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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雪嶽)에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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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雪嶽)에 들다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 한계령~진부령/10.14~10.16

산행 마흔 여드레 째. 화요일.

다시 한계령을 찾았다. 하늘은 그지없이 청청하고 바람 세찼다. 구름 지나고 있었다. 바람에 쓸린 듯 비스듬히 늘어선 산줄기는 멀리 있는 듯 가까이 있는 듯했다. 모든 것들이 있는 듯 없는 듯했다. 설악의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도록 산과의 조화를 살려 지었다는 한계령 휴게소는 산자락에 스며들어 있는 듯 없는 듯 했고, 한계령의 옛 이름을 써 넣은 '옛 오색령' 표지석은 한쪽에 고요히 머물러 있는 듯 없는 듯했다. 눈길 닿는 이들만 보고 마음 닿는 이들만 들어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오랜 세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며 산을 닮은 탓인지 산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산의 고요함 속에 함께 머물고 있었다. 표지석으로 태어나고 집으로 만들어지기 전에는 그저 보잘것없어 보이는 목재일 뿐이고 돌멩이일 뿐이었던 것들이 저마다 생명을 지닌 채 머물러 있었다. 조화로움이었다.

▲한계령휴게소 ©이호상

산행 준비를 마쳤다. 세월에 씻긴 듯 바람에 쏠린 듯 비스듬히 누운 산줄기를 바라보았다. 구름 지나며 또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보이지 않던 아름다운 세상이 거기 있어 내 곁에 머물고 있었다.
한계령은 사람의 손길이 많이 닿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조화로움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었다. 산자락에 스며든 휴게소, 사람의 탐욕을 비웃기라도 하듯 텅 비어 있는 너른 마당, 마당 한 편에 무심히 서 있는 표지석, 아득하게 펼쳐진 산줄기 등 모든 것이 있어야 할 곳에 있었다. 제자리에 있었다.
조화로웠다. 조화롭지 못한 것은 사람뿐이었다. 자연의 경이로운 조화가 머물고 있는 이 고개도 사람 지날 때면 그대로 속세의 번다함으로 가득했다. 산을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산의 겸허함과 고요함을 닮지 못한 이들 때문이다. 함께 살아가는 조화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이들 때문이다. 그저 저 하나의 즐거움을 위해 산에 들어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산을 지나며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놀이공원을 찾은 듯 저 홀로 요란한 것이다.

마침내 설악이었다. 지난 5월 20일 지리산 천왕봉에서부터 시작한 산행은 백두대간 남쪽 구간의 끝자락인 설악에 이르러 있었다. '신성하고 숭고한 산'이라는 뜻에서 예로부터 설산(雪山), 설봉산(雪峰山), 설화산(雪華山) 등으로 불렸고, 서리뫼(霜嶽)라고 불린 금강산(1638m)에 견주어 설뫼(雪嶽)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도 불렸다. 백두대간의 중심부에 있어 북쪽으로는 향로봉, 금강산과 마주하고 남쪽으로는 점봉산, 오대산과 마주하고 있다.
산행 마지막 주였다. 많은 생각들이 마음에서 일어났다 사라지곤 했다. 지나온 길들, 저마다 달랐던 숲 냄새, 새소리, 흐르는 구름과 머물러 있는 뫼가 만들어 내던 신비롭고 황홀했던 풍경들, 바람 흐르는 소리, 나뭇잎 부대끼는 소리, 나뭇잎 하나의 울림, 경이로웠던 숲의 조화로움, 무너져가는 산과 사라져가는 숲 그리고 즐겁고 고통스러웠던 순간들 등 수많은 느낌과 생각들이 마음을 채웠다.
산행이 무사히 끝나기를 기도했다. 한계령에서 출발하여 끝청(1604m)과 중청(中靑, 1676m), 대청(大靑, 1709.7m)에 올랐다가 소청산장(小靑山莊)에서 설악의 첫 밤을 맞은 후 공룡능선을 따라 마등령(馬等嶺, 1320m)을 넘어 황철봉(1381m) 너덜지대에서 가쁜 숨 몰아쉬고 미시령(彌尸嶺, 826m)으로 내려 둘째 밤을 보낼 예정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산행의 마지막 날은 상봉(1241m)과 신선봉(1204m), 대간령(660m)과 마산(1052m)을 넘어 진부령(陣富嶺, 529m)에서 산행을 끝낼 예정이었다. 그곳이 남쪽 구간의 끝이었다. 더 이상 가고 싶어도 갈 곳이 없었다. 군부대의 허락을 받아 들어갈 수 있는 향로봉(香爐峰, 1296.3m)이 있었지만 후일을 위해 남겨 두기로 했다.

