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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가 사는 마을을 가다

[김정헌의 '예술가가 사는 마을']<1> 여주 점동면 늘향골 홍일선 시인

연재를 시작하며 - 3만개의 '마을공화국'을 꿈꾼다

우리나라는 원래 산이 많아 골짜기가 많다. 우리나라의 면적은 중국이나 미국 같은 큰 나라에 비해 36분의 1 정도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주름살을 좍 다림질하여 그 표면적을 재면 앞의 큰 나라들의 6분의 일 정도로 커진다고 한다. 그 만큼 산이 많고 골짜기가 많은 우리나라는 그래서 골골이 들어앉은 마을도 많은 것이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아직도 우리나라의 마을은 3만 여 개로 추산하고 있다.

마을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 지형에 맞는 생업을 중심으로 자연부락을 형성해왔다. 농업을 중심으로 하면 그 부락은 농촌이고 어업을 중심으로 해안가에 있으면 어촌이다. 높은 산간에 위치하면 산촌이고 강변에 있으면 강변마을이 되는 것이다.

마을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의 이상향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도시로 모여든 모든 사람들의 고향이며 시골 마을이 고향이 아닌 나 같은 사람들에게도 일종의 파라다이스로서, 삶의 원형공간으로서 존재한다. 마을은 인류가 처음 사회를 형성할 때 그 최초의 시원으로서의 기원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인류학자들이 말하듯이 라스코동굴 벽화 같은 예술의 탄생도 이러한 마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속에 이상향으로 남아 있는 마을들의 현실은 어떤가? 일제의 식민지 수탈로 향약이나 두레 같은 고유한 공동체의 전통은 사라지고 전통 민속문화도 자취를 감추었다. 해방 후 좌우 대립과 6.25를 겪으면서 마을들은 파괴되거나 피폐해졌다. 박정희의 개발독재시절에는 산업화에 따른 도시화로 농어촌 마을들은 점점 더 황폐해져 왔다. 이제 그 많던 마을들이 황폐해졌을 뿐만 아니라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노인들만의 마을로 활력을 잃은 지 오래다. 지금 마을들은 주민들 사이에 어떤 소통도 원활하지 않은 공동체로서의 생명력을 잃어 가고 있다.

이런 마을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이루는 최소 단위로서의 마을이 그 마을의 공동체의 구성원들만이라도 자치자립의 민주적인 삶을 살게 되면 그 마을은 생명력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 작은 '마을'들이 민주화되면 더 큰 사회인 '지역'이 그리고 더 나아가 '국가'가 민주화될 것이라는 꿈을 가지고 있다. 나는 간디가 구상하고 실천하려고 한 자치 자립의 마을 '스와라지'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간디가 구상한 스와라지는 사실 마을 단위의 정부다. '마을공화국'인 것이다.
이 자치와 자립의 '마을공화국'이 마을마다 만들어진다면 국가의 폭력, 자본의 폭력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만일 3만개의 마을공화국이 만들어지면 '국가'처럼 거대한 조직이 과연 우리에게 필요할까? 마을공화국 연합은 자동적으로 국가를 대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마을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예술가들의 역할이 있지 않을까? 혹시나 예술가들이 들어가 그의 예술적 영감으로 마을에 새로운 대안 공동체를 만들 가능성은 없을까?

우리는 마을에 희망을 걸고 먼저 <예술과 마을 네트워크>(줄여서 예. 마. 네)가 예술가들이 사는 마을 탐사여행을 시작했다.

마을에 예술가가 찾아 들었다. 동네 주민들 사이에 새로 이사 온 이 예술가를 두고 말들이 많았다. '뭘 해먹고 사느냐', '생김이 땅 파먹고 살 것 같진 않더구먼', '뭐 예술인가 뭔가를 한다던 데', '시인이래요', '아니 그림을 그린다던데' 그러나 제일 많은 관심은 서울에서 새로 이사 온 이 사람이 뭐하는 사람이냐로 모아졌다. 마을 회관에 모인 마을 주민들은 그 예술가가 생업이 그들과 틀린 걸 알고는 얘기들이 시들해지면서 그를 그들과 다른 종자로 취급했다.

우리 <예. 마. 네>가 탐방에 나선 예술가들은 처음 이방인으로 마을에 찾아 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다들 마을주민들과 같이 어울려 마을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가 들른 네 마을에 사는 예술가들과 주민들 사이에는 아직까지도 보이지 않는 벽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벽은 점차 엷어지고 있었다. 자기들과 생업이 틀린 예술가를 마을의 정주자로 받아들이는 데는 매개가 되는 계기나 예술가들의 활동이 필요했다.

