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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의 품에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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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의 품에 들다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49> 닭목재~구룡령/9.30~10.2

산행 마흔 나흘 째. 목요일.

산행 준비를 마치고 차에서 내리니 새벽하늘에 별 총총하였다. 영롱히 빛나며 진고개를 비추고 있었다. 유난히 빛나는 별들 있었다.
'저 별들 중에 항성(恒星)도 있겠지...'
항성은 행성과 달리 스스로 빛을 발하는 별이다. 태양과 같은 붙박이 별이다. 나는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을 즐겨하던 유년 시절부터 항성처럼 스스로 빛나기를 소망했다. 항성의 중력에 이끌려 주위를 맴돌 수밖에 없는 행성처럼 항성의 빛을 받아 빛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작은 빛이라도 내 마음의 빛, 내 영혼의 빛을 지닐 수 있길 바랐다. 행성이라고 보잘 것 없는 별은 아닌데도 다른 별의 빛을 받아 빛나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었다. 이런 생각은 어른이 되어서도 지속되었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은 대체로 나를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때로는 몹시 힘들게 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약간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항성과 같은 빛을 지니고 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있는 것을 보지 못하면서 찾으려고 하였으니 하지 않아도 되는 갈등과 번민의 날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날들로 인해 때로 나의 젊은 날들은 힘들고 고달팠다. 생각해보면 그런 번민과 고통의 시간들조차도 새벽하늘의 별처럼 아름다웠다. 아름다웠던 날들이었다.
동대산으로 올라갔다. 여기서부터 온전하게 오대산(五臺山, 1563.4m)의 품이었다.

오대산이라는 이름은 신라시대 지장율사가 지은 이름으로 전해진다. 당나라 유학 당시 공부했던 중국 산서성 청량산의 다른 이름이 바로 오대산이다. 지장율사가 귀국하여 전국을 순례하던 중 백두대간에 자리한 이 산을 보고 오대산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오대(五臺)는 비로봉(毘盧峰, 1563m), 호령봉(虎嶺峰, 1560m), 상왕봉(象王峰, 1493m), 두로봉(頭爐峰, 1421m), 동대산(東臺山, 1433m) 등 다섯 봉우리를 말하는 것이다. 제1봉은 비로봉이다. 비로(毘盧)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의미한다. '부처의 진신(眞身)'을 의미하는 말이다.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에 살면서 그의 몸은 법계(法界)에 두루 차서 큰 광명을 내비추어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이다. 그러니 비로봉은 부처의 산이다. 오대산은 부처를 중심에 모신 불교신앙의 성지이다. 오대산 외에도 비로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봉우리들이 우리나라의 산에는 많다. 금강산 비로봉(1638m), 치악산 비로봉(1288m), 속리산 비로봉(1057m)과 소백산 비로봉(1439.5m)이다. 모두 부처의 산이다. 문수보살이 일만의 권속을 거느리고 살고 있는 부처의 땅이며, 부처의 법을 온 누리에 비추는 산이다. 그런 까닭이었을까. 오대산은 주봉인 비로봉을 비롯해서 다섯 개의 연봉이 연꽃처럼 피어오른 것과 같은 모양이라고 한다. 오대산은 1975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아침 오다 ©이호상

진고개에서 동대산(東臺山, 1434m)으로 오르는 길은 한 번의 내리막도 없었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숨을 가다듬으며 올랐다. 아침이 오고 있었다. 햇살은 깊고 울창한 숲을 뚫고 들어오지 못한 채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햇살 빛나고 있었다. 숲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동대산에 올랐다. 연곡천(連谷川)과 평창강(平昌江)을 품어 흐르게 하는 산으로 태백산령의 줄기를 이루는 오대산령에 속한 산이다.
해 떠오르고 있었다. 산줄기마다 능선을 따라 붉은 기운 서려 마치 오로라처럼 빛나고 있었다. 빛으로 마음 그득했다. 차돌백이(1200m)로 향했다. 숲은 깊고 울창했다. 나무들은 세월의 흔적을 감고 있는 듯 가지들은 굵었고 껍질은 두꺼웠다. 우람한 나무들이 몸 구부리고 가지 뒤틀려 살아가고 있었다. 세찬 바람에 쓸리고 눈에 눌린 때문이다. 원시림 같았다.
산길에는 나뭇잎 떨어져 수북했다. 숲은 이미 깊은 가을이었다. 발바닥으로 낙엽의 느낌이 전해졌다. 푹신하고 따스했다.
산길을 덮은 낙엽들은 한 겨울 혹한의 찬바람으로부터 나무뿌리는 물론 흙 속에 사는 미생물들이 얼어 죽지 않도록 지켜준다. 그 미생물들로 인해 흙은 봄과 함께 새로운 생명들을 품어 자라게 한다. 그러니 떨어진 낙엽은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는 전령사이며 새로운 생명을 품어 안은 대지의 일부이다. 겨울 지나고 봄이 되어 하늘과 땅의 온도가 같아지는 날이 오면, 하늘과 땅의 마음이 같아지는 날이 오면, 하늘과 땅이 서로 만나 사랑하게 되는 날이 오면 언 땅 녹고 물 흘러 식물들은 제각기 싹을 틔우고 잎을 내며 꽃을 피우는 것이다.
낙엽 한 장의 사랑이라고 할까. 낙엽 한 장의 소중함이 가슴으로 전해진다. 사랑이란 다른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와 다른 것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소유욕이고 탐욕이고 아집일 뿐이다. 아무리 사랑이라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차돌백이 ©이호상

나뭇잎 수북이 쌓인 길 곁에 산목련과 물박달나무 있었다. 거대한 신갈나무들도 많이 보였다. 소나무들은 보이지 않았다. 오래된 숲이다. 소나무에서 참나무로 숲의 천이가 진행 된지 오래된 숲이다. 깊고 울창한 숲으로 인해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숲에는 살아있는 나무들에게도 이끼가 잔뜩 올라 있었다.
커다란 흰 돌들이 보였다.
"선생님, 저 돌들이 부싯돌이에요. 들 수만 있으면 한 손에 하나씩 들고 탁탁 치면 불꽃이 일지요. 제일 큰 부싯돌이에요. 그래서 살아있는 돌이라고 해서 산돌이라고도 부릅니다."
김 대장의 말이었다. 둘러보니 산 경사면에 산돌이 많았다. 아주 자그마한 산돌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언제든지 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홀로 웃었다.