휴게소 건물 사이로 돌계단이 가지런히 나 있었다.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 같았다. 돌계단을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 계단은 끝날 듯 끝날 듯 이어져 있었다. 불과 한 두 주일 사이에 산에는 겨울이 와 있었다. 나뭇잎은 떨어져 텅 빈 나뭇가지에는 이미 찬바람 머물고 있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붉은 단풍들이 오히려 생경했다. 산기슭이나 계곡에 아직 남아 있는 붉게 물든 숲은 철 지나 사람들 떠난 포구처럼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낯설었다. 돌계단에 마른 낙엽들 쌓여 있었다. 산은 이미 겨울이었다.

▲산은 이미 겨울이었다 ©이호상

산길 곁에 다람쥐 있었다. 두 손으로 도토리를 쥐고 오물거리며 먹고 있었다. 발걸음 멈추고 바라보았다. 귀여웠다. 겨울 준비를 하는 중 잠시 허기를 달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람쥐는 겨울이 오기 전 도토리를 모아 땅에 묻어 두었다가 먹을 것이 귀한 겨울이 오면 하나씩 꺼내 먹는다. 그러나 때로 어치처럼 어느 곳에 도토리를 묻어 두었는지 잊어 찾지 못하기도 한다. 어치나 다람쥐가 땅 속 깊이 묻어 두었다 찾지 못한 도토리들은 싹을 틔워 숲을 풍성하게 한다. 땅 속 깊이 묻혀 뿌리를 깊이 내린 도토리는 세찬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고 오백 년, 천 년의 세월을 사는 큰 나무로 자라기도 한다. 다람쥐의 월동준비는 숲을 풍성하게 하는 자연의 은총이기도 하다.
자연에서는 어느 것 하나도 그저 일어나지 않는다. 의미 없는 일은 없다. 도토리 묻어 놓은 것을 잊은 어치나 다람쥐로 인해 숲이 풍성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자연은 어느 누구의 실수도 그대로 덮어두지 않는다. 그 속에서 생명을 틔운다.

설악산(雪嶽山, 1708m)은 1970년 3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1982년 8월 유네스코의 '생물권보존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온대 중부지방의 대표적 원시림 지역으로 다양한 동식물들이 살아가고 있다. 동물로는 사향노루, 산양, 곰, 하늘다람쥐, 여우, 수달 등 희귀종을 포함하여 총 39종의 포유류와 62종의 조류 및 각종 파충류, 양서류, 어류, 곤충 등이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식생 분포도 다양하다. 대청봉 지역에 군락을 이루어 자라는 눈잣나무와 눈주목은 남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북방계 고산식물이다. 그 밖에 소나무, 벚나무, 개박달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눈측백, 금강초롱꽃, 금강분취 등 총 882종의 관다발식물이 살아가고 있다. 이 가운데 65종이 특산식물이고, 56종이 희귀식물이다.

수많은 생명들이 이 산에 몸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고마운 산이다.

"선생님, 저기 움푹 파인 곳이 있지요? 저기가 비박골이에요. 정식 명칭은 아니지만 다들 그렇게 불러요. 저기서 비박을 하면 바람도 완전히 막아지고 짐승들 걱정 할 필요도 없지요. 정말 아늑하고 좋아요."

빈 산 김남균 대장이 말한 곳을 바라보았다. 계단에서 조금 떨어진 곳 거대한 바위 아래 자락이 깊이 패여 있었다. 안락해 보였다. 눕고 싶은 마음 절로 들었다. 떨어진 낙엽들 가득했다. 수북했다. 낙엽들은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올 해 떨어진 낙엽들도 있어 보이고, 한 두 해 전 혹은 여러 해 전에 떨어진 낙엽들도 있어 보였다. 구멍 숭숭 뚫려 흙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본래 제 것이 아닌 것들을 제 자리로 돌려보내고 있었다. 제 몸 속에 있던 물과 햇빛과 바람과 탄소와 비와 구름과 이슬 등을 모두 돌려보내고 있었다. 원래 제 몸이 아니었던 것들이다. 외부로부터 온 것들이다.

모두 제 왔던 곳으로 돌아가고 나면 나뭇잎은 그 형체를 잃고 사라지리라.

