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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봉산에 마음 내려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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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봉산에 마음 내려놓고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 청화산.구룡령~한계령/10.7~10.9

산행 마흔 이레 째. 목요일.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한계령의 새벽은 고요했다. 바람 찼다. 몸 시렸다. 고갯마루에 서서 바라보니 멀리 불빛 아른거렸다. 깊은 밤처럼 어둠 짙었다.
어제 오후 내려온 조침령에서 산행을 시작해야 했지만 한계령으로 올라왔다. 비법정탐방로를 지나기 위해서였다. 종주 산행을 하는 내내 산행 코스 문제는 늘 나를 괴롭혔다. 한 대장은 상황에 따라 방향을 바꾸었지만, 산줄기의 느낌을 이어가야 하는 나는 역방향으로 산행을 하는 것이 매우 혼란스럽고 힘들었다. 어느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니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다. 백두대간 길이 온전히 열리기를 바랄 뿐이다.

백두대간은 옛날부터 강원도의 동서 교통에 큰 장애였다. 이로 인해 영동과 영서 지방의 문화와 풍속, 기후와 인심, 산수와 역사 등은 달라졌다. 하지만 이 큰 산줄기도 곳곳에 고개를 만들어 사람들이 넘나들도록 하였다. '령'(嶺)이란 한자를 풀이하면 '잇닿은 산의 능선'이니 그런 곳에 길이 되었던 것이다. 철령, 추치령, 오소령, 건봉령, 진부령, 대간령, 미시령, 한계령, 대관령들이다.
한계령(寒溪嶺, 1004m)은 강원도 인제군 북면, 기린면과 양양군 서면과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백두대간의 설악산(雪嶽山, 1708m)과 점봉산(點鳳山, 1424m) 사이의 안부(鞍部)에 있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우묵한 지점을 안부라고 한 것은 그 모습이 말안장 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인제와 양양을 연결하는 국도가 지난다. 옛날에는 소동라령(所東羅嶺) 또는 오색령(五色嶺)이라고 불렀다.
역사는 이곳에도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신라 김씨 대종원'의 기록은 '태자 일행이 서울을 떠난 것은 935년 10월 하순이고, 한계에 닿은 것은 살을 에는 추위와 눈보라 몰아치는 혹독한 겨울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망국의 마지막 태자에 대한 옛 사람들의 애정은 놀라울 정도로 깊어 그가 왕건에게 쫓겨 망한 나라를 등지고 산으로 들어간 흔적을 곳곳에 전하고 있었다. 그가 하늘재를 넘으며 그의 누이 덕주공주를 생각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국망봉을 넘으면서는 망한 나라의 수도를 바라보며 눈물 흘렸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깊은 땅 한계령에 이르러 살 부비고 살았다는 이야기 또한 전하고 있다. 백두대간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마의 태자는 백두대간을 걸어 이곳 한계령까지 온 것이 아니었을까.

그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1000년도 더 된 오랜 일을 알 길 없지만,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해야 하는 몸이었으니 깊고 깊은 백두대간 산줄기를 따라 흘러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무거운 발걸음과 시린 마음이 느껴져 마음 아팠다.

철조망 곁의 소로를 지나 산으로 올라갔다. 산길은 마주 서 있는 듯 가팔랐다. 바람 세차 몸이 흔들렸다. 바람 불 때 마다 나뭇가지 흔들려 몸을 스치고 볼을 때렸다. 세찬 바람에도 안개 깊었다. 밧줄을 의지하고 나무뿌리를 잡으며 산길 오르고 바위 넘었다. 숲에서 소리가 났다. 동물이었다. 매우 놀란 듯 갑작스레 움직이는 소리가 부산했다.
'놀랄 만도 하겠지...'
새벽산행을 할 때마다 동물들이나 나무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었다. 숲의 주인은 숲에서 사는 생명들이다. 나무이고 동물들이다. 사람은 손님일 뿐이다. 그런데 손님이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남의 집을 새벽에 찾아가는 것이니 어찌 주인이 놀라지 않겠는가. 가능하면 새벽 산행을 피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삼가고 조심하며 산에 들고 산을 지나야 할 것이다.
숲에 새벽 어스름 머물고 있었다. 산등성 너머로 아침이 오고 있었다. 아스라한 새벽 어스름 조금씩 물러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깊은 신비를 안고 있는 숲의 또 다른 세계가 열리는 것 같았다. 나뭇잎 사이로 햇살 비추었다. 노랗게 물든 당단풍나무 더욱 노랗게 물들고, 붉게 물든 단풍나무 더욱 붉게 물들었다. 온통 붉게 물든 산길 한 편에 구절초 하얗게 피어 애처로웠다. 햇살 드리운 깊은 가을 숲의 아침은 설렘과 신비함과 황홀함으로 가득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산길을 막고 굳이 가지 못하게 하는 이들도 딱하고, 가지 말라는 길을 굳이 가고 있는 나 같은 이들도 퍽이나 딱하였다. 그저 이렇게 산길 걸으며 마음 씻으면 될 것을... 서로 못할 일이다.
▲망대암산에 오르다 ©최창남

