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산줄기 저 홀로 흐르고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산줄기 저 홀로 흐르고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40> 화방재~댓재/9.9~9.11

산행 서른 닷새 째. 화요일.

지난 5월 20일 시작한 산행이 9월이 되었는데도 끝나지 않고 있었다. 아직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아 있었다. 백두대간 남한 구간 도상거리 약 690km, 실제거리 약 1,000km의 3분의 2를 걸어 왔다. 강원도 땅으로 들어왔다. 하루에 높고 낮은 산과 봉우리와 고개를 삼사십 개씩 넘었다. 수많은 산과 봉우리를 지났음에도 나는 산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전과 달리 산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뿐이었다.
지난 5월 이후, 산은 늘 가까이 있는 듯 멀리 있었고, 멀리 있는 듯 가까이 있었다. 때로 산길을 걸으면서도 산을 느낄 수 없었고, 때로 산을 떠나 있으면서도 산을 느낄 수 있었다. 때로 산이 그리워 산으로 들어서면 산은 멀리 물러나 내게 곁을 허락하지 않았고, 때로 산을 나와 사람 사는 세상으로 들어서면 산은 다가와 곁에 머물렀다.
산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산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거나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산이 나를 받아들여 주었듯이 나도 산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멀리 떨어져 있거나 곁에 머물러 있거나 그저 느끼고 받아들였다. 그리워하고 사랑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 산행이 끝나는 날까지 그렇게 그리워하고 사랑하며 산들과 함께 남은 길을 지날 수 있기를 바랐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다. 산행을 위해 지난 목요일 내려온 화방재(花房嶺, 939m)를 다시 찾았다. 날씨 맑았다. 화방재에서 비단봉까지 가는 16.3km의 산행이었다. 화방재에서 만항재를 지나 함백산(咸白山, 1572.9m), 은대봉(1442.3m), 금대봉(1418.1m)으로 이어지는 산길이었다. 해발 1400m가 넘는 하늘 가까이 나 있는 하늘길이었다. 야생화 가득하여 야생화 천국이라고 불리는 산길이었고, 낙동강과 한강과 오십천을 품어 흐르게 한 산줄기였다. 그 산길, 그 산줄기, 그 하늘길을 몸으로 느끼며 걷고 싶었다.

어평재 민박집 앞에서 산행 준비를 마치고 함백산으로 향했다. 함백산(咸白山)은 오대산(五臺山, 1563m), 설악산(雪嶽山, 1708m), 태백산(太白山, 1567m) 등과 함께 태백산령에 속하는 고봉이다. '함백'(咸白)은 '태백'(太白)과 마찬가지로 '크게 밝다'는 뜻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함백산도 태백산과 같이 신령한 산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태백산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산이었고, 함백산은 하늘의 은총을 입는 산이 아니었을까.'
▲야생화 흐드러지다 ©이호상