본래 제 것이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삶도 이와 같다. 나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 모두 내 것 같지만 본래 내 것은 하나도 없다. 육신도 영혼도 마음도 모두 외부로부터 온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날 우리는 삶을 마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삶이란 참으로 감사한 것이다. 다른 것들에게서, 남에게서 받은 선물이니 말이다. 그러니 가치 있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제 것이 아닌 것으로 살아가면서 가치 있게 살지도 못한다면 얼마나 부끄럽고 부끄러운 일이겠는가 말이다.

설악산이 바위산이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 바윗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바윗길 따라 오르다보니 끝청이 눈앞이었다. 멀리 공룡능선이 보이고 너덜지대로 유명한 황철봉도 보였다. 용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암봉들이 듬성듬성 연이어 산세를 이루고 있다는 용아장성(龍牙長城)도 보였다. 험하고 날카로운 산세로 인해 일 년 내내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그 위세가 날카로우면서도 장엄하고 당당했다.

▲바윗길 ©이호상

전망대에 올라 잠시 쉬었다. 지나온 길 아득하였다.

저 산줄기를 다 걸어 왔을까.
그저 마음 내려놓고 쉬었다.

오른 산길 곁에 중청과 대청을 곁에 두고 소청으로 향했다. 소청으로 가는 길 아름다워 꿈길을 걷는 듯했다. 한참 내려가자 소청 대피소였다. 방을 배정 받았다. 우리는 모두 한 방에 들었다. 6명이 정원이었다. 한 사람당 모포도 한 장씩 받았다. 한 사람당 숙박료가 7,000원이고 모포 한 장 빌리는 가격이 2,000원이었다. 6명이 들어가자 배낭을 놓기도 힘들었다. 겨우 몸 부대껴 누일 정도였다. 명색이 국립공원이고, 세계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진 산의 숙박시설치고는 너무 초라했다. 찾는 이들이 많아 그나마 이 방도 없어서 못 얻는 것이 현실이라고 하지만, 현실을 핑계 삼아 덮어놓고 지낼 일만은 아니었다.

소청산장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대청봉(大靑峰, 1707.9m)을 향했다. 봉우리가 푸르게 보인다 해서 예전에는 그저 청봉(靑峰)이라고 불리기도 했었고, 봉정(鳳頂)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다. 한라산(1950m)과 지리산(1915m)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다. 기상 변화가 심하고 강한 바람과 낮은 온도 때문에 눈잣나무 군락이 융단처럼 낮게 자라고 있는 곳이다.
대청봉에 올랐다. 바람 세차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가슴 시리도록 하늘은 푸르고 산줄기는 낯가림을 하는 듯 멀리 떨어져 있었다. 부챗살처럼 퍼지고 있는 햇살이 산줄기를 따르는 듯했다. 바라보니 아득한 산줄기 더욱 아득했다.
상념들 떠오르며 졌다. 원초적인 질문들이었다.
왜 이 산행을 시작했는지, 그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산행을 한 보람이 있었는지, 이제 이 산행이 끝나면 어떻게 할 것인지...
알 수 있는 것,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도 있었다. 산은 언제나 나를 받아들여주었다는 것이다. 산행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채 산에 들어왔을 때에도 산은 언제나 길을 열어주었고 쉴 곳을 마련해 주었다. 내 곁에 머물며 숲의 비밀을 알려주었다. 숲에서는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싸울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서로 다르기에 숲이 풍성해진다고 말이다. 다른 것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이다.

세찬바람으로 몸에 한기가 들기 시작했다. 대청봉을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목에 돌탑이 촘촘히 쌓여 울타리를 이루고 있었다.

▲돌탑 울타리 ©이호상

무엇을 저리도 많이 빌었을까.

작은 돌멩이 하나하나에 담긴 마음의 소망들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빌며 나도 작은 돌 하나 올려놓았다. 소청으로 내려가는 길에 멈추어 보니 화채봉, 칠성봉, 권금성 등이 눈앞에 있었다. 신선대도 보이고 멀리 울산바위도 보였다. 내일 지나게 될 마등령과 황철봉도 거기 있었다.

산장에 내려와 짐 정리를 하였다. 웅성거림에 나가보니 설악의 산줄기 위로 해가 지고 있었다. 노을 붉게 물들어 산줄기는 불타는 듯했고 산중은 그대로 붉은 바다였다. 산줄기도 일렁이고 출렁이며 붉은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내 가슴도 함께 일렁이고 출렁였다. 해도, 붉게 물든 하늘도, 산줄기도, 나도, 모두 함께 일렁이고 출렁였다.
가슴 붉게 타오른 저녁이었다.
어둠 깃들고 밤이 왔다.
기운 맑은 밤이었다.
달빛 고왔다.

최창남/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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