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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침령 지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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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침령 지나며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51> 청화산. 구룡령~한계령/10.7~10.9

산행 마흔 엿새 째. 수요일.

눈을 뜨니 방 창으로 불빛 희미하게 비추었다. 밤을 지킨 외등 불빛이었다. 사위 고요했다. 빗소리 들려왔다. 어제 저녁부터 내리던 비였다.
지난 7월 남겨 두었던 청화산 산행을 마치고 구룡령으로 올라와 민박집을 찾아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앞으로의 산행 일정을 의논한 후 방으로 들어서니 밤 9시 30분이었다. 지난 5월 20일부터 시작한 백두대간 종주 산행은 어느덧 그 끝을 보이고 있었다. 10월 16일, 다음 주 목요일에 진부령으로 내려서는 것이다. 지난 시간들을 생각했다. 지리산에 처음 오르던 날, 노고단까지 15시간 30분을 걸었던 날, 근육통으로 다리를 절며 걸었던 많은 날들, 밧줄에 의지해 넘었던 산길들, 너무나 깊은 아름다움에 마음 내려놓으며 눈물 흘렸던 순간들, 숨결 멎게 할 만큼 아름다웠던 야생화들, 산이 강을 품어 흘려보내고 있음을 깨달았던 순간들, 강과 산과 산줄기와 백두대간의 의미를 하나하나씩 새겼던 순간들... 그 모두가 떠올랐다. 그 날들의 느낌들을 산행일기 수첩에 기록 하였다.

백두대간은 하늘길이다. 이 땅 모든 생명들의 삶은 백두대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백두대간 솟아올라 수많은 산줄기 뻗어내며 들을 이루고 10개의 큰 강을 품어 흐르게 함으로 생명들은 살아갈 수 있었다. 백두대간의 산줄기와 산이 품어 흘려보내는 강줄기는 삶의 터전이고 시작이었다. 옛사람들은 하늘로부터 생명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하늘이 생사를 주관한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있어 모든 생명의 바탕인 백두대간은 하늘세상이었고 하늘로 가는 길이었다. 그 길을 걷는다는 것은 하늘로 오르는 것이요 하늘의 사람이 되어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었다. 백두대간이 품어 이 땅 구석구석으로 흘려보내고 있는 강줄기처럼 구석구석 스며들어 모두를 살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물처럼 가장 낮은 곳으로 스며들어 모든 생명을 살리는 삶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 백두대간은 그저 산길이 아니라 마음을 닦는 길이었다. 그러하기에 마음으로 산을 오르고 걸었던 것이다. 산줄기의 오르고 내림을 느끼고 산의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곤 하였다. 그리하여 한 번도 끊어지지 않은 채 구름 위를 흐르는 이 산길처럼 그들도 사람들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백두대간 그 장엄한 산줄기를 세상으로 흘려보낼 수 있었다.
이처럼 백두대간이 사람들의 마음으로 흘러들을 때에야 비로소 이 땅의 등줄기이며 생명의 고향인 백두대간은 우리 안에서, 이 민족 안에서 되살아나게 될 것이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간단히 스트레칭을 하고 산행 준비를 하였다. 아침식사를 위해 마당으로 나서니 빗줄기 가늘어져 있었다. 불빛이 비추었다. 빗줄기 불빛 받아 반짝이고 운무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다. 마치 불빛을 따라 가는 듯했다. 다른 세상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가볍게 식사를 하고 산으로 갔다. 산허리 굽이굽이 돌아드는 산길을 따라 올랐다. 구룡령이었다. 운무 가득했다. 어둠 속에 홀로 있던 표지석은 외로워 보였다.