대개는 예술가들이 주민들과 같이 마을의 일을 나누거나 앞장섰을 때 마을에 들어온 이 새로운 정주자들에 대한 신뢰가 쌓였다.

여주의 홍일선 시인처럼 마을의 신앙인 회나무를 심은 일이 그랬고, 제천 박달재의 판화가 이철수는 마을을 위협하는 대규모 리조트를 막기 위한 법정 싸움에 앞장섰을 때 그에 대한 믿음이 싸여갔다.

또 다른 제천의 만화가 이은홍과 일러스트레이터 신혜원 부부는 이웃과 같이 꽃 나눔을 통하여 때로는 대안교육공동체인 인근의 간디학교와 결합하여 활동을 하고 있었다.

봉화 비나리마을의 송성일 류준화 부부는 마을의 청장년들과 함께 민주학교를 구상 중이고 이미 마을 정보화사업과 농촌개발사업을 통하여 주민들과의 의사소통구조를 구축해 놓고 있었다.

우리는 이들 마을에 정착한 예술가들이 마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예술가들과 주민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구술 채록하려고 한다. 더불어 마을의 유래와 주민들이 살아온 이야기들도 가능하면 영상과 함께 수집하려고 한다.

우리는 지난해 11월과 12월, 1차와 2차로 나누어 8~9개의 마을을 방문하였고 2010년에도 계속해서 마을 답사를 다닐 것이다. 이 답사기는 주로 김정헌과 박명학이 쓴 글에 사진기록과 채록은 같이 간 답사 팀들이 나누어 맡았다.

<마을답사팀>과 1차로 2차로 방문한 마을들은 다음과 같다.

<마을 답사팀>

김정헌 공주대 교수, 화가, <예마네> 대표
박명학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사무처장, <예마네>상임이사
김송희 <예마네>사무국장, 답사팀 총무
전효관 전 하자센터 소장, <예마네>이사 - 1차 답사팀
홍철기 사진가, 기록담당 - 1차 답사팀
채은영 독립큐레이터 - 2차 답사팀
장윤주 독립큐레이터 - 2차 답사팀

<1차 답사> 2008. 11. 11(수)~11. 13(금)
* 여주 점동면 늘향골(도리)- 홍일선시인
* 제천 백운면 평동리- 판화가 이철수
* 제천 덕산면 신현리- 만화가 이은홍과 일러스트레이터 신혜원
* 봉화 명호면 풍호리 비나리마을- 화가 류준화와 송성일

<2차 답사> 12월 2일(수)~12월 4일(금)
* 원주 문막 -화가 김봉준
* 평창 감자꽃 스투디오 - 연출가 이선철
* 홍천 - 가구 디자이너 이정섭, 화가 이진경

김정헌(예술과마을 네트워크 대표, 화가, 공주대 교수)


배를 닮은 마을, 여주 점동면 늘향골(도리) 홍일선 시인


홍일선시인의 늘향골은 찾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차에 달려 있는 엉터리 내비게이션 때문에 충청도까지 왔다 갔다 하다가 30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홍시인은 하도 길을 못 찾는 우리 일행을 위해 큰 길 가에 있는 한지 체험장까지 마중을 나왔다. '아름다운 마을(과거길 만들기) 만들기' 사무장 정성범씨와 함께 우선 마을 입구에 있는 마을 회관엘 들렸다. 아름다운 느티나무가 두 그루 있고 조그마한 마당을 끼고 있는 마을 회관은 그 자체로 예뻤다.

시인의 집은 자그마한 산 옆에 강을 바라보고 있다. 처마 끝에서 풍경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우리가 너무 늦어 회관 안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점심을 차려 논 홍시인의 집으로 차를 몰아 먼저 들어갔다. 홍시인의 부인과 아들 또 동네 분들 두 어 명이 마중 나와 인사를 나누었다. 집 앞에 흐르는 남한강(여강)과 주위의 경치를 잠시 감탄! 하고 나서 홍시인 부인이 차려 논 밥상 앞에 다들 둘러앉았다.


홍시인이 지은 우렁이농법의 유기농 밥과 반찬들, 여주 막걸리가 가득 찬 식탁은 그야말로 잔칫상이다. 식탁 못지않게 푸짐한 말잔치가 벌어졌다. 먼저 동네 근황을 캐봤다. 우리가 떠나기 전 가는 마을 마다 가능하면 이장을 포함한 주민들 몇 명을 같이 만났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먼저 전달해 놓은지라 이 늘향골에서 여흥 민씨 집성촌 대표로 민영선씨와 이강원 노인회장이 같이 자리를 해 주셨다. 이장이 있었으면 했는데 이장은 제주도로 전국 이장협의회 출장을 갔단다. 추측건대 4대강 사업을 앞두고 정부에서 이장들을 모아놓고 제주도 관광도 시켜주고 회유작업으로 꼬드기는 판에 출장을 간 모양이다.(제천 판화가 이철수한테도 연락을 했는데 거기도 이장이 출장을 갔다고 하니 이 추측이 맞지 않나 싶다)

