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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을 지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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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을 지나다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47> 닭목재~구룡령/9.30~10.2

산행 마흔 이틀 째. 화요일.

아직은 새벽이 오지 않은 시간이었다. 깊은 밤이었다. 눈을 뜨니 2시 50분이었다. 일어나 커튼을 치니 도시의 불빛이 은은했다. 산행 준비를 마치고 길을 떠나니 새벽 4시였다. 아침은 아직 오지 않았고 어둠은 두텁게 드리워있었다. 차는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어둠 저편에 산이 있었다. 아직은 가야할 길이 있었다. 만나야할 무엇이 있었다.
차는 닭목재를 향했다. 비로 인해 마치지 못한 산행을 이어갈 예정이었다. 짙은 안개가 산과 도로를 덮고 있었다. 안개로 인해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차는 안개 속으로 나아갔다. 나아가는 만큼 길은 열렸다. 길은 이어져 있었다.
멀리 산 능선을 따라 붉은 기운이 깃들고 있었다. 일출의 장엄함이 능선을 붉게 물들이며 내려오고 있었다. 하늘이 저편으로부터 붉어졌다. 아름다웠다.

어떻게 자연(自然)은 스스로 저토록 아름다운 것들을 품을 수 있을까.
저 아름다움의 비결이 무엇일까.
자연(自然)스러움일까.

'자연(自然)스러움'이란 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것, 스스로 그렇게 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자연이 저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내는 것은 '스스로 그렇게 되어지는 세계'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아무리 훌륭한 예술가라고 하더라도 저토록 아름다움 풍경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만들어 내기 위해 인위적으로 노력하기 때문이 아닐까. 자연스러움과 자연스럽지 못함의 차이가 자연과 사람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 차이만큼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마음에 이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따라가다 보니 차는 닭목재로 들어가고 있었다. 구름은 많으나 화창한 날씨였다. 농기계 보관창고 곁에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이 서서 고개를 지나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닭목령 ©이호상

산행을 시작했다. 고루포기산 방향으로 들어가는 길은 동네 뒷산을 오르는 길처럼 완만하고 편안했다. 길은 한가로웠다. 엉겅퀴와 쑥부쟁이, 구절초와 개망초 피어 산길 아름다웠다. 날 밝아 꽃잎을 오므리고 있는 노란 달맞이꽃도 피어 가슴 설렜다. 바람 불었다. 숲에서 젖은 낙엽 냄새가 났다. 오래도록 쌓인 낙엽들이 썩고 있었다. 흙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숲으로 더 들어가니 수령이 수백 년은 되어 보이는 소나무들 곁에 어린 참나무들이 어느새 자라고 있었다. 숲의 천이(遷移)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더 많은 날들이 지난 어느 날에는 이 숲에는 소나무 사라지고 참나무만 가득하리라.

숲은 그렇게 잠시도 쉬지 않고 자연스럽게 변해가고 있다. 생명이란 그렇게 잠시도 쉬지 않고 변화하는 것이다. 맹덕목장을 지났다. 과거에는 소와 염소 등을 키웠으나 지금은 키우지 않는다는 목장에는 가지런히 일구어 놓은 밭고랑만 보였다. 목장을 돌아 들어간 숲에는 고사목들 많았다.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들어 올려 호소하는 듯했다. 고사목 위로 하늘이 파랬다. 숲은 이미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단풍든 나뭇잎들 떨어져 산길을 울긋불긋 수놓고 있었다. 왕산 제1쉼터, 제2쉼터를 지나 산자락에 서니 멀리 누운 산줄기에 풍력발전소가 들어서 있었다. 파란 하늘과 하얀 발전기의 모습을 멀리서 보니 조화를 이룬 듯했다. 자연과 문명도 멀리서 바라보니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고루포기산(1238.3m)에 올랐다. 강원 평창군 도암면 수하리와 강릉시 왕산면 고루포기 마을 사이에 위치해 있는 태백산령의 지맥인 해안 산령에 딸려있는 산이다. 주변의 발왕산, 제왕산, 능경봉의 명성에 가려 찾는 이들이 많지 않았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백두대간 종주를 하는 이들이 많아지며 찾는 이의 발걸음이 잦아졌다. 겨울철에는 유난히 눈이 많이 쌓여 선자령(1168m)과 더불어 겨울산행지로서 사랑받고 있다.
정상에는 알루미늄과 철재로 만든 벤치가 하나 놓여 있었고 고루포기산이라고 쓴 작은 푯말이 나무기둥에 걸려 있었다. 1000m도 넘는 높은 산이건만 뒷산처럼 편안했다. 산길을 이어갔다. 전망대를 만들려고 목재를 쌓아 놓은 곳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다. 풍력발전소가 더욱 가까이 보였다. 자연 속에 들어선 인위적인 설비들이 생경스러웠다. 가까이서 보니 자연과 문명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확실히 자연이란 가까이 보면 볼수록 아름답지만 문명이란 멀리 떨어져 보면 볼수록 아름답다. 문명이란 신기루인가보다.
▲사람 사는 세상을 바라보다 ©이호상