산길에 연리목(連理木) 여러 그루 보였다. 단풍나무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1260m 봉우리를 지나고 신선목이(1120m)를 지나니 나무들 붉게 물들어 숲은 온통 불타는 듯했다. 산봉우리가 노인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대로 이름이 된 두로봉(頭老峰, 1422m)에 오르니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산줄기들이 하늘을 닮아 파랬다.
예부터 신 돌배가 많았다는 신배령(新梨嶺, 1173m)에서 지친 몸을 쉬었다. 점심식사를 하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누군가 말했다.
"문자 받으셨어요? 최진실이 자살했대요."
이미 모두들 알고 있는 듯했다. 믿겨지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어려운 일들이 있었지만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려고 했던 유명 배우가 자살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너무 오랜 세월을 늘 사람들 속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홀로 있어 보아야 진정으로 함께 있을 수 있다. 홀로 있어보지 못한 사람은 함께 살아가는 삶의 의미와 즐거움을 온전히 깨닫기 어렵다. 함께 살아가는 삶의 의미와 즐거움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면 함께 있어도 늘 홀로 있는 듯 외롭다. 그래서 홀로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게 된다. 참으로 마음 아팠다. 그 영혼이 조금이라도 위로받기를 기도했다.

영화배우 최진실씨의 소식을 전해 들으며 오래 전 이 땅에 살았던 이가 떠올랐다. 차기석(車基錫)이었다. 차기석은 동학지도자였다. 강릉, 양양, 원주, 횡성, 홍천 등 5읍의 대접주였다. 그는 홍천 서석을 중심으로 수천명의 농민군을 모아 활동했으며, 풍암리 전투에서는 800여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굴하지 않고 내면 쪽으로 후퇴하여 끝까지 항전하였다. 이 전투로 인해 이 지역은 강원도 농민항쟁 최후의 전투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토벌군에 의해 생포 되어 강릉 땅에서 효수 당했다.

시대도 역사도 삶도 전혀 다른 두 사람의 주검을 대하며 마음 무거웠다. 마음 돌리려 애썼다. 바람 잔잔하게 불어왔다. 하얀 어수리 소담스럽게 피어 바람에 흔들렸다. 나를 위로하는 듯했다.
▲가을 깊어지다 ©이호상

지나는 산길마다 산줄기 아련했다. 산과 하늘이 맞닿는 곳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하늘은 파랬고 산은 검었다. 만월봉(滿月峰, 1280.9m)을 지나고 산이 매가 엎드린 모양을 하고 있다는 응복산(鷹伏山, 1369.8m)을 지나니 마늘봉(1126.5m)이 지척이었다. 응복산을 내려 왔다. 돌계단을 지나니 나무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오늘의 목적지인 구룡령까지 6.7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보였다. 마늘봉을 지나 약수산(藥水山, 1306.2m)에 올랐다. 산이 품고 있는 약수(藥水)로 인해 약수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산이다. 약수산에서 발원하는 미천골에는 불바라기약수(미천약수)가 있고, 약수산과 갈전곡봉 사이 구룡령 계곡에는 갈천약수가 있다. 양양 주민들은 오색약수보다 이 약수를 더 인정한다고 한다.

구룡령(九龍嶺, 1013m)을 향했다. 원래 지명은 장구목이다. 도로가 나기 전 강원도 홍천에서 속초로 넘어가던 고개이다. 일만 골짜기와 일천 봉우리가 일백 이십 여리 고갯길을 이룬 모습이 마치 아홉 마리 용이 지난듯하다 하여 구룡령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가 지금 구룡령이라고 알고 있는 56번 국도가 지나는 고개는 원래의 구룡령이 아니다. 이 도로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자원 수탈 목적으로 원래의 구룡령 고개에서 1km 가량 떨어진 곳에 개설한 비포장도로이다. 그 후 1994년 이 도로를 포장하여 오늘에 이르는 것이다. 일제 당시 일본인들이 지도에 원래 구룡령의 위치를 표기하지 않고 자신들이 만든 비포장도로를 구룡령으로 표기하면서 위치가 잘못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1994년 이후에는 모든 지도와 행정 표기에서 구룡령의 위치가 현재의 고개로 표시되었으니 원래의 구룡령을 찾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구룡령 옛길은 최대한 경사를 뉘여 자연스럽게 만들어져 있어 노새에 짐을 싣고 오르면서도 그저 숲길을 걷는 듯 숲을 느끼며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그 길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 간절했다. 마음 내려놓고 그 길 지나며 산과 함께 걷고 싶었다.
▲구룡령 ©이호상

구룡령으로 가는 길에 고사목 줄지어 서 있었다. 고사목 위로 산줄기 보였다. 붉은 노을이 깃들고 있었다. 구룡령으로 내려섰다. 폐쇄된 산림전시관이 있었다. 빈 건물 앞으로 바람 지났다. 쓰레기 날렸다. 황량했다. 다소 흉물스러웠다. 구룡령의 정취를 찾을 길이 없었다.
구룡령 고개에도 노을 빛 어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최창남/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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