도리에는 100여명 주민들이 사는데 인근에 명성황후 생가도 있고 여흥 민씨가 많다. 일종의 여흥 민씨 집성촌이다. 집성촌이라 웬만한 집들은 다 일가친척으로 얽혀 있고 이 삼 년 전까지만 해도 동네 주민들끼리 서로들 세배를 다녔단다. 마을에 민심이 후하고 지금도 정월 대보름에 장승제를 마을 축제로 매년 지내고 있다.


이 마을은 옛날 한양으로 접어드는 과거길의 길목이란다. 아홉 구비를 돈다고 해서 '아홉사리'라는 길을 지나 '도리마을'을 거쳐 가는 코스다. 마을 분들 얘기로는 이 마을로 들어왔다가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오던 길을 되돌아 나가는 수밖에 없 기 때문에 예전에는 '돼래마을'이라 불렸다고도 하며, 지금도 군사용 작전지도에는 '돼래'로 표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랬는지 육이오 전쟁 때도 국군이나 인민군들이 마을로 들어오질 않고 그냥 지나쳐서 서울과 가까운 곳인데도 한동안 전쟁이 난 줄도 모르고 지냈단다.

홍시인은 여러 번 귀촌할 생각이었으나 결행(?)을 못하고 있다가 3년 전에 드디어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부인 임은희씨와 딸과 아들의 허락(?)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당시 이 마을의 이장(지금은 전 이장이 된 이경희씨)을 만나 그의 소개로 도리 늘향골로 귀촌 결정을 했다고 한다. 특히 도리(道里)라는 지명이 마음에 들어 이곳으로 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의 도리(道理)를 다하기 위하여' 말이다.

농고 출신이고 집안 대대로 농사일의 내력을 가진 그는 '땅의 운명'처럼 이곳으로 귀촌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의 시집 <농토의 역사>, <흙의 경전>에는 삶의 원형으로서의 '가난한 마을'을 노래하고 있다. 이곳으로 오면서 정말 농사를 본격적으로 짓겠다는 결심으로 오자마자 유기농에 덤벼들었다. 한 3천평 농사를 짓는데 원래 생업으로 농사를 짓는 동네 사람들에게 이리 저리 배워가며 농사를 짓는 것 같았다.

옆에 앉은 노인회장은 홍시인을 가리키며 "저 사람은 좀 힘 드는 일이 있으면 막걸리를 척 받아가지고 와. 그러면 내가 안 도와줄 수 없지"라고 말한다. 홍시인이 사람을 꼬드길 줄 아는지 그의 유기농은 같은 마을의 농사꾼들에게도 슬슬 영향을 미치는 모양이다.

옆의 노인회장께서 또 동네 이야기를 꺼내신다. "이 동네는 뒷산에 올라가 보면 배 형상이야. 배란 물위에서 흔들리잖아. 그래서 이 동네는 배가 흔들려서 그런지 남자들이 빨리 죽어." 그때 내가 재빨리 추임새를 넣는다. "그래서요?" "아 그런데 배에 중심을 잡아줄 돛대가 바로 우리 동네 한 가운데 있는 몇 백 년 된 회나문데. 그것을 어떤 동네 놈이 잘라서 뿌리까지 팔아 먹었어. 그러자 얼마 안 있어 그 놈도 죽었지." 바로 옆에 앉아계신 민선생도 고개를 꺼떡이는걸 보니 이 얘기는 실지로 있었던 모양이다.

노인회장의 얘기는 계속된다. "그런데 여기 있는 홍선생이 그 베어 나간 회나무 있던 자리에 다시 회나무를 갔다 심었거든. 그 자리에 하나 심고 또 마을 저 쩍에 또 하나. 그래서 배에 다시 돛대를 달은 거지. 배가 흔들리지 않으니 이제 우리 마을 남자들도 오래 살 거야" 그때 내가 또 추임새를 넣는다. "회장님은 몇 살까지 살 건데요?" "아 나야 150까지 살아야지"

이 회나무는 물가 동네의 마을 신앙이다. 마을의 형세가 배 모양으로 생긴 건 옆에 유장하게 흐르는 남한강과 그 마을에 있는 '창남나루' 이런 것들이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곳에 있는 '창남나루'를 거쳐 문경새재, 영월 등에서 올라온 물품들이 서울로 올라갔다고 한다. 두 분들은 젊었을 때 300석을 싣고 마포나루까지도 가본 적이 있다고 자랑스레 얘기하신다. 이 외에도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3도의 접경지역이라 거기 얽힌 얘기들도 많았다. 인근 삼합리 산등성이에서 담배를 피우면 담배연기가 3개 도로 날아간다는 얘기하며, 과거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통행금지가 제외되었던 충청도로가서 밤새도록 술 마신 얘기, 37년간 조이고 닦으면서 지금도 쓰고 있다는 '유신경운기' 얘기들이 술 한자리 돌아갈 때마다 쏟아져 나왔다.


