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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마을 미술관과 민주주의 시민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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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마을 미술관과 민주주의 시민학교

[김정헌의 '예술가가 사는 마을']<4> '봉화 비나리마을' 작가 류준화 부부

한 시간을 달려 영주로 해서 봉화로 들어선다. 산세가 제천 저리 가라다. 태백준령이 우리와 같이 달린다. 잠시 면소재지에 들러 류작가가 부탁한 고깃감과 술을 샀다. 가게 집 주인들도 '비나리 마을'을 잘 알고 있었다. 비나리 마을이 인근에 꽤나 호가 난 모양이다. 낙동강 상류를 따라 내려가다 비나리 마을 팻말을 보고 급하게 꺾어져 산으로 올라가니 거기서부터 비나리마을이다. 오지 산골 마을이지만 여기를 들어서니 꽤 넓은 농지들이 눈에 뛴다. 좁은 고샅길을 돌고 돌아 류준화 작가의 집을 겨우 찾았다. 류준화 작가가 나오고 이내 그의 남편이자 진짜 농사꾼인 송성일이 웃으며 다가와 인사를 나눴다.


미술관 안으로 안내를 받았다. 미술관엔 전시가 없어 당분간 류작가의 개인 작업장으로 쓰이는 모양이다. 캔버스들이 여기 저기 널려 있다.


송성일은 몇 년 전인가 추운 겨울 트럭을 가지고 직접 자기가 수확한 농산물을 팔러 서울 왔을 때, 류작가와 같이 만나 저녁을 먹은 적이 있고 그 후에도 류 작가의 개인전 등에서 그를 여러 번 만났다. 그 때마다 나는 방문 약속을 했었는데 이제야 오게 된 것이다.

미술관엘 둘러 앉아 정식으로 그에게 마을 브리핑을 듣기로 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오고 큰 기업에 있던 송성일이 작심하고 이 마을에 들어와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10 여 년 전의 일이다. 제일 농사를 많이 지을 때는 만 오천 평 까지 지었다고 한다. 요즘은 오천 평 내외로 짓고 있다고 하는데 실지 농사 수입은 그렇게 많지 않은 모양이다. 조금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이 마을에 제일 젊은 농사꾼인 정도윤이가 합세했다. 그는 이곳이 고향인데 혼자 계신 할아버지를 모실 겸 아내를 끌고 이리로 들어와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10여 년 전 송성일이 이 마을로 들어오기 전후해서 이 마을엔 정부에서 시행하는 각종 '마을 사업'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을 만들기' 식의 정부 지원 사업들이 이 산 골 마을을 대상으로 서너 건 씩 선정되어 시행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WTO, FTA 등 신자유주의 물결로 제일 타격이 심한 농산어촌에다 조금의 보상을 해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먹물 출신인 송성일이 마을 주민들의 앞장을 서서 이 일을 맡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여러 가지 사업에 팔 걷어붙이고 뛰어 들었다. 그러나 어느 마을이나 그렇지만 정부의 지원이 있는 위에서 떨어진 사업엔 동네 주민들의 의견이 분분해지면서 서로 간의 갈등까지 유발시킨다. 마을과 마을 간의 이해조정도 그렇지만 주민들 사이의 의사소통은 더욱 어렵다. 모여서 민주적으로 의사결정 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그들은 많은 좌절감도 느꼈지만 꾸준히 밀고 나갔다. 특히 '정보화마을사업'에서 애를 많이 먹은 모양이다.

이제는 정보화마을사업으로 얻은 마을 주민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내년에 건설되는 마을회관(일종의 마을 문화센터)에다 '민주주의 시민학교'를 개설하기로 마을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 놓았다고 한다. '민주주의 시민학교'라니 이 마을에 '민주'는 무엇이며 '시민'은 또 무엇인가? 도대체 주민들이 무얼 보고 동의를 했을까?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송성일과 정도윤은 자신 만만해 했다. '그래! 앉아서 그냥 무너지느니 무엇이든지 시도를 해 봐야지...' 그런데 그들의 계획은 치밀했다. 이미 외부의 유명짜 한 강사진들에게 섭외가 들어가고 그들의 공간을 미니콘도형의 시민학교로 재구성을 하는 모양이다. 나도 졸지에 이 계획의 자문위원을 맡게 되었다.