산으로 들어서는 모든 이들은 야생화 천국을 이룬 이 산에서 마음의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산길을 지나며 삶의 고단함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산을 '크게 밝은 산'이요 이 땅에 이루어진 천상세계라고 생각했다고 해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디 그뿐인가. 산줄기는 금대봉으로 이어지며 한강과 낙동강과 오십천을 품어 흐르게 하고 있으니 하늘의 은총을 입은 산줄기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을 것이다.
도로를 가로 질러 마을로 들어섰다. 왼편 길로 접어들자 숲이었다. 아침 9시가 다 되었는데도 풀잎들은 젖어 있었다. 바짓단은 이내 젖었다. 가파른 길 숨 가쁘게 오르니 편안한 길이 이어졌다. 야생화 많았다. 노란 짚신나물, 마타리, 금마타리, 기린초, 개망초, 모싯대와 씀바귀도 있었고 미나리아재비도 보였다. 모두들 아름다웠다. 저마다 제 삶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숲은 이미 가을이었다.
둘러보니 지나 온 길 낯설었고 가야할 길 친근했다. 산은 때로 낯설게 때로 친근하게 길을 열어주었다. 수리봉(1214m)에 올랐다. 나는 언제나 산이 열어주는 길을 따라 걸었다. 수리봉을 떠나 함백산으로 향했다. 길에 어린 참나무 숲을 이루었고 조릿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가는 길에 씀바귀 흰 꽃을 피워 나를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국가시설물 곁 작은 공터에 야생화 가득했다. 엉겅퀴, 산오이풀, 달맞이꽃, 어수리, 궁궁이, 미나리아재비, 민들레, 금매화, 이질풀, 개망초 만발했다.
남한 땅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함백산 줄기가 태백산으로 흘러내리면서 잠시 쉬었다 간다는 만항재(1330m)에 도착했다. 우리도 산줄기 따라 쉬었다. 만항재는 정선, 태백, 영월의 경계에 위치한 고개로 불과 이삼십년 전만 해도 석탄을 나르던 고개이다. 날아갈 듯 날씬하게 만들어진 만항재 표지석이 시대의 변천을 말없이 말해주고 있었다.
지나는 산길마다 야생화 피어 있었다. 창옥봉 지나 함백산을 올랐다. 끊임없이 가파른 돌계단이 이어지고 있었다. 길을 따라 투구꽃과 구별하기 어려운 한라돌쩌귀 지천으로 피어나 갈 길을 일러 주었다. 함백산(咸白山, 1572.9m)에 올랐다. 외롭게 서 있는 함백산 표지석 뒤로 지나는 이들이 쌓아 올린 작은 돌탑들이 보였다. 정상은 '크게 밝은 산'이라는 이름에 걸 맞는 아름다움과 위용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초라했다. 또한 날 파리 가득했고 지저분했다. 날 파리에 쫓겨 서둘러 내려 와야 했다. 내려오는 길에 마음을 담아 쌓아 올린 돌탑들이 여기 저기 있었고 쑥부쟁이 피어 정겨웠다.
주목을 보호하기 위해 도립공원에서 설치했다는 철조망을 따라 대간 길은 이어지고 있었다. 철조망 너머로 주목들 보였다. 모두들 하늘을 향해 있었다.
절실히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일까.
조금 걸어 내려가자 이정표가 나왔다. 두문동과 함백산을 나누는 이정표였다. 두문동으로 가는 길은 왼편으로 들어선 새로 난 길이었다. 한 대장과 나는 원래 대간 길이었던 오른 쪽 길로 들어섰다. 대간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지나지 않아 그 길은 이미 길이 아니었다. 풀 우거져 이미 숲이었다. 헤쳐 나가기 힘들었다. 길이라고 해도 사람 지나지 않으면 잡풀 우거져 길 아니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함백산 ©이호상

큰 돌배나무 아래 돌로 만들어진 쉼터에서 점심 식사를 한 후 은대봉(1442.3m)을 향했다. 은대봉은 함백산의 봉우리인 상함백산, 중함백산(1505m), 하함백산(1527.9m), 창옥봉(1380m) 중 상함백산을 말함이다. 서기 636년 신라 선덕여왕 5년 지장율사가 함백산 북서쪽 사면에 정암사를 세울 때 조성된 금탑, 은탑으로부터 금대봉, 은대봉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두문봉(싸리재)을 통해 금대봉과 이어진다.
이곳에서 낙동강은 시작되었다. 낙동강의 첫 물방울은 은대봉의 너덜샘이다. 이전에는 은대봉의 은대샘에서 태백시 화전동 쪽으로 흘러내리는 황지천(黃池川)으로 알려졌었으나 조사 결과 황지보다 상류에 있는 너덜샘으로 밝혀졌다. 그래서 전문가들이나 향토사학자들은 너덜샘은 낙동강의 발원샘, 황지는 낙동강의 발원지로 구분해서 부르고 있다고 한다. 황지의 옛 이름은 '하늘 못'인 '천황'(天潢)이었다. 하늘의 연못으로부터 낙동강이 흐른 것이다.
중함백산을 지나고 제2쉼터를 지나 은대봉에 오르니 날 개미들이 달려들었다. 쫓겨내려 왔다. 지천으로 피어난 마타리꽃이 우리를 보고 웃는 것 같았다. 쫓겨 내려온 길을 걸어 두문동재로 향했다. 고사목들 많았다. 저마다 하늘을 향해 무엇인가를 구하는 듯 원망하는 듯 절규하는 듯했다. 두문동에서 죽은 이들의 넋일까. 슬픈 역사가 서려있는 땅이다.