산길을 걷는 것은 자연을 가까이서 보는 일이다. 자연과 함께 머물러 자연스러워지는 일이다. 문명 속에서 살아오며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마음의 생각과 습성들을 씻어내는 일이다. 나는 백두대간을 걷는 내내 내 영혼이 다시 자유로워지기를 원했다. 끊어진 길 이어져 자유롭게 백두대간을 따라 백두산까지 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원했다. 이 땅이 입은 상처가 회복되기를 원했다.
발걸음 멈추고 바라보았다. 살아있으나 속이 텅 비어 있는 나무 안에서 새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생명이란 저렇게 자유로운 것이다. 생명의 경이로움에 고개 숙여 경의를 표했다.
차분하게 산길 이어갔다. 어느 새 영동고속도로가 뚫려 있는 횡계치를 지나니 사람들이 쌓아 놓은 행운의 돌탑이었다. 돌멩이 하나 올려놓고 길을 나서니 옥잠화, 비비추, 산수국 피어 마음을 씻어 주었다.
능경봉(陵京峰, 1123.2m)에 올랐다. 해는 구름 속에 있었으나 하늘은 맑았다. 멀리 바다 보이고 대관령의 초원이 보였다. 초원은 바다 같고 바다는 초원 같았다. 첩첩한 산줄기 그림 같이 늘어서 고요했다. 모든 것이 보이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웠다. 그 느낌을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저 마음 편안했다.
능경봉은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 및 강릉시 왕산면 왕산리에 걸쳐 있다. 오르기가 다소 힘들기 때문에 찾는 이가 적어 오히려 자연이 그대로 보존되었다. 백두대간이 동해를 끼고 설악산(1708m)과 오대산(1563m), 황병산(1407m)을 일으키고, 대관령에서 몸을 낮췄다가 다시 솟아오른 산이다. 눈이 많으나 산행거리가 짧아 눈 덮인 겨울 산을 즐길 수 있는 산으로 알려져 있다.

능경봉을 내려섰다. 참나무 몇 그루가 서로 엉켜 살아가고 있었다. 서로 다른 몸을 지니고 태어났으나 서로 한 몸으로 살아가며 삶을 나누고 있었다. 서로 뿌리로부터 빨아 올린 물과 영양소를 나누며 서로를 해치지 않고 공존하고 있었다. 공존의 삶이다. 나무는 서로 소통하며 공존의 삶을 살아가지만 사람들은 많은 경우 그렇지 못하다.
이 산줄기에는 가슴 아픈 역사의 기억이 남아 있다. 대관령(大關嶺, 865m) 가는 길 동쪽에 자리한 제왕산(帝王山, 840.7m)에 남아 있는 이야기이다. 제왕산은 고려 말 우왕(禑王, 1364~1389)이 쫓겨 온 곳이다. 우왕은 공민왕의 시녀 반야(般若)에게서 얻은 아들로 알려져 있다. 공민왕이 죽은 후 10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공민왕의 자식이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라는 이성계의 주장에 몰려 왕위에서 쫓겨났다.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강릉으로 옮겨진 후 이성계에 의해 1389년 살해되었다. 쫓겨난 왕의 최후가 대개 그런 것이라고 하지만 슬픈 이야기이다. 권력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는 말로 모든 것이 이해될 수 있을까.
우왕이 마지막으로 머물었던 곳이 바로 지금의 제왕산이다. 그곳에는 당시에 쌓았다는 제왕산성이 남아 지나간 역사의 아픈 기억들을 소리 없이 말해주고 있다.

나무들처럼 몸 부비며 함께 살아갈 수 없을까. 그 어떤 신념이나 사상보다 생명을 더욱 소중히 여길 수는 없을까. 숲의 모든 생명들이 제각기 제 삶을 살아감으로서 풍성한 숲을 이루듯이 사람들도 제각기 제 삶을 살아감으로 다양하고 풍부한 사회를 이룰 수 없을까.
▲대관령 ©이호상

모두들 제각기 살아가라는 듯 산은 말이 없었다. 대관령(大關嶺, 832m)으로 향했다. 대관령 가는 길가에 억새 피어 아름다웠다. 바람 불어 억새 흔들릴 때마다 마음 흔들렸다. 발걸음 멈추었다. 길을 넘어서자 대관령이었다. 곳곳에 풍력 발전기가 세워져 있었다. 거대했다. 곁을 지날 때마다 그 규모에 압도되곤 하였다. 낯설고 생경했다. 그 생경함 때문이었는지 아흔아홉 험준한 고개를 오르내리며 대굴대굴 굴러 '대굴령'이라 하였다는 대관령의 정겨움을 느낄 수 없었다.

대관령은 강원 강릉시와 평창군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서울과 영동을 잇는 관문이다. 대관령을 경계로 동쪽은 오십천이 강릉을 지나 동해로 흐르며, 서쪽은 남한강의 지류인 송천이 된다. 이 일대는 황병산, 선자령, 발왕산 등에 둘러싸인 분지이다. 영서지방과 영동지방을 넘나드는 큰 관문이라 하여 대관령이라 불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대관령을 가로질러 선자령(仙子嶺, 1157m)으로 들어가는 산길 초입에 있는 통신중계소로 향했다. 1950년대 말에 구축한 군사시설인 벙커를 철거한 자리에는 억새 무성하여 지나간 시대의 아픔을 잊게 했다. 통신중계소가 보였다. 오늘 산행의 목적지였다. 산행을 마쳤다.

저녁이 오고 있었다. 하늘은 어두워지고 산은 고요히 말이 없었다.
달맞이꽃 제 사랑을 마중하기 위해 꽃잎을 활짝 펴고 있었다.

기다릴 제 사랑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선자령 가는 길 ©이호상

노을 붉었다. 노을은 산줄기를 붉게 물들이며 내려오고 있었다.
선자령 가는 길을 바라보았다. 길은 가깝고 산은 멀리 있었다.
멀리 있는 산줄기에도 붉은 노을 깃들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최창남/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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