망대암산(望對岩山, 1236m)이 지척이었다. 멀리 설악산의 주능선이 보였다. 대청봉과 중청봉이 보였다. 구름이 대청과 중청 앞을 빠르게 지나고 있었다. 망대암산이란 이름은 위조주전을 만들던 주전골의 바위굴을 이 산에서 감시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바위를 바라본다.'는 뜻이 그대로 망대암(望對岩)이란 이름이 된 것이다.
바위를 부여잡고 바위틈에 매달리며 망대암산에 올랐다. 주전골 바위굴은 보이지 않고 흐르는 구름만 보였다. 강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구름의 강이다. 하늘을 흐르는 강이다. 바람 불어 나뭇잎 펄럭였다. 깃발처럼 나부꼈다. 깃발처럼 마음도 나부꼈다. 기암괴석으로 덮여 있는 정상은 거칠고 좁았다. 겨우 발 디디고 선후에야 바람과 구름에 몸 맡길 수 있었다.
산을 내려오며 바라보니 끝청, 중청, 대청, 화채봉은 가지런했고 만물상은 우아했다.

마루금 지나며 점봉산 가는 길에 만난 나무들은 세찬 바람에 가지 뒤틀리고 굽어 있었다. 마치 우리를 반기는 듯도 했고 어서 가라고 손짓하며 밀어내는 듯도 했다.
물박달나무와 신갈나무 바람에 흔들렸고 주목나무 의연했다.

점봉산(點鳳山, 1424m)에 올랐다. 한계령을 사이에 두고 설악산 대청봉과 마주보고 있는 산이다. 옛이름은 '덤붕산'이다.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이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덤'은 '둥글다'는 뜻이다. 이것이 한자화하면서 '점봉'으로 변한 것이다. 정상은 너른 평지 같다. 멀리서 보면 부드럽고 둥근 모습이다. '덤붕산'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린다.
▲점봉산에서 ©최창남

점봉산은 식물 자원의 보고로서 생태적 가치가 매우 높다. 모데미풀, 한계령풀, 노랑무늬붓꽃, 금강초롱, 칼잎용담, 홀아비바람꽃 등 보호해야 할 희귀식물이 50여 종이 넘는다. 또한 참나물, 곰취, 곤드레, 고비, 참취 등 10여 가지 산나물들이 자생한다. 점봉산의 생태적 가치가 높은 또 다른 이유는 이곳이 한반도 자생식물의 남북방한계선이 맞닿는 곳이기 때문이다. 북에서 서식하는 바람꽃류가 설악산을 거쳐 이곳으로 내려오고 남에서 자라는 모데미풀이 올라오다 멈추는 곳도 이곳이다. 북에서 자라는 이노리나무와 남에서 자라는 서어나무를 함께 볼 수 있는 곳도 이곳이다. 북쪽의 식물들은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오고 남쪽의 식물들은 올라와 만나 한 데 어우러져 사는 곳이 바로 점봉산인 것이다. 이곳에 한반도 자생종의 20%에 해당하는 8백 54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그렇기에 산림청은 이 산을 천연림보호구역으로 지정하였고, 유네스코는 1982년 설악산과 함께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한 것이다.

