 자신도 필요성에 의해, 내가 유효한 방법론에서 지식적 습득을 했지 학자로서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것을 응용해서 내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백운에서는 기존의 면지 조사하고 기존의 (마을조사)보고서 만으로도 충분히 활동할 수 있는데, 조사단 활동이 주민을 타율화, 타자화시킬 우려도 있다.

박명학


- 지역에 내려와 보니까 행정의 리더십이 절대적이다. 지역은 거의 지자체 행정의 리더십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지방공무원은 중앙공무원보다 더 똑똑해야 한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중앙은 공무원말고도 인적 자원이 많기에 똑똑하지 않아도 된다. 지역은 공무원의 인적자원이 절대적이다. 말은 주민자치를 얘기하나, 그러기 위해서도 지역은 행정의 리더십이 중요하다.


- 진안의 마을조사에 이런 방법을 제안해 보고 싶다. 예전에는 행정에서 선제적으로 마을조사를 하겠다고 틀을 잡고 주민에게 통보했지만 그러질 말고 계획 세우는 방법에서부터 주민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예산이 있으니 마을조사를 어떻게 할까요?'하고 아예 주민들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군에서 일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순서로 무엇을 할 것인가의 계획을 주민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 주민들한테서 무엇을 조사하겠다는 게 당장은 안 나올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사전 서베이가 필요할 것이다. 끊임없이 자기 마을에 대한 고민을 학습시키는 거다. 어차피 10년, 20년 할 것이라면, 큰 계획을 세우는 차원에서 정책집행 의지가 뭐냐는 거죠? 주민을 타자화, 대상화하는 것으로는 절대로 학습이 안 될 것이다.


- 결과물을 가지고 평가나 성과를 내려면 평가가 안 되는 게 많다. 목표가 불분명해서 그렇다. 목표가 분명해야 된다.


- 공공기관 자리는 바뀐다. 장관도 대통령도 바뀐다. 자신의 정책을 유지시키려면 공무원과 국민을 학습시켜야한다. 자기 때에는 안 된다. 절대로 3년, 5년 만에 될 사업은 없다. 학습이 어느 정도 된 주민들은 군수, 장관, 대통령이 바뀌어도 이미 학습이 됐기에 지켜낼 내공이 있다. 지속시킬 수 있다.


- 주민이 타자화되지 않으려면 주민이 설계에 참여해야 한다. 행정에서 자기들이 설계 다하고 주민이 참여하면 그것은 동원이지 참여가 아니다. 설계부터 참여하는 방식으로 10년이 지나면 주민은 높은 단계에서 참여할 수 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그분들이 설계해야 한다. 오히려 행정 관청은 주민들이 설계한 것을 시공해 줘야 한다.
- 진안의 마을조사 컨셉은 정말 좋다. 진안군에서 어렵더라도 끌고 가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올 것이다.

오인규


- 이런 문제가 있다. 주민주체라는 것이 처음부터 안 된다. 이것은 1년 정도 학습이 된 뒤에나 된다. 가볍게 뭔가를 해보고 주민들과 만나면서, 이해하면서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여건이 되면 본 사업을 해야 하고 이것이 끝나면 평가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 이걸 정리를 안 하니까 모순이 반복된다. 게다가 주민들은 속얘기가 다 있는데도 모이면 싫은 소리를 못한다.


- 도서관 만드는 일을 모임에서 해 봤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다. 뭔가 일을 계속 한 달에 두세 번 모여서 하니까, 설계부터 놀이과정을 같이 해 봤다. 그것이 된 다음에 본 사업에 들어가야지, 워크숍 같은 걸로는 학습이 안된다.


- 처음에 왔을 때는 몰랐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 농촌의 정착프로그램으로는 마을조사가 좋은 사업이다. 농사가 아니라 귀농, 귀촌 프로그램으로 훌륭할 수 있다. 마을을 공부하고 조사하고 여기에 정착하는 프로그램으로 우수하다. 그리고 진정한 조사는 이 사람들이 1~2년 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를 내리고 난 후부터 해야 할 수 있다. 지금은 붕 떠 있다. 언제 어디로 떠날지 모른다. 정착을 못한다. 그래서 굉장히 위험한 사업이 된 것이다.

