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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의 품으로 들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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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의 품으로 들어서다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38> 마구령~화방재/9.2~9.4

산행 서른 사흘 째. 수요일.

이른 아침 숲은 싱그럽고 대기는 서늘했다. 마음 맑아지는 듯했다. 싱그러운 숲의 기운에 둘러싸인 박달령은 이 고개에 뿌린 수많은 민초들의 이별과 눈물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늑했다. 옥돌봉 가는 길이라는 이정표 곁에 아담한 돌계단이 층층이 놓여 있었다. 백두대간 마루금을 이어가고 민족의 영산 태백산으로 들어서는 길이 아니라 잘 가꾸어 놓은 뒤 뜰 정원으로 들어가는 길 같았다. 나무 푸르러 우거지고 햇살 눈부셨다. 나무 사이를 떠다니던 물안개 햇살에 부딪치며 반짝였다. 햇살을 따라 물안개 흐르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저렇게 아름다운 것을...'


보이지 않는 것들을 너무나 많이 잃어버렸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늘 우리 곁에 있다.

햇살 비추었다. 내 마음자락 물안개처럼 드러날까 저어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들 제 일에 분주했다. 산행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몸을 푸는 이도 있고, 촬영 장비를 점검하는 이도 있고, 등산화 끈을 묶는 이도 있었다.

산령각(山靈閣)이 보였다. 요즘도 매년 4월 초파일에는 오전리 마을 사람들이 고사를 지내고 있다. 산신(山神)에 대한 고사(告祀)는 오래전부터 인간이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공존을 표현하는 수단이자 토속신앙이었다. 특히 사람의 통행이 빈번한 고갯마루에 세워진 산령각은 마을 어귀에 세워졌던 성황당(城隍堂)이나 사찰에 세워진 산신각(山神閣)과 달리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신앙 공간이었다. 고단한 삶으로 인해 등이 휘었던 이들, 원치 않는 이별로 눈물 흘리던 이들, 권세 있는 자들의 핍박에 내몰려 이 고개를 넘던 이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품어주던 곳이었다. 또한 그들이 제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고사 지내고 기도하던 열린 공간이었다. 그들의 마음으로 세워지고 눈물과 기도로 지켜진 마음자리였다.

그 마음이 고마워 나도 멀리에서나마 마음 자락 하나 내려놓고 산으로 들어갔다.


▲햇살 드리우다 ©이호상

비 내렸던 아침 숲은 맑은 호수 같았다. 깨끗하고 싱그러웠다. 부는 바람에 나뭇잎 소리 없이 흔들리고 햇살은 고요히 숲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물박달 나무, 일본잎갈 나무, 물푸레나무가 보였다. 햇살이 숲 깊이 들어왔다. 숲은 밝아졌다. 나무도 투명해지려는 듯 빛났다. 산행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마에 땀이 맺혔다. 땀을 닦았다.

"아휴, 어제 하루 빨지 않았다고 모자에서 냄새가 너무 나요."

땀을 훔치며 하는 내 말에 신범섭 촬영감독이 맞장구를 쳤다.


"그럼요, 땀으로 온갖 노폐물이 다 빠져 나오는데 냄새가 지독한 건 당연하지요."

지독해도 너무 지독했다. 도저히 냄새를 맛을 수 없을 정도였다. 어제는 우중산행을 한 탓에 땀을 별로 흘리지 않아 빨래를 하지 않았더니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기야 온갖 잡다한 것을 다 먹으니 냄새가 안 난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햇살 비추니 새 소리가 들렸다. 마음 설렜다.

지나는 산길은 신갈나무와 물푸레나무 가득했다. 이 산길은 1980년대 중반까지는 산불확산을 막기 위한 방화선이었다. 산불이 더 이상 옮겨 붙는 것을 막기 위해 나무들을 모조리 잘라낸 것이다. 밑둥치에서부터 잘려진 그 나무들에게서 다시 새싹이 돋아나 이루어진 숲이다. 맹아지로부터 형성된 숲이다. 맹아(萌芽)란 식물에 새로 튼 싹을 말하는 것이다. 건강하고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자라지 않지만 환경 등의 변화로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에는 싹을 틔운다. 밑둥치에서부터 잘려나가 생명의 위기를 느낀 나무가 껍질 속에 숨어 발아되지 않던 싹을 틔운 것이다. 살아남기 위한 노력이다. 생명의 신비이다.

'나무도 저렇게 살아가는 것을... 하물며 사람이랴...'


