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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에서 하늘을 보다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39> 마구령~화방재/9.2~9.4

산행 서른 나흘 째. 목요일.

산행 준비를 마치고 마당으로 나오자 어둠 속으로 별빛 쏟아졌다. 마음 설렜다. 새벽하늘 바라보았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들이 저마다 빛을 발하며 영롱했다. 어린 시절에도 별은 저렇게 빛나고 있었다. 어린 날에는 별빛 바라볼 때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젖어들곤 했다. 그 날들이 그리웠다.
새벽 5시 33분, 산행을 시작했다. 곰넘이재로 향했다. 곰넘이재에서 다시 대간 길을 이어 태백산(太白山, 1567m)을 넘고 화방재(花房嶺)까지 갈 예정이었다. 17.4km의 여정이다.
숲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고요했다. 깊은 고요함이었다. 발자국 소리만 들려왔다. 여명(黎明)이 오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곰넘이재에 다가갈수록 조금씩 밝아졌다. 마치 신께 나아가는 거룩한 길인 곰넘이재에서 드리우는 빛 같았다. 야생화 가득했다. 어제 저녁 내려오는 길에 미처 보지 못했던 꽃들도 보였다. 산괴불주머니, 모싯대, 흰여로, 단풍취, 오이풀, 어수리, 쥐오줌풀, 개당귀, 궁궁이, 며느리밥풀꽃, 쪽 등 많은 야생화들이 신의 고개(神嶺)로 오르는 길을 장식하고 있었다.
아침이 밝아왔다. 다시 찾은 곰넘이재는 빛 가득했다. 나무도 풀도 대기도 빛나고 있었다.

▲곰넘이재로 가다 ©이호상

태백산을 향했다. 가는 길은 넓었다. 방화선이었다. 불을 차단하기 위해 나무들을 베어낸 길이다. 덕분에 편안했다. 야생화 지천이었다. 산박하도 보이고 어수리도 보였다. 잠시 걸음 멈추고 마음 기울여 들여다 보았다. 풀이 피운 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풀들은 민초들을 닮았다. 이름 없이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닮았다. 풀들도 민초들도 모두 자신들이 몸 기대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바탕이다. 풀이 없는 산은 상상할 수도 없다. 풀이 없다면 산은 무너지고 사라질 것이다. 비바람 불어올 때 마다 흙은 비에 쓸리고 바람에 쓸려 끝내는 흔적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풀이 없는 산을 상상할 수 없듯이 민초들이 배제된 사회공동체 또한 상상할 수 없다. 그들이 없다면 모든 정치, 경제 활동은 중단될 것이다. 생산 자체가 없으니 애초에 공동체가 이루어질 수도 없다. 또한 민주주의적 가치들도 모두 무너져 내릴 것이다. 풀과 민초들은 자신들이 공동체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점에서 닮았다. 그러나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올바른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함부로 베이고 내몰린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 잃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는 것 역시 닮았다.
바람 불어 꽃들 흔들렸다.

회백색의 어린 신갈나무 무리지어 있고 조릿대 무성한 길을 지나 신선봉(1300m)에 올랐다. 햇살은 맑은 나뭇잎에 부딪혀 흩어지고 바람은 시원했다. 깃대배기봉(1370m)을 향했다. 산은 참으로 정직하다. 올라온 만큼 반드시 내려가야 한다. 삶도 이와 같다. 오른 만큼 내려가야 하고, 얻은 만큼 베풀어야 한다. 정직하지 못한 삶도 있다. 얻기만 하고 베풀지는 않는 삶이다. 오르기만 하고 내려가려고 하지 않는 삶이다. 어리석은 일이다. 자신을 망치고 모두를 불행하게 하는 일이다.
바람 불었다. 숲에서 '사사삭 타타닥 사사삭 탁탁탁탁'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조릿대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부딪치고 있었다. 온 숲에 가득한 조릿대들이 노래하는 듯 했다. 숲은 조릿대들의 노랫소리로 가득하고 내 마음은 걷는 내내 숲으로 가득했다. 각화지맥이 갈라져 나가는 차돌배기 삼거리를 지나니 숲은 점점 깊어졌다. 아름드리 참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길은 편안하고 포근했다. 어린 자작나무도 보이고, 거제수나무, 물푸레나무, 당단풍나무, 미역줄나무도 보였다. 깃대배기봉 가는 길에 며느리밥풀꽃 많았다. 슬픈 며느리의 넋이 담긴 전설을 품고 있는 꽃이다.