그 동네를 돌아 나오면서 그 새로 심어진 회나무를 둘러 봤다. 7년생 나무를 3년 전에 심었으니 10년 밖에 안 된 작은 나무였다. 이 작은 회나무를 심어 주고 홍시인은 큰 것을 얻었다. 마을 사람들, 주로 남정네들의 믿음을 얻은 것이다. 이런 믿음은 귀촌하여 농사일을 새로 시작하는 홍시인의 가족에게는 커다란 힘이 될 것이다. 회나무가 하나도 아니고 보조 돛으로 하나를 더 심어 마을에 쌍 돛을 달아 주었으니 동네 주민들로서는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오토바이를 타고 뒤쫒아 온 두 마을 어른들과 홍시인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여러 가지 포만감으로 그 마을을 떠났다.

얼마 전 타계한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남미의 원시부족사회를 탐사하면시서 원시사회의 풍요를 그 사회가 100명 내외의 소규모사회였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밝혔다. 레비스트로스가 탐사했던 그러한 원시부족사회와 비교할 수 없지만 우리의 농산어촌의 생활단위나 규모로서 이상적인 공동체, 즉 마을공동체의 도덕적, 생태적 가치를 실현시킬 가능성은 없는지를 곰곰 생각하면서 우리는 다음 마을로 향했다.

후기


여주 도리마을의 홍일선 시인이, 우리가 떠난 후 짧은 시간 미처 다 못한 만남의 아쉬움과 함께 마을을 품은 시인의 상념을 전하는 글과 근자에 지은 시를 보내왔다.

대저 사람은 저를 낳아준 산천을 닮는다 했는데, 여강을 조상처럼 섬기며 사는 도리 늘향골 마을 사람들의 운명이 또한 그러하였을 것이다. 작년 이맘때였던건가. 한반도 대운하 건설 논의로 우리 나라 산천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하더니 오늘은 멀쩡히 살아있는 생명의 강을 죽어있다고 폄하하면서 '4대강 살리기' 토목공사가 막 시작되는 강의 풍경이 아스라하다.

강께서 자기도 꿈이 있다고 했다

홍일선

강께서 자기도 꿈이 있다고 했다

그이는 바다에 이르는 길이
이 땅 모든 강물들이
생을 걸어볼 만한 꿈은 아니라고 했다
그이 꿈은
머나먼 지평선을 한 열닷새쯤 걸어보고 싶었던 것
그이 꿈은
크고 작은 논밭들이
의좋은 형제처럼 오순도순 모여사는
강마을에 들려
그때가 마침 오월 중순 모내기철이면
새참도 얻어먹고
다시 지평선을 향해
먼길 천천히 밟아가는 것

또 그이 소박한 꿈은
한번도 뵙지못한 조상들
태백산 깊은 골짜기 검룡소라 했던가
혹은 평창 어디 진부령 외진 곳 어디
돌무지 실개천을 떠나와
남한강 여주 평야라 하셨던가
가문 땅 벌판으로 스며들어가 오곡백화가 된
머언 먼 할아버지 시간들을
두손 모아 친견하는 것

그리고 조상님들께서
그이에게 꿈 한자락 더 허락하신다면
강과 사람들이 한 몸이 되는 곳
밭을 주유하는 고라니들과
며칠째 꿈쩍않고 알을 품고 있는
붉은오목눈이 어미새 순한 눈동자를
오래오래 지켜보는 것

그런데 그이 꿈 접을 시간이
가차이 다가오고 있는 것
그이도 대운하 소식을 들으셨던 것
돌아보니 슬픈 일 뿐이어서 회한 뿐이어서
큰 죄 많이 지은 것 같다는
그때 홍수 때 자기도 제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수 없어서
그냥 미치고 만다는 쓸쓸한 고백도
이젠 소용없어진 저녁

강물이 자주 넘쳐 낭패를 많이 본
도리마을에 인사나 하고 떠나겠다는
죄 많은 그이
마지막 인정이라도 쓰듯 소담스럽게 핀
어린 이팝나무를 바라보며
그이 강물은 지금 울고 있는 것
그이는 홍수 때 뽑혀나간 이팝나무들에게도
용서를 구하고 싶은 것이다


* 이 연재는 매주 금요일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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