세 단장들은 단원으로서 또 단장으로서 백운면 마을 조사사업을 하면서 그들이 느낀 점을 비교적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이현배 단장은 초기에 당시 진안군에서 '마을 만들기'에 심혈을 쏟던 시기에 마을 만들기 팀장으로 영입된 구자인 박사 등과 함께 생명의 숲, 유한킴벌리 등의 물심 양면의 지원으로 마을조사 사업을 시작했다.


내가 이 마을 조사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처음 찾아간 것은 1차 사업이 끝나가던 2006년도 말로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에 '생명의 숲'의 김재현 교수와 구자인 팀장의 사회로 군청에서 열린, 1차 마을 조사 사업에 대한 보고와 평가, 다음 해의 사업 진행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회의 자리였다.


그 날 나는 자진해서 이 마을조사 사업의 자문위원을 요청했고 마을 조사 사업단도 이를 수락했다.


이현배 단장과는 전화로도 수시로 연락했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백운면 원천 마을과 이현배의 손내옹기를 방문했다.


그러면서 이현배한테 들은 얘기가 있다. 2006년도 마을 조사사업단에서 면민 체육대회 날, 마을조사단에서 몇 가지 프로그램에 참여를 했다고 한다. 그 중에 하나가 마을 조사를 하면서 각 집에서 나온 옛날 사진들을 모아서 연 전시회였다고 한다. 이것이 크게 히트했다고 한다. 그 날이 그 해 추석이었던 모양인데 고향을 떠났던 주민들이 고향에 돌아와 같이 어울리는 체육대회를 열었던 모양이다.


이 체육대회에 내걸린 옛날 사진들을 보며 주민들이 서로 옛날 기억을 떠올리느라 떠들썩한 이야기꽃이 마구 피었다고 한다.


아주 색 바래고 낡은 사진들로 주민들 사이에 소통이 이루어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주민들의 오래된 사진을 꺼내 전시회까지 하게 된 것은 오로지 마을조사사업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오인규 단장은 이현배 단장 시절에 그냥 단원이었는데 이현배 단장이 이런 저런 이유로 자진 사퇴하자 두 번째 단장이 되었다. 그도 단장으로써의 역할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전주에서 이름난 문화활동가였다. 전주의 전통 한옥만들기와 그 안의 공연프로그램들은 거의 그의 손을 거쳤다고 한다. 그는 전주의 활동을 털어버리고 진안으로 들어와 자기의 새로운 문화 활동으로 삼고 마을조사사업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는 이때 아예 이름까지 지금의 오인규로 바꾸었다고 한다.

세 번째 단장인 박명학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사무처장으로 있다가 나와 같이 해임을 당하고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다가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마을'에 관한 일에 선뜻 합류하여 같이 '예술과마을 네트워크(예마네)'를 만들었다. 그는 '행정의 달인'이다. 사무처장 때도 그랬지만 <예마네>에서 무슨 일을 기획하고 처리하는 솜씨가 남달랐다.


여기 마을조사사업의 단장 일을 맡게 된 것은 이 사업이 사회적 기업으로 바뀌면서 '생명의 숲'에서부터 제의가 와서 수락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마을 조사라는 사업에 애착을 가지고, 나름 고민하며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고나가고자 하였으나, 처음 접해 본 일들에 역부족을 느꼈다고 한다. 그 역시 마을조사단의 사회적 기업으로의 계약 기간이 다 되자 이 일에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집담회에서 세 단장들은 이 사업이 마을의 활성화에 유효하고 지속되어야 한다는 점을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금년도에는 지자체 선거로 이 사업의 지속을 가늠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앞으로 백운면이라도 더 면밀한 마을조사가 이루어지고 이 마을조사를 바탕으로 마을이 활성화되기를 바랄 뿐이다.

(예술과마을네트워크 까페http://cafe.naver.com/yem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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