▲©최창남

계속되는 새벽 산행 탓이었을까. 어둠이 익숙했다. 산으로 들어갔다. 구룡령 옛길 정상이라는 이정표가 보였다. 옛길 안내판도 있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잊힌 길이다. 그 길을 걸으며 그 길을 느껴보고 싶었다.
숲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구룡령 옛길에는 민초들의 삶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특히 일제 강점기 때 숲을 구웠던 재탄장과 함께 철광의 흔적도 남아 있다. 철로 만들어진 농기구의 원재료를 이곳에서 생산했다. 지금도 철을 캐던 동굴이 그대로 남아 있다. 광산이 일제 강제수탈의 현장이었던 점도 흔적을 통해 확인된다.
또한 이 길에는 금강소나무가 무리지어 살고 있다. 1980년대 말 경복궁 복원 과정에서 많은 금강소나무가 베어졌지만 아직도 우람한 금강소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다. 지금도 당시에 잘려나간 노송들의 그루터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 옛 지명도 그대로 남아 있다. 굵은 금강소나무 무리지어 사는 곳은 '솔반쟁이', 젊은 청년 죽은 터는 '묘반쟁이', 장례식의 하관 때 회다짐을 하기 위해 쓰던 횟가루를 생산한 곳은 '회돌반쟁이'라고 불렀다.

옛길 안내판은 옛길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 온 길과 가야 할 길도 알려주었다. 지나 온 약수산(藥水山, 1369.8m)과 가야할 갈전곡봉(葛田谷峰, 1204m)을 보여주었다. 갈전곡봉은 '칡넝쿨 밭'이란 뜻이다. 강원 인제군 기린면과 양양군 서면의 경계에 있으며 소양강의 지류인 방대천(芳臺川)을 비롯하여 계방천(桂芳川), 내린천(內麟川) 등의 발원지이다.

비에 젖은 숲은 고요했다. 비 그쳐 낙엽 밟는 소리만 들려왔다. 어둠 가시지 않은 숲길에 나무들 희끗희끗하고 검붉었다. 어린 조릿대들이 군락을 이룬 숲길에는 나뭇잎 떨어져 가을이 이미 깊었음을 말하고 있었다. 아침이 오고 있었다. 숲이 희미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산줄기를 넘어 온 햇살이 산길을 따라와 발길 닿는 곳마다 밝아지고 있었다. 꼭 우리의 발걸음이 빛을 몰고 오는 것 같았다. 갈전곡봉을 지났다. 단풍나무 붉게 물들어 숲은 눈길 닿는 곳마다 불타고 있었다. '조침령 17.5km'라고 쓴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긴 나무의자가 놓여 있었다. 낙엽 쌓여 있었다. 의자도 산길도 낙엽 쌓여 울긋불긋했다. 길도 의자도 숲도 모두 노랗고 붉은 나뭇잎으로 덮여 있었다. 모두 하나가 되어 있었다. 가을 깊어진 이 숲에서 낯선 것은 나뿐이었다. 나 홀로 다른 모습으로 숲길을 지나고 있었다.
골짜기에서 운무 피어올랐다. 숲은 이내 운무로 가득 찼다. 그저 아득했다.

▲나뭇잎 쌓이다 ©최창남

이름 없는 봉우리를 지나고 왕승골을 지나니 연가리골 안부였다. 연가리골은 재앙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룬 곳이다. 이제는 사람들 지나지만 1990년대 초만 해도 오지 중의 오지였던 곳이다. 연가리는 정감록이 적시한 최고의 피난처 중 하나였다.

"막힌 백두대간 길이 언젠가는 열릴까요?"
걸어오는 내내 생각하고 있었던지 김남균 대장이 불쑥 말을 건넸다.
"물론 언젠가는 열리겠지요. '언제인가?'가 중요한 것이지요. 막힌 길을 열려면 백두대간이 사람들 속으로 흘러들어가야 해요. 마음속에 백두대간이 있어야 해요. 지금처럼 원하는 사람들과 종주하는 것도 의미는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앞서 말한 대로 많은 국민들이 백두대간을 알아야 한다는 거예요. 이 땅에서의 백두대간의 의미, 백두대간이 우리 민족에게 갖는 의미, 백두대간이 품어 흐르게 하는 강의 의미, 생태적 의미, 문화적 의미, 신앙적 의미, 역사적 의미 등을 다양한 노력을 통해 알려야 해요. 전문 산악인들의 역할이 중요하지요. 좀 안된 이야기지만 지금의 전문 산악인들은 직업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백두대간 길이 열리기는 어렵겠지요. 길이 열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오랫동안 잃어버린 백두대간을 우리 안에서 되살리는 것 자체가 어려워지겠지요. 그저 산사람들만 지나는 산길로 끝나겠지요. 그러니 전문 산악인들이 변화해야 해요. 백두대간을 알리는 노력을 해야지요. 세미나도 하고 자료도 만들고 책도 내야지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지요. 그러면 틀림없이 막힌 길이 열릴 거예요. 믿음을 가지세요."

