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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강 흐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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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강 흐르다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41> 화방재~댓재/9.9~9.11

산행 서른 엿새 째. 수요일.

산행 준비를 하고 나오자 길가에 민들레 홀씨 다소곳했다. 바람 기다린 밤이었건만 불어오지 않았다. 아직 어둠이 남아 있는 신새벽이었다. 민들레 제 몸 나누어 살아가라고 바람 불어오기를 기도했다.

해가 뜨자 하늘은 파랬다. 구름 한 점 없었다. 에메랄드빛이었다. 매봉산 풍력발전단지 자리한 산자락의 하늘도 푸르렀다. 능선 따라 거대한 풍력발전기 늘어서 있었다. 사람이 날아갈 정도로 바람이 거세다는 능선에는 바람 한 점 없었다. 산자락에는 고랭지 채소밭 끝이 없었다. 무성한 숲 잘리고 깎여 민둥산이 되어 있었다. 먹고 사는 일의 고달픔을 알면서도 가슴 아팠다. 결국은 자연도 인간도 황폐화 되는 일이다.
맵시 있게 만들어 놓은 간판이 보였다. '하늘 다음 태백, 바람의 언덕'이라고 써있었다. 매봉산 풍력발전단지(1272m)였다. 풍력발전기 있고 다른 한 편에 다양한 모양의 풍향계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주황색의 별 모양을 한 것도 있고, 파란색 별과 하트 모양을 한 것도 있다. 붉은색 그믐달 모양, 연두색 초승달 모양도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어 모두들 허공에 박혀있는 듯하였다. 마치 장난감 같았다.
건너편 산은 스키장을 만드느라 온통 깎여 나가고 있었다. 이 땅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가슴 아팠다.
▲바람의 언덕 ©이호상

숲으로 들어갔다. 소나무와 전나무 많았다. 참나무 간간이 보였다. 조록싸리 보이고 엉겅퀴, 씀바귀, 쑥부쟁이도 보이고 연보라 빛 모싯대 몇 송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매봉산(1303.1m)에 올랐다. 옛날 어느 땐가 강릉 일대에 해일이 일어 산봉우리에 매 한 마리만 앉을 수 있는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침수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 봉우리의 이름이 매봉산이 된 것이다. 원래 이름은 천의봉이다. '하늘의 봉우리'라는 뜻이다. 이는 하늘에서 떨어진 빗물이 한강과 낙동강, 오십천으로 흘러들도록 물줄기를 만들어 주는 산이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백두대간 상에 있는 매봉산은 또 하나의 산줄기를 흘려보낸다. 지리산부터 매봉산까지 이어온 백두대간 산줄기와 달리 매봉산은 부산 몰운대까지 산줄기를 흘려보낸다. 바로 낙동정맥이다. 지리산에서 매봉산에 이르는 백두대간 산줄기와 매봉산에서 몰운대에 이르는 낙동정맥 산줄기 사이에 낙동강 흐르고 영남지방이 자리하고 있다. 두 산줄기가 만들어 준 터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몸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강줄기와 산줄기를 품어 흐르게 하는 것은 하늘이라는 옛 사람들의 고백이 '천의봉'이라는 이름에 담겨 있었던 것은 아닐까.

비록 지금은 천의봉이라는 이름의 원래 의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매봉산으로 불리고 있지만 말이다. 산경표에는 이 산의 이름이 '수다산'(水多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산줄기에서 세 개의 강줄기 흘러내리고 있으니 물이 많은 산임에 틀림없다.
▲©이호상

봉우리 한 편에 '백두대간 구성 체계도'라고 쓰여 있는 안내판이 있었다. 백두대간의 의미에 대한 간결한 설명이 담겨 있었다.

"백두대간은 우리 민족 고유의 지리인식체계이며...(중략)... 산의 흐름을 파악하고 인간의 생활권 형성에 미친 영향을 고려한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이루는 산지 인식 체계이다."

매봉산에 올라 내려 보니 사방을 에워싼 산세로 인해 '천년병화 불입지지'(千年兵禍 不入之地)의 이상향(理想鄕)으로 여겨지던 태백시는 구름에 덮여 보이지 않았다. 골마다 구름의 바다였다. 구름 위로 지나온 길이 보였다. 구름 위로 산줄기 흘러 이곳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구름 위를 걸어온 것이다. 말 그대로 하늘 길이었다. 소백산, 태백산, 화방재, 청옥봉, 함백산, 중함백 그리고 은대봉과 금대봉도 보였다.

매봉산을 내려와 끝이 보이지 않는 고랭지 채소밭을 지났다. 길가에 민들레 홀씨 바람에 날리고 자색 물봉선 예쁘게 피어 있었다. 민들레나 물봉선이나 씨앗을 퍼뜨려야 하지만 그 방법은 사뭇 다르다. 민들레는 바람 기다리며 '나를 흔들어 주세요.'라고 말하지만, 물봉선은 꽃말의 의미 그대로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라고 말한다. 건드리기만 하면 '톡!'하고 터지니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민들레는 바람에 자신을 맡기는 자연스러움과 초연함이 의젓했고, 물봉선은 제 자존심이 지키려 애쓰는 마음이 사랑스러웠다. 물봉선 군락지인 듯 흰물봉선, 분홍물봉선, 노랑물봉선 등 피어 아름다웠다. 마음 설렜다.
▲낙동정맥 예서 갈라지다 ©이호상

고랭지채소밭을 지나고 헬기장을 지나 삼수령(三水嶺, 920m)으로 향했다. 숲으로 들어갔다. 숲은 햇살 가득했다. 숲 사이로 난 길을 내려가자 표지석이 보였다. "낙동정맥 예서 갈라지다."라고 적혀 있었다. 피재라고도 부르는 삼수령은 아직 더 내려가야 했지만 이곳에서 강줄기는 갈라지고 있었다. 이곳으로 떨어지는 물줄기는 각각 낙동강과 한강과 삼척의 오십천으로 흘러들어 들을 풍성하게 하고 수많은 생명 품어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낙동정맥(洛東正脈)은 낙동강의 동쪽을 따르는 산줄기로 동해안 지방의 담장이다. 이곳 매봉산에서 시작하여 태백 백병산(1295m), 통고산(1067m), 울진 백암산(1004m), 청송 주왕산(720m), 경주 단석산(829m), 울산 가지산(1240m), 신불산(1290m), 부산 금정산(802m)을 지나고 백양산(642m)을 넘어 다대포의 몰운대까지 장장 370km를 흐르는 산줄기이다.