점봉산 정상은 다른 산들과 달리 제법 너른 평지를 갖추고 있었다. 하늘길에 자리한 언덕 같았다. 작은 바위들 줄지어 있고 풀들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점봉산 표지석은 너른 들에 홀로 선 듯 외로워 보였다. 가슴으로 바람 맞으며 산줄기 바라보았다. 첩첩이 늘어선 산줄기 골마다 구름 흘러 산인 듯 바다인 듯 했다. 한 폭의 정물화였다. 오랜 동안 바라보았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마음 가볍고 편안했다. 가슴 깊은 곳에 남아 있었던 다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어느덧 사라진 듯 했다. 마음 깊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산줄기를 바라 볼 수만 있다면, 이렇게 깊은 숲을 지날 수만 있다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왜 숲을 지켜야 하고 산줄기를 살려야 하는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을...'

점봉산의 아름다움을 가슴에 품은 채 단목령으로 향했다. 단풍 붉었다. 산길 지나며 올려다 보니 붉은 단풍잎 햇살 받아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높은 나무 위로 철새 무리지어 날듯 붉은 단풍잎 무리지어 흐르고 있었다. 숲은 바라보는 곳마다 붉고 노란 잎으로 뒤덮여 아름다웠다. 산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씻어 주는 하늘길을 지나는 것 같았다.
▲붉은 잎 하늘을 물들이고 ©최창남

단목령(檀木嶺, 809m)을 지났다. 박달나무가 많아 박달령이라고도 불린다. 양양군 서면 오색의 마산에서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를 잇는 고개이다. 근동의 민초들은 이 고개를 넘어 마을을 잇고 삶을 이어갔던 것이다.
단목령 이정표 좌우에 '백두대장군'과 '백두여장군'이 서 있었다. 일반적으로 하나가 '백두대장군'이면 다른 하나는 '지리여장군'인데 이곳의 두 장군의 이름은 똑같이 '백두'였다. 하기야 백두이건 지리이건 하나의 산줄기이고 하나의 산이니 나누어 무엇 하랴. '백두'라 부르고 '지리'라 부르는 것도 사람들이 저희들끼리 나누고 구분 지어 부르는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길을 이었다. 지나는 길에 투구꽃 한 송이 피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얼굴이었다. 반가움에 손짓했다.
그렇게 산을 느끼고 숲을 받아들이며 걷는 중 북암령(北岩嶺, 925m)을 지났다. 조침령은 도로 공사 이후 옛길을 잃어버렸지만 북암령과 박달령(단목령)은 옛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소중히 가꾸어야 할 우리의 자산이다. 또한 북암령은 세계적인 희귀식물인 한계령풀의 집단 분포지이다. 매자나무과에 속하는 한계령풀은 설악산 일부 지역과 점봉산에서만 서식하는 희귀식물이다. 제철에 잠시 노란색 꽃을 피웠다가 이내 녹아 없어져 뿌리로서만 동정(同定)이 가능하다. 세계의 유명한 초본식물원(herbatium)들도 표본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희귀식물이다. 지난 90년 대 중반 식물학자들에 의해 북암령 일대에 대규모 군락지가 있음을 발견하고 당국에 천연기념물 지정이나 보호구역 설정을 건의했으나 아무런 조치가 따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식물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백두대간 산길을 막는 것 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훨씬 근본적이고 우선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물들다 ©최창남

산길은 편안했다. 마음 가벼이 산책을 즐기는 기분이었다. 산줄기 위로 노을 지고 있었다. 하늘 붉고 산등성이 또한 붉게 물들고 있었다. 붉은 기운이 산줄기를 타고 숲으로 들어오자 숲은 이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숲에 남은 붉은 기운은 저녁 어스름과 어울려 숲은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를 남긴 듯 은은했다. 어둠 속에서 기운을 다한 듯 빛은 아스라했다.

어둠 깊었다. 조침령으로 내려섰다. 어둠 속의 조침령은 새들도 잠들었는지 고요했다.
조금 떨어져 우리를 기다리는 차의 불빛이 보였다.
산길 지나 온 가을 숲의 하루가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최창남/글, 사진
chamsu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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