김 대장은 백두대간을 여러 차례 종주하였지만 산을 타는 것이 직업은 아니었다. 소위 말하는 전문 산악인이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고민이 더욱 많아진 얼굴이었다. 나는 김 대장을 바라보며 웃었다. 김 대장도 따라 웃었다. 멋쩍은 웃음이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가을 숲에 마음을 뺏긴 채 걷다보니 쇠나드리고개였다. 바람이 매우 세차 황소가 날아간다는 고개이다. 바람만 세찬 것이 아니라 계절에 맞추어 불기까지 한다고 한다. 봄에는 땅을 메마르게 하는 흙바람이 불고, 여름에는 길을 가로막는 비바람이 불고, 가을에는 억새를 뒤흔드는 낙엽바람 불고, 겨울에는 눈보라에 살을 에는 칼바람이 분다고 하니 바람도 이만하면 장하다. 그러나 그것도 옛말인지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가을 숲의 청청한 기운만이 숲을 돌아 나오며 우리를 감쌀 뿐이었다.
우리는 옛 조침령인 이 고개를 떠나 새로운 조침령으로 향했다.

▲조침령 ©최창남

깊어진 가을 숲은 나뭇가지마다 노랗고 붉은 잎 뚝뚝 떨어뜨리며 한가로웠다. 지나는 바람에 가지 흔들릴 때마다 나뭇잎 우수수 떨어졌다. 떨어지는 나뭇잎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기도 했다. 바람 많다던 쇠나드리고개에 불지 않던 바람이다. 나무 계단이 보였다. 긴 계단이었다. 계단을 내려서자 커다란 표지석이 보였다. 크고 굵은 글씨로 조침령(鳥寢嶺, 877m)이라고 써있었다.
강원도 양양군 서면 서림리와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소금을 지어 나르던 고개이다. 조침령이라는 이름은 여러 개의 다른 의미로 불리었다. 증보문헌비고에서는 '떨어질 조(阻)', '가라앉을 침(沈)'자를 써서 험준하다는 뜻으로 조침령(阻沈嶺)이라 하였고, 산경표에는 조침령(曺枕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근래에는 '새도 자고 넘는 고개'라는 뜻으로 조침령(鳥寢嶺)이라고 쓰고 있다.
조침령도 구룡령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길이 본래의 옛길이 아니다. 본래의 옛길은 현재의 조침령보다 남서쪽에 위치한 쇠나드리고개였다. 별로 높지 않은 고개지만 소도 날아갈 정도로 바람 세찼으니 예전에는 새들도 머물러 쉰 후 고개를 넘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의 조침령은 20여 년 전 군부대가 놓은 군사 도로이다.

내려선 조침령은 시골의 뒷산처럼 아늑했다. 고갯길은 넓어 마음이 툭 트였다. 가슴 시원했다. 흙길의 감촉도 좋았다. '새도 자고 넘는 고개'라는 이름의 뜻도 정겨웠다. 마음 가득 편안함이 밀려 왔다. 걸어 올라가니 조침령이라고 쓴 작은 표지석이 또 있었다. 오래 전에 만들어 놓은 것이다. 앞에 것과 달리 작고 아담했다. 정감이 갔다. 배낭을 내려놓고 앉았다. 모두들 편안해 보였다. 11시간의 산행을 마치고 내려온 사람들의 얼굴이 아니었다. 마치 그 자리에 그렇게 앉아 있기 위해 산을 지나 온 것 같은 얼굴들이었다.

▲산행을 마치다 ©최창남

햇살 따스하고 바람 선선했다. 고갯길을 걸었다. 산보를 나온 듯 마음 가벼웠다. 나뭇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 보였다. 뭉게구름 피어오르고 있었다. 구름 아래로 첩첩한 산줄기 아득했다. 지나온 길이 거기 있어 손짓하고 가야할 길이 거기 있어 웃고 있었다.

최창남/글, 사진
Chamsu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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