숲을 나서자 도로 곁에 삼수령 목장이 있었다. 맵시 있게 만들어 놓은 간판이 눈에 띄였다. 도로를 따라 내려가니 삼수령(三水嶺, 920m)이었다. '피재'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삼척 지방 백성들이 난리를 피해 이상향으로 알려진 태백 황지로 들어가기 위해 이곳을 넘었던 데서 기인한 이름이다. 난리를 '피해 오는 고개'라는 뜻이다.
삼수령은 이름 그대로 세 강(三江)의 발원지이다. 고갯마루에 떨어진 빗물이 북쪽으로 흐르면 한강을 이루어 황해로 들어가고, 동쪽으로 흐르면 삼척의 젖줄 오십천을 이루어 동해로 들어가고, 남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을 이루어 남해로 흐른다. 그러니 삼수령은 이 세 강의 발원지이며 분수령(分水嶺)인 것이다.

삼수령 표지석 뒤쪽에 조성된 공원으로 들어가 쉬었다. 공원에는 내린 빗물이 한강과 낙동강과 오십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상징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바람 불어 시원했다.
건의령(巾衣嶺, 820m)을 향했다. 가는 길에 이제는 농사를 짓지 않는 고랭지 채소밭을 보았다. 밭에는 풀 자라고 나무들 자라고 있었다. 숲이 복원되고 있었다. 자연은 스스로 제 상처를 치유하고 복원하고 있었다. 자연치유력과 복원력을 지니고 있는 자연을 치유력과 복원력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보존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조금은 낯간지러웠다. 때로 보존을 하겠다면서 오히려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되기도 하였다. 그대로 놓아두면 자연은 제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온전히 만들고 보존해 가는데 말이다.

새목이재(鳥項, 850m)를 지나고 건의령에 도착했다. 남한강 상류의 상사미 마을 주민들이 삼척시 도계읍 방면으로 갈 때 이용하던 고갯길이다.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恭讓王, 재위 1389~1394)이 삼척 육백산 기슭의 궁터에 유배와 있을 때의 일이다. 고려의 충신들이 그를 배알하고 돌아오면서 이 고갯마루에 이르러 복건과 관복을 벗어 걸어 놓으며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겠다고 하였다고 한다. '복건과 관복을 벗어 건 고개'라는 의미로 건의령(巾衣嶺)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5만분의 1 지형도나 고갯마루 안내판에는 한의령(寒衣嶺)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도 건의령으로 기록되어 있고, 마을 사람들도 건의령으로 부르고 있다.
태백의 깊고 장대한 산줄기에 남아 있는 두문동이나 건의령의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걷는 내내 마음에 남아 있었다.
▲많은 이야기가 담긴 숲 ©이호상

푯대봉(1009.2m)을 넘고 서방만 얻으면 죽어 아홉 서방을 모셨다는 기구한 여인의 전설이 서려있는 구부시령(九夫侍嶺)을 지나니 덕항산(德項山, 1072.5m)이었다. 원래 이름은 '덕메기(산)'이었다고 한다. "저 너머에 화전하기 좋은 더기(고원)가 있는 뫼"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것이 '덕목이'로 변하고 덕항산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 화전민들의 고단한 삶이 그대로 전해지는 이름이다. 화전민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라도 하려는 듯 덕항산은 수려한 산세를 자랑한다. 경동지괴(傾動地傀)의 표본을 이루는 곳으로 동쪽은 깎아지른 석회암 사면, 서쪽은 1000m 전후의 고위평탄면을 이룬다. 석회암 사면에는 환선굴, 바람굴, 관음굴 같은 동굴들과 촛대봉, 사다리바위, 나한봉, 수리봉, 금강봉, 미륵봉 같은 기암들이 즐비하다. 골짜기는 거의 언제나 안개에 차있고 그 사이로 언뜻언뜻 험산과 기암이 드러나는 환상적인 풍경을 품고 있다고 한다. 머물러 바라보지 못해 끝내 아쉬웠다.

환선봉(幻仙峰, 1081m)에 오르니 바람 불었다. 환선봉에서 내려오니 낙엽송 가득했고 쑥부쟁이 만발했다. 자암재에 도착했다. 굵은 참나무들 많았다. 하늘은 아직 푸르렀으나 숲은 어스름 속으로 잠겨들고 있었다. 어스름은 나무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어스름이 하늘로부터 내리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부터 오르는 것 같았다.
어스름 깃드는 숲에 서서 내려가는 길을 바라보았다. 참나무 가득하고 조릿대 무성했다. 조릿대 헤치며 내려갔다. '사사삭- 사사삭!' 조릿대 몸에 스치며 소리가 났다. 그 소리 정겨웠다.
자암재에서 내려서자 이미 숲 밖 차 지나는 길에도 어스름 드리워있었다.
어스름 깊어가는 저녁 숲가에서 개망초꽃 무리지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 순박해 아름다웠다. 그러나 외로워 보였다.
돌아보니 내려온 길 어둠 속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최창남/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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