류준화 작가는 이 산골 미술관에서 주민들의 전시회를 비롯한 여러 번의 전시회를 치렀었으며, 인근의 마을 어린이들을 모아 미술체험학교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미술관이 엄마들의 모임터이자 주민들의 마을 공동체의 문화공간이 되었다.

저녁식사가 준비되었다고 하여 자리를 살림집으로 다들 옮겼다. 그런데 알고 보니 오늘이 수능일로 이집 딸이 수능시험을 치른다 고 했다. 기숙사에 묶고 있는 딸이 시험을 치르고 모처럼 집에 오는 날인데 우리 때문에 기숙사에서 하루 더 머문다고 했다. 마을 공부한다고 들이닥친 우리들이 이렇게 민폐를 끼쳐서야....

저녁상이 푸짐하다. 우리기 장을 봐온 삼겹살에, 나중에 합류한 동네 주민 한 분이 봉화 육고기를 싸가지고 오셨다. 이 사람은 김일현 씨로 '다둥이 아빠' 티셔츠를 자랑스럽게 입고 있다. 아이가 넷이라 다둥이 아빠 대회엘 가서 이 티셔츠를 얻어 입은 모양이다. 또 한 사람이 더 왔는데 이 분은 어린 아이 둘을 데리고 마을로 들어와 이제는 방앗간 주인을 하고 있다고 한다. 부산에 떨어져 있던 아내도 뒤늦게 합류를 했다는 데 젊어서 탄광일 등을 전전하다 부산에 도저히 못 살 것 같아 이리로 들어 왔다고 한다.


서로의 어려웠던 곡절, 사연, 꿈과 희망, 삶의 현실, 시국관 까지 산골 사나이들의 이야기가 한 없이 펼쳐진다. 우리가 준비해온 막걸리, 이집에 있던 소주, 청년들이 들고 온 맥주, 류작가가 꺼내온 주스인지 술인지 알 수 없는 액체(?)까지 마실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동이 났다.


밤이 늦어 청년들은 돌아가고 차 한 잔으로 뒷마무리를 한다. 노곤함과 취기를 이길 수 없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알아서들 잠자리를 찾는다.


다음 날 의외로 일찍 눈이 떠져 밖으로 슬슬 산책을 했다. 둘러싼 산세와 아침운무로 마을은 포근했다. 낙엽송이 둘러싼 뒷산들이 늦가을 단풍색깔로 더 다정해 보였다.

정말 이 마을이 잘되기를 빌었다. 이름도 '비나리 마을'이지 않는가? 시골 마을의 인심대로 그들은 헤어지는 우리에게 기념품들을 싸 들려주었다. 잘 있게 '비나리 마을' 청년들이여. 당신들에게 사한 것 없이 경사만이 있기를. 비나리.

비나리마을을 마지막으로 우리들의 마을 답사가 끝났다. 우리는 이 답사를 통해 무엇을 배웠는가? 마을이 우리들의 도움으로 조금이라도 발전할 수 있을까? 주민들은 앞으로 그들의 일을, 마을의 계획을 자치적으로 잘 결정해 나갈까?

마을을 떠나 서울로 향하면서 마을에 관한 이 생각 저 생각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얼핏 봉화 비나리 마을의 축제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중에는 '촛불 부조'이야기도 도는데, 옛날 가난하던 시절 돈이 없으면 동네 애사에 촛불을 하나씩 켜들고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것을 응용하여 '촛불 축제'를 하겠다는 이야기다. 정말 좋은 생각이다. 이런 축제에 우리들이 둘러본 여러 마을 분들이 같이 참여하면 어떨까? 또 다른 마을에서 축제를 할 땐 품앗이로 이 마을에서 참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여기에 연극단체에 의뢰해 마을 주민들의 의사결정과정을 주제로 한 연극을 한편 만들어 같이 즐기고 싶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게. 주민들이 같이 출연하는 연극으로.
예마네서울로 올라가는 길은 비도 오고 날씨만큼 을씨년스러웠지만 그래도 우리들의 결론은 '마을만이 희망이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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