효성이 지극한 아들을 며느리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심술궂은 시어머니가 있었다. 시어머니는 아들이 멀리 일을 나간 사이에 트집을 잡아 며느리를 쫓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효성이 지극한 며느리에게 트집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며느리는 밥을 하다 뜸이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솥뚜껑을 열고 밥알 몇 개를 입에 물었다. 그 때 방안에 있던 시어머니는 솥뚜껑 여는 소리를 듣고 뛰어 나와 '어른이 먹기도 전에 먼저 먹느냐!'며 몽둥이로 때렸다. 며느리는 맞아 쓰러졌고 끝내 죽었다. 며느리는 마을 앞 솔밭 우거진 길가에 묻혔다. 시간이 지나자 무덤가에 이름 모를 풀들이 자랐다. 여름이 되자 하얀 밥알을 물고 있는 것 같은 꽃이 피었다. 사람들은 착한 며느리가 밥알을 씹어보다 죽었기 때문에 그 넋이 한이 되어 무덤가에 꽃으로 피어난 것이라 생각했다. 꽃도 며느리의 입술처럼 붉은데다 마치 하얀 밥알을 물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꽃을 며느리밥풀꽃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정말 자주색 며느리밥풀꽃은 입을 열어 금방 무슨 말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깃대배기봉(1370m)에 올랐다. 생태학습장 쉼터에서 점심을 먹었다. 깊은 숲에 나뭇잎 떨어져 마치 가을 속에 앉아 있는 듯 했다.

▲맛나게 먹다©이호상

태백산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투구꽃 많았다.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촛대승마도 보이고 산박하도, 짚신나물도 보였다. 백부자라 불리는 하얀색 투구꽃도 보였다. 간간이 보이던 이질풀도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이정표가 보였다. '태백산 1.3km'라고 쓰인 이정표를 지나면서부터 급격히 길은 좁아지고 험해졌다. 나무에 가려있던 시야가 열렸다.

구름 간간이 지나는 파란 하늘 아래 산줄기 장엄하고 골은 강처럼 굽이치며 흐르고 있었다. 멀리 태백산 천제단이 보였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득했다. 마치 하늘의 기운을 받고 있는 듯 하늘을 향해 입 벌리고 있었다. 그 하늘의 기운을 세상으로 흘려보내고 있는 듯 태백산 영봉(靈峰, 1560.6m)의 능선은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무 한 그루조차 품고 있지 않았다. 사람들 모여 있었다. 영봉을 향했다. 이질풀, 투구꽃, 까실 쑥부쟁이 지천으로 피었고 마가목도 눈에 띄었다. 돌배나무를 지나 천제단으로 향했다. 태백산이었다. 마침내 민족의 영산 태백산 정상에 올랐다.

태백산은 백두산으로부터 낭림산, 두류산,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그리고 청옥산과 두타산을 지나며 뻗어 내려온 백두대간의 맥이 크게 용트림한 산이다. 다른 산들과 달리 태백산의 주능선 일대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평평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부드러운 능선이다. 나무 한 그루 없고 커다란 바위 하나 없다. 그저 마른 풀만 바람에 흩날릴 뿐이다. 거대한 초지의 영봉 한가운데 천제단(天祭檀)이 있다. 이곳에서 우리 민족은 예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동국여지승람은 '태백산은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태백산은 민족의 이름이 된 산이다. 태백산(太白山)은 '크게 밝은 산'이라는 의미이다. '크게 밝은 산'의 순 우리말은 '한밝뫼' 또는 '한밝달'이다. '한밝달'이 '한백달', '한배달'로 전음 되어 '한민족', '배달민족'같이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이름이 된 것이다. 예부터 우리민족은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제사 지내던 산을 '밝은 산'(白山)이라고 부르며 숭앙했다. '밝은 산' 중에서 가장 '크게 밝은 산'이 바로 태백산(太白山)인 것이다.