두문동(杜門洞)은 본래 북녘 땅 개풍군의 지명이다. 개성 송악산 서쪽 자락 만수산과 빈봉산에 각각 두 곳의 두문동이 있었다. '개풍군지'는 만수산의 서두문동에는 고려의 문신 72인이 은둔했고, 빈봉산의 동두문동에는 무신 48인이 숨어 살았다고 전한다. 이들을 출사 시키려고 회유하던 조선의 태조는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 두 곳의 두문동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불에 타 죽고 살아남은 일곱 충신이 흘러간 곳이 바로 정선의 고한 땅이었다. 그들 또한 변함없이 두문불출하였으니 이름 역시 두문동이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생명을 버리면서 까지 자신의 신념과 믿음과 가치를 지키고자 했던 고귀한 정신이 살아 있는 땅이다.
두문동재에 내려서니 도로가 '백두대간 두문동재'라는 표지석 있어 그곳이 충절의 땅 두문동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은대봉 가는 길에서 ©이호상

금대봉을 향했다. 이 이름은 그 옛날 정암사를 세울 당시 모셨던 금탑에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아무래도 그랬을 것 같지 않다. 금대봉이라는 이름은 깊은 뜻을 지니고 있다. '금'은 '검'이고, '검'은 '신(神)'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금대'는 곧 '검대'와 같은 말이다. '검대'는 말 그대로 '신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름 풀이에서 알 수 있듯이 금대봉은 '신(神)이 사는 대(臺)'라는 뜻이다.
한강(漢江)의 발원지인 검룡소(儉龍沼)가 있고 야생화 온 산에 흐드러져 산 아래에서는 볼 수 없는 천상의 화원을 이루었으니 옛사람들이 이곳을 '신이 사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우리나라 제일의 야생화 군락지인 금대봉은 자연생태계 보호지역인 동시에 식물유전자 보호구역이다. 천연기념물인 하늘다람쥐가 서식하고, 꼬리치레도룡뇽의 집단 서식지도 있는 곳이다. 또한 모데미풀, 한계령풀, 대성쓴풀, 가시오갈피 등 희귀식물도 많이 자라고 있다.
숲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숲은 잘 보전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제일의 야생화 군락지를 보지 못해 아쉬웠다. 그러나 백두대간을 이어가는 길은 열려 있었다. 산림청에서 대간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열려 있는 길을 바라보았다. 사람과 자연이 함께 살아갈 때에만 사람도 자연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아 고마운 마음이 되었다. 나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여진 것 같아 마음 설렜다. 거절당하는 것, 배척당하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숲에서 웃다 ©이호상

금대봉(1418.1m)에 올라서니 '양강발원봉'이라는 나무표지목이 서있었다. 참으로 볼품없었다. 마음 안타깝고 슬펐다. 한강과 낙동강이 발원하는 봉우리가 너무나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것 같아 마음 아팠다.
한강과 낙동강이 이 땅에서 얼마나 소중한 강이란 말인가.
우리 민족에게 있어 얼마나 의미 깊은 강이란 말인가.
한강에 기대어 사는 이들이 얼마며 낙동강에 의지해 사는 이들 또한 얼마나 많은가.
이 두 강의 발원봉을 이렇게 버려진 듯 내버려 두어도 되는 일인가.
어이없는 일이다.
그뿐인가. 옛사람들이 '신이 머물던 산'이라며 경외하던 산은 보잘것없어 보였다. 자연생태계를 보호한다고 하고 식물 유전자를 보호한다고 하지만 산 자체에 대한 경외심은 없어 보였다. 생태계를 보호하는 일은 산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인데도 말이다. 생태계를 보호한다고 하지만 인간 중심의 보호일 뿐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생태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생태운동이 아니라 환경운동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을 위해 생태계를 보호한다는 것이다. 참된 의미의 생태운동이란 인간도 생태계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다른 모든 생명들과의 조화가 생태 보호 운동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참된 생태 보호 운동은 자연에 대한 경외심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쑤아밭령에서 잠시 쉰 후 비단봉(1281m)에 올랐을 때 어둠은 깊어졌다. 비단봉을 내려오니 고랭지 채소밭이었다. 이미 수확을 마친 채소밭을 가로질렀다. 길은 멀리 보이고 어둠은 깊었다.
멀리 불빛이 보였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차의 불빛이었다. 반가웠다.
지나온 길 돌아보니 산이 따라온 듯 가까웠다.
어둠 속에서 산줄기 저 홀로 흐르고 있었다.
차창에 몸 기대었다.
멀리 하루 일을 마친 농가의 불빛이 보였다.

최창남/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