▲수령 550년 된 철쭉나무

옥돌봉(玉石山, 1222m)에 올랐다. 신갈나무, 호랑버들, 물푸레나무, 딱총나무, 병꽃나무, 산딸기나무 어울려 자라고 진달래, 둥글레, 억새, 큰까치수염, 수리취 등이 정겨웠다. 옛날에는 금강소나무의 주산지였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금강소나무 뿐 아니라 소나무도 눈에 자주 띄지 않았다. 솔잎흑파리로 인해 자연스럽게 신갈나무로 숲의 천이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래기 재를 향했다. 철쭉 군락지를 지나고 수령이 550년이나 되어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철쭉나무를 보았다. 울타리 쳐져 있었다. 나무는 작달막했다. 나뭇가지 비틀리고 굽어져 있었다. 그 모습이 힘들어 보였다. 외로워 보였다.

550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왔으니 어찌 힘들고 외로운 때가 없었겠는가.

길을 이어갔다. 소나무와 신갈나무, 물박달나무 어우러진 숲이었다. 간간이 굴참나무도 보였다. 진달래 터널이라고 쓴 안내판이 달려 있었다. 진달래 터널이라고 하지만 산철쭉 가득한 듯했다. 나무 계단이 이어졌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도로가 보였다. 도래기재였다. 서벽리 북서쪽 2km 떨어진 거리에 있는 마을 이름이 고개의 이름이 되었다. 이 마을을 도역리(道驛里)라고 불렀다. 마을에 역(驛)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름이 이후 변음 되어 도래기재가 된 것이다.

고개에는 햇살 가득해 눈부셨다. 터널 위로 생태 통로가 있는 듯했다. 그늘 드리웠다. 터널 앞 인도에 배낭을 내려놓고 앉았다. 등 기대니 시멘트벽에서 시원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도래기재 ©이호상

눈 감았다. 지나 온 길 아득하고 가야할 길 그리웠다. 지나 온 삶이 아득하고 살아갈 삶 또한 그리웠다.

이 길 따라가면 내 삶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햇살 따가웠다. 노래 불렀다. 속으로 부르던 노랫가락이 차츰 입술 밖으로 새어 나왔다. '어디로 갈꺼나'(김영동 곡)였다. 오랜 날 마음에 두고 사랑하던 노래였다.

어디로 갈꺼나 어디로 갈꺼나
내님을 찾아서 어디로 갈꺼나
이강을 건너도 내쉴곳은 아니오
저산을 넘어도 머물곳은 없어라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 있을까
내님은 어디에 어디에 있을까

어디로 갈꺼나 어디로 갈꺼나
내님을 찾아서 어디로 갈꺼나
흰구름 따라 내일은 어디로
달빛을 좇아 내님을 찾아간다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 있을까
내님은 어디에 어디에 있을까

구룡산(九龍山, 1345.7m)을 향했다. 여기서부터는 온전히 태백산(太白山)의 품이다. 태백의 품으로 들어섰다. 나무계단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계단을 밟고 올라섰다. 곁으로는 전나무 숲 무성하고 계단 아래에는 자색 물봉선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달맞이 샛노란 꽃도 피어 있었다. 새소리 들려왔다. 매미 소리도 들려왔다. 매미 소리 애잔했다. 칠일 밖에 살지 못한다는 짧은 생 때문에 애잔했고, 그 짧은 생이 지나기 전에 제 사랑을 찾아야 한다는 애틋함에 더욱 마음 애달팠다.

"여기서 잠시 촬영하겠습니다."

송동일 조감독의 말이 들려왔다. 하늘을 찌를 듯 쭉 뻗어있는 금강소나무 한그루 당당했다. 주목처럼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간다'는 나무다. 금강소나무는 나무에 윤기가 나며 줄기도 곧게 자란다. 나이테도 촘촘하다. 몸통이 굵고 재질까지 단단해 최고의 목조 건축자재로 쓰였다. 그래서 조선시대 이래 궁궐을 짓거나 임금의 관을 짜는데 주로 쓰여 왔다. 춘양목이라고도 불렀다. 일제 강점기 때 우수한 금강소나무들이 춘양역에서 반출되었기 때문에 춘양목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하늘을 향해 뻗어있는 금강소나무 위로 하늘은 에메랄들 빛이고 흰 구름 한가했다.


▲금강소나무 ©이호상

금강소나무에 몸 기대었다. 편안했다. 여러 해 전 이렇게 큰 나무에 기대어 앉았었다. 그 때 처음으로 나무의 말을 들었다. 나무의 말이 들려왔다. 울림이었다. '왜 이제 왔느냐?'고 말했다. '오래 기다렸다'고 말했다. '수고했다'고 말했다. '애썼다'고도 말했다. '이제 네 삶을 살아가라'고도 말했다. 그 말, 그 울림들이 아직도 가슴 속에서 울려나고 있었다.