▲태백산 영봉의 천제단 ©이호상

현재 태백산 정상부 영봉(靈峰)에는 자연석 녹니편마암으로 쌓은 천제단(天祭壇)인 '천왕단'(天王壇)이 있다. 위쪽은 원형이고 아래쪽은 네모꼴이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을 나타낸 구도이다. 또한 이곳 영봉 북쪽 상봉인 장군봉(將軍峰, 1566.7m)에도 사각형으로 된 '장군단'(將軍壇)이라는 천제단이 있고, 영봉 남쪽 아래쪽에도 '하단'이라 일컫는 천제단이 있다. 이 세 개의 제단을 통틀어 '천제단'이라고 한다. 천왕단은 하늘에, 장군단은 사람(장군)에, 하단은 땅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천제단은 1991년 10월 23일 중요민속자료 제 228 호로 지정되었다.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단군조선시대 구을(丘乙) 임금이 쌓았다고 전해진다. 천제단은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서 늘 함께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초기에는 혁거세 왕이 천제를 올렸고, 그 후 일성왕(138년)도 친히 나아와 천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또 기림이사금 3년(300년)에도 태백산에 망제를 지내니 낙랑, 대방의 두 나라가 항복하여 왔다고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에도 방백수령(方伯守令)과 백성들이 천제를 지냈다. 구한말에는 쓰러져 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우국지사들이 천제를 올렸다. 의병장 신돌석 장군은 백마를 잡아 천제를 올렸다. 그 뿐인가. 일제 강점기 때에는 독립군들이 천제를 올렸던 성스런 제단이 바로 이곳이다.

천왕단에 올라섰다. 둘러보았다. 제단 가운데 '한배검'이라고 투박한 글씨로 쓰여 있었다. 제단 위로 바람 지나고 햇살 가득했다. 하늘을 올려 보았다. 흰 구름 지나는 하늘은 눈부시게 파랬다. 가슴 시리도록 푸르렀다.

나도 저렇게 푸르게 살 수 있을까.
나도 저렇게 시린 가슴 다 들여 보이도록 살 수 있을까.
나도 저렇게 소리 없이 머물러 눈부신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나도 저렇게 슬픈 역사를 지켜보면서도 마음 푸르게 살아갈 수 있을까.

천왕단을 내려섰다. 모두들 제 일에 분주한 듯했다. 촬영을 하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들의 뒤에 눈부시도록 청명한 하늘이 있었다. 하늘이 참 아름다웠다. 저녁 햇살 일렁이는 바다 같기도 하고 호수 같기도 했다. 능선의 끝자락에 앉았다. 하늘가에 앉은 듯했다. 파란 하늘이 가까웠다. 하늘 아래 첩첩한 산줄기 외로웠다.

▲주목을 만나다 ©이호상

장군봉을 지나자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는 주목들이 즐비했다. 주목군락지였다. 잎 떨어져 텅 빈 나뭇가지들은 제각기 다른 모양을 지니고 있었다. 제각기 살아온 제 삶의 모습들을 닮은 듯했다. 어떤 가지들은 하늘을 향해 제 몸 비틀었고, 또 어떤 가지들은 땅을 향해 가지를 꺾고 있었다. 또 다른 가지들은 서로 깊숙이 엉켜 어느 나무의 가지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줄기 한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나있는 나무들도 있었다. 그들도 사는 것이 고단했던 모양이었다.
나무를 올려 보았다. 빈 가지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눈부셨다. 스스로 가지를 비운 듯 했다. 너무 아름다웠다.

화방재(花房嶺, 939m)로 내려섰다. 봄이면 고갯마루 부근이 진달래와 철쭉으로 붉게 타올라 꽃방석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어평재'라고 부른다. '어평'이라는 마을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어평'이란 이름은 단종과 관련이 있다. 죽어 태백산의 산신이 된 단종대왕의 혼령이 "이제부터 내 땅(御坪)이다."라고해서 '어평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단종에 대한 애틋함을 오늘날 까지도 품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화방재'보다는 '어평재'라 부르는 것이 좋아 보인다.
어평재의 하늘도 눈 부시고 가슴 시리도록 푸르렀다.

차를 기다렸다. 한참 기다려서야 왔다. 이번 주의 산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모두들 샤워를 하지 못한 채 차에 올랐다. 집으로 향했다.
창을 여니 푸른 하늘 붉게 물들고 있었다.
태백산의 하늘이 보고 싶었다.
그리웠다.

최창남/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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