그 울림들이 가슴 속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에 커다란 연리목(連理木)을 만났다. 하나인 듯 서로에게 깊이 몸을 박고 있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나무가 서로에게 깊이 몸을 박고 있는 모습 때문에 많은 이들은 연리목을 보며 사랑하는 이들을 떠올렸다. 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말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연리목을 볼 때마다 때로 사랑에 앞서 아팠다. 연리목이란 깊은 상처를 서로 보듬어 안은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서로 보듬어 안은 것이 연리목이다. 스치기만 해도 쏟아질 것만 같은 오랜 아픔의 상처들을 지닌 나무들이 서로를 끌어안은 것이다. 그 깊은 아픔과 상처가 만들어 낸 사랑이 바로 연리의 사랑이다. 그래서 때로 사랑을 말하기에 앞서 마음 아팠다.

구룡산에 올랐다. 경북 봉화군 춘양면과 강원 영월군 상동읍 사이에 있는 산이다. 태백산(太白山, 1657m), 청옥산(靑玉山, 1277m), 옥돌산(玉石山,1177m) 등과 함께 태백산령에서 소백산령이 갈라져 나가는 곳에 있다. 이 산에서 발원하는 하천들은 남북으로 흘러서 각각 낙동강과 남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한 산이라고 하여 구룡산이 되었다. 재미있는 전설을 전한다. 어느 아낙이 물동이를 이고 오다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뱀 봐라" 하면서 꼬리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용이 떨어져 뱀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 뱀이 어떤 뱀인지는 몰라도 아무래도 그랬을 것 같지 않다.

바람 선선하여 이마에 맺힌 땀을 씻어 주었다. 짚신나물과 개망초꽃, 엉겅퀴 피어 지나는 이들의 마음 어루만져 주었다. 시야가 넓었다. 산줄기 첩첩하였다. 산줄기는 사방으로 이어져 있었다. 지나온 길 바라보았다. 옥돌봉과 선달산도 보이고 멀리 연화의 세계 핀 소백산도 보였다. 동남쪽으로는 문수기맥이 시작하는 문수산이 보였다. 북동쪽을 바라보았다. 가야할 길이었다. 끝없는 산줄기 늘어서 소리 없는 몸짓으로 어서 오라고 부르고 있었다. 깃대배기봉과 부소봉이 보이고 태백산 천제단도 보였다. 수리봉과 창옥봉, 함백산도 보이고 그 곁의 중함백산도 보였다. 은대봉과 금대봉도 보이고 매봉산도 보였다. 한강의 발원지인 검용소가 있다는 대덕산도 보였다.

그렇게 산은 첩첩하여 그리움처럼 끊일 줄 몰랐고 내 마음은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곰넘이재에서 내려오다 ©이호상

곰넘이재에 도착했다. 태백산으로 천제를 지내러 가던 사람들이 넘던 고개이다. '신(神)'이 있는 곳으로 넘어가는 고개라 하여 '곰(검신)님이'라고 불렀던 고개이다. '곰'은 '검'에서 나온 말로 '신(神)'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니 곰넘이재를 곰 웅(熊)자를 써서 '웅현'(熊峴)이라고 쓴 것은 뜻이 아니라 소리만 빌려온 것으로 보인다. '웅현'의 우리 말은 '곰재' 혹은 '검재'이니 곧 '신령'(神嶺)이다. 곰넘이재는 '신에게 나아가는 고개'였고 '신의 고개'였던 것이다. 그래서인가. 곰넘이재는 앉아 쉬는 동안 마음 편안했다. 마치 이불 속에 누운 듯 포근하고 아늑했다. 그래서였던가. 곰넘이재에서 참새골 내려가는 길에 수십, 수백의 야생화 피어 아름다웠다. 산박하, 산괴불주머니, 수리취, 물봉선, 개당귀, 궁궁이, 어수리 가득하고 이름 모를 꽃 흐드러지게 피어 마치 형형색색의 눈꽃이 내리는 듯했다.

마음 절로 가벼워지고 영혼은 맑아졌다.

그대로 천국이었다.

※ 바로 잡습니다. : 서른 일곱 번째 글 오타 바로잡습니다. 백운동 서원을 세운 이는 '수세붕'이 아니라 '주세붕'입